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611 - Chapter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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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1화

정은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방금 깨어났어요.”“아이고! 그거 참 잘됐구나.”“전 교수님은... 여기서 뭐 하세요?”“아... 화장실 가려던 참이다.”그러니 한밤중에 복도를 서성이던 게 이상할 리 없었다.정은은 몇 초간 망설이다가 결국 물었다.“조재석 교수님은 지금 어느 방에 계세요?”전해산은 순간 멈칫하더니, 금세 알아차린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정은이 같은 애 세상에서 드물게 좋은 아이인데...’‘어쩌다 조재석 같은 사람을 마음에 두는 거야?’전해산의 눈에 비친 정은은, 젊고 예쁘고 능력도 뛰어나면서 성격까지 원만한, 그야말로 흠잡을 데 없는 여학생이었다.반면 조재석은?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긴 데다 연애사도 복잡했다. 업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인품에는 의문이 남는 인물.전해산이 보기엔, 두 사람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그리고 이제 깨어난 정은이 제일 먼저 찾는 사람이 바로 조재석이라니.이건 누가 봐도 마음이 깊이 기울었다는 뜻 아닌가.‘아이고... 저렇게 꽃 같은 애가 왜 하필...’결국 전해산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젊은 사람들의 일에 괜히 간섭하는 꼰대는 되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한숨만 내쉰 뒤, 결국 재석의 위치를 알려주었다.“전에 자네가 쓰던 방 있지? 거기야.”“감사합니다, 전 교수님!”정은은 세면도구를 든 채, 그대로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자기 손에 들고 있던 대야와 세면도구도 내려놓을 겨를이 없었다....재석은 침대에 반듯이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리는 이미 마취가 풀려 통증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참을 만했다.그가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아픔 때문이 아니었다.‘정은아...’마음이 자꾸 그녀에게 가 닿았다. 그래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문득,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상체를 일으켰고, 고개를 홱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잠시 뒤, 방문이 조심스레 벌어지며 작은 틈이 생겼다.그리고 그 틈으로 얼굴 하나가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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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2화

재석이 몸을 안쪽으로 조금 옮기더니,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며 손짓했다.“와서 같이 좀 누워. 혼자 있으니까 도무지 잠이 안 와.”“다리도 아직...”“침대 넓어. 너 안 건드려. 그리고 약속할게, 안 움직일 거야. 진짜.”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자, 정은은 결국 마음이 약해졌다.“조금만 누워있다 갈 거예요.”“응, 알았어.”정은이 자리에 눕자, 재석도 옆에 함께 누웠다. 고개를 돌리면 서로의 눈동자가 바로 맞닿았다.“정은아, 지하도에 있을 때 말이야. 난 정신은 잃었지만... 의식은 있었어.”“그래서요?”“그때 네가 한 말, 다 들었어.”“그럼 나 지금은...”“아니.”재석은 피식 웃었다.“내 말은 아직 끝까지도 못 했는데...”“그럼 하지 마요.”“안 돼. 겨우 얻어낸 약속인데, 이런 기회 놓칠 순 없지.”정은은 눈을 감으며 하품했다.“피곤해요. 잘래요.”재석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다만 무력하게, 그러나 애틋하게 그녀를 바라봤다.몇 분 뒤.“정은아?”그가 조심스레 불렀다.정은은 정말로 잠들어 있었다.재석의 눈가에는 더 짙은 웃음이 번졌다.그러고는 어느새 자신도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다음 날 아침.“조 교수님, 아침 식사 드시라...”주광빈 교수가 식사를 들고 방문을 열었다.그러다 안에 있는 광경을 본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허억... 뭐야 이게...”그는 황급히 문을 닫고 뒤로 물러났다.그러나 이내 다시 고개를 내밀어 틈새로 확인했다.“진짜네? 내가 헛것 본 거 아니지?”정은과 재석이 같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게다가 재석의 손은 정은의 허리 위에 놓여 있었다.주광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아이고... 이거 큰일인데...”아예 밥도 들고 나오지 못한 채, 그는 곧장 전해산 교수에게 달려갔다.“왜 그렇게 서두르나요?”전해산이 방에서 나와 하품을 하며 물었다.주광빈은 침을 튀겨 가며 아까 본 광경을 온몸으로 설명했다.“교수님, 직접 보셨어야 돼요! 조재석 교수가 정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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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3화

‘뭐지, 이 분위기...?’리아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정은에게 꽂혔다.정은은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다.“그게... 다 설명하려면 길어요, 나중에 말해줄게요.”“알았어요.”리아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에겐 지금 당장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올리버는요? 어디 있어요?”리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정은은 고개를 갸웃했다.“올리버 씨를 왜 찾아요?”“할 말이 있어요.”리아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무겁게 덧붙였다.“중요한 얘기예요.”정은은 그 순간, 심각해진 기운을 감지했다. 급히 슬리퍼를 챙겨 신고는 곧장 일어섰다.“따라와요.”리아는 발걸음을 맞추며 바짝 따라붙었다.뒤에 남겨진 재석은 침대에 누운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정은은 리아를 데리고 작은 건물 앞으로 향했다.“저기예요. 올리버 씨 안에 있어요.”새 건물은 구조 손상 위험이 커서 연구팀이 모두 철수한 상태였다.전해산 교수는 떠나기 전에도, 올리버에게 서둘러 나오라고 재차 당부했었다.“집이 뭐가 중요해, 목숨이 먼저지.”하지만 올리버는 듣지 않았다. 마치 무너지는 집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사람처럼 남아 있었다.그 말을 들은 리아는 입꼬리를 비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올리버는 집을 못 버리는 게 아니죠. 숨겨온 비밀이 드러날까 봐 두려운 거예요.”“비밀...?”정은은 눈을 크게 뜨며 속으로 중얼거렸다.‘무슨 말이지? 무슨 비밀...?’묻기도 전에, 리아는 이미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정은은 당황한 채 서둘러 그녀를 뒤쫓았다.정은이 3층에 도착했을 때쯤, 올리버는 이미 리아에게 붙잡혀 마치 병아리가 잡힌 듯이 끌려 내려오고 있었다.“아이, 이게 무슨 실례야!”“놔! 제발... 너무 심하게 굴지 마! 난 도대체 뭐가 잘못한 건데!”리아는 올리버를 끌며 거의 지독하게 몰아붙였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돼지를 다루듯 끌어내느라 숨까지 가빴다. 올리버는 저항할 힘조차 없어, 발버둥 치며 욕설을 퍼부었지만 소용없었다.리아는 그런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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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4화

두 달 전, 리아는 정은의 연줄을 통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맥스 군도에서 빠져나왔다.그녀가 섬을 벗어나자마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 가지를 해치웠다.먼저, 설수환에게 전화를 걸어 필요한 ‘짐’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사람, 총기, 폭약...범위를 한정하지 않았고, 필요한 건 다 준비하라고 했다.그다음으로, 엄청난 돈을 들여 민간 탐사팀을 고용했다.중성미자를 제외하고는 땅속 거의 모든 것을 탐지해 낼 수 있다는 소문이 도는, 일인자들만 모은 팀이었다.어쩌면 평범한 사람들에겐 낯선 이름일지 몰라도, 돈을 들여 못할 일이 없다는 걸 리아는 잘 알고 있었다.모든 준비가 끝나자, 리아는 일곱 명으로 구성된 그 탐사팀을 데리고 다시 맥스 군도로 향했다.설수환 쪽에서 준비한 인원과 ‘물건’들은 화물선으로 나눠 올려보냈다.그 과정에서 바람 섬 쪽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이제 남은 건 배치와 잠복이었다.탐사팀이 보름 남짓 땅을 파헤치고 조사하자, 유씨 가문의 비밀 훈련소의 윤곽이 하나둘 드러났다.넓이는 물론, 방 하나하나의 쓰임새까지 상세하게 파악되었다.어느 곳이 훈련실인지, 어디가 화장실이고, 식당은 어디인지...모두가 손에 잡힐 듯 명확했다.그때 리아는 비로소 실체를 이해했다.‘비밀 훈련소’라 불린 곳은 사실 거대한 지하 미로였다.먹고 싸는 문제부터 정보 수집, 외부 촉수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능이 갖춰진, 대규모 ‘중계소’이자 ‘훈련 학교’였다.여기서 정보가 정리·가공되어 전 세계로 흘러 나가고, 요원들이 각국으로 배치되는 시스템이었다.정말이었다. ‘전 세계’적 규모였다.H국에서 전 세계 이백여 개국에 파견한 요원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고 흩어졌다는 사실은, 리아의 머릿속을 차갑게 스쳤다.그렇다면 그날 리아를 공격했던 자들은 단순한 용병이 아닐 가능성도 컸을 것이다.‘H국의 무장 조직’에 속한 인력일 가능성도 있었다.그 생각이 들자 리아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드디어... 찾아냈어.’흥분이 그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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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5화

하루하루 그렇게 조용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흘러갔다.그러던 어느 날, 올리버는 우연히 비밀 훈련소에서 도망쳐 나온 여자 하나와 마주쳤다.그 여자의 이름은 유하린이었다.리아의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그리고?”올리버는 숨을 고르며 입술을 달싹였다.“유하린이 나한테 부탁했어. 경찰에 신고 좀 해달라고. 그런데 나는... 비밀 훈련소의 보복이 두려워서 그 부탁을 거절했어.”주먹을 움켜쥔 리아의 손등에서, 뼈마디가 움찔거렸다.올리버의 눈에 공포가 스쳤지만, 감히 리아 앞에서 거짓을 섞을 용기는 없었다.“그다음에 유하린이 브로치를 나에게 줬어. 아주 값어치 있는 물건이라면서, 대신 내 핸드폰으로 전화를 한 통만 하게 해달라고.”“나는 당연히 경찰에 전화하려는 줄 알았는데, 유하린 말이... 경찰이 아니라 언니한테 연락하고 싶다더라.”정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언니...?’올리버는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었다.“나는 할아버지한테 들은 게 있어. 훈련소에는 최첨단 신호 탐지 장치가 있다고. 그러니 유하린이 설령 무사히 도망쳤다 해도, 아니면 다시 잡혀갔다 해도, 결국 꼬리표는 제게까지 달려올 거라고. 그래서... 난 감히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어.”“그래서 나는 브로치를 다시 돌려주려고 했어. 정말이야. 아무리 그게 값지고 예쁘다 해도, 결국 유하린을 돕지 못했으니까, 그 물건을 받을 자격 없으니까. 최소한의 신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거든.”하지만 그 순간, 추격해 온 훈련소 경호원들이 들어와 하린을 붙잡아 끌어냈다.올리버는 문 뒤에 숨어, 눈앞에서 벌어진 모든 걸 지켜보고 말았다.그들이 하린에게 가한 폭행까지... 그러나 단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난 죽기 싫었어... 너무 무서웠어...’게다가,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신신당부했었다.비밀 훈련소와는 절대 엮이지 말라고.그 경고가 올리버의 심장을 옥죄며, 두려움을 공포로 바꾸어 버렸다.“미안해.”올리버의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그 후로 나도 많이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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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6화

올리버는 목을 움찔하며 애써 담담한 척 말했다.“내가 아는 건 다 말했어. 정말... 이게 전부야.”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리아의 발끝이 올리버의 가슴팍을 거칠게 눌렀다.“악!”올리버는 고통에 몸을 웅크리며 연신 비명을 토했다.리아의 눈빛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멍청한 놈! 이 건물이 비밀 훈련소의 출구 위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여기에 눌러앉았다고? 언젠가는 여기에 불붙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냐?”올리버는 자신만이 아니라 연구팀까지 이 건물로 불러들였다.‘바보가 따로 있나, 바보가...’정은도 속으로 혀를 찼다.올리버는 눈가가 붉어진 채 목소리를 떨었다.“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어? 다른 방법이 없었어, 난 정말...”그는 말이 점점 흐려지더니, 끝내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건물이 무너지고, 출구의 비밀이 드러날 위기에 처했을 때, 올리버는 재건할 돈조차 없었다.그때 정은이 손을 내밀었다. 연구팀이 비용을 대고, 대신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는 조건.그 상황에서 올리버가 거절할 수 있었을까?아니, 거절할 용기도 없었다.“누가 훈련소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그는 울먹이며 덧붙였다.“그토록 거대한 조직, 최신 장비와 무장 병력까지... 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훈련소만 무사하다면 이 출구는 평생 열릴 일도 없고, 나도 그냥 평범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하지만 세상은 올리버의 계산대로 굴러가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울부짖었다.‘그날이 올 줄은... 그날이 정말 올 줄은 몰랐지...’비밀 훈련소의 존재가 송두리째 사라질 날이 올 줄, 그는 꿈에도 몰랐다.그리고 변리아는... 정말 무서운 여자였다.비밀 훈련소에 있는 그 멤버들 죽일 거면 조용히 죽이지, 굳이 통째로 폭파해 잿더미로 만들다니.그건 마치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일부러 불태워버린 격이었다.아무 이유도, 협상도,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그저 시작부터 끝까지, 죽음을 향해 몰아붙였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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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7화

“그런 뜻은 아니에요.”정은은 잠시 말없이 리아를 빤히 바라봤다.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동안, 얼굴 두껍기로 소문난 리아가 오히려 얼굴이 빨개지는 순간이 찾아왔다.리아가 가볍게 헛기침하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정말 미안해요. 정은 씨에게 미리 알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다들 마음의 준비라도 할 수 있게...”옳고 그름은 따로지만, 합당함은 다른 문제였다.목숨과 명분을 저울질했을 때, 리아의 방식엔 분명 정당성이 있었다.하지만 정보의 비대칭 때문에 연구팀은 불필요한 재난을 겪어야 했고, 그것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일이기도 했다.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제가 화약의 양을 계산했을 때, 이 정도로 바닥이 무너지진 않을 거라 판단했어요.”“제 방 바로 아래에 지하실을 팠기 때문이에요.”정은이 담담하게 말했다.리아가 잠시 말문을 닫았다.“보세요. 아무리 정확히 계산해도, 실제는 이론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돌발 변수는 늘 있는 법이죠.”리아는 고개를 떨궜다.“그래요. 이번엔 제 예측에 부족한 점이 있었네요.”그러자 정은의 어조가 부드럽게 바뀌었다.“그렇지만... 변 선생님, 연구팀이 당할 수 있었던 위험을 초기에 꺾어 준 건 사실이에요. 고맙습니다.”“제 잘못만은 아니겠지요?”“좀 있긴 해요. 그래도 공과가 서로 상쇄되는 것 같습니다.”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한편, 바닥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해 흐느적거리는 올리버가 더듬거리며 물었다.“그럼, 그럼 저는요? 전... 어떻게 되는 거죠?”리아는 차갑게 올리버를 쏘아봤다.“닥쳐! 한마디 더 하면 진짜로 죽는다.”올리버는 말을 삼키고 침묵하며 속으로 기도하듯 중얼거렸다.‘알았어. 말 안 할게. 근데... 말 안 한다고 죽이지는 마.’ 정은은 어조를 가다듬어 물었다.“변 선생님, 동생분은 괜찮으세요?”리아는 잠깐 멈칫하더니, 턱을 꽉 깨물었다.“살아 있어요.”살아는 있었지만, 하린은 그저 살아만 있는 상태였다.리아는 지금도 감히 떠올리기 힘들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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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8화

정은은 리아의 사정을 고려해, 연구팀과 현빈의 동의를 얻은 뒤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큰 병은 미루면 안 되고, 작은 병도 방치해선 안 돼요. 생명 앞에서는 그 어떤 문제도 사소한 거예요.”리아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목이 멘 듯 낮게 흘러나온 목소리.“고마워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그날 오후, 리아는 곧장 하린을 데려왔다.리아의 상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꽃다운 아가씨가, 어떻게 이 지경이 됐을까?굳세고 단련된 의료진조차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굳혔다.전해산 교수는 한숨을 멈추지 못했고, 주광빈 교수는 이를 악물며 저주를 퍼부었다.“짐승 같은 것들...! 사람이 아니다, 인간 말종들이야!”그리하여 하린은 연구팀이 머무는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리아는 한 사람을 남겨 간호를 맡기고는 홀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번엔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리아는 떠나기 전, 정은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했다.“수환이 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그걸 먼저 해결해야 해요. 그리고 지난번에 섬에 들여온 인원들을 차례로 철수시켜야 하고, 나머지는 뒷정리예요.”“모든 게 정리되면, 국제 사회에 맥스 군도의 간첩 훈련소 존재를 폭로할 거예요. H국의 대단한 유씨 가문이 이번에는 목숨은 건질지 몰라도 큰 타격은 입을 겁니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황을 이해했다. 그러나 문득 묻지 않을 수 없었다.“올리버는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리아의 시선이 먼 바다로 흘렀다. 한동안 침묵하다가, 낮게 내뱉듯 말했다.“그대로 두죠. 올리버의 비겁함 때문에 하린이는 유일한 탈출 기회를 놓치고, 결국 5년을 더 끔찍한 지옥에서 보내야 했는데... 비밀 훈련소 같은 괴물을 마주했을 때, 두려움과 도망이 본능일지도 모르잖아요.”리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생각해 보니, 설령 올리버가 그때 나섰다 해도 하린을 지켜낼 순 없었을 거예요. 오히려 본인 목숨까지 잃었겠죠. 그랬다면 오늘날 나에게 브로치를 전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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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9화

하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말을 꺼내고 싶었지만, 다친 목구멍에선 기괴하고 거친 음절 몇 개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하린은 자신을 비웃듯 허공을 올려다보았다.두 눈은 천장을 향했지만, 뜨거운 눈물이 옆으로 흘러내려 베개를 적셨다.그 속엔 말로 다 못 할 무력감과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올리버는 몸이 앞으로 쏠리듯 바닥을 기어가, 이내 침대 곁에 무너져 내렸다.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그는 하린의 손을 잡고 싶어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마다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고, 그 위로 진득한 핏자국이 번져 있었다.올리버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끝내 떨리는 손끝을 움츠리듯 거두었다.“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 나 도와주고 싶었는데... 너무 무서웠어... 미안해. 그때 내가 신고만 했어도, 네 언니한테 연락만이라도 하게 해줬어도...”“지금 네가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야... 널 망친 건 나야... 다 내 잘못이야... 나 같은 겁쟁이, 비겁한 인간... 책임도 못 지는 쓰레기야...”올리버의 목소리는 점점 흐트러졌다. 말은 뒤엉키고, 숨은 가빠지고, 눈물은 마구 쏟아졌다.전에 리아에게 얻어맞았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저 맞으니 아프다고만 느꼈다. 자신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진지하게 마주한 적은 없었다.‘난 그저 살고 싶었던 거야. 모든 사람이 영웅이 될 순 없잖아.’‘신이 나에게 그런 걸 강요한 적도 없으니까.’올리버는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하며,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늪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쳐 왔다.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하린의 모습.붕대에 덮인 손가락, 만신창이가 된 몸.모든 핑계와 변명은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나는... 끔찍하게도 추악하고, 역겹고, 차갑고, 잔인한 놈이었구나...’그는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오열은 쏟아져 내리는 빗물처럼 그치지 않았다.모르는 이가 본다면, 오히려 올리버가 환자라 해도 믿었을 것이다.그렇게 넋이 나간 듯 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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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0화

올리버가 입에 올린 ‘하린’이라는 이름의 사람은 놀랄 만큼 진심을 담아 말했다.“네. 고... 고마워.”“아니, 고맙다는 말 하지 마.”올리버는 허둥지둥 손발을 모았다.하린은 고통스러운 몸임에도 불구하고 옅게 미소 지었다. 아직 얼굴에는 선명한 상처들이 남아 있었지만, 눈웃음이 번지자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우아함과 단아한 아름다움은 감출 수 없었다.올리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왜 이제야...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정은아...”현빈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정은을 불러 세웠다.정은은 무심코 돌아봤다.“오빠?”“어디 가?”“조재석 교수 좀 보러 가려고요.”현빈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나는 내일 떠난다. 의료팀은 맥스 군도에 남겨두고 갈 거다. 의료팀이 더 이상 필요 없을 때는 도 선장에게 연락해. 도 선장이 와서 팀을 데리고 나갈 거야.”그는 잠시 정은을 바라보다가, 덧붙였다.“배에 있던 약품은 다 옮겨서 창고에 두었어.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라도 부족한 게 있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도 선장이 최대한 빨리 다시 가져올 수 있도록 도울 거다.”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마워요, 오빠.”현빈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졌다.“날 오빠라고 부르면서,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지. 우리 사이에 그런 말은... 괜히 거리감이 느껴지잖아.”...점심시간이 되자, 정은은 작업 구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일은 멈추지 않는다.하지만 모두가 정신적, 육체적 충격을 입은 만큼 정은은 결정을 내렸다.“모두 안정과 회복을 위해 앞으로 사흘은 휴식하겠습니다.”정은이 연구팀 팀원에게 결정을 알려줬다.셋째 날이 지나고,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된 이들은 다시 연구하던 자리로 돌아왔다.건강상 큰 문제 없는 이들은 장비를 점검하고 기록을 정리하며 연구를 계속했고, 몸을 움직이기 힘든 이들과 부상이 심한 이들은 계속 치료를 받으며 요양을 이어갔다.연구팀은 다시 조금씩,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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