ANMELDEN밤 10시가 넘어선 시각, 태성 기획의 9층 기획팀 사무실은 낮의 소란스러움이 무색할 정도로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하고 텅 빈 공간, 오직 한 자리에만 스탠드 불빛이 외롭게 밤을 밝히고 있었다.
연수는 모니터 화면 가득 띄워진 수백 장의 데이터 시트를 틔운 채 눈을 깜빡였다. 낮에 최진혁이 남기고 간 화려한 초콜릿 상자와 사교계 도련님의 노골적인 접근은 사무실에 커다란 파문을 몰고 왔었지만, 연수는 도리어 평소보다 더 밝게 웃으며 동기들에게 초콜릿을 전부 나누어주었다. 사심 없는 척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넘기려 애쓴 덕에 표면적인 소음은 가라앉았지만, 뒤틀린 질투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다. 연수를 시기하던 상사는 퇴근 직전, 도저히 신입 혼자서는 제시간에 끝낼 수 없는 방대한 양의 추가 시장 분석 피드백을 연수의 책상 위에 툭 던지고 가버렸다. 명백한 보복성 야근 지시였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평창동 저택을 떠난 연수의 차가 어두운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조수석에는 강 회장이 적어준 주소와 오래된 녹음테이프가 놓여 있었다. 강원도 평창, 백설원. 태성이 평생 다시 찾지 않으려 했던 가장 아픈 기억. 그리고 이창석이 원본 장부를 숨겼을 가능성이 있는 곳. 연수는 신호등 앞에 차를 세우고 접어둔 주소를 다시 바라봤다. 강 회장의 고백을 듣고도 마음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강 회장은 자신이 모든 일의 주범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창석이 자신의 이름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했다. 회사를 지킨다는 이유로 조사를 중단시켰고, 그 결과 연수의 아버지 하정우는 모든 죄를 뒤집어쓴 채 무너졌다. 그의 침묵은 끝났지만, 그 대가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연수는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 강 회장의 죄를 묻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야 했다. 태성을 구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뒤에서 조종한 이민우를 반드시 세상 밖으로 끌어내야 했다. 연수의 눈빛이 단단하게 가라앉았다. 이전의 연수였다면 누군가 자신을 지켜
“별장이요?” “태성이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자주 머물던 곳이 있었다.” 강 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성이가 어린 시절 가장 행복해했던 장소였지.” “지금도 남아 있습니까?” “아니다.” 강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태성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폐쇄했다.” “어디에 있습니까?” 강 회장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무언가를 떠올린 그의 눈에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 번졌다. “강원도 깊은 산속에 있었다.” 연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폐쇄했다는 건 건물을 없앴다는 뜻입니까?” “아니.” 강 회장은 힘없이 말했다. “소유권만 다른 재단으로 넘겼다.” “어느 재단입니까?” 강 회장은 눈을 감았다. “이창석이 관리하던 문화재단.” 연수의 얼굴이 굳었다. 이창석은 처음부터 그 장소를 알고 있었다. 태성의 어머니와 관련된 장소. 태성이 너무 아픈 기억 때문에 다시는 찾지 않았을 장소. 강 회장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기억을 간직한 곳. 그곳이라면 정말 태성이 영원히 찾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연수는 녹음기를 꽉 움켜쥐었다. “주소를 알려주세요.” 강 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혼자 갈 생각이냐?” “혼자 가지 않을 겁니다.” 연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진혁 씨와 경찰에도 알릴 거예요.” “이민우가 이미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 “알아요.” “
연수는 뒤를 돌아봤다. 강 회장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떠올랐다. “분명 자료를 함께 넣어뒀는데…….” “누군가 가져간 겁니까?” “모르겠다.” 강 회장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 저택 금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연수는 카세트테이프를 꺼냈다. 겉면에는 날짜도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강 회장은 그것을 알아보는 듯했다. “이창석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의 녹음이다.” “통화를 녹음하셨어요?” “그날 그자가 협박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재 한쪽에는 오래된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연수는 테이프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딸깍. 한동안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흘러나왔다. 이윽고 젊은 시절 강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창석, 당장 그 계좌를 폐쇄해. 지금보다 훨씬 힘 있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곧이어 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깨끗한 척하시는 겁니까, 회장님? 이창석의 목소리였다. —내 비서실 계좌를 더 이상 이용하지 마. 자금 흐름도 모두 돌려놔. —이미 늦었습니다. —무슨 뜻이야? —회장님도 그 돈 덕분에 살았잖습니까. 이제 와서 나만 잘라내면 끝날 줄
강 회장은 주범이 아니었다. 직접 하정우를 몰락시키라고 명령하지도 않았고, 비자금을 빼돌린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방관자였다. 자신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했고, 무고한 사람이 희생될 가능성을 알면서도 조사를 멈췄다. 그 침묵으로 이창석에게 시간을 벌어준 공범이었다. 연수는 가슴 깊은 곳이 저려왔다. 자신의 아버지는 이들에게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었다. 이창석에게는 범죄를 덮기 위한 도구였고, 강 회장에게는 그룹보다 우선순위가 낮은 희생양이었다. “아버님께는 회사가 그렇게 중요하셨습니까?” 연수가 물었다. “한 사람의 인생보다도요?” 강 회장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가에는 깊은 후회가 배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회사를 살리는 일이 곧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 한 명쯤은 희생되어도 된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강 회장의 입술이 떨렸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는 고개를 숙였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오랜 침묵 끝에 강 회장은 비로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내 명예와 그룹을 지키기 위해 나는 진실을 외면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게 나의 비겁함이었다.” 강 회장은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비겁함이 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지금은 너와 내 아들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구나.” 연수는 눈물을 참으며 물었다. “태성 오빠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강 회장은
강태성의 구속영장 심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진혁과 법무팀은 화재 신고보다 먼저 작성된 기사 초안과 CK 물류 터미널 주변의 차량 기록을 확보하기 위해 밤낮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민 역시 최초 제보 메일의 발신자를 추적하며 언론사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화재가 태성과 무관하다는 정황은 조금씩 모이고 있었지만, 그가 왜 CK 물류 터미널에 들어갔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를 분명히 증명할 원본 자료가 없었다. 무엇보다 M-17의 끝에서 발견된 계좌가 문제였다. 강 회장 비서실 특별관리계좌. 연수는 그 이름이 적힌 서류를 밤새 바라보았다. 태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기록을 수사기관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확인도 없이 자료를 공개한다면 강 회장은 20년 전 비자금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될 수 있었다. 그 순간 태성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죄를 감추려 했다는 더 거센 의심을 받게 될 터였다. 연수는 혼자 결론 내릴 수 없었다. 진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을 직접 만나야 했다. 강 회장이었다. 강 회장은 사건 소식을 들은 뒤 병원에서 의식을 잃었지만, 이틀 만에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았다. 의료진은 절대 안정을 권했으나 그는 병원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다. “내가 도망치듯 병실에 숨어 있으면 모든 의혹이 사실이 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평창동 저택으로 돌아왔다. 몸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간병인과 의료진이 저택에 상주했고, 강 회장은 대부분의 시간을 침실과 서재에서 보내야 했다. 연수는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평창동으로 향했다. 오래전 태성
순간 연수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은 것 같았다. “아니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하지만 계좌번호와 당시 비서실 관리 코드가 정확히 일치했다. 이민우가 퍼뜨린 기사는 태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과 조작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거짓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비밀 계좌의 종착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태성의 아버지. 강 회장의 비서실이었다. 연수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뒤엉켰다. 강 회장이 정우 산업의 비자금 흐름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 강 회장 모르게 비서실 계좌를 이용한 것일까. 태성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만약 알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덮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관련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혼자 확인하려 했던 것일까. 연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온 태성은 진실을 덮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의 기록은 분명 강 회장을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화살의 끝이, 태성이 가장 지키고 싶어 했던 아버지에게 닿아 있었다. 연수의 손에 들린 서류는 태성을 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였다. 동시에 태성의 세상을 가장 잔인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