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라진 10년과 흔들리는 인연: Chapter 1261 - Chapter 1270

1277 Chapters

제1261화

잠시 망설이던 성유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약혼식은 원하지 않아요.”“그래. 그럼 너희 뜻대로 해.”김서영이 그렇게 말하며 성유리 앞에 청첩장 한 장을 내려놓았다.“유리 넌 학교 다니느라 바쁘겠지만 이 전시회는 주말에 열려. 혹시 시간 되면 나랑 같이 가보자.”성유리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무슨 전시회요?”그동안 김서영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있던 옥지나가 그제야 참지 못하고 물었다.“안 작가님 전시회야.”김서영은 그렇게 답하더니 곧 덧붙였다.“미안하지만 초대장은 두 장뿐이야.”이 한마디는 옥지나를 완전히 배제하겠다는 뜻이었다.옥지나도 그걸 모를 리 없었지만 이내 웃어 보였다.“괜찮아요. 저희 이모도 초대받았다고 하더라고요.”그러고는 성유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럼 저희 같이 가요. 네?”김서영을 차마 직접 초대하지 못하고 그녀 대신 성유리라는 만만한 상대를 골라 붙잡으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성유리는 점점 머리가 아팠다.그녀가 난감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박한빈이 불쑥 입을 열었다.“전시회는 무슨 요일입니까?”“다음 주 토요일이야.”“아, 성유리 씨는 시간 안 될 것 같습니다.”박한빈이 계속 말했다.“저도 토요일에 교외에 좀 다녀와야 하는데 유리 씨가 저랑 같이 가기로 했거든요.”그 말에 성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다고!’박한빈은 성유리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식탁보 아래에서 손을 쭉 뻗어 그녀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세게 꼬집은 것도 아닌데 너무 뜻밖이라 성유리는 온몸이 순간적으로 굳어 버렸다. 그녀는 거의 온 힘을 다해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꾹 참고 간신히 웃음을 지었다.“네. 저희가 약속했었어요.”“그럼 어쩔 수 없네.”김서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박한빈을 힐끗 바라본 뒤 말했다.“괜찮아. 네 일도 중요하니까.”그 모든 상황 속에서 여전히 아무도 옥지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옥지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장면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눈가가 빨개졌다.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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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2화

“아까 저희 어머니가 뭐라고 했습니까?”성유리가 막 차에 오르자마자, 박한빈이 곧장 물었다.성유리는 멍하니 고민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아무 말도 안 했어요.”그러자 박한빈의 눈이 가늘어졌고 성유리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아, 맞다. 이거 돌려드릴게요.”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아까 박한빈이 억지로 쥐여 준 비단 상자를 다시 내밀었다.“저는 이거 필요 없어요.”“왜요?”“저는 이런 거 받을 수 없어요. 너무 값비싼 거잖아요.”“저희 어머니도 말씀했잖아요? 비싼 거 아니라고.”박한빈이 그렇게 말하며 살짝 웃음이 깃든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혹시 아직도 파혼할 생각이 있는 거 아닙니까?”자신의 마음을 콕 집어내는 말에 성유리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하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이런 건 좀 부담스러워서 그래요.”“뭐가 부담스러운데요?”박한빈은 점점 몰아붙였다.그래서 성유리는 애써 담담한 척하며 입을 열었다.“저는 아직 졸업하려면 1년이나 남았어요. 1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그렇죠?”박한빈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아무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그의 눈빛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졌다.성유리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손은 여전히 반쯤 내민 채로 멈춰 있었고 시선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박한빈은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마주치더니 갑자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그 비단 상자를 차 뒷좌석으로 휙 던져 버렸다.그 후, 그는 더 이상 성유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바로 시동을 걸었다.박한빈은 운전대를 꽉 움켜쥐었고 차창 밖 풍경이 순식간에 뒤로 쓸려나가기 시작했다.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고 안전벨트를 꼭 움켜쥐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꽉 다문 채 앞만 바라보았다.그러다 얼마쯤 지나자, 박한빈이 서서히 차 속도를 늦췄다.곧 성유리는 손가락에 들어간 힘을 천천히 풀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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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3화

그 뒤로 이어지는 말들을 성유리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녹음 영상 아래 달린 다른 사람들의 댓글이 대신 그녀를 위해 싸워주고 있었다.[가난한데 자격지심도 있는 뭣 같은 놈.][정말 웃겨 죽겠네. 높은 나무에 기어오르고 싶으면서 체면은 못 버리고... 결국 남 잘난 걸 원망하네?][안 맞으면 헤어지면 되지 왜 계속 만나고는 뒤에서 저러고 다녀 ? 진짜 웃김.]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다.성유리는 그중 한 아이디를 몇 초 동안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문득 댓글을 단 사람이 현은영이라는 걸 알아챘다.현은영과 다른 이들의 날 선 비난에도 백지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렇지만 곧 그는 자신과 추은정이 나눈 다소 묘한 뉘앙스의 채팅 내용을 또 공개했다.그제야 성유리는 깨달았다.지난 2년 동안, 두 사람은 매일 밤 채팅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처음엔 대화 주제가 언제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딴 데로 새곤 했다.심지어 백지환은 추은정에게 성유리가 너무 보수적이라며 불평하기도 했다.[걔는 너무 보수적이야. 우리 사귄 지도 이렇게 오래됐는데 아직 모텔 한 번도 안 가봤다니까.]이런 부류의 기록은 셀 수 없이 많았다.둘은 학교 커뮤니티에서 설전을 벌이며 연애 중인 커플이라기보다는 전쟁터에서 서로를 꿰뚫어 죽이려 드는 적 같았다.상대를 완전히 몰락시키고 싶은 듯, 서로에게 독설을 퍼붓고 있었다.주말 저녁이 되어서야 성유리가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추은정은 이미 이곳에서 방을 빼겠다고 신청해 둔 상태였다.현은영은 침대에 누운 채로 누군가와 채팅하느라 바빴고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빠르고 경쾌했다.그녀는 성유리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성유리는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현은영에게 다가가 침대 난간을 톡톡 두드렸다.그제야 현은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 왔어?”현은영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난 너도 방 뺄 줄 알았는데?”“그럴 리가.”성유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손에 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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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4화

성유리는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지금 기숙사에는 그녀와 현은영, 딱 둘만 남아 있었다.사람이 적어서인지 주변은 기묘하리만큼 고요했고 그 탓에 성유리는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현은영이 방금 전 말해준 백지환 이야기만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사실 백지환이 저번에 사과 영상을 올렸을 때부터, 성유리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었다.그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영상을 올릴 리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박한빈과의 만남은 명백히 좋지 않은 결과로 끝이 났다.그래서 그녀는 끝내 물어볼 기회를 찾지 못했다.그렇지만 이제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학교 안쪽 사정에 손을 뻗고 심지어 백지환이 1년 전 교수 일을 도왔던 프로젝트까지 들춰낸 사람.박한빈 말고는 달리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박한빈의 목적도 뻔했다.그는 분명 백지환을 완전히 무너뜨리려는 거였다.만약 백지환이 진짜 학교에서 퇴학당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성유리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그런데 이런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비단 성유리만은 아니었다.다음 날 아침.성유리가 막 기숙사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그곳에 서 있는 백지환이 눈에 들어왔다.지난 2년 동안, 그가 저 자리에서 성유리를 기다린 적은 수없이 많았다.그때의 백지환은 늘 하얀 셔츠를 입고 햇빛과 산들바람에 부드럽고 맑은 인상이었는데 지금 성유리가 보는 백지환에게서는 그때의 모습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오히려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그가 추은정과 나눈 대화들뿐.그리고 몸 깊숙이 치미는 혐오감이었다.“성유리!”백지환은 성유리의 표정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그녀를 보자마자 급히 달려왔다.그는 분명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했다.두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고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으며 온몸에서 피폐함이 묻어났다.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발걸음조차 멈추지 않았다.그러자 백지환은 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왜 이래? 이거 당장 놔!”성유리는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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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5화

그리고 몇몇은 아예 침대에서 자다 말고 구경하러 나온 학생들이었다.기숙사 전체가 떠들썩했고 복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그런데도 백지환은 마치 부끄러움이라는 감정 따윈 사라져 버린 사람처럼 여전히 성유리 앞에 무릎 꿇은 채 계속해서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성유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네가 말하는 그 일들, 나는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까 도와줄 수도 없어.”“아니, 넌 도울 수 있어! 넌 분명 나 도와줄 수 있잖아! 지금 나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백지환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제발 부탁이야, 성유리. 우리 그래도 1년 넘게 사귄 사이잖아. 나도 내가 부족하고 잘못한 거 많은 거 알아. 하지만 너 착하잖아. 설마 정말 내가 이렇게 망가지는 꼴을 보고 싶진 않지? 내가 죽으면 어쩔 거야?”성유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내가 죽으면 우리 부모님은 또 어떻게 하라고.”백지환은 울먹이며 계속 말했다.“그러니까 유리야, 제발...”성유리는 잠깐 고민하듯 고개를 푹 숙였다가 이내 대답했다.“미안. 난 널 도와줄 수 없어.”그 말이 떨어지자 백지환의 얼굴에서 모든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리고 방금 전까지 흘러내리던 눈물마저 멎어 버렸다.“네가 진짜 그런 일들을 저질렀다면 넌 그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해.”성유리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러나 백지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몸 전체를 심하게 떨고 있었다.그게 두려움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떨림이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백지환을 쳐다보지 않았고 그저 그를 지나쳐 손에 든 캔버스 가방의 끈을 꼭 쥐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백지환은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다가 마침내 정신을 차린 듯 외쳤다.“아니, 성유리! 내 말 좀 끝까지 들어봐. 성유리!”하지만 성유리는 더는 백지환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러자 백지환도 발걸음을 결국 멈췄다.그러더니 이를 악물고 성유리를 향해 소리쳤다.“넌 왜 그렇게 잘난 척이야?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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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6화

[성유리, 이번 주말에 같이 놀러 가자.]단체 메시지방에 누군가가 성유리를 태그하며 메시지를 보냈다.성유리가 힐끗 확인해 보니 누군가가 모임을 잡았다며 얘기하고 있었다.이번에 진씨 가문에서 새로 만든 크루즈가 첫 운항을 한다며 사람들을 잔뜩 초대해 바다로 나가자는 거였다.성유리는 사실 꽤 오랫동안 그들과 어울려 놀지 않았었다.그리고 주말에도 학교에 남아 있어 봤자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그냥 나가보기로 했다.처음엔 정말로 그 무리가 자신과 놀고 싶어 진심으로 초대한 줄 알았다.그런데 막상 배에 올라서야 알았다.전부 구경거리를 보려던 속셈이었단 걸.“성유리, 저기 있는 사람 네 약혼자 아니야? 너 왜 같이 안 다녀? 옆에 있는 저 여자는 또 누구고?”어디선가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성유리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그래서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옆쪽 식당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앞서 계단을 올라가던 두 사람은 우아하게 나선형 계단 위로 사라졌다.검은 옷과 하얀 옷. 두 사람의 실루엣은 나란히 서 있으니 꽤 잘 어울렸다.옥지나의 얼굴에는 한여름 꽃처럼 화사하고 눈부신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그러자 성유리 옆에 있던 사람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난 박 대표님도 이번에 올 거라고 해서 당연히 너도 같이 올 줄 알았거든? 근데 둘이 따로따로 오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아?”성유리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원유진, 너 요즘 한가해?”날 선 그녀의 목소리에 원유진이 움찔했다.“그게 무슨 소리야?”“왜 남 일에만 그렇게 관심이 많아? 넌 할 일 없어?”성유리의 말투에는 조금의 부드러움도 없었다.사실 성유리와 원유진은 애초에 궁합이 안 맞았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원유진은 언제나 성유리에게 이유 모를 적대감을 드러냈다.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잘 맞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대체로 신경 쓰지 않고 넘겼다.그러나 가끔 이렇게 몇 마디는 받아치곤 했다.그리고 원유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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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7화

옥지나의 말투에 담긴 친근함에 성유리의 손가락이 잠깐 멈췄다.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좀 달라요.”성유리가 대답했다.“전 애니메이션 제작을 전공했거든요.”“아, 좀 아쉽네요. 이번에 전시회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꽤 많았거든요. 유리 씨가 있었으면 같이 얘기 나눌 수 있었을 텐데...”“그래요?”성유리는 그냥 가볍게 한마디만 흘렸다.옥지나는 사실, 성유리가 누구랑 같이 갔었냐고 물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끝내 묻지 않았다.그 차가운 반응에 옥지나는 마치 주먹을 허공에 휘두른 듯 허탈함이 밀려왔다.마침 그때 누군가가 옥지나를 불렀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옥지나를 두고 ‘뻔뻔하다’고 말하던 그 무리였다.옥지나는 당연히 그 뒷말을 듣지 못했다.그리고 성유리와도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곧장 대답을 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다.성유리는 원래 차려진 디저트를 더 먹으려 했다.그렇지만 그때쯤 배가 이미 항구를 벗어나기 시작했고 배 밑바닥이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방금 전까지 이어진 말싸움이며 온갖 일들 탓에 성유리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결국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한편, 원유진 일행은 수영장 쪽에 모여 있었다.배가 어느 정도 나아간 뒤, 성유리 시야에는 끝없이 펼쳐진 인피니티 풀과 그 아래 펼쳐진 바다가 하나로 이어져 보였다.그 광경이 괜히 가슴 한구석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그렇게 한참 자리에 서 있던 성유리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고 곧장 돌아서 근처에 있던 한 승무원을 붙잡았다.“저기요. 혹시 선장님 어디 계시는지 아세요?”...그 시각, 박한빈은 꼭대기 층 스포츠 데크에 있었다.뒤쪽에서는 원래 당구를 치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금세 재미없다며 때려치우더니 아예 도박용 테이블까지 들여오고 있었다.지금은 이미 패가 다 깔린 상태였다.하지만 박한빈은 그런 것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해외에서의 광기 어린 문란한 파티도 그에게는 아무런 흥미가 없었는데 하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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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8화

소식을 들은 즉시 선장은 바로 사람을 시켜 준비를 시작했다.성유리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승무원을 따라 선실 쪽으로 향했다.하지만 아직 계단을 다 오르기 전, 등 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거기 서세요.”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였다. 성유리에게 그리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단번에 누군지 알아챘다.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무 일도 못 들은 척 계속 걸음을 옮겼다.그러나 박한빈은 순식간에 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의 팔뚝을 덥석 붙잡았다.“뭐 하시는 거예요?”성유리의 미간이 곧장 찌푸려지자 박한빈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어디가 아픈 겁니까?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박한빈 씨랑 뭔 상관이에요? 손 놔요!”성유리는 말을 끝내자마자 그의 손가락을 억지로 떼어내려 했다.그런데 바로 그 순간, 박한빈이 문득 이런 말을 내뱉었다.“비밀번호, 제가 이미 새로 바꿔놨습니다.”그 한마디에 성유리는 그대로 굳어 버렸고 곧이어 입술을 꾹 깨물더니 대답했다.“바... 바꿔놨으면 뭐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 그래요?”박한빈은 아무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손 놔요. 전 돌아갈 거예요.”성유리가 다시 말했다.그리고 박한빈은 잠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마침내 성유리의 팔을 풀어 주었다.하지만 성유리가 막 모터보트에 올라서자마자 보트를 기다리고 있던 운전기사가 다시 요트 쪽으로 올라가 버렸다.이내 성유리는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박한빈이 이미 보트로 뛰어내렸다.“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성유리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소리쳤다.“돌아가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직접 데려다주죠.”박한빈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미 보트 시동을 걸고 있었다.깜짝 놀란 성유리가 반대하려던 찰나, 보트가 그대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거센 스크루 소음 속에서 성유리는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보트의 속도는 무서울 만큼 빨랐고 거의 광기에 가까웠다.이리저리 튀어 오르는 바닷물이 성유리의 원피스며 머리카락을 모조리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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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9화

“이... 이거 놓으라고요!”성유리는 아직 방금 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목소리까지 떨리고 있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고 다른 손은 성유리의 뒤통수를 잡아당겨 자기 가슴팍 쪽으로 눌렀다.옷 너머로 전해져 오는 그녀의 체온이 자신과 닿는 순간, 박한빈은 주위의 모든 것이 갑자기 생생하고 흥미롭게 느껴졌다.방금 전 요트 위에서의 그 따분한 오락거리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재미있었고 조금 전 보트를 최고 속도로 몰아붙였을 때조차 지금만큼 흥분되진 않았다.성유리도 곧 박한빈의 몸에서 변화를 느꼈다.그 때문에 그녀는 더욱 거칠게 몸부림쳤다.“놓으라고요! 박한빈 씨,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품 안에서 요동치는 성유리의 몸짓에 박한빈은 살짝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럼에도 억지로 하지는 않고 혀를 차며 팔을 조금 풀어 주었다.성유리는 이번엔 뒤로 물러서지 않았지만 최대한 박한빈과 거리를 두고 서서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듯 그를 노려보았다.이까지 꽉 악문 채로 말이다.박한빈은 그런 그녀를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그리고 옆에 놓여 있던 지도를 흘끗 본 뒤, 화면을 꺼버렸다.성유리는 그의 동작을 보고 물었다.“방금 뭘 꺼버린 거예요?”하지만 박한빈은 대답이 없었고 짜증이 난 성유리는 다시 물었다.“지금 우리 어디 있는 건데요? 저 돌아가고 싶어요!”“모릅니다.”“말도 안 돼요! 모를 리가 없잖아요. 방금 꺼버린 거... 내비게이션 아니에요?”그렇게 말하며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다가갔다.그리고 화면을 다시 켜보려 했지만 그녀는 보트를 다뤄본 적이 없어 버튼이 무슨 기능인지 전혀 몰랐다.그러자 박한빈이 느긋하게 말했다.“보트에 기름도 별로 안 남았습니다. 뭐 하나라도 잘못 눌렀다간, 보트에 기름이 다 떨어져서 저희는 꼼짝없이 여기 갇혀서 죽을 수도 있거든요.”박한빈의 목소리는 너무나 침착했기에 성유리는 순간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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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0화

“근데 분명 옥지나 씨랑 같이 걸었잖아요. 그리고 같이 밥도 먹었다고 들었어요.”성유리의 말에 박한빈은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그는 무언가 말하려다 말았지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성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질투하는 거예요?”“당연히 아니죠.”성유리는 즉시 부인했다.하지만 너무 빠른 부인에 박한빈의 표정은 다시 굳어졌다.성유리는 어쩔 수 없이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다시 말했다.“그냥 만약 그게 아니라면 굳이 옥지나 씨랑 그렇게 가까이 걸을 필요는 없잖아요. 괜한 오해도 사고...”“누가 오해한 겁니까?”“많은 사람이요.”“그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인데요?”박한빈이 되물었다.그 말에 성유리는 할 말을 잃고 조용히 침묵했다.그러자 박한빈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러니까 성유리 씨는 별로 신경 안 쓴다는 거죠?”“네?”“제가 누구랑 밥 먹고 누구랑 같이 다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겁니까?”박한빈이 말하면서 보트 속도도 조금 올렸다.그리고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다.“그게... 아니고요.”“아니면 뭔데요?”“저... 그러니까 옥지나 씨랑 좀 거리를 두면 안 될까요?”그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성유리가 말을 끝내자 박한빈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표정도 조금 풀렸다.“성유리 씨는 무슨 자격으로 저한테 그런 걸 요구하는 거죠?”성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이를 꽉 깨물었다.그리고 박한빈도 당장 더 캐묻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그가 보트 조종간을 잡고 있는 손을 볼 수 있었다.그 모습이 마치 말 없는 협박 같았다.그래서 성유리는 고민하다 이런 말을 내뱉었다.“약혼자.”“뭐라고요? 잘 안 들립니다.”성유리는 이를 더 꽉 깨물었지만 박한빈과 눈을 마주치며 다시 말했다.“박한빈 씨... 약혼자 자격이요.”그 말을 들은 박한빈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입가가 살짝 올라가고 눈빛은 성유리를 뚫어져라 응시했다.방금 전 요트 갑판 위에서 그는 오늘 내린 결정을 후회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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