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1111 - Chapter 1120

1121 Chapters

제1111화

“사모님, 안녕하세요.”추형석이 금세 인사를 건네며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걸었다.“박 대표님이랑 같이 오신 건가요?”“네.”“그럼 지금 이 자리에 계신 건...”“아, 그냥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왔어요.”“그렇군요. 그럼 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추형석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려 떠나려 했지만 성유리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요즘 방해준 씨랑 사이가 꽤 좋아 보이던데요?”성유리의 말에 추형석은 발걸음을 뚝 멈추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바라봤다.그리고 성유리는 그 자리에 서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복도 천장의 조명이 밝게 빛나 그녀의 눈동자를 더욱 맑고 투명하게 비추고 있었고 얼굴은 완벽하리만큼 섬세했다.추형석은 이래서 박한빈이 저렇게 좋아했구나 싶었다.몇 초간 눈을 마주치던 끝에 추형석이 웃으며 되물었다.“사모님, 그게 무슨 뜻이신가요?”“별 뜻은 없어요. 그냥 좀... 이상해서요.”“어디가 이상하다는 건지...”“지난번 강지연 씨 일로 박한빈 씨가 방해준 씨한테 꽤 화를 냈잖아요. 저는 그래서... 당신도 연루됐을 줄 알았어요.”강지연이 그렇게 된 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하지만 그녀의 전 남편이자 처음 방해준에게 강지연을 소개했던 추형석은 그 일에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오히려 지금은 방해준 옆에 앉아 함께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이게 이상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박한빈은 추형석을 신경 쓰지 않는다.그에게 추형석 같은 사람은 고작해야 여자를 연결해주는 수준의 인물일 뿐, 눈에 들지도 않았고, 경쟁자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그날 밤 박한빈이 성유리에게 먼저 추형석 이야기를 꺼낸 것도 그저 성유리의 말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그래서 낚시하듯 조금씩 사실을 흘렸던 거다.그렇지만 성유리는 달랐다.전부터 강지연이 끼어든 후, 방해준이 박한빈을 의도적으로 겨냥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눈치를 챘다.그때부터 생각했다.‘이 일에서 추형석 씨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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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2화

성유리는 추형석의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자신이 막 세운 추측이 맞았다는 확신을 얻었다.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추형석도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조명 아래 추형석의 안경은 은은하게 빛을 반사했다.그걸 본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저 강지연이랑은 이미 이혼했어요.”마지막으로 추형석은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게다가 그건 걔가 자초한 일이죠.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성유리는 말이 없었다.“방해준 씨는 의리 있는 사람이니까 이런 걸로 저한테 뭐라 하진 않을 겁니다.”추형석은 말을 이어갔다.“어쨌든 사모님께서 저를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네요.”성유리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추형석은 다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전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중에 뵐게요.”성유리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고 추형석은 이내 몸을 돌려 떠나갔다.남겨진 그녀는 추형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전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잠시 더 복도에 머물러 있던 성유리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가려 몸을 돌렸다.그런데 막 대연회장 입구에 도착하자, 안에서 싸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높게 쌓아 올린 샴페인 타워가 완전히 무너져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방해준과 그의 파트너를 모델로 만든 몇 층짜리 웨딩 케이크 역시 처참히 박살 나 있었다.사람들 사이에서는 강지연의 거의 광란에 가까운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방해준 씨! 저랑 다 하고 나서 그냥 도망치겠다고요? 제가 가만히 있을 줄 아세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보여드리죠!”“여러분 다 들으셨죠? 저랑 이 사람, 뭐 사랑이니 모범 부부니... 다 가짜예요! 방해준 씨는 믿을 수 없는 배신자예요! 이 사람 바람났어요! 진작부터!”강지연은 그렇게 외치며 자신과 방해준이 함께 찍은 친밀한 사진들을 뿌리기 시작했다.희고 번들거리는 사진들이 공중을 날며 쏟아졌고 그 광경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업계 사람들 대부분이 내막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폭로한 건 처음이라 누구든 놀라지 않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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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3화

하지만 박한빈은 여전히 성유리의 손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그때, 방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는 먼저 현장에 있던 손님들에게 사과했고 강지연의 난동은 ‘정신적인 문제’ 때문이라며 정리했다.손님들은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반응을 보였다.그렇게 연회는 다시 이어졌다.호텔의 청소 인력들이 즉시 투입되어 현장을 말끔히 정리했고 와인잔은 전부 새것으로 교체되었으며, 샴페인도 다시 터졌다.심지어 케이크조차 새롭고 더 화려한 디자인으로 대체되었다.우아한 교향곡이 다시 연회장에 흐르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어느새 다시 화기애애해졌다.방금 전의 소동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그러나 성유리는 그 광경을 보면서 오히려 미간을 더 잔뜩 찌푸렸고 가슴 속에는 뭐가 막힌 듯한 답답함이 차올랐다.“우리 먼저 나갈까?”그때 박한빈이 문득 물었다.“그래도 돼요?”깜짝 놀란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당연하지.”“그럼 방 대표님은...”“지금 응대하느라 정신없으니까 우리가 빠지는 거 몰라.”박한빈은 그렇게 말하며 성유리의 손을 이끌고 이미 연회장을 떠나고 있었다.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사실 이 연회장의 중심은 바로 박한빈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모든 시선이 무대 위 사람에게 쏠려 있었고 그 덕분에 그들의 움직임은 주목받지 않았다.박한빈은 그렇게 조심스럽게 성유리를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전등이 전부 밝혀지는 순간, 박한빈의 걸음이 잠시 멈췄고 이내 그녀의 손을 잡고는 달리기 시작했다.성유리는 한 손으로 드레스를 살짝 들어 올렸고 다른 한 손은 박한빈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문득 예전에 봤던 동화 영화의 포스터가 떠올랐다.주변엔 아무도 없고 세상엔 오직 그 사람과 자신만 있는 것 같은 기분.방금 전까지 답답했던 감정이 순식간에 사라진 성유리는 입꼬리도 저절로 살짝 올라갔다.그렇게 연회장을 빠져나와 한참을 달린 후에야 박한빈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성유리는 눈을 깜빡이며 박한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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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4화

설날 이틀 전, 방해준이 무너졌다.이 소식은 대중에겐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가 관리하던 시스템은 순식간에 다른 사람들로 전면 교체되었고 그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은 전부 동결되었다.또한 방해준의 아내가 운영하던 자선단체까지 포함해서 말이다.그 시기 박한빈은 유난히 바빴다.성유리는 하늘이를 데리고 미리 엔젤 월드에 들어가 있었고 박한빈은 마치 더는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매일 새벽같이 나가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다.이 사실은 임종연이 김서영에게 연락을 취하면서 성유리도 알게 되었다.“방해준 씨가 끝장날 거라는 건 알아요. 저도 이제 와서 뭘 바라는 것도 아니에요. 근데 경언이는 아직 어리잖아요. 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어요. 제발... 제발 도와주세요.”임종연은 통화 내내 오열하며 애원했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김서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제가 상황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그 아이가 관련이 없다면 괜찮을 거예요.”“알아요. 근데 지금 방해준 씨가 가진 재산은 다 묶였잖아요. 그럼 경언이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저는 그저... 저희가 죽고 나서라도 혹시라도 경언이한테 손 내밀어줄 수 있다면 좋겠어요. 딱 그거 하나만 바랄게요.”“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울 수 있다면 꼭 도울게요.”김서영은 그렇게 전화를 끊은 뒤, 옆에 있던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한빈이는 어젯밤 몇 시에 들어왔니?”성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저도 몰라요.”김서영은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방금 말한 거 다 들었지? 오늘 밤에 한빈이 들어오면 꼭 전해줘.”“네.”그러고 나서 성유리가 다시 물었다.“어머님, 어디 안 편찮으세요? 안색이 좀...”“아, 아니야.”김서영은 금세 손을 내리며 대답했다.“그냥 갑작스러운 소식에 좀... 놀라서 그랬지.”“몸이 좀 안 좋으시면 병원 가보시는 게...”“괜찮아. 내가 뭐 어때서.”김서영은 곧장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날씨 보니까 눈이 많이 올 것 같네.”“할머니! 나 눈사람 만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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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5화

“나는 그냥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야. 나랑은 사실 별로 상관없어.”박한빈의 말을 성유리는 전혀 믿지 않았다.그러나 곧 그의 말 속에서 핵심을 짚어냈다.“그럼 신고한 사람은 누군데요?”“모르겠어.”“최경언 씨죠?”박한빈은 원래 모른다고 말하려 했다.어차피 어떤 일은 너무 많이 아는 게 좋지만은 않다.게다가 성유리에게 굳이 알려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확신에 찬 말투로 물어오자 박한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최경언 씨가 직접 말해준 거야?”그 말을 듣자 성유리는 자신이 맞혔음을 확신했다.“지난번에 저한테서 일부러 경언 씨 연락처를 받아 갔잖아요. 단순히 위로하려는 게 아니었겠죠.”성유리는 말을 이었다.“그리고 지난번 연회에도 최경언 씨는 참석하지 않았고 방해준 씨도 아무 언급도 안 했어요. 이미 둘 사이가 갈라졌다는 뜻이겠죠.”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러자 성유리는 그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내가 맞춘 거죠?”“그런 셈이지.”박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어쨌든 최경언 씨가 1차 자료를 넘겼고 그 덕분에 뒷조사들이 가능해졌거든.”“최경언 씨 어머니는 몰라요?”“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자선회가 연루된 건 확실하니까 지금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알게 될 거야.”성유리는 미간을 찌푸렸다.“오늘 임종연 씨가 어머니한테 전화했거든요. 방해준 씨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최경언 씨를 좀 도와줬으면 한다고.”“그래?”박한빈은 별다른 반응 없이 대답했다.“걱정하지 마. 도와줄 필요 없어. 최경언 씨는 이미 자기 살길 다 마련했어.”“그걸 어떻게 아세요? 또 경언 씨한테 직접 들은 거예요?”대화를 나누던 박한빈은 이미 침실 쪽으로 향하고 있었지만 성유리의 질문에 걸음을 멈췄다.그리고 돌아서서 성유리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너처럼 순진한 사람만이 최경언 씨를 착한 사람이라고 믿는 거야.”성유리는 화내지 않고 그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물었다.“그럼 나머지 사람들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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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6화

눈은 밤이 깊은 후반쯤 내리기 시작했다.희미하게 잠든 상태에서도 성유리는 바깥에서 눈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일어나서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금세 박한빈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눌러 다시 눕게 만들었다.“밖에 눈 와요.”성유리가 조용히 말하자 박한빈은 고개를 끄덕거렸다.요즘 들어 박한빈은 확실히 살이 좀 빠졌다.눈 아래에는 뚜렷한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고 이 순간에도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였다.정말 자신의 말을 들은 게 맞긴 한 걸까? 그저 무의식적으로 대답한 것 같기도 했다.지금 성유리가 일어나기라도 하면 박한빈도 분명 깰 것이다.이런 생각이 들자 성유리는 더 이상 일어나려 하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다시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다음 날 아침, 하늘이는 정말 신이 나 있었고 계속해서 눈사람 만들겠다고 소리를 질러댔다.“할머니는요? 할머니가 눈사람 같이 만들어주기로 했는데!”하늘이가 물었다.“아직 사모님께서 안 일어나셨어요.”도우미의 말에 성유리는 잠시 멍해졌다.평소 김서영의 생활 리듬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제가 가볼게요.”성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그녀는 곧장 김서영의 방으로 향했다.계단 근처에 다다랐을 때, 마침 김서영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김서영은 성유리를 보고 조금 의아해하며 물었다.“왜 그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성유리는 계단 아래에 멈춰 서서 한동안 그녀를 바라보고 나서야 대답했다.“아니에요. 밖에 눈 와서... 하늘이가 할머니를 찾아서요.”“그래?”김서영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얼른 내려가야겠네.”성유리는 김서영을 바라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그러자 김서영은 약간 당황한 듯 물었다.“왜 그래? 갑자기.”“어머님, 어디 안 좋으신 거 아니에요?”성유리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아니야.”“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성유리의 목소리는 더욱 확신에 차 있었다.이내 김서영은 점점 말을 잃고 조용해졌다.그러더니 성유리의 손등을 살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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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7화

“그러면 왜 저나 박한빈 씨한테 말씀 안 하셨어요?”성유리가 따지듯 물었다.“마지막으로 검사받으신 게 언제예요? 의사가 뭐라고 했는데요?”김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성유리는 더 묻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하지만 그 순간, 손이 다시 붙잡혔다.“설 지나고 나서 말하려고 했어.”김서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어쨌든 이번 설은... 우리 다 같이 잘 보내고 나서 얘기하자. 응?”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미간은 더 잔뜩 찌푸려졌고 목소리는 점점 잠겨갔다.“그럼 한빈 씨한텐요? 그 사람한텐 말 안 하실 건가요?”김서영은 고개를 푹 떨구며 대답했다.“설 지나고 나서... 말할 거야.”잠시 김서영을 바라보던 성유리는 조용히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죄송해요, 어머니. 이번엔 말씀대로 못 할 것 같아요.”“성유리!”김서영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하늘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할머니! 싸우는 거예요?”아이의 맑은 목소리에 높아질 뻔했던 두 사람의 언성도 이내 가라앉았다.성유리는 그 틈을 타 몸을 돌렸고 막 박한빈을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다.요즘 너무 지쳐 있었고 오늘은 오랜만에 아침 늦게까지 자는 중이었다.그렇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성유리는 계단 입구에 서 있는 그를 보게 되었다.박한빈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크고 길쭉한 그림자 아래 굳게 다문 입술과 어두운 얼굴.하늘이는 도우미 손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가 놀고 있었다.성유리는 복도에 멈춰 섰고 복도 끝에는 김서영이 직접 설계하고 꾸며놓은 방이 있었다.지금은 그 안에서 박한빈과 김서영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렇게 둘이 조용히 앉아 있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그동안 박한빈은 워낙 바빴고 잠시 여유가 생겼을 때도 성유리나 하늘이 곁에 붙어 있던 시간이 더 많았다.김서영 역시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그녀는 아들의 시간을 굳이 바라지 않았다.하지만 막상 이렇게 마주하고 앉아보니 왠지 모를 어색함과 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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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8화

성유리는 복도에 조용히 앉아 있었고 하늘이는 도우미와 함께 눈을 맞으며 신나게 놀고 있었다.아이는 몸에 연한 노란색 패딩을 입고 있었고 같은 색의 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그리고 움직일 때마다 양 갈래로 땋은 머리가 흔들렸고 얼굴 위의 웃음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평소 같았으면 성유리는 그 모습을 보며 주저 없이 휴대폰을 꺼내 영상을 찍었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머릿속에 맴도는 건 조금 전 김서영의 말, 그리고 그때의 표정이었다.가장 걱정하던 가능성, 그것이 사실이라는 걸 성유리는 이제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사실 지난 2년 동안 김서영의 건강은 계속 좋지 않았다.그래서 성유리는 매주 주말마다 하늘이를 이곳에 보내 그녀 곁에 있게 했다.김서영은 하늘이를 정말 좋아했고 하늘이가 옆에 있을 땐 확실히 생기와 활력이 느껴졌다.의사도 말했었다. 병세는 잘 조절되고 있고 이런 상태만 유지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그런데도...성유리가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방문이 갑자기 열렸고 김서영이 먼저 나왔다.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 자리에 앉은 채로 김서영을 바라봤다.그러자 김서영이 눈을 맞추며 살짝 웃었다.“왜 그렇게 뚫어지게 봐?”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뒤쪽을 한 번 더 바라봤다.김서영은 그 시선을 알아차리곤 얼른 말했다.“한빈이는 안에 있어. 가서 네가 좀 봐줘.”“그럼 어머님은...”“난 하늘이랑 눈사람 만들기로 약속했잖니?”성유리가 아직 대답하기도 전에 하늘이가 김서영의 목소리를 듣고는 벌써 달려오며 외쳤다.“할머니! 얼른 와요!”그러면서 김서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눈사람 만들기로 했잖아요!”“그래. 지금 갈게.”김서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그 순간, 그녀는 무언가 떠오른 듯 성유리를 다시 돌아봤다.“가봐. 한빈이 곁에 잘... 있어줘.”성유리는 그녀가 말한 게 단지 이 순간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그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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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9화

박한빈은 갑자기 모든 게 흐릿해진 느낌이었다.그 순간, 성유리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방금 전까지 밖에 있었던 그녀였지만 그 손은 박한빈 몸보다 훨씬 따뜻했다.불쑥 스며든 그 온기에 놀라듯 박한빈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고 그제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성유리는 조용히 박한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그 눈동자는 마치 봄날 녹아내린 물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웠고 박한빈의 모든 불안과 억울함을 조용히 품는 것 같았다.박한빈은 침을 한 번 삼켰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그는 조용히 성유리를 꽉 안았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성유리의 가슴에 기대어 고개를 묻었다.성유리는 그저 그 곁에 조용히 서 있었다.박한빈의 머리를 감싸듯 손을 올리고는 조용히 쓰다듬었다.그 어떤 말도 없이 그저 그렇게 묵묵히 위로해 줬다.그리고 찻잔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김마저 스르륵 사라졌다....설날 밤.김서영은 별장에 있는 도우미들을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고 스스로 부엌에 남아있었다.그리고 성유리도 그녀 곁에서 이것저것 손을 거들었다.두 사람 다 요리 실력은 별로였지만 하늘이는 한껏 신이 나 있었다.살면서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다며 과장해 말하는 아이의 말에 김서영은 참 기쁘게 웃었다.그리고는 와인 한 병을 꺼냈다.성유리는 마시지 않았지만 박한빈은 그녀와 함께 잔을 들었다.뒤이어 성유리는 하늘이와 함께 거실에서 TV를 보며 놀았고 식탁에는 김서영과 박한빈,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그때, 김서영이 그를 바라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넌 앞으로 정말 행복할 거야.”박한빈은 잔을 비우며 조용히 대답했다.“네.”“난 박씨 가문 묘지엔 안 묻히고 싶어.”그러자 김서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알고 있습니다.”박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조용하고 좋은 곳으로 모실게요.”아들의 말에 김서영은 만족한다는 듯 웃었다.“사실 이미 정해 놨어.”예상치 못한 김서영의 말에 박한빈이 고개를 들었다.“그냥 바다에 뿌려줘. 난 자유로운 게 좋아.”박한빈은 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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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0화

박한빈은 고개를 들어 김서영을 바라봤다.평소 같으면 비즈니스 자리에서 하던 식으로 지금쯤은 이런 말을 건넸을지도 모른다.“사실 저도 어머니가 좋은 어머니셨다고 생각해요.”하지만 막상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왜냐하면 아무리 지금 두 사람의 관계가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해도 그가 잃어버린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박한빈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자신이 어떤 숨 막히는 환경에서 자라났는지를.아무리 좋은 성적을 내도 아무리 큰 성과를 내도 김서영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왜냐하면 그녀에게 그건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그 시절, 모든 사람은 박한빈에게 이렇게 암시했다. “이 정도 자원이면 누구나 이 정도는 하지. 어쩌면 너보다 더 잘할 수도 있고.”그래서 박한빈은 자랑스러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마치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처럼 그가 가야 할 모든 길은 미리 설정되어 있었고 단 한 발짝도 벗어나선 안 됐다.심지어 사춘기 반항조차 박한빈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그런 이유로 지금 이 순간까지도 그는 김서영이 좋은 어머니였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감사합니다.”결국 박한빈이 꺼낸 말은 이것뿐이었다.김서영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내가 너랑 성유리 결혼하게 한 거... 그걸 말하는 거지?”박한빈은 부정하지 않았다.만약 성유리가 아니었다면 그의 인생은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저 흘러가고 있었을 것이다.계획된 대로 감정 없이, 오직 효율과 실적만 따라가는 삶.지금의 에릭처럼 하루하루 쾌락에 취해 자극을 좇으며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험 속에서만 겨우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런 삶.하지만 그런 자극은 금방 사라진다.박한빈은 잘 안다.자신이 운이 좋은 편이라는 것을.성유리를 만났고 그녀와 부부가 되었다.그 길고도 멀고 험한 여정을 지나 비로소 한 줄기 빛을 찾았고 그 빛은 바로 그들만의 집이었다.“근데 솔직히 말해봐.”김서영이 문득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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