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행복은 영원할 것 같았고, 상류층이라는 견고한 성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줄 알았다. 연수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 그 아름답던 유리 성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시작은 아주 작은 소문이었다. 아버지가 무리하게 추진하던 해외 리조트 개발 사업이 현지 자금 경색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는 이야기. 처음에는 늘 있는 비즈니스의 리스크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집안의 공기는 하루가 다르게 무거워졌다. 매일 밤, 서재에서는 아버의 격앙된 목소리와 어머니의 억눌린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실을 가득 채우던 화려한 웃음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집안에는 오직 무거운 침묵과 줄담배 연기만이 매캐하게 감돌았다. “연수야, 혹시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딸은 강하게 버텨야 한다. 알았지?”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유난히 붉어진 눈으로 연수의 손을 꼭 잡았다. 한때 대한민국 재계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던 아버의 손은 눈에 띄게 거칠어져 있었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연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차마 무슨 일이냐고 되묻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아버지를 위로하려 애썼을 뿐이다. 그 무렵, 연수는 파티장에서 서준을 만나는 횟수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하씨 가문의 위기가 상류층 사교계에 소문이 나면서, 어른들은 은근히 연수의 가족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파티에 참석해도 예전처럼 환대해 주는 이는 없었고, 차가운 멸시와 동정 어린 시선만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그 지옥 같은 공간에서 연수가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오직 서준의 존재였다. 서준은 주변의 평판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연수가 보이면 다가와 무심하게 초콜릿을 쥐여주었다. “얼굴이 왜 이렇게 반쪽이 됐어. 밥 안 먹고 다니냐?” “그냥…… 요즘 공부하느라 그래요.” “거짓말은.” 서준은 연수의 안색이 파리해진 이유를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깊게 묻지 않는 배려를 보이며, 연수의 머리를 꾹 눌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 꼬맹이야. 잊지 마.” 그 한마디가 연수의 무너져가는 세계를 지탱하는 마지막 기둥이었다. 아버의 사업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공포 속에서도, 연수는 서준의 단단한 눈빛을 보며 다짐했다. 이 위기만 지나가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소년의 넓은 등 뒤에 숨어 다시 따뜻한 겨울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운명은 열다섯 소녀의 가녀린 기도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폭주하기 시작했다.연수는 뒤를 돌아봤다. 강 회장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떠올랐다. “분명 자료를 함께 넣어뒀는데…….” “누군가 가져간 겁니까?” “모르겠다.” 강 회장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이 저택 금고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어.” 연수는 카세트테이프를 꺼냈다. 겉면에는 날짜도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강 회장은 그것을 알아보는 듯했다. “이창석과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의 녹음이다.” “통화를 녹음하셨어요?” “그날 그자가 협박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서재 한쪽에는 오래된 녹음기가 놓여 있었다. 연수는 테이프를 넣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딸깍. 한동안 지지직거리는 잡음만 흘러나왔다. 이윽고 젊은 시절 강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창석, 당장 그 계좌를 폐쇄해. 지금보다 훨씬 힘 있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곧이어 한 남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깨끗한 척하시는 겁니까, 회장님? 이창석의 목소리였다. —내 비서실 계좌를 더 이상 이용하지 마. 자금 흐름도 모두 돌려놔. —이미 늦었습니다. —무슨 뜻이야? —회장님도 그 돈 덕분에 살았잖습니까. 이제 와서 나만 잘라내면 끝날 줄
강 회장은 주범이 아니었다. 직접 하정우를 몰락시키라고 명령하지도 않았고, 비자금을 빼돌린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방관자였다. 자신의 왕국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했고, 무고한 사람이 희생될 가능성을 알면서도 조사를 멈췄다. 그 침묵으로 이창석에게 시간을 벌어준 공범이었다. 연수는 가슴 깊은 곳이 저려왔다. 자신의 아버지는 이들에게 한 사람의 인생이 아니었다. 이창석에게는 범죄를 덮기 위한 도구였고, 강 회장에게는 그룹보다 우선순위가 낮은 희생양이었다. “아버님께는 회사가 그렇게 중요하셨습니까?” 연수가 물었다. “한 사람의 인생보다도요?” 강 회장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가에는 깊은 후회가 배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회사를 살리는 일이 곧 사람들을 살리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 한 명쯤은 희생되어도 된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강 회장의 입술이 떨렸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는 고개를 숙였다.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오랜 침묵 끝에 강 회장은 비로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내 명예와 그룹을 지키기 위해 나는 진실을 외면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게 나의 비겁함이었다.” 강 회장은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비겁함이 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지금은 너와 내 아들을 지옥으로 끌고 들어가고 있구나.” 연수는 눈물을 참으며 물었다. “태성 오빠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강 회장은
강태성의 구속영장 심사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진혁과 법무팀은 화재 신고보다 먼저 작성된 기사 초안과 CK 물류 터미널 주변의 차량 기록을 확보하기 위해 밤낮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민 역시 최초 제보 메일의 발신자를 추적하며 언론사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결정적인 증거는 없었다. 화재가 태성과 무관하다는 정황은 조금씩 모이고 있었지만, 그가 왜 CK 물류 터미널에 들어갔는지, 그곳에서 무엇을 찾으려 했는지를 분명히 증명할 원본 자료가 없었다. 무엇보다 M-17의 끝에서 발견된 계좌가 문제였다. 강 회장 비서실 특별관리계좌. 연수는 그 이름이 적힌 서류를 밤새 바라보았다. 태성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 기록을 수사기관에 제출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확인도 없이 자료를 공개한다면 강 회장은 20년 전 비자금 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될 수 있었다. 그 순간 태성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도 전에, 아버지의 죄를 감추려 했다는 더 거센 의심을 받게 될 터였다. 연수는 혼자 결론 내릴 수 없었다. 진실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을 직접 만나야 했다. 강 회장이었다. 강 회장은 사건 소식을 들은 뒤 병원에서 의식을 잃었지만, 이틀 만에 가까스로 정신을 되찾았다. 의료진은 절대 안정을 권했으나 그는 병원에 머무는 것을 거부했다. “내가 도망치듯 병실에 숨어 있으면 모든 의혹이 사실이 된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평창동 저택으로 돌아왔다. 몸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간병인과 의료진이 저택에 상주했고, 강 회장은 대부분의 시간을 침실과 서재에서 보내야 했다. 연수는 그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평창동으로 향했다. 오래전 태성
순간 연수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숨을 쉬는 방법조차 잊은 것 같았다. “아니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뭔가 잘못됐어.” 하지만 계좌번호와 당시 비서실 관리 코드가 정확히 일치했다. 이민우가 퍼뜨린 기사는 태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과 조작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거짓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비밀 계좌의 종착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태성의 아버지. 강 회장의 비서실이었다. 연수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뒤엉켰다. 강 회장이 정우 산업의 비자금 흐름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 강 회장 모르게 비서실 계좌를 이용한 것일까. 태성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만약 알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진실을 덮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아버지가 관련됐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혼자 확인하려 했던 것일까. 연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봐온 태성은 진실을 덮기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눈앞의 기록은 분명 강 회장을 향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화살의 끝이, 태성이 가장 지키고 싶어 했던 아버지에게 닿아 있었다. 연수의 손에 들린 서류는 태성을 구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였다. 동시에 태성의 세상을 가장 잔인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칼이기도 했다
그 시각 진혁은 태성의 전담 변호사와 함께 경찰청 복도를 빠르게 걷고 있었다. “구속영장 청구 전에 막아야 합니다.” 변호사가 낮게 말했다. “불법 침입 정황은 명확하지만, 방화 혐의를 뒤집을 증거가 필요합니다.” “현장에 발화 촉진제 분사 장치가 있었어요.” “소방 감식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화재 전에 통신 차단 장치도 작동했습니다.” “그것도 잔해에서 찾아야 증거가 됩니다.” 진혁은 이를 악물었다. 이민우는 불길로 현장을 지웠고, 언론으로 사람들의 판단을 먼저 움직였다. 수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태성은 이미 유죄가 된 것처럼 취급받고 있었다. 진혁은 휴대전화를 꺼내 보안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CK 물류 주변 사설 CCTV 전부 확보해.” —건물 내부 영상은 이미 경찰이 가져갔습니다. “내부 말고 외부.” 진혁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화재 전에 들어간 차량, 발화 장치를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 기자들이 도착한 시간까지 전부 확인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고자 신원도 추적해. 경찰 신고보다 먼저 기자들에게 보도자료가 뿌려졌다면 발신 기록이 남아 있을 거야.” 통화를 끊은 진혁은 다시 다른 번호를 눌렀다. 이번에는 태성그룹 내부 감사팀이었다. “이사회에 넘어간 자료 전부 복사해 보내십시오.” —어떤 자료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경찰청 지하 취조실을 희게 물들이고 있었다. 태성은 금속 의자에 앉아 다친 어깨를 감싼 붕대 위로 피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병원에서 제대로 치료받을 시간도 없이 간단한 응급처치만 받은 채 곧바로 조사실로 옮겨진 상태였다. 맞은편에 앉은 형사는 두꺼운 서류철을 펼쳤다. “강태성 씨가 CK 물류 터미널에 들어간 이유부터 다시 말씀해주시죠.” “이미 말했습니다.” 태성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20년 전 정우 산업 사건과 관련된 원본 자료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들어갔습니다.” “정식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고 직접 들어갔군요.” “자료가 사라질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유지에 무단 침입하고 금고까지 열었다는 겁니까?” 태성은 대답하지 않았다. 형사는 탁자 위에 사진 몇 장을 내려놓았다. CCTV 화면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태성이 금고 앞에 서 있는 장면. 진혁이 주변을 살피는 장면. 연수가 금고 안의 문서를 꺼내는 장면. 그러나 문이 닫히고 불길이 번지는 장면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상이 편집됐습니다.” 태성이 차갑게 말했다. “우리가 안에 갇힌 뒤의 기록은 없군요.” “원본 여부는 분석 중입니다.” “발화 장치와 통신 차단 장치를 찾으면 바로 알 수 있을 겁니다.” 형사는 태성을 잠시 바라봤다. “현장은 화재로 상당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