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너 없이도 눈부신 나날들: Chapter 1761 - Chapter 1770

1799 Chapters

제1761화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지훈은 스스로에게 ‘퉤’ 하고 침을 뱉는 시늉까지 했다.‘내가 지금 누구 생각을 하는 거야? 하필 민슬아?’‘애초에 반 강제, 반 협박으로 나를 끌고 다닌 건 그쪽이었고...’‘뱀이고 거미고 들먹여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간 건 난데...’‘지 하고 싶을 땐 달려오고, 맘에 안 들 땐 딱 끊어버리고... 난 뭐야?’‘아무 때나 만나줘야 하는 호구냐?’‘젠장!’분노는 짧았다.곧 정신이 차려졌다.‘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나한테도, 민슬아한테도 제일 나아.’‘적당히 끊어낼 때 끊어내고, 서로 시간 낭비하지 않는 거...’‘그게 어른의 선택이지.’...밤이 깊었다.찬 달빛이 고씨 가문의 본가 저택을 은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동건은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었다.남자의 눈은 밤보다 더 깊었고, 그 안에서 몰아치는 감정은 검은 먹물처럼 짙어 섞여 올라왔다.“도련님? 동건 도련님이세요?”늙은 가사도우미가 희미한 가로등 아래의 실루엣을 바라보다 망설이듯 부른 한마디.동건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가사도우미를 바라봤다.“아이고... 진짜 동건 도련님! 도련님 돌아오셨어요! 회장님이랑 사모님께 얼른 가서 알려야겠다!”가사도우미는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 총총하게 뛰어갔다.곧, 고씨 가문의 본가는 오랜만의 소란으로 깨어났다.송보미와 고창민은 원래 소파에서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아들 없이 지낸 지난 2년 동안, 두 사람은 이렇게 서로 기대앉아 있는 시간에 익숙해져 있었다.예전에도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다.하지만 지금의 둘은 서로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외로움과 상처를 같이 견디며 버티고 있었다.외동아들은 버팀목이 되지 못했고, 부부만이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야 했다.특히 작년, 송보미가 병으로 쓰러지기를 반복하던 시기.고창민이 곁에서 손을 놓지 않고 함께 버텨준 게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었다.사실 송보미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아들은 아들의 운명이 있다.업보라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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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2화

고창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그러는 사이 현관 쪽에서 한 사람이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던 그림자는 조용히 거실 불빛 아래 멈춰 섰고, 마침내 송보미와 고창민 앞에 서게 되었다.그 순간, 동건은 두 무릎을 꿇었다.“아버지...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20년.동건은 이 순간을 20년 동안 기다렸다.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 후회하며 살았다.전생에서 동건은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내가 지은 죄가... 다 부모님께 돌아간 걸까?’‘왜 나는 살아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떠나야 했을까?’‘내가 저지른 잘못 때문에... 그분들이 벌을 대신 받은 건 아닐까?’살아온 모든 날이 그 한 가지 의문으로 질식할 만큼 고통스러웠다.지금 바로 눈앞에 살아서 서 있는 부모님을 보는 순간...동건의 눈에서는 참아왔던 눈물이 터져 흘러내렸다.“죄송합니다... 제가 불효했습니다. 걱정만 끼쳐드리고...”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창민의 얼굴빛이 번개처럼 변했다.“누가 들어오라 했어? 밖에서 못 버티겠어? 못 버티겠어도 버텨! 우리가 너를 외국 보낸 게 편하게 살라고 보낸 줄 알아?!”“나가. 지금 당장 나가! 오늘... 넌 돌아온 적 없다. 우린 너를 보지 못했다.”고창민은 돌아섰다. 이미 눈이 뜨거워지고 있었기에 더 보면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여보, 그러지 마...”송보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창민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아들이 돌아왔어... 이렇게 왔는데... 당신은 또 내쫓을 거야? 딱 이틀만... 이틀만 집에 있게 해줘. 이틀 지나면... 나도 더는 아들 편 안 들게.”그 간절함에 고창민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그러나 동건이 먼저 말했다.고개를 들고 차분하고 단단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아버지. 저... 안 나갑니다. 이번에는 돌아서지 않겠습니다.”“버르장머리 없이...!”“수민이 때문이 아닙니다. 전... 고씨 가문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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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3화

정은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고동건도 그렇게 한다고 했어?”재석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근데... 고동건, 뭔가 좀 이상해.”사람이란 건 쉽게 바뀌지 않는다.적어도 짧은 몇 년 사이에 완전히 달라지는 일은 거의 없다.길게는 10년, 20년.삶을 뒤흔들 사건을 견뎌낸 후에야 조금씩 깨닫고 변하는 게 보통이다.고동건이 한국을 떠난 건 고작 2년.2년 만에 ‘다른 사람’이 되었다?정은은 쉽게 믿지 않았다.“나 오후에 수민 좀 보고 올게. 저녁은 집에서 안 먹어.”재석이 바로 말했다.“그럼 나도 같이...”“여자끼리 얘기하는데, 당신이 끼어들어서 뭐 하려고?”정은의 말에 재석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문이 열리자마자, 환한 미소가 튀어나왔다.“정은아! 왔어?”정은도 웃으며 해바라기 한 다발을 내밀었다.“너랑 잘 어울려. 완전 찰떡.”“고마워. 나 해바라기 좋아해.”수민은 꽃을 품에 안고 다른 손으로 정은의 팔을 슬쩍 잡아끌었다.“얼른 들어와. 내 방으로 가자.”“그래.”둘이 방으로 들어서는 모습은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았다.아파트에 붙어 살며 같이 게임하고, 수다 떨고, 야식 먹던 그 시절.“진짜...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이렇게 지나네. 우리 정은이 결혼까지 하고...”수민이 감탄하자 정은이 바로 되물었다.“넌? 앞으로 뭐 할 거야?”“결혼은 안 하고... 국내에 있으면서 부모님이랑 지낼 거야.”“그럼 고동건과는... 다 끝난 거야?”“응.”수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쪽 부모님도 집에 와서 이야기하고 갔고... 전체적으로 나쁘진 않았어.”“근데 넌 고동건... 믿어?”수민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변한 건 느껴져. 근데 믿는 건... 아직 모르겠어. 좀 지켜보고, 아니다 싶으면 그때 다시 생각하지 뭐.”정은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그래...”정은은 고동건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수민의 직감만큼은 믿었다.진짜... 한 번 믿어봐도 되지 않을까?...저녁, 정은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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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4화

정은이 현관으로 나오자, 재석은 자연스레 걸음을 내디뎌 정은의 손을 잡았다.손가락 사이가 빈틈없이 맞물리는 순간,재석의 표정이 더없이 부드러워졌다.“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저희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래. 조심해서 가.”재석은 직접 조수석 문을 열어 정은이 타는 걸 확인하고, 문을 닫은 뒤에야 운전석으로 돌아갔다.차가 출발하자마자 재석이 물었다.“수민이 상태는 어때?”“괜찮아. 표정도 좋고, 말하는 것도 예전 같아.”“그럼 이제 좀 안심됐지?”정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이제야 진짜 마음이 놓였어.”잠시 후, 재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한 보름 있으면 설인데... 우린 어떻게 할까?”그제야 정은은 깨달았다.또 한 해가 거의 끝나 가고 있다는 걸.요즘 프로젝트 마무리, 논문 정리, 투고 준비로 정신이 없었으니, 달력을 볼 여유도 없었다.“당신 생각은?”정은이 되묻자 재석은 잠깐 고민하는 척하다 대답했다.“없어.그냥 당신 결정 따라가면 돼.”정은이 피식 웃었다.“푸하... 아무 생각 없으면서 뭐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은 했어?”재석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생각은 없어도... 태도는 있어야지.”“오, 요즘 각오가 좋은데?”재석은 입꼬리를 올렸다.“당신 앞이니까 그런 거지.”정은은 재석의 뺨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입은 왜 이렇게 달아? 꿀이라도 몰래 먹었어?”“이따 집에 가서 확인해 봐.”운전 중인데도 재석은 정말로 그런 쓸데없고 위험한 말을 했다.그리고 그 ‘확인’ 과정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19금이고, 아주 격렬했다.정은과 재석 둘 다 다음 날 아침 피부도 말끔하고 정신까지 맑게 일어났다는 것만 보였다.둘은 활기 넘치는 얼굴로 각자 차를 몰아 각자의 실험실로 향했다....진욱은 멀리서 걸어오는 재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바로 느꼈다.‘아, 재석과 정은이 부부생활 아주 화목하네. 어젯밤 아주 잘 잤군.’웃음기, 피부 톤, 걸음걸이... 다른 말이 필요 없는 상태였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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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5화

정은은 실험 구역에 들어서자마자 민지의 환한 미소와 딱 마주쳤다.“정은 언니, 좋은 아침이에요!”민지는 이제 배가 불러서 제법 임산부 티가 났고, 볼살도 포동포동 올라 살결이 맑게 빛났다. 머리카락은 더 윤기 나고 풍성해져서 완숙한 복숭아 같았다.“그래, 민지. 그리고 우리 리틀 민지도 좋은 아침.”남진일과 탁재민은 타지에서 열리는도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다.연말엔 늘 그렇듯 모두 바쁘게 뛰어다닌다.민지가 몸이 불편해지자 서준은 하루 스물네 시간 옆에 붙어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서준이 밖으로 나도는 건 당연히 불가능.정은은 연말 보고서, 실적 발표, 과제 결산, 논문까지 한꺼번에 몰려 있어서 더더욱 실험실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그래서 ‘외근’을 나갈 사람은 재민과 진일밖에 없었다.다행히 지난 2년 동안 재민은 눈부시게 성장했다.내성적이고 수줍음 많던 대학생에서 말도 잘하고 능력도 갖춘 연구원으로 급성장.얼마 전에는 서비대 어느 나이가 많으신 교수의 외손녀가 재민에게 한눈에 반해 아주 적극적으로 들이댔다는 소문까지 돌았다.하지만 재민은 단 한마디로 깔끔하게 잘랐다.“저 아직 연구자로 이름도 못 알렸어요. 지금은 연애 생각 없습니다.”결과적으로 아가씨는 깔끔히 퇴각했다.진일은 더 심했다.자기 인생의 ‘결혼 문제’ 따위엔 관심이 전혀 없이 그저 논문만 들이파고 있었다.작년 한 해 논문 생산량, 완성도 모두 진일이 탑이었다.진일의 좌우명은 명확했다.‘사랑 따위는 논문 속도를 방해할 뿐. 마음에 여자가 없으면 과학이 나의 신이 된다.’재민은 바로 따라 외쳤다.“선배님! 저도 그 길을 따르겠습니다!”서준은 그 둘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얘네들은 몰라서 그래. 사랑이 없어서 그래...’...점심을 먹고 난 뒤, 정은은 회의실 앞쪽을 한 바퀴 둘러봤다.임시호가 노트북을 껴안고 키보드를 마치 드럼 치듯 두드리고 있었다.정은이 다가가 물었다.“진행은 어때?”시호는 눈을 들며 담담하게 말했다.“연말 전에는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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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6화

설 연휴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구름’이 드디어 업그레이드를 마쳤다.임시호가 현장에서 차분히 설명했다.“이게 구름의 최종 구현 화면입니다.”시호가 명령을 내리자, 구름은 깔끔하게 시연을 마쳤다.정은, 민지, 서준, 남진일, 탁재민은 모두 응접실에 모여 새 버전 ‘구름’을 검수했다.솔직히 말해, 시호는 정말 한 수 위였다.업그레이드된 ‘구름’은 중추 제어 능력뿐 아니라 전문성도 눈에 띄게 향상됐다.이전까지 ‘구름’의 지식 저장소에는 생물학이나 생물정보학 같은 개념이 없었는데, 이제는 세포 분열 공식을 응용해 개체의 총 세포 수를 계산할 정도였다.민지가 기쁜 듯 외쳤다.“우리 ‘구름’ 완전 출세했네!”서준도 바로 맞장구쳤다.“그럼, 그동안 헛돈 쓴 게 아니잖아.”정은은 쿨하게 잔금을 처리했다.“수고했어. 업그레이드한 ‘구름’, 다들 아주 만족스러워하네.”시호는 겸손한 표정으로 말했다.“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고객 만족이 제일이죠. 오늘 밤...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같이...”정은이 막 거절하려던 순간, 재민이 먼저 끼어들었다.“죄송합니다, 임 대표님. 오늘 저희 실험실 회식날이라서요. 정은 누나는 보스라 반드시 참석하셔야 합니다.”진일도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추첨 행사도 있잖아요. 보스 없으면 누가 뽑아요? 우리 실험실 원래 인원도 적은데.”민지는 속으로 둘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잘한다, 두 능력자!’시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러시군요... 제가 실례했습니다.”정은은 마치 미안한 척하며 말했다.“요즘 고생 많았어. 오늘은 들어가서 푹 쉬어.”말 속에는 ‘여기까지, 이제 그만 돌아가라’라는 뜻이 분명했다.시호도 눈치 있게 고개를 숙이며 노트북을 챙겨 빠르게 자리를 떴다.시호가 나간 뒤, 정은이 손목시계를 힐끗 보며 말했다.“슬슬 시간 됐다. 다들 출발하자.”“아? 출발? 어디로요?”“회식날이라며?”재민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하게 웃었다.“정은 누나, 그건 제가 그냥 막 던진 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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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7화

서준의 할아버지와 부모는 서준이 명문가 집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N세대 재력가’들의 삐뚤어진 기풍에 물드는 걸 누구보다 경계했다.얼마 전, 한 유력 가문이 대대적으로 조사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손주가 가문의 권세를 등에 업고 거리에서 여기저기 설치더니, 결국 만취 상태로 레이싱을 하다 사고를 내고도 난동을 부린 것이다.그 자리에서 시민들에게 바로 붙잡혔다.차 유리며 문짝이며 부서질 만큼 몰려든 시민들이 그 집안 도련님을 끌어내렸고, 수십 대의 핸드폰 카메라가 일제히 그를 향했다.교통경찰이 도착했을 때조차 현장은 진정되지 않았다.영상이 온라인에 올라가자 순식간에 여론이 들끓었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가문 전체가 탈탈 털렸다.윗사람 아랫사람 가리지 않고 모조리 조사 대상이 되었고, 결국 모두가 책임을 피하지 못했다.이 일을 들은 서준의 부모는 등골이 서늘해졌다.‘다행이다... 서준이는 저런 식으로 크지 않아서.’‘다행이다, 서준이가 민지처럼 마음 곱고 단순한 애를 만난 게.’‘다행이다, 서준이가 연구와 학문에만 마음을 두고 헛된 일엔 관심조차 없어서.’그래서 서준이 세상물정 모르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럴 자리도, 흥미도 없었다.‘바다향’ 같은 고급 퓨전 레스토랑에 처음 와보는 것도 결코 이상할 게 없었다.이에 비해 민지는 서준보다 훨씬 ‘즐길 줄 아는’ 편이었다.‘바다향’엔 여러 번 온 적이 있었다. 이 집 전복죽과 동파육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었다.다만, 늘 홀에서만 식사하고 바로 나가곤 했고, 포장해가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룸에 들어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오늘은 정은 언니 덕분에 완전 호강하네요.”민지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요리들이 하나씩 테이블 위에 올랐다.정은은 메뉴를 고를 때 민지가 싫어하는 음식들을 일부러 싹 피해 갔다.민지는 임신 이후 입맛이 크게 바뀌었다.전에 그렇게 좋아하던 연어와 홍새우는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렸고, 반대로 예전에 맵다고 잘 먹지도 않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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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8화

재민의 한마디 한마디에 모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민지가 콧물을 훌쩍였다.“재민이가 이렇게 감성적인 줄 몰랐네. 평소엔 말도 별로 없더니...”마침 그때, 배 속의 아기가 민지를 톡 하고 찼다.민지는 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아가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아이도 다시 한번 움직였다.술이 몇 바퀴 돌고,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정은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구석으로 가서 마치 마술처럼 빨간 종이 상자를 꺼냈다.“저건...”진일과 재민이 서로를 바라봤다.민지가 바로 물었다.“정은 언니, 저게 뭐예요?”“추첨 상자.”“네? 진짜 추첨하시는 거예요?”“그럼. 남들도 하는데 너희라고 없으면 안 되지. 누가 먼저?”“저요, 저요!! 저 먼저!”민지가 가장 적극적이었다.정은은 상자를 품에 안고 민지 앞으로 다가갔다.민지는 손을 쏙 넣어 한 장의 카드를 꺼냈다.“뭐지... 국내 7일 여행? 괄호... 가족 동반 가능?! 헐, 이렇게 큰 상이 있어요?”국내 도시 아무 데나 7일, 게다가 유급 휴가, 그리고 가족 동반 가능.“아아아! 나 왜 이렇게 운 좋지?!”민지는 자리에서 깡충 뛰었다.서준은 놀라서 식겁했다.“아, 아냐, 아냐! 진정해! 배에 애 있잖아.”“여보, 나 진짜 금손인가 봐? 헤헤...”사실 둘은 원래 아기 태어나기 전에 여행 가려고 했는데, 이제는 휴가 걱정도 필요 없고 비용도 전부 해결.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정은이 다음을 물었다.“다음은 누구?”“저요.”가까이 있던 서준이 자연스럽게 한 장을 뽑았다.민지가 바로 들여다봤다.“어떤 건데... 컴퓨터? 무슨 컴퓨터? 태블릿? 노트북?”부부는 동시에 정은을 바라봤다.정은이 대답했다.“다 가능해. 브랜드도 네가 고르고, 모델도 네가 고르고.”서준의 눈이 번쩍였다.“그럼... 사양은요?”“넌 그냥 맞추기만 해. 비용은 전부 내가 낼게.”민지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언니! 언니가 우리 서준이한테 너무 잘해주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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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69화

진일과 재민이 서로를 한번 바라봤다.“정은 누나, 이건 너무 비싸요. 전 정말 받을 수 없어요...”재민이 열쇠를 되돌려주었다.정은은 무심하게 말했다.“재민아, 그게 진짜 너와 전일 선배한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 이건 정착 지원금이야. 흔히 말하는... 뭐, 몸값 계약서? 크흠, 농담이고.”“근데 의미는 비슷해. 나는 너와 전일 선배가 계속 실험실에 남아서 많은 연구 자료를 생산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너희도 J시에 집이 있어야 정착하든 말든 할 거 아니야.”정은은 아주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내가 안 줘도 너희라면 몇 년 뒤엔 충분히 살 수 있어. 하지만 의미가 다르지. 결론은 이건 ‘선물’이 아니라, 너희가 가진 가치에 대한 당연한 보상이라는 거야.”민지가 바로 거들었다.“맞아요, 맞아! 전일 선배! 안 받는 건 무슨 뜻이에요? 설마 이직 생각 있으세요?”진일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절대 아니야.”재민도 필사적으로 손을 저었다.“말도 안 돼요!”정은이 단호히 말했다.“그럼 두 분, 그냥 받아요. 인테리어랑 가전은 다 들어가 있어요. 가서 바로 짐만 풀면 돼요. 며칠 뒤에 부모님도 모셔 와요. 새집에서 같이 새해 맞이해요.”과학자는 ‘신’이 아니다.과학자도 먹고 살아야 하고, 돈이 필요하고, 생활이 필요하다.연구는 열정과 이상만으로 굴러가는 게 아니었다.가정 형편을 개선하고, 더 나은 삶을 얻기 위해 연구를 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돈이 전부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그 돈으로 두 명의 인재를 붙잡을 수 있다면, 정은 입장에서는 이만한 장사가 없었다.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밤 9시.식당도 거의 마감하는 분위기였다.일행은 함께 식당을 나섰다.민지는 정은 팔짱을 끼며 궁금한 걸 참지 못했다.“언니, 언니는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걸 뽑을 거라고 확신하셨어요? 혹시 무슨 장치라도 넣으신 거예요?”정은이 짧게 답했다.“비밀번호.”“아이, 언니... 그거 좀 알려주세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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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70화

의사는 몇 번이나 경고했다. 더 늦기 전에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강서원의 병세가 실제로 악화할 수 있다고.하지만 재석의 마음속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그래서 주변의 압박을 모두 버티고 치료에 동의하지 않았다.집안 사람들도 하나하나 설득했다.마침 조지언과 조지훈이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 강서원이 먼저 나섰다.“그냥 재석이 말 들어.”...병원, VIP 병동.재석과 정은이 도착했을 때 병실엔 아무도 없었다.두 사람은 안내데스크에 가서 물었다.“아! 동료분이 강 여사님 모시고 햇볕 쬐러 나가셨어요. 오늘 날씨 좋잖아요.”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쳤다.요즘 들어 강서원은 의료진들과의 관계가 훨씬 좋아졌다.예전에는 작은 일에도 성질을 냈고, 다들 강서원을 ‘힘든 환자’로 여겨 속으론 불만도 많았다.하지만 최근 강서원은 눈에 띄게 온순해졌다.검사라면 뭐든 순순히 따라주고, 말도 부드럽고 태도도 차분했다.사람들이 조금씩 강서원을 다시 보기 시작한 데에는 지난달 있었던 일도 한몫했다.강서원이 병원 측에 먼저 요청한 것이다.자신을 돌본 간호사 몇 명에게 보너스를 주고 싶다고.비용은 본인이 부담하겠다고.병원은 흔쾌히 허락했고,그동안 가장 열심히 챙긴 간호사 몇 명은 그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상여금을 받았다.기뻐서 SNS에 몇 번씩이나 올릴 정도였다.그 후로 강서원은 VIP층에서 가장 환영받는 환자가 됐다.재석과 정은이 병실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아마 전화를 받은 듯 강서원이 일찍 들어왔다.“재석아, 정은아.”“어머님.”강서원은 상태가 나쁘지 않아 보였다.막 햇볕을 쬐고 와서인지 얼굴빛도 좋았다.정은은 가져온 닭백숙을 그릇에 옮겨 테이블에 두었다.“이거 재석 씨가 끓인 거예요. 한번 드셔보세요.”“고마워. 너희 둘 다, 마음 많이 썼네.”강서원은 숟가락을 들어 한 모금 떠먹었다.“응, 맛있네.”식사 중, 자연스레 설 이야기로 넘어갔다.재석이 말했다.“아까 교수님 뵙고 왔어요. 상태만 안정적이면, 설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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