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차가운 대표님과의 치명적인 밤들: Chapter 571 - Chapter 580

635 Chapters

제571화

윤하경이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았던 건, 주미나와 구지호와 함께였을 때였다.오늘은 묘비가 가득한 산자락에 덩그러니 서 있으려니 어쩐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산바람이 불자 검은 원피스 자락이 나풀거렸고 윤하경은 어머니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과 음식들을 차분히 내려놓았다.그리고 천천히 묘비에 손을 올렸다. 묘비 위 사진 속, 웃고 있는 얼굴은 자신과 80퍼센트쯤 닮아 있었다.“엄마, 저 드디어 복수했어요. 보셨죠? 아니 엄마도 참. 사람 보는 눈이 왜 그렇게 없으셨대요. 아무리 고르셔도, 어떻게 그런 사람을 골라요.”윤하경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묘비를 쓰다듬었다.사진 속 신수아는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 미소는 마치 지금도 윤하경을 응원하고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한참을 묘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그런데 가방 안에 두었던 휴대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무음 설정이 아니었기에, 조용한 들판에 울린 진동 소리에 그녀는 놀라 몸을 움찔했고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 뭐라고요?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갈게요.”전화를 끊은 윤하경은 곧바로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채 서둘러 산에서 내려왔다.차를 세워둔 곳까지 달려가 차에 올라탄 그녀는 최대한 빠르게 경찰서를 향해 차를 몰았고 경찰서에 도착하자, 윤하경을 알아본 담당 형사가 곧장 다가왔다.“윤하경 씨, 오셨군요.”“그 사람, 지금 어디 있어요?” 윤하경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고 형사는 바깥쪽을 힐끔 보며 말했다.“방금 나갔습니다. 대략 10분쯤 됐네요.”그러자 윤하경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어떻게 풀려났죠?”명백한 범죄에 증거도 확실했는데 어떻게 풀려날 수 있는 건지.형사는 그녀의 반응에 당황하며 설명을 덧붙였다.“오늘 변호사가 보석 신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임수연 씨가 이전 진술을 번복했습니다. 고인에 대한 범행은 전적으로 자신 혼자 저지른 일이며 윤 회장은 관련이 없다고 진술했어요. 그래서...”윤하경의 얼굴은 서서히 창백해졌고 어딘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직감이 이 순간 명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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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2화

윤하경은 지금 마음이 복잡하고 힘든 상황이라 배경빈의 장난 섞인 태도에 대응할 여유가 없었다.“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에요. 내려주세요.”하지만 배경빈은 그녀가 기분이 안 좋다는 말에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기분이 안 좋으세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윤하경은 말을 아꼈다.“우리 사이가 그런 얘기를 나눌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평소보다도 말투가 더 날카로웠지만 배경빈은 전혀 기분이 상한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손을 뻗어 윤하경의 뺨을 가볍게 집었다.“이렇게 예쁜 얼굴은 웃을 때가 제일 예쁜데요. 괜히 우울해하지 마세요.”윤하경은 한숨이 나왔다.“정말 안 내릴 건가요?”“아, 당연히...” 그는 몸을 비키는 척하더니 고개를 다시 돌려 말했다.“내릴 생각 없어요. 하경 씨가 기분 안 좋다잖아요. 제가 남자인데 혼자 운전하게 둘 순 없죠.”윤하경은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이 사람, 처음 만났을 땐 이렇게 수다스러운 타입은 아니었는데...’결국 더 말 섞기도 싫어 그냥 시동을 걸고 도로로 나섰지만 목적지가 없었기에 그저 방향 없이 도로 위를 달리기만 했다.잠시 후, 배경빈이 말을 꺼냈다.“기분 안 좋으신 김에... 저랑 어디 좀 가보실래요?”“어디요?”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물었다가, 바로 후회했다.그러나 이미 늦었다. 배경빈은 차를 도로 옆에 세우고는 조수석에서 내려 운전석으로 자리를 바꿨고 도시 외곽 쪽으로 차를 몰았다.윤하경은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수철이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고 어지러운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더 이상 말할 힘도 없어 그녀는 팔짱을 끼고 창밖만 멍하니 바라봤다.그때 핸드폰이 진동했고 확인해 보니 유 집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회장님께서 댁으로 돌아오셨어요.]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꾹 다물더니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얼마나 지났을까, 차는 어느 레이싱 서킷 앞에서 멈췄다.“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윤하경이 고개를 들어 트랙을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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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3화

윤하경은 제대로 거절할 틈도 없이 배경빈에게 이끌려 빨간색 레이싱카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말도 없이 그녀를 조수석에 태운 뒤, 꼼꼼하게 안전벨트를 매줬고 그제야 운전석으로 돌아갔다.“경빈 씨,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니에요?”갑자기 두려운 감정이 올라온 윤하경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트랙 근처에 있던 남자들이 외쳤다.“형, 화이팅!”배경빈은 헬멧을 고쳐 쓰고는 윤하경에게 환하게 웃어 보였다.“아드레날린이 확 치솟으면 안 좋은 감정도 싹 사라져요. 저는 그냥 하경 씨가 조금이라도 기분 좋아졌으면 해서요.”“....”윤하경은 속으로 투덜거렸다.‘목숨 걸고 기분 전환할 마음은 없는데요’ “저 진짜...”문을 열려고 하자, 배경빈은 그녀를 다시 자리로 끌어당기며 태연하게 웃었다.“괜찮아요. 저 운전 꽤 잘해요.”그가 시동을 걸자, 차는 이미 출발선 쪽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속도는 거칠고 강렬했고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안전벨트를 한 번 더 꽉 움켜쥐었다.출발선에는 이미 여러 대의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배경빈의 차가 자리를 잡자, 비키니를 입은 여성 진행자가 깃발을 들었다.깃발이 내려가자마자, 차는 화살처럼 튀어 나갔고 윤하경은 그 순간, 심장이 목까지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소리 지르셔도 돼요.”배경빈은 앞을 주시하며 핸들을 부드럽게 틀었고 차는 속도감 있게 커브를 돌며 또 한 대를 추월했다.윤하경은 이런 스릴 넘치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몸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지만 머릿속은 이상할 정도로 맑아졌다.말대로, 배경빈의 운전 실력은 꽤 수준급이었다. 곡선 코스를 부드럽게 넘어가며 앞서 있던 차들을 빠르게 따라잡았다.그는 건조한 입술을 한 번 핥고는 흥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재미있으세요?”바로 그 순간, 또 한 번 급커브.윤하경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경빈 씨가 직접 조수석에 타보세요. 그럼 아실 거예요.”배경빈은 웃음을 터뜨렸다.“그럼 이번엔 더 세게 가볼까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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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4화

“콜록, 콜록...”그녀의 기침 소리에 옆에 있던 의사가 곧바로 다가왔다.“하경 씨,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신가요?”윤하경은 머리가 묵직하게 아픈 느낌에 고개를 살짝 흔들며 말했다.“괜찮은 것 같아요. 저, 많이 다친 건 아니죠?”윤하경은 무의식적으로 상체를 일으키며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려 했고 의사는 그녀가 말도 또렷하게 하는 걸 보곤 안도한 표정으로 말했다.“네, 다행히 큰 부상은 없고 손목에 가벼운 골절이 있어요. 이미 고정 처리해 놓았습니다. 혹시 다른 불편한 곳이 있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윤하경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몸 여기저기를 점검해 보니 정말로 별다른 이상은 없었고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아직 죽을 수 없지. 윤수철이 벌을 받는 걸 내 눈으로 봐야 하니까.’그 순간,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고 병실을 나서려는 의사를 붙잡았다.“잠깐만요, 배경빈 씨는요? 저랑 같이 병원에 실려 온 사람이에요.”의사는 입꼬리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아, 옆 병실에 계십니다. 윤하경 씨보단 상태가 좀 심각했지만 깨어난 건 훨씬 먼저예요.”“감사합니다.”의사가 병실을 나가자마자, 윤하경도 바로 침대를 벗어나 옆 병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 위에 누운 배경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손과 다리엔 붕대가 칭칭 감겨 있고 한쪽 다리는 높이 들어 올려 고정되어 있었다.꽤 우스꽝스러운 자세였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또렷했다.윤하경을 보자, 배경빈은 어색한 듯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그... 괜찮아요?”윤하경은 콧잔등을 찡긋하며 그의 병상으로 다가갔다.“내 걱정은 됐고요, 본인부터 신경 쓰시죠.”배경빈은 머쓱하게 웃었다. 레이싱을 하자고 제안한 건 자기였고 결과는 이렇게 됐다. 무엇보다 윤하경 앞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게 더 창피했다.“오해하지 마세요. 저 진짜 운전 잘하는 사람이에요. 그 차가 정비가 안 돼 있었던 게 문제였지, 제 실력은 아니에요. 나중에 다시 보여드릴게요.”“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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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5화

윤하경의 얼굴을 본 순간, 잠시 멈칫하더니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고 배경빈을 향해 외쳤다.“오빠, 이 아줌마 때문에 목숨까지 걸고 달린 거야?”“...”‘살면서 언니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아줌마?’소녀가 너무 어려 보이기도 했고 굳이 말 섞기 싫었던 윤하경은 조용히 말했다.“친구 왔네요. 저는 이만 갈게요.”하지만 배경빈은 대답 없이 문가에 서 있는 소녀를 불쾌한 눈빛으로 바라봤다.“너랑 뭔 상관인데?”그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 “다신 오지 말라 했잖아.”보아하니 소녀의 짝사랑은 일방적인 듯했다. 윤하경은 이런 상황이 부담스러웠고 특히 자신에게 반감을 보인 듯한 상대라면 더더욱 엮이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서둘러 병실을 나가려는 찰나, 소녀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어딜 가요? 경빈 오빠는 제 사람이에요. 저랑 경쟁하지 마세요. 그리고 언니는 나이도 많잖아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같이 어울릴 수가 있죠?”“...”또 나이 이야기가 나왔다. 윤하경은 참을성 많기로 유명했지만 이번엔 조금 짜증이 났다.윤하경은 천천히 돌아서 그녀를 쏘아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학생이 수업 안 듣고 이 시간에 연애질하러 다니면 집에서 알면 혼나지 않겠어?”그 말에 소녀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그게 무슨 상관이에요?”“그럼 내 나이는 왜 문제 삼아? 네 엄마가 어른한테 예의 지키는 법은 안 가르쳤어?”윤하경의 싸늘한 시선에 소녀는 움찔하며 결국 손을 놓았다.“정말 귀찮게 구네. 강소연, 다음부터 오지 마.”‘강소연?’윤하경은 이름이 어딘가 귀에 익다고 느껴져 무심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강소연은 배경빈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어제 나 때문에 싸울 땐 안 귀찮았잖아. 그땐 왜 날 싫어하지 않았는데?”“그건 내가 눈이 잠깐 멀어서 그랬지.” 배경빈은 차갑게 말했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괴롭힘당하면 못 본 척 못 하거든. 그러니까 돌아가. 학교 수업은 안 들어?”“오빠!”강소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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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6화

윤하경은 강현우의 말투에서 어딘가 낯선 기운을 느껴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움츠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저는... 음... 설명하려면 좀 길어요.”“그래?”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윤하경을 바라봤다. 그때, 병실을 나가려던 강소연이 발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한 강소연은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두 분, 설마...”그 말끝이 채 닿기도 전에, 강현우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아직도 안 나가고 뭐 해?”“아, 나갈게! 지금 바로!”얼굴이 확 하얘진 강소연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더니 윤하경에게 다가와 억지웃음을 지으며 손을 살짝 잡았다.“언니 아까는 제가 좀 실수했어요. 태도도 많이 안 좋았고요. 나중에 제가 커피 한잔 살게요. 정말 죄송했어요.”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강소연은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갔다. 병실은 그리 넓지 않았고 사람이 많다 보니 더 답답하게 느껴졌다.배지훈이 윤하경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오늘 있었던 일은 다 들었습니다. 경빈이가 좀 무모했죠. 혹시 다친 데는 없으세요?”그래도 그는 강현우처럼 위압적인 느낌은 없었다.“괜찮아요. 정말이에요.”“그렇다면 다행이네요.”배지훈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상에 누운 배경빈을 향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애정과 체념이 뒤섞인 표정으로 쳐다봤다.그 순간, 강현우가 윤하경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말도 없이 그녀를 끌고 옆 병실로 향했다.문이 탁하고 닫히자, 그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강현우는 윤하경의 검은 원피스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오늘 너, 거의 너 자신 장례 치를 뻔한 거 알아? 옷도 아주 그럴싸하게 잘 입고 갔더라.”윤하경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입술을 핥았다.“엄마 묘지에 다녀왔어요.”강현우는 대답 대신 코웃음만 흘렸다. 그 차가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꿰뚫듯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었다.그 시선에 괜히 긴장된 윤하경은 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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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7화

병원에는 간병인도 있었고 혼자서도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기에 사실 윤하경은 용천수가 챙겨주는 식사가 조금 부담스러웠다.하지만 용천수는 분명히 말했다.“강현우 대표님 지시입니다.”그 한마디에 윤하경은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그녀는 입원 기간 내내 용천수에게 강현우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애인’이라면 알아야 할 것과 묻지 말아야 할 것을 스스로 구분할 줄 알아야 하니까.퇴원 당일, 윤하경은 병실을 나서기 전에 옆방에 잠시 들렀다. 그곳엔 배경빈이 여전히 병상에 누운 채 지루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윤하경이 들어서자마자 그의 두 눈이 환하게 빛났다.“화나서 다시는 안 올 줄 알았는데?”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웃으며 말했다.“강소연 그 애는 그냥 좀 정신없고 집착 심한 애예요. 저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괜히 오해하지 마세요.”윤하경은 피식 웃었다.“그런 거 굳이 저한테 해명할 필요 없어요.”배경빈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는 알 것 같았지만 윤하경은 연하의 귀여운 남자에겐 관심이 없었다. 그 말에 배경빈은 살짝 이를 깨물더니 툭 하며 고개를 돌렸다.“그럼, 뭐 하러 온 건데요?”“그럼 갈게요.”윤하경은 가볍게 일어나 그대로 돌아서려 했지만 그 순간, 배경빈이 급히 그녀를 불렀다.“잠깐만요!”진짜로 문 쪽으로 걸어가는 걸 본 그는 다급하게 소리쳤고 윤하경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며 물었다.“왜요? 할 말 있어요?”잠시 머뭇거리던 배경빈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진짜 하나도 안 궁금해요?”“뭘요?”배경빈은 살짝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병상에 주저앉으며 말했다.“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요?”윤하경은 멈칫했다. 사실 그 얘기는 예전에 한 번 들은 적이 있었지만 그냥 넘겼었다.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여유가 있었고 솔직히 말해 약간 궁금하기도 했다.그녀는 다시 침대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말해봐요.”배경빈의 얼굴이 순간 빨개지더니 괜히 도도한 척 고개를 돌렸다.“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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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8화

“검사 결과요?”윤하경은 눈을 깜빡였다.“다 끝난 거 아니었어요?”간호사는 입술을 다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직접 오셔야 할 것 같다고 하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꽤 중요한 내용이라네요.”배경빈이 그 말을 듣자 금세 얼굴이 굳어졌다.“설마, 무슨 병이라도 있는 거예요?”간호사는 고개를 저었다.“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윤하경은 별일 아니길 바라며 간호사를 따라 진료실로 향했고 진료실에 도착하니 의사가 진지한 얼굴로 검사 결과지를 들고 있었다. 윤하경이 들어서자 그는 손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윤하경 씨, 앉으세요.”그 분위기에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윤하경은 평소처럼 태연한 척 웃으며 말했다.“설마... 저, 무슨 시한부 같은 거 걸린 건 아니죠? 말씀하셔도 돼요. 저, 멘털 꽤 강하거든요.”그 말에 의사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고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건넸다.“걱정하지 마세요. 시한부는커녕, 오히려 좋은 소식이에요.”“좋은... 소식이요?”윤하경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 종이를 받아서 들었고 내용을 확인한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는 넋이 나간 듯 검사지를 들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이거, 제 거 맞나요?”“네, 정확히 윤하경 씨 거 맞습니다.”...진료실을 나온 윤하경은 마치 혼이 빠진 사람처럼 걸었고 딴생각에 빠진 채 병원 복도를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아... 좀 보고 다니면...?”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든 윤하경은 그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녀 앞에 서 있던 건 바로 강현우였다.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와 마주치자, 윤하경은 반사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사지 뒤로 숨겼다. 그러자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뭘 그렇게 숨겨?”“아... 그냥, 검사 결과예요. 별거 아니에요.”목소리가 떨리는 걸 자신도 느낀 윤하경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그나저나... 신인아 씨도 이 병원에 입원해 있나요?”신인아라는 이름이 나오자, 강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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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9화

윤하경은 흠칫 정신을 차리며 강현우를 향해 억지로 웃어 보였다.“어? 아니에요,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그래?”강현우는 얕은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근데 아무리 봐도 무슨 생각 중인 얼굴인데.”윤하경은 잠시 눈빛이 흔들리다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정말 아니에요.”그녀는 괜히 목을 가다듬으며 손에 집중하는 척 단추를 푸는 속도를 조금 더 빨리했다. 고개를 숙이자, 자연스럽게 강현우의 셔츠 소매에서 반짝이는 커프스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그건 지난번 백화점에서 신인아를 위해 골라준 바로 그 커프스였다.그 순간, 윤하경의 시선이 잠시 굳었고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다 됐어요.”그녀가 나지막이 말하자, 강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윤하경은 그가 이제 욕실로 들어갈 줄 알고 돌아서 소파 쪽으로 향했지만 채 몇 발짝 걷기도 전에 등 뒤에서 들려온 지퍼 풀리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원피스 등 부분이 살짝 풀렸다.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강현우가 여유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같이 들어가자.”“...”“괜찮아요. 전 혼자서도...”그녀가 당황하며 말하려던 찰나, 강현우의 눈빛이 스윽 어두워졌다.윤하경은 할 말을 삼키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제야 강현우는 다시 표정을 풀고 욕실로 먼저 들어갔다.윤하경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채로 옷방에서 타월을 하나 꺼내 몸을 감싼 뒤 그를 따라 욕실로 들어섰다.욕실 안,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욕조 안에 강현우는 이미 몸을 담그고 있었다.평소보다 지쳐 보이는 얼굴, 아마도 최근 무리한 일정 탓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윤하경이 조심스럽게 맨발로 다가가자, 감겨 있던 강현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고는 말없이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말한다.“조심해.”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그대로 그의 품 안으로 푹 떨어졌고 놀란 윤하경은 작게 비명을 질렀다.다행히 차가운 욕조 바닥이 아니라 강현우의 가슴팍에 안긴 채로 안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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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0화

윤하경은 얼른 말을 멈추고 얌전히 웃으며 강현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강현우는 겉보기엔 차갑고 무서운 인상이지만 그녀가 이렇게 순하게 굴고 애교를 부리면 대체로 다 받아줬다.그녀는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을 톡톡 건드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며칠 동안 안 보이길래... 혹시 헤어지자고 하려는 건가 했죠.”툭 던진 말이었지만 그 순간 강현우의 손이 그녀의 등에서 멈칫했다.“헤어지자고?”윤하경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고 그 말에는 미묘하게 힘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강현우는 그 말에 오히려 작게 웃으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고 조금 전보다 눈빛이 훨씬 부드러워져 있었다.“앞으로 또 배경빈이랑 그렇게 위험한 짓 하다간, 나랑 헤어지고 싶어도 그럴 기회도 없을지 몰라.”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하고 위협적인데 속에는 걱정이 묻어 있었다.윤하경이 눈웃음을 지으며 슬쩍 웃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누르듯 억지로 참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윤하경이 그의 입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더니 금세 몸을 뒤로 뺐다.“걱정하지 마세요. 다시는 그런 무모한 일 안 해요.”목숨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달은 이상, 배경빈과의 무모한 드라이브 따위는 다시 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며 목울대를 천천히 움직였고 그 모습을 모르는 윤하경은 여전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진짜 무서웠어요.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어요... 윽.”그 순간, 욕조 안에서 물결이 철썩하며 흔들렸고 강현우의 입술이 그녀의 입을 덮으며 말을 막았다.그의 키스는 여느 때처럼 빠르고도 강렬했다. 주도권은 순식간에 넘어갔고 윤하경은 다시 그의 품에 끌려 눌리게 됐다.뜨거운 물과 그의 체온이 섞이며 숨이 가빠졌고 그녀는 놀라 두 팔로 밀어내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손을 위로 들어 올려 제압했다.오랜 키스 끝에 입술이 떨어졌고 그는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 눈빛에는 걱정과 욕망이 동시에 담겨 있었고 금세 그 눈빛은 부드럽게 풀어졌다.강현우는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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