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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사랑의 덫에 빠진 운명: Chapter 1071 - Chapter 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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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1화

아마도 너무 아파서, 순간 착각을 한 걸지도 모른다.유건은 시연의 눈동자 밑에서 물기 어린 빛을 보았다. 은은하게 흔들리는 빛, 매혹적인 눈망울.‘혹시... 나 때문에 너무 긴장해서... 울고 있는 건가?’“후후.”유건은 저도 모르게 낮게 웃음을 흘렸다.시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뭐라고 했길래, 웃는 거지?’“아니야.”유건은 웃음을 머금은 채, 덧붙였다.“네가 그러면... 사실은 날 사랑하면서도 괜히 입으로만 부정하는 것 같잖아.”시연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건은 고개를 저으며 자기 말을 부정했다.“알아, 그건 아니겠지.”시연은 눈을 깜박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빨라졌다.‘이건... 너무 위험해.’시연은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나... 봉합 세트 처리하고 올게요.”의료 폐기물은 아무 데나 버릴 수 없다. 마수경은 모를 테니, 결국 시연이 직접 처리해야 했다.“시연아.”유건이 그녀를 붙잡았다.“말해 줘.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거야? 내가... 노은범처럼 너를 위해 죽으면, 그때는 다시 날 선택할 수 있겠어?”‘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할 수가 있지?’시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떨리는 고개를 겨우 내저었다. “가정은 의미 없어요. 일어나지 않은 일로는 정확한 결론을 낼 수 없어요.”그 말을 끝내고 시연은 유건을 밀어내고 나갔다.“그렇지.”뒤에서, 유건은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가정 따위, 아무 의미 없지...”...다음 날.시연은 퇴근 후 곧장 은법의 집으로 향해야 했다. 강수희에게서 전화가 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외과 건물을 나서자, 누군가 시연을 불러 세웠다.“저기요!”시연이 고개를 들어 보니, 지난번에 봤던 레오의 딸, 루시였다.‘또야?’“하...”시연은 설명하려 했다.“아버지도 분명 설명했을 텐데? 그분은 나랑...”하지만 루시는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렇다고 손을 휘두른 건 아니었다.루시는 울먹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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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2화

곧 레오가 도착했다.“아빠!”루시는 손을 놓고, 달려가 레오에게 안겼다.“루시?”레오는 즉시 얼굴을 찌푸렸다.“왜 또 시연이를 찾아왔어? 내가 몇 번이나 말해야 믿겠어? 나랑 시연이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 아이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아빠...”루시는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아빠 눈엔 이제 그 사람밖에 안 보여요? 그럼 엄마는요? 엄마는 아프셔서 그냥 아빠가 한 번만 와주길 바라는 거라고요!”“루시.”레오는 난처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나랑 네 엄마 문제는 어른들끼리 해결할 일이야. 넌 끼어들지 마.”“아빠...?”루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엄마랑 부부였잖아요. 정말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구실 거예요?”“루시.”레오는 고개를 저었다.“나랑 네 엄마 일은... 너무 복잡해. 네가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싫어요, 안 돼요!”루시는 얼굴을 감싸 쥐고, 무너져 내리듯 오열했다.“아빠, 왜 이러는 거예요? 엄마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엄마랑... 나한테까지 이렇게 하는 거예요!”“루시...”레오는 딸을 끌어안으며 달랬다.“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 딸이야. 그건 변하지 않아.”“아빠...”그렇게 부녀가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시연은 그 장면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조용히, 소리 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은범의 집에 도착하자, 강수희가 반갑게 시연을 붙잡았다.“시연아, 오늘 부른 건... 앞으로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야.”‘앞으로의 일?’시연은 순간 멍해지며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설마...’ “사모님, 말씀하세요.”“그게 말이야.”강수희는 위층 침실을 가리켰다.“은범이 요즘 상태가 훨씬 좋아졌어. 깨어나는 건, 시간문제 같아.”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녀가 누구보다 기다린 소식이었다.“휴...”강수희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그래서 요 며칠 집안 정리도 하고, 방도 새로 꾸미려고 사람을 알아보고 있어. 네 방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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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3화

SKY 전원주택단지.“흥!”조이는 토라진 듯 통통한 손을 홱 들어 올리더니, 들고 있던 연필을 던져 버렸다.“안 쓸래요!”도경미가 깜짝 놀라 급히 연필을 주워 들고 달래듯 말했다.“왜 안 쓰니? 이거 봐, 우리 조이가 쓴 거...”그러다 말을 멈췄다. 솔직히 글씨가 영 아니기 때문이었다.‘어떻게 달래야 하지...’도경미가 난감해하던 순간, 2층에서 유건이 내려왔다.조이는 화가 난 탓에 평소처럼 먼저 유건 품에 뛰어들지도 않았다.“왜 그래?”유건은 조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상처가 벌어진 탓에 안아줄 순 없었다.“우리 공주님이 화났네?”“흥!”조이는 볼을 불룩하게 내밀더니, 말도 하기 전에 금세 억울함이 치밀어 올라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내 입술을 떨며 입을 열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글씨 못 써요... 난 진짜 바보예요! 으아앙...”점점 울음은 커지고, 조이는 목 놓아 울었다.“울지 마.”유건은 조이가 우는 걸 도무지 못 보았다.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자기 아이가 아닌데도, 조이가 울기만 하면 심장이 쥐어짜듯 아팠다.유건은 두 팔을 벌렸다.“이리 와. 아빠 품으로 와야지.”“아빠!”시연이 없을 땐, 이들 부녀는 더 대담해졌다.포근하게 안긴 조이를 품에 안고, 유건은 조이의 공책을 펼쳐 보았다.요즘 조이는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F를 쓰는 날이었다.“어디 보자... 어떤 글자가 우리 아가 말을 안 듣는 거야?”조이가 힘들어한 건 대문자와 소문자 F였다.“음, 아기 탓이 아니야. 이건 원래 어려운 글자거든.”곡선도 있고, 길게 내려가다 마지막엔 또 위로 살짝 치켜올려야 했다. 스물여섯 개 알파벳 중에서도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자.”유건은 공책을 다시 펴고, 조이의 통통한 손에 연필을 쥐여주었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감싸 쥐며 함께 움직였다.“아빠랑 같이 써 보자.”유건이 쓰는 글씨는 자연스럽게 흘려 쓰는 꽃체 느낌이 살짝 묻어 있었다. 가볍게 긋는 선이 매끄럽게 이어졌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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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4화

“아...”조이는 곧장 떠올렸다. 엄마 앞에서는 ‘아빠’라 부르면 안 된다는 걸.“아저씨가 내 손 잡고, 하나하나 가르쳐 줬어요!”“그래? 그럼 아저씨한테 고맙다는 말 했어?”“했어요! 아저씨 너무 좋아요!”순간, 시연의 마음은 복잡해졌다.여기서 지낸 시간은 짧았지만,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보였다.유건이 조이를 얼마나 아끼는지, 얼마나 진심을 다하는지...‘어떤 사람은, 타고나길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지.’‘고유건은... ‘아빠’라는 자리가 잘 어울리는 사람이야.’그때, 마수경이 다가와 물었다.“대표님, 지 선생님, 저녁 준비됐는데 드시겠어요?”“네.”“밥 먹어요!”조이는 공책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나 유건에게 달려갔다.“아저씨, 손 씻으러 같이 가요!”아저씨가 상처 때문에 안아줄 수 없다는 걸 아는 조이는, 얌전히 손만 꼭 잡고 끌었다.“가요.”나란히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연의 가슴엔 근심이 더 짙게 내려앉았다.‘언젠가 헤어지게 되면... 조이가 울겠지?’ ‘울 거라는 건 분명한데... 내가 과연 달래줄 수 있을까?’...며칠 후, 시연은 지동성이 남겨둔 지씨 저택을 찾았다.집을 물려받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다른 두 채는 이미 세를 놓았고, 오래된 저택만 남겨 두었다. 지씨 저택은 얼마 전에 보수까지 마쳐 두었으니, 들어가 사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강수희가 그렇게까지 분명히 말했으니, 시연도 준비해야 했다.하지만 은범이 깨어난다 해도, 바로 은범의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조이랑 나는... 당분간 여기에서 지내는 게 맞아.’집 구조나 살림에는 문제 될 게 없었지만, 한 가지 준비해야 할 게 있었다.조이의 방.그동안 이 집에 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기에, 어린이 방은 마련해 두지 않았다.다행히 그건 꽤 간단했다. 가구만 들이면 됐으니까.시연은 SKY 전원주택단지 집에서 조이가 쓰던 침대를 떠올렸다.‘그 침대랑 똑같은 걸 주문해야겠어.’집안을 둘러보고 나니 시간이 꽤 늦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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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5화

시연은 하고 싶은 말을 반쯤 내뱉은 채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유건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시연이 하지 않은 나머지 말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올 게 온 거지.’“허.”유건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었다.“좋아졌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벌써 깨어난 거야?”그럴 리 없었다.만약 은범이 눈을 떴다면, 그 소식이 자기 귀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었다.“아니에요...”시연은 고개를 저었다.“하지만, 아마... 깨어날 확률이 크대요.”“치...”시연이 말을 잇기도 전에, 유건은 듣기 싫다는 듯 냉소로 끊어냈다.“뭐야, 아직 깨어난 것도 아닌데 벌써 설레발이야? 날 버리고, 노은범과의 해피엔딩이라도 꿈꾸는 거야?”“유건 씨...”“좀 이르지 않아?”유건의 말투는 이미 까칠하게 날을 세웠다. 시연이 변명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노은범이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깰지 안 깰지도 모르는 거잖아.”그 말은 사실이었다.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래도... 미리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하.”유건은 씁쓸하게 웃었다.“걱정해 준 거야? 내가 충격받을까 봐? 참, 착하기도 하지. 정말 고맙네.”그 말투엔 가시가 박혀 있었다.이마 위엔 ‘기분 더럽다’라는 글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는 듯했다.유건의 그런 태도에, 시연은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뭐라고 해도 소용없어. 지금은... 어떤 말도.’시연이 침묵으로 일관하자, 유건은 오히려 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왜 말이 없어?”시연은 멍한 눈길로 유건을 올려다봤다.‘무슨 말을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도... 기분만 상할 텐데.’그녀가 입을 열면, 유건은 열 마디라도 쏘아붙일 기세였다.유건은 울컥하는 심장을 억누르지 못했다.노은범 얘기, 이별 얘기 말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없는 게 서운했다.‘좋다, 아주 좋아!’“가자!”유건은 시연의 손목을 덥석 붙잡고 차 쪽으로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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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6화

유건은 손바닥으로 시연의 뒤통수를 감싸 쥐더니, 강하게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돌아왔잖아. 네가 아무리 날 화나게 하고, 상처 주고... 그래도 네가 없던 지난 3년보다 낫다고! 난 널 안 놔줄 거야. 절대 못 가!”시연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온몸이 굳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유건은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키스는, 숨이 막히도록 깊어졌다.“유건 씨!”시연은 당황했다. ‘이 사람, 지금 뭐 하는 거야? 여긴... 차 안인데!’앞좌석의 공기마저 얼어붙었다.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는 식은땀을 흘렸다.‘대표님, 진짜 이건 아니죠...’‘내가 뭐라 할 수도 없고, 그냥 눈과 귀를 막아야지.’ ‘제발, 이 일 들키면 나 이 일자리 끝장이야...’“고유건!”시연은 결국 급해져, 그의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큭...”큰 통증은 아니었지만, 날카로운 자극이 그를 정신 차리게 했다.유건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행동을 멈췄다.그러고는 자신을 노려보는 시연의 눈빛을 마주하자, 오히려 머쓱해져 그녀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윽...”시연이 추궁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낮게 신음을 흘렸다.“왜 그래요?”역시 효과는 있었다.시연은 순간 멈칫하더니, 곧장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혹시... 상처가 또 터진 거예요?”“응.”유건은 그녀의 품에 비비듯 몸을 기댔다.“어디 봐요.”“응.”그는 한없이 순하고 연약한 태도로, 그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시연은 서둘러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다행히 상처는 이미 아물어, 다시 벌어지진 않았다.“정말이지...”시연은 여전히 화가 나, 그의 이마를 톡 치듯 눌렀다.“이 일로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어요?”“그래도 될까?”유건은 어린아이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올려다봤다.“내가 이 일로 죽으면... 널 위해 죽는 거잖아. 그럼, 넌 나랑 다시 함께할 마음 생길까?”“유건 씨!”시연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정신 차려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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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7화

며칠 사이,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 노인에게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상훈은 더위에 지쳐, 식사도 잠도 제대로 못 이뤘다.지금은 가볍게 흔들리는 안락의자에 기대어 졸고 있었다.조이는 고상훈 발치에 깔린 카펫 위에서 장난감을 만지며 조용히 놀고 있었다.유건은 다가가 조이를 번쩍 안아 올렸고, 시연은 조심스레 담요를 꺼내 덮어주려 했다.그런데, 작은 움직임에도 고상훈은 눈을 떴다.시선을 흐릿하게 돌리더니, 시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명주...?”시연은 순간 굳어졌다.“할아버지, 저예요. 시연.”“아...”고상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서히 정신을 가다듬었다.“그래, 시연이지. 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고... 나이 들면 기억은 자꾸 흐려지더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옛일은 더 또렷해져.”어머니 이야기에 시연은 이제 슬픔보다는 그리움이 먼저 찾아왔다.그러나 동시에 의아했다.“저... 엄마랑 많이 닮았나요?”할아버지마저 착각할 정도라니.사실 시연은 사진 속 어머니와 그다지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음.”고상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얼굴만 보면 크게 닮진 않았어. 하지만 말투, 기운, 풍기는 기색은... 얼핏 보면 꼭 빼닮았지.”“그렇군요...”시연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잔잔히 웃었다. 그리고 곧장 화제를 돌렸다.“유건 씨 말로는 요 며칠 몸이 불편하시다던데요?”“에휴...”고상훈은 짧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나이 먹으면... 아무리 고치고 붙여도 소용이 없구나.”“할아버지.”시연은 그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병원에 가서 검사 한 번만 해보세요. 뭐가 문제든, 빨리 치료하면 되잖아요.”이 말에 고상훈은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또 병원이냐?”고상훈의 지난 세월은 병원과 함께 흘러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병원은 이제 지긋지긋한 곳이었다.“네.”시연은 차분히, 그러나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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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8화

수술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허락하지 않았다.“알았어.”유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론 뻔히 알았다.‘이 병... ‘그분’ 집안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 때문이겠지.’시연은 유건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할아버지는 조이를 좋아하시잖아요. 조이가 곁에 있는 게 제일 좋은 약일 거예요.”“시연아.”유건은 순간 가슴이 저릿해지며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고마워.”‘별말씀을요. 당연한 건데요.’그건 입 밖에 내지 않고, 시연은 속으로만 삼켰다.그녀는 유건과 조이가 부녀라는 사실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렇게 곁을 지켜주는 일뿐이었다.유건은 시연의 손을 더 세게 쥐며 고개를 숙였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았다.알고 있었다. 시연이 이렇게 하는 건 자신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선함 때문이라는 걸.‘언젠가는, 그 선함 때문에라도 내 곁에 머물러주지 않을까?’...고상훈이 입원한 첫날 밤, 유건은 병실을 지켰다.그리고 이튿날 아침, 곧장 병원에서 회사로 향했다.병실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고개를 쭈뼛거리며 안을 기웃대는 고장민과 정면으로 마주쳤다.‘허, 소문 한번 빠르네.’유건은 비웃음을 흘렸다.고장민 일가의 속셈이 뻔히 보였기에 유건은 오랫동안 그 일가를 경계해 왔다.“유건아.”고장민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네 할아버지 몸이 안 좋다 해서... 내가 좀 뵈러 왔다.”“뵌다고?”유건은 미간을 치켜올리며 비아냥거렸다.“심장이 안 좋으셔. 왜 그런지 정말 몰라서 그래?”“뭐?”고장민은 순간 멈칫하다가 얼굴을 찌푸렸다.“말은 똑바로 해라. 아버지는 연세가 있으니 심장이 안 좋은 거야. 나 때문은 아니라고.” “헛소리하고 싶지 않아.”유건의 목소리엔 노골적인 혐오가 묻어났다.“그쪽은 할아버지를 뵐 필요 없어. 할아버지가 그쪽을 보면 더 큰 일이 날 거야. 심장병이라도 도지면 어쩔 거야? 썩 꺼져.”“너...!”고장민은 분노에 치를 떨며 유건을 손가락으로 겨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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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9화

한때, 고장민과 심명진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잉꼬부부였다.결혼 초만 해도 금실이 좋아서 누구나 부러워할 정도였다.하지만 좋은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심명진의 여동생 심화연은 남자 친구에게 버림받은 뒤 충격을 크게 받아, 몇 차례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할 정도로 상태가 위태로웠다.언니인 심명진은 그런 동생을 걱정해 곁에 두고, 정성껏 보살폈다.자매의 정, 그 진심에는 거짓이 없었다.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심화연이 은혜를 원수로 갚듯, 뻔뻔스럽게도 형부인 고장민을 유혹한 것이다.하지만 고장민은 끝내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고, 결국 두 사람은 같은 침대 위에서 얽히고 말았다.이 모든 사실을, 정작 아내이자 언니인 심명진만 모르고 있었다.그 무렵 심명진은 고씨 가문의 일들을 챙기느라, 또 각종 사교 모임에서 빠지지 않고 얼굴을 비추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래서 동생이 조금씩 밝아지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안도했을 정도였다.그러다 어느 날.심화연이 떨리는 손에 임신 진단서를 들고 와, 눈물로 호소했다.“언니... 제발 형부를 저한테 양보해요. 저, 형부 아이 가졌어요.”그 순간, 심명진의 세상은 무너져 내렸다.‘남편과... 내 동생이?’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두 사람이 동시에 칼을 꽂았다.그러나 심명진에게 선택지가 있었을까?고장민과 심화연은 이미 아이까지 가지게 된 사이였다.심장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 속에서, 결국 그녀는 이혼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하지만 고상훈은 단호했다.“안 돼! 절대 안 된다!”이성은 또렷했고, 분노는 불꽃 같았다.그는 손가락을 고장민에게 겨누며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처제까지 건드려? 네가 사람이냐? 내가 어떻게 이런 짐승 같은 놈을 아들로 뒀을까!”“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고장민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그러나 고상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나한테 잘못했다고 빌지 마라. 네가 죄를 지은 대상은 내가 아니라, 네 아내다! 명진이한테 무릎 꿇고 빌어라!”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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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0화

웃기는 일이었다.고장민과 심화연이 몰래 얽혀 있을 때, 심명진은 오히려 그 둘의 아이를 대신 키우고 있었다.“엄마.”“엄마!”갑작스러운 파국 속에서도 승하와 유건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다만 두 아이 모두 본능적으로 엄마 곁을 지켰다.그러다 결국, 승하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고상훈은 그때조차 고장민에게 마지막 기회를 줬다.“네게 두 가지 선택을 주마. 첫째, 심화연을 외국으로 보내라. 다시는 우리나라 땅을 밟지 못하게 하고, 명진이랑 평생을 살아라, 그게 네 책임이다.”그러나 심명진은 그 선택 따위 기대하지 않았다.이미 남편으로서의 가치는 끝났으니까.“둘째, 너도 화연이처럼 떠나라. 그리고 기억해라. 그 순간부터 넌 내 아들이 아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마. 밖에는 네가 죽었다고 알리겠다. 그리고...”고상훈은 차가운 눈을 가늘게 뜨고 심명진을 스치듯 바라봤다.결국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고씨 가문의 장손, 이제부터 없는 셈 칠 거다.”“아버지!”고장민은 망연자실했다. 설마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냉정할 줄은 몰랐다.그러나 고상훈의 태도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협상의 여지도 없었다.결국 결말은 뻔했다. 고장민은 심명진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입을 열었다.“여보... 미안해. 나는 화연을 버릴 수 없어. 당신은 나 없어도 잘 살 거야. 하지만 화연은... 나 없이는 살아남을 수가 없어. 내가 아니면, 화연은 죽을 거야.”그 말에 심명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 정말 그렇다고 믿어?’눈물로 얼굴을 적시던 여동생의 나약한 모습을 떠올리자, 분명 자기보다는 한없이 연약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고장민이 심화연을 택한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좋아. 잘됐네. 어차피 당신이 나를 택했다 해도...’‘나는 다시 당신과 살 수 없었을 거야.’“아버지...”고장민은 끝내 무릎을 꿇었다.고상훈 앞에 이마를 몇 번이고 박으며 울먹였다.“불효했습니다. 아버지 곁에서 효도하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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