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601 - Chapter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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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1화

“정은아? 소정은? 우리 이야기 잘 들었지?”전해산 교수가 거듭 물었다.“네, 네! 알겠습니다.”정은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두 교수는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주광빈이 단호하게 덧붙였다.“아무튼, 정은아. 전 교수님이랑 내가 하는 말은 꼭 믿어. 절대로 너에게 해로울 일은 없으니까.”“네.”두 사람은 위층으로 올라가기 전, 재석 쪽을 힐끗 돌아봤다. 그리고 눈빛에는 경계와 경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조 교수, 얌전히 굴어!’재석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은에게 물었다.“두 분이 무슨 얘기 하셨어?”정은은 담담하게 대답했다.“조 교수님이 문제 있는 사람이라던데요. 그리고... 깨끗하지 않다고도 하셨어요.”눈이 휘둥그레진 재석은 말문이 막혔다....밤이 깊었다.창밖으로 차가운 달빛이 번지고, 파도 소리가 잔잔히 스며들었다.그런데 재석은 정은의 방에서 나갈 기미가 없었다.“만춘미 교수님 방 이미 치워놨잖아요. 거기 가서 주무시면 되는데, 왜 굳이 여기서 저랑 같이 자려고 하세요?”정은은 지친 듯 말했다.아무리 내쫓으려고 해도 재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도리어 안쓰러운 얼굴까지 내비쳤다.“정은아, 상처가 좀 가려워. 이거 염증 생긴 거 아닐까? 혹시 한밤중에 열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내가 네 옆에 있으면 너도 안심되잖아?”정은은 어이없어 눈을 크게 떴다.재석은 벌써 바닥에 이불을 펴고 있었다.“오늘 밤은 내가 바닥에서 잘게. 넌 침대에서 자. 이걸로 결정.”‘누가 자기더러 결정하래...’정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몇 분이 흘렀다.그러다 결국 정은이 먼저 입을 열었다.“상처... 정말 가려워요?”“응.”정은은 약상자를 꺼내 와서 재석 곁에 앉았다.“손 내밀어 보세요.”재석은 순순히 팔을 내밀었다.정은은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었다. 확인해 보니, 상처 가장자리가 옅게 붉어져 있었다.정은은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그러고는 새 붕대를 감지 않고 상처를 내버려두었다.“너무 꽁꽁 싸매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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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2화

정은의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두 번 움찔거렸다. 수없이 많은 순간이 정은의 뇌리를 스쳐갔다.이 가슴 위에 머리를 기대면, 흐트러진 머리칼이 이 가슴을 덮던 기억.그때마다 재석은 정은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집어 들며 장난치듯 매만졌다.그러고는 언제나 사랑을 나눈 후에만 드러나는 여유와 달콤한 나른함으로 정은을 바라보곤 했다.“정은아, 얼굴 빨개졌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재석은 언제 다가왔는지, 남자의 숨결이 정은의 귓가에 닿았다.이 남자 특유의 시원한 향이 그녀의 코끝을 파고들었다.정은은 놀라 급히 물러섰지만, 등 뒤는 이미 벽이었고, 피할 곳이 없었다.재석은 손을 들어 올려 그녀를 가슴과 벽 사이에 가두었다.“얼굴이 더 빨개진 것 같은데?”정은은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곧 따뜻한 손가락이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피할 수 없는 눈빛이 마주쳤다.두 사람의 거리는, 서로의 심장 고동이 생생히 들릴 만큼 가까웠다.“정은아...”재석의 목소리는 갈라진 듯 낮고 깊었다.“네가 떠난 뒤, 난 혼자 있는 동안 하루도 안 빼놓고 널 생각했다. 넌? 단 하루라도 날 생각한 적 있어?”정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없는 모양이네.”재석은 스스로를 비웃듯 웃었지만, 눈빛만큼은 절대 흐려지지 않았다.곧 단호히 이어지는 목소리.“괜찮아. 너 대신 내가 생각하면 되니까.”“일할 때도 네가 생각나고, 퇴근해도 네가 생각나고,잠자리에 들어도 네가 생각나고, 꿈속에서도 너만 찾게 돼.”“그만해요...”“싫어. 계속 말할 거야.”남자의 표정은 투정 부리는 아이 같았지만, 아이는 아니었다.아이였다면 억울할 땐 울거나 화를 냈을 것이다.재석은 억울함 속에서도 웃고 있었다.‘참, 이 남자는... 나한테 상처도 주지 못하는구나.’정은의 눈가가 붉어졌다.“재석 씨...”“드디어... 이렇게 나를 불러주는구나.”재석의 목소리가 떨렸다.그것은 그가 섬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정은의 입에서 흘러나온 ‘재석 씨’였다.‘조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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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3화

재석이 정은의 손을 낚아채 달려 나가려던 순간, 피하기엔 이미 늦었다.두 번째 폭음이 터졌다.이어 세 번째, 네 번째...땅이 요동치며 천장의 들보가 크게 흔들렸다.둘은 간신히 문밖으로 뛰쳐나오려 했지만, 복도에 닿기도 전에 발밑이 무너져 내렸다.그대로 아래로 추락했다.쾅!먹먹한 충격음이 울리고, 이내 죽음 같은 정적이 드리웠다.몇 초 뒤, 재석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그리고 본능적으로 사방을 더듬었다.“정은아?! 어디 있어?! 내 목소리 들려?!”바닥이 꺼지는 순간, 붙잡았던 손이 억지로 떨어져 나갔다.아무리 더듬어도, 정은의 온기가 잡히지 않았다.대답조차 돌아오지 않았다.‘안 돼... 미치겠다... 제발 대답 좀 해...’“소정은!!”“정은아!!”재석은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부르며, 상처 난 손으로도 바닥을 기어 나아갔다.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살이 쓸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그때, 가쁜 기침 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콜록, 콜록...”정은이었다.그녀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눈을 떴지만, 눈을 떠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칠흑 같은 암흑. 자신의 손끝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정은의 머릿속에는 방바닥이 무너져 내리던 마지막 순간이 생생했다.‘여기... 지하 통로로 떨어진 거야?’‘원래는 비상탈출 용으로 파둔 길인데, 지금은 우리를 가둬버린 감옥이 됐네.’“소정은! 어디 있어?! 정은아!”재석의 다급한 외침이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았다.“콜록... 여기 있어요...”손과 손이 맞닿는 순간, 재석의 거친 숨결이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그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정은은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플래시를 켜자 갑갑한 지하 공간이 희미하게 드러났다.“괜찮아?”재석이 물었다.정은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당신은요?”말을 끝내자마자, 정은의 눈에 들어온 건 재석의 두 손이었다.새까맣게 흙과 먼지가 뒤엉킨 데다, 붕대는 온통 피와 진흙으로 범벅이 돼 있었다.‘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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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4화

정은은 눈앞의 광경에 순간 얼어붙었다.재석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이럴 리가...”정은은 다급히 두 손으로 바위를 밀어냈다.하지만 돌무더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그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끊겼다.고개를 돌린 순간, 재석이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재석 씨?! 왜 그래요?!”정은은 급히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가까이서 본 남자의 얼굴은 창백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대체 어디가 안 좋은 거예요, 재석 씨...”그때, 정은의 손에 축축한 감촉이 전해졌다. 본능적으로 손바닥을 들여다보자, 붉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다리...”정은의 시선이 내려갔다.검은색 바지가 허벅지부터 짙게 젖어 있었다.피가 스며들어 번져 있었지만, 색 때문에 그제야 눈에 띈 것이다.‘그래서 걸음이 들쭉날쭉했던 거구나.’“정은아, 진정해. 들어봐...”재석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떨어질 때 돌에 찔린 것뿐이야. 목숨은 구했으니까, 걱정하지 마.”“거짓말!”정은의 목소리가 떨렸다.상처에서는 여전히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출혈이 이대로라면 30분도 못 버티고 쇼크 상태에 빠질 게 뻔했다.“정신 나간 거예요?! 다리 그렇게 다쳤는데도 말도 안 하고, 이렇게까지 걸어왔다는 게...”분노와 슬픔이 섞여, 목소리는 거의 울먹임에 가까웠다.“정말 괜찮아...”“조용히 해요! 더는 말하지 말고 힘 아껴요. 곧 누군가 구하러 올 거예요!”“알았어...”재석은 힘겹게 웃었다.정은은 그를 벽 쪽에 기대 앉혔다.그리고 서둘러 재석의 바짓자락을 찢어내 상처를 드러냈다.자신의 옷을 벗어 다리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멎도록 단단히 묶었다.옷자락을 묶는 순간, 재석이 낮게 신음을 삼켰다.그 외에는 남자의 숨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많이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요.”“안 아파.”“거짓말이잖아요!”“왜 또 나한테 화내?”“혼나야 하니까요!”재석은 어깨를 들썩이며 미소를 지었다.“좋아, 그러면 듣고 있을게.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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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5화

달빛 아래, 잔잔한 바다 위로 한 척의 배가 전속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도균성은 갑판 위에 서서 멀리 시선을 거두고 곁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대표님, 방금 들린 몇 번의 굉음은 아마 맥스 군도 쪽에서 온 것 같습니다.”“무슨 일인지 알 수 있겠나?”도균성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불빛도 없었고, 화산재가 분출되는 것도 아니니 화산 폭발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정도의 움직임이라면...”현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제가 틀리지 않았다면... 인위적인, 폭발일 겁니다.”현빈의 얼굴에 순간 긴장감이 스쳤다.“맥스 군도에서 폭발이라니! 어느 방향인지 가늠할 수 있나?”도균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아마... 남동쪽일 겁니다.”‘남동쪽...’현빈의 표정에 근심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도균성에게 명령했다.“더 속도를 내자.”“예.”30분 뒤, 배는 해안에 닿았다.현빈은 곧장 작은 건물이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도균성과 일행도 뒤따랐다.“형님, 대표님이 좀 지나치신 거 아닌가요? 고작 꿈에서 여동생이 위험했다고 우리를 이끌고 한밤중에 바다를 건너 맥스 군도로 직행이라니요?”도균성이 눈을 흘겼다.“닥쳐라. 말이 많다.”“헤헤... 그냥 감탄한 겁니다. 예전 같으면 대표님 얼굴 1년에 한 번, 아니 반 년에 한 번 보기도 힘들었잖아요.”“그런데 소정은 씨가 호주로 오고, 섬에 들어온 뒤로는 열흘 아니면 보름에 한 번씩이나 뵙게 되네요. 대표님이 참... 마음을 많이 쓰시는 것 같아서요.”도균성이 낮게 쏘아붙였다.“나 못 만나서 그동안 네가 월급을 못 받았냐, 아니면 뱃삯을 못 챙겼냐. 투정이 많구나.”“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요. 대표님이 여동생을 정말 극진히 챙기시잖아요.”“구하기 힘든 약도 상자째 보내고, 먹을 것, 입을 것, 쓰는 것까지 전부 직접 챙기시고... 솔직히 부인한테도 이 정도는 못 하실 것 같은데요?”도균성의 미간이 다시 좁혀졌다.“헛소리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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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6화

그나마 의식이 있는 사람은 전해산 교수와 주광빈 교수뿐이었다.한 사람은 약상자를 들고 부상자들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건물 안팎을 오가며 갇혀 있던 이들을 차례로 구해내고 있었다.현빈은 곧장 앞으로 다가가 전해산 교수의 팔을 움켜쥐었다.“교수님, 정은이는 어디 있습니까?”전해산은 순간 멍하니 굳어 서 있다가,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눈을 크게 떴다.‘그래, 정은이는 어디에 있지?’‘이런 큰일이 터졌다면 가장 먼저 달려나와야 했을 텐데...’‘설마... 정은이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인 거야?’그때, 인원을 세고 있던 주광빈도 정은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모든 방을 확인했습니다. 잡동사니 창고까지 다 뒤졌는데, 안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전해산이 고개를 저었다.“그럴 리가요... 이 시간에 정은이는 방에 있거나, 아니면 화장실에 있었을 텐데... 잠깐, 부엌은 확인하셨습니까?”주광빈이 단호히 끄덕였다.“주방까지 다 살폈습니다. 없더군요.”현빈은 전해산의 팔을 놓고,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눈앞의 건물을 바라보았다. 그 건물은 겉보기에 그대로 서 있었지만, 분명 조금 전 큰 충격을 견뎌낸 흔적이 역력했다.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자세히 말씀해 주십시오. 가능한 한 상세하게.”주광빈이 답했다.“저희도 알 수가 없습니다. 모두 누워서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세 번의 굉음이 들려왔습니다.”“곧바로 건물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다들 급히 방에서 뛰쳐나오다가 넘어지기도 하고, 파편에 맞기도 하고...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전해산이 무겁게 중얼거렸다.“정은이는 1층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니 조 교수님과 함께라면 제일 먼저 밖으로 나왔어야 정상인데... 두 사람 모두 보이지 않는다니...”현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그가 이를 악물고 한 자 한 자 내뱉었다.“교수님, 지금 누구라고 하셨습니까?”전해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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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7화

“이, 이게...”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도균성도 눈앞에 드러난 지하 통로 입구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여기에 지하도가 있었습니까?”현빈은 곧바로 삽을 던져버리고 뛰어들려 했지만, 도균성이 막아섰다.“대표님, 제가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이번엔 현빈도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그는 도균성에게 길을 맡겼다.몇 분 후.도균성이 올라왔다.“대표님, 안에 좁은 통로가 있긴 한데, 조금만 들어가면 완전히 막혀 있습니다. 힘껏 밀어도, 무너져 내린 돌무더기가 겹겹이 쌓여 있어서 꿈쩍도 안 합니다.”“그 돌들을 치울 방법은 없나?”도균성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선을 묻고 폭약을 쓰면 됩니다.”“안 된다.”현빈은 단호하게 잘랐다.“폭약은 2차 붕괴를 일으킬 위험이 크다.”만약 안에 누군가 있다면...‘상황은 더 끔찍해질 거야.’“내가 직접 내려가 보겠다.”현빈은 입구로 몸을 낮췄다. 통로는 도균성의 말대로 좁고 답답했으며, 바닥은 온통 깨진 돌과 뾰족한 잔해들로 가득했다.도균성이 어디선가 손전등을 구해 내려보냈다.현빈은 그것을 받아들고 사방을 살피던 중, 시선이 돌연 멈췄다.바위 위에 선명한 핏자국이 있었다.곧장 다가가 확인하자, 꽤 넓게 번져 있었다.적지 않은 양의 피였다.“정은아! 거기 있니?! 내 목소리 들리면 대답해! 정은아...!”현빈은 다급히 외쳤다.하지만 30초가 지나도록 아무 응답도 없었다.그는 돌무더기로 막힌 벽 앞으로 다가갔다.그 너머로 통로가 이어져 있었지만, 여기서 완전히 끊겨 있었다.‘잠깐... 통로라고?’현빈의 눈빛이 번쩍였다.“도 선장! 날 끌어올려!”밖으로 나온 그는 즉시 명령했다.“도 선장, 사람 셋 데리고 이 건물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을 뒤져라. 반드시 출구가 있을 것이다.”지하도가 있다면, 반드시 반대편에 출구가 있을 것이다.막힌 쪽에서 들어갈 수 없다면, 다른 쪽으로 접근하면 된다.얼마 지나지 않아 도균성이 소리쳤다.“대표님! 저쪽에 입구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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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8화

동이 트며 새로운 하루가 밝아왔다.아침 햇살이 바다 위로 부드럽게 흩뿌려지고, 모든 것이 고요하고 평화로웠다.재석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 시야에 들어오자, 순간 멍해졌다.잠깐의 혼란과 당혹감이 스쳤다.“깼어요! 깼어요!!”전해산 교수의 다소 과장된 목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곧이어 여러 의사가 우르르 몰려와, 재석을 둘러싸고 검진을 시작했다.“정은... 정은이는 어디 있습니까?”재석은 상반신을 억지로 일으키며, 의사들의 사이로 전해산을 똑바로 바라봤다.“환자분, 지금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그대로 누워 계셔야 합니다!”그러나 재석은 말을 듣지 않았다.“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움직이면...”의사가 다급히 말리자, 전해산이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걱정하지 마십시오. 정은이는 괜찮습니다. 조 교수님처럼 치료를 받고 있어요.”“정은이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위층에 있습니다.”전해산은 솔직하게 말했다.재석은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내려올 기세였으나, 다친 다리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전해산의 표정이 굳어졌다.“조 교수님, 이제 성인이지 않습니까? 제발 좀 침착하게 행동하십시오! 그 상황에서 정은이는 목숨을 걸고 조 교수님을 지켰습니다.”“그런데 이제 와서 조 교수님이 이렇게 치료를 거부하면... 정은이가 그런 모습 보길 원하겠습니까?”그 마지막 한마디가 재석을 멈추게 했다.그는 전해산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정은이는... 안전합니까?”전해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안전합니다.”“네, 알겠습니다.”재석은 천천히 몸을 눕혔다.그가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정은이와 갇혀 있던 그때, 몸은 의식을 잃었어도 정신은 또렷했다.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었지만 정은의 절망과 고통이 그대로 전해졌다.그리고 끝내 쓰러지기 직전, 그녀가 내뱉은 그 낮고 애틋한 한마디.‘바보...’의사들은 마지막 점검을 마친 후 링거를 교체해 주었다.“다리 상처는 이미 소독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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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9화

“심 대표님.”선두에 서 있던 의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현빈은 짧게 낮은 소리를 내며 대답하고, 침대 옆자리를 비켜 주었다.“검진하세요.”남자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거친 기운이 남아 있었다.가까이서 본 현빈의 두 눈은 붉은 실핏줄로 가득 차 있었다.30분이 흐른 뒤.“어떻습니까? 왜 아직도 깨어나지 않는 거죠?”현빈의 목소리에는 억누른 조급함이 배어 있었다.“안심하셔도 됩니다. 특별한 이상은 없고, 단지 깊이 잠든 상태일 뿐입니다.”“잠들었다고요?”현빈은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네. 극도의 피로와 두려움을 겪으면 몸의 에너지가 크게 소모됩니다. 이제 위험에서 벗어났으니, 당연히 몸은 회복을 위해 깊은 수면을 요구하는 거지요.”“약은... 필요 없습니까?”“필요 없습니다. 계속 자도록 두세요. 충분히 자고 일어나면 됩니다.”의사들이 물러난 뒤, 현빈은 다시 침대 곁에 앉았다.그는 고요히 잠든 여자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결국 손을 뻗어 살며시 쓰다듬었다.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졌다.그제야 현빈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정은아...”남자의 입술에서 이름이 흘러나왔지만,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수많은 의문과 미련, 불안이 가슴을 가득 메웠지만, 끝내는 쓰라린 아픔으로만 남았다.현빈은 알고 있었다. 정은이 품에 안고 있던 사람을 보는 순간, 이미 모든 것이 끝났음을.아니, 어쩌면 더 일찍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조재석이 이 섬에 들어왔을 때, 이미 자신은 철저히 무너진 것이리라.‘아직 나에게 기회가 있다고 믿었어.’‘그래서 기다릴 수 있었고, 정은이에게 어떤 부담도 주고 싶지 않았어.’‘하지만... 또 틀렸구나.’‘정은아, 대체 왜지? 그 사람이... 정말 그렇게 좋은 거야?’‘왜 헤어졌다면서도, 너의 눈엔 다른 누구도 들어오지 않는 거지?’‘...’현빈은 속으로 묻고 또 물었다. ...마취가 완전히 풀리자, 재석은 곧장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그러나 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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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0화

정은이 눈을 뜬 순간, 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현빈의 모습이 보였다.“오빠.”정은의 목소리는 바람에 스칠 듯 작았다. 그러나 그 한마디에 현빈은 곧장 눈을 뜨고 몸을 숙여 정은을 확인했다.“깼어?”그는 웃으며 정은을 부축해 일으킨 뒤, 베개를 가져와 그녀의 등 뒤에 받쳐 주었다.정은은 낯설고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린 듯, 현빈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그 순간, 현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손끝이 닿은 그 자리가 전기라도 흐른 듯 뜨겁게 저릿했다.“정은아...”“오빠! 조 교수님은요?!”두 사람의 목소리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왔다.현빈의 가슴은 그 즉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산산조각이 나 버린 듯했다.“조 교수님은 괜찮아요? 다리 상처는...?”정은의 다급한 물음에, 현빈은 차분하게 대답했다.“괜찮아. 의사들이 이미 치료했어.”겉으로는 침착하게 미소를 지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깊고 낮아졌다.깊은 상실감과 질투가 묻어나는, 갈라진 음색이었다.“조 교수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제가 가서 봐도 될까요?”정은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현빈은 서둘러 만류했다.“지금은 늦었어. 내일 보러 가.”그제야 정은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는 까만 어둠뿐이었다.급히 핸드폰을 켜 보니, 화면에는 새벽 세 시라는 숫자가 또렷했다.정은은 놀라움에 숨을 들이켰다.“이렇게 늦었는데... 오빠는 왜 아직도 못 자고 있어요?”현빈은 고개를 저었다.“안 졸려.”“난... 오래 잤나요?”“이틀 하고도 반나절.”정은은 눈앞의 현빈이 수척해진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챘다.“오빠... 여긴 어떻게 온 거예요?”“네가 위험할까 봐. 도 선장이랑 같이 왔다.”그는 가볍게 말했지만, 정은은 알지 못했다.현빈이 꿈에서 본 불안한 그림자, 그리고 그 오랜 초조한 기다림을.“오빠는... 어떻게 내가 위험할 거란 걸 알았어요?”“그냥... 직감.”정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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