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Chapter 1191 - Chapter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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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1화

이영이 당안과 송이를 데리고 자리를 뜨는 모습을 바라보며, 심초운은 허리에 손을 얹고 석양에 물든 노을빛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그러곤 조금 욱신거리는 입술을 매만지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저는 중이 되기도 싫고, 풀만 먹고사는 건 더더욱 질색입니다.”“도련님, 그럼 고기 반찬 좀 차려드릴까요?”초구가 갑작스레 머리를 내밀며 물었다.심초운은 눈썹을 찌푸리며 슬쩍 그를 노려보다가 말했다.“돌아가자.”“예, 알겠습니다.”왠지, 오늘따라 도련님께서 마음이 복잡하신 듯했다.아무래도, 황녀 마마께서 하신 그 말씀 때문이랴.그렇게 생각하니 초구는 괜스레 열정이 끓어올랐다.어찌하든 양측이 다 만족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고야 말리라 다짐하였다.“도련님, 국공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사가로 가시겠습니까?”마차를 몰며 조심스레 묻는 초구에게, 심초운은 이마를 짚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직이 답했다.“국공부로 가자.”거리는 이미 불빛으로 가득 찼고, 야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반 시진쯤 걸려 도착한 국공부는 그날 심초운의 귀환을 예상치 못했던 터라, 식사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우옥명은 다급히 하인을 불러 두어 가지 소찬을 준비케 하고, 그제야 앉은 아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어머니, 왜 자꾸 저를 그렇게 보십니까…?”심초운은 밥을 들며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그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초구는 조용히 눈썹을 치켜올렸다.‘입술이 저렇게 부었는데, 누가 봐도 멀쩡하진 않잖아.’허나 우옥명은 그런 쪽으론 생각이 닿지 않은 듯, 그저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들아, 입술이 부어 있구나. 벌레에라도 물린 것이냐? 어미가 약을 가져다 발라주마.”심초운은 잠시 멈칫하더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아… 예, 물리긴 했습니다. 허나 이미 약은 발랐습니다.”우옥명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말했다.“앞으론 좀 더 조심해야 한다. 궁중이라고 하여 마마만 잘 보필하면 그만이 아니야.”“네 몸 또한 아끼고 돌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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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2화

“오라버니, 제 생일 잔치날에 황녀 마마께서 오시려나요?”심연희는 촉촉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물었다.열 살이 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생일 잔칫날이면 황태녀와 진녕 공주가 종종 찾아오곤 했었다.허나 열 살을 지나고부터는 어찌 된 일인지 황태녀의 발걸음은 끊기고, 그 자리에는 진녕 공주만이 남았다.심초운은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글쎄. 오실 수도 있을 것 같구나.”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자신은 분명 병이 들어 있었던 게다.가슴 깊은 곳의 마음은 꾹꾹 눌러 담은 채, 늘 그녀와의 관계에선 군신의 예만을 고집하였다.결국 군도 아니요, 신하도 아닌 어정쩡한 사이가 되어 서로를 불편케 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함께 지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편안하고도 바람직한 모습이었다.“오라버니, 왜 웃으세요?”심연희가 고개를 갸웃이며 물었다.무슨 생각을 하는지, 괜히 멍하니 웃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은가.심초운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아무것도 아니다.”그러고는 우옥명을 향해 물었다.“어머니, 아버지는 어디에 계세요?”“서재에 계신다.”“그럼,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다녀오너라.”심초운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정당을 나섰다.그가 발걸음을 옮기자, 곧 심연희도 우옥명께 정중히 인사드렸다.“어머니, 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그래, 다녀오너라.”우옥명은 손을 가볍게 저어 그녀를 보내주었다.심교은은 모처럼 나누고픈 말이 많았기에 자리에 남아 대화를 이어갔다.심연희는 걸음을 일부러 늦추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곧 심초운과 초구를 따라잡았다.심초운이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초구를 불러세웠다.“초구야, 잠깐 이리 와 보거라.”초구는 허리를 굽히며 예를 올렸다.“무슨 일이십니까, 아씨?”“그야 당연히 오라버니와 마마에 관한 이야기지.”심연희는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요즘 두 분 사이 말이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지?”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두 사람 사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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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3화

“어서 말하라니까!”심연희가 허리에 손을 얹고 조급히 다그쳤다.초구는 며칠 뒤면 열다섯을 맞이할 아씨를 바라보며, 이를 앙다물었다.이 나이라면 이미 혼담이 오간 집안이 수두룩하고, 어떤 이들은 벌써 아이까지 두었다.그런 것을 생각하면, 아씨께 드리는 말도 이제는 시기상조는 아니었다.“도련님께서 마마와 사이가 무척 깊어지신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초구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마마께서 도련님께 내리신 말씀이, 참으로 천하에 둘도 없는 난제라… 저는 그저 마음이 무거울 따름입니다.”심연희는 점점 안달이 나기 시작했다. 팔짱을 끼고 눈매를 번뜩이며 다그쳤다.“그러니까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어찌 그리 빙빙 돌려 말하는 것이야!”초구는 숨을 고른 뒤, 드디어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마마께서 이르시기를… 하늘처럼 맑고 고고하신 황자 마마께서, 속세로 내려와 혼인하고 자손을 두셔야 한다 하셨답니다. 황실의 혈맥을 잇기 위함이라 하셨으나, 이는 하늘을 오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그제야 말을 다 하고 나니, 마음 한켠이 조금은 가벼워졌다.허나 이 말을 아씨께 들려드린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그저 속만 태우는 일이지.초구는 문득 생각했다.‘불가의 자식이 속세에 내려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그런 화본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찾아야겠다.’“아씨, 그럼 저는 볼일이 있어 먼저 물러가 보겠습니다.”초구가 슬며시 뒤로 발걸음을 옮기자, 심연희가 성큼 다가와 물었다.“어딜 가는데?”“그, 화본을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초구는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남녀 간의 정사와 풍월이 오가는 화본을 즐겨 보았으니, 지금처럼 마음 복잡할 때 딱인 것이었다.“그럼 나도 함께 가마.”심연희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초구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은 밝고 별빛은 흐트러져 있으니 실로 마음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었다.“아씨, 이미 밤이 깊었습니다. 지금 같은 시각에 바깥출입은 적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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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4화

초구의 몸과 마음이 한순간에 동시에 흔들렸다.“어찌,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진심으로 도련님의 행복을 바라고 있사온데…”“그럼 됐다. 어서 날 그곳에 데려가거라. 조금 있으면 국공부 문이 닫히겠구나.”“저는… 예, 알겠습니다.”초구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한 자도 채 지나지 않아, 드디어 ‘묘취서옥’에 당도하였다.지리적으로 외진 곳이라 그런지, 이런 기이한 화본을 구비하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아이고, 나으리 오셨습니까.”묘취서옥의 주인이 초구를 보자 반갑게 웃으며 맞아주었다.그런데 심연희를 본 순간, 그 표정이 조금 놀란 듯 변하였다.‘기녀를 데려온 건가?’‘아, 아니군. 저 차림새를 보니 분명 명문가 규수로구나.’그것도 권세 있는 집안의 아씨인 게 틀림없었다.초구가 말했다.“오늘은 공연히 잡담할 겨를 없소. 불문의 불자가 속세에 떨어지는 화본이 있소?”“아, 그거라면… 물론 있습니다.”“그럼 입 다물고, 전부 다 내놓으시오.”심연희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며 은전 하나를 던졌다.“한 권도 빠짐없이 말이오.”“아, 예예… 알겠습니다!”잠시 뒤, 노부부가 십여 권쯤 되는 책을 품에 안고 나왔다.심연희는 아무렇게나 두 권을 집어 들고, 나머지는 초구에게 건넸다.“가자.”초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뒤를 따랐다.주인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두 사람을 대문 밖까지 배웅하였다.마차에 오르려던 심연희는 초구에게 말하였다.“오라버니께 절대 나와 함께 사러 갔다 말하지 말거라.”그녀는 초구가 이 화본들을 오라버니에게 보여주려 한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초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아씨, 안심하세요. 감히 입도 뻥긋하지 않겠습니다.”심연희가 규방에 돌아왔을 무렵, 그녀의 몸종 시녀는 초조하게 안에서 불안한 듯 빙글빙글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그녀가 초구와 함께 외출했다는 것을 미리 알아채지 못했더라면, 진즉 심국공에게 보고하러 달려갔을 터였다.“아씨, 더 늦으셨으면 대감마님께 알릴 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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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5화

초구의 심장은 쿵쿵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보다 더 크게 뛰고 있었다.“들어오너라.”심초운의 목소리가 먼저 방 안에서 들려왔다.초구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 주인장이 아씨의 차림을 보고도 설마 그런 노골적인 책을 직접 고르게 두진 않았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그는 미리 추려 놓은, 비교적 수위가 낮은 화본 두 권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것이 제가 찾아온 화본입니다.”심초운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그 책을 살펴보다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화본?”초구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도련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장공 스님의 보살핌을 받으셨으니, 마음속에 분명 불성이 자리하고 계실 것입니다. 남녀지사에 있어 사대개공하실 분이시니… 이 화본들 또한 불문에서 환속하신 이들의 이야기로 골랐습니다.”심초운이 조용히 책을 집어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좋구나.”잠시 후, 그가 초구를 향해 덧붙였다. “너는 다시는 이런 책에 빠지지 마라. 넌 너대로 노력해야지. 만일 그러지 않으면 다시는 보지 못하게 할 것이다.”초구는 손을 가슴에 얹고, 마치 충성을 맹세하듯 고개를 숙였다. “예, 도련님. 목숨을 다해 충성하겠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심초운이 손을 내젓자, 초구는 안도의 숨을 쉬며 물러났다.그날 밤이 깊어지자, 심초운은 탁자에 앉아 촛불 아래에서 책을 펼쳤다. 책장 안에는 글과 함께 정교한 수묵화들이 곁들어 있었고, 처음엔 제법 품격 있어 보였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책 속 장면들은 점차 노골적으로 변했고, 입술을 맞대는 장면과 야릇한 문장들이 그의 온몸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그 낯선 뜨거움은, 바로 아령과 입맞춤을 나누었을 때의 감각과도 같았다. 무언가를 더 원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그 애틋한 욕망이 다시 끌어올라온 것이다.“무, 무엄하구나!”심초운은 얼굴이 붉어진 채 책을 던져버렸다.'초구 저 녀석은… 내시 주제에 이런 책을 좋아하다니. 머릿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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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6화

“누님, 괜찮으십니까?”심초운이 물었다.이영은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매일같이 얼굴을 맞대는 사이에, 어찌 자신이 괜찮은지 아닌지를 모른단 말인가.“괜찮다.” 이영은 말하며 금융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심초운과 초구, 당안, 송이도 그 뒤를 따랐다.금융궁에 도착한 후. 심초운은 틈을 봐 이영을 안아보거나 입을 맞춰보려 하였으나, 궁인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그녀의 치수를 재고 혼례복을 준비하느라 도무지 틈이 나지 않았다.“도련님께서도 치수를 재셔야 합니다. 대혼례 예복을 맞춰야 합니다.”심초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이리 급하게 해서야 과연 제때에 맞겠느냐?”“자수는 모두 미리 완비해두었고, 이제 마무리 공정만 남아 있습니다. 염려 마시옵소서. 제 시간에 꼭 맞출 수 있습니다.”“수고가 많구나.”“영광입니다.”사의국의 장인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치수를 모두 잰 후, 이영은 다시 서재로 갔다. 심초운은 초구에게 눈짓을 보냈다. 초구는 눈치를 보다가 송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 잠시 말씀을 나눠도 되겠습니까?”송이가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영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문이 닫히기 직전, 심초운은 급히 앞으로 나아가 이영을 막아섰다. “누님...!”이영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였다.그녀는 깜짝 놀라 그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전날 밤, 심초운과 입을 맞춘 뒤 온 밤을 설핏 잠도 못 이루었다.꿈에서도 그와 입을 맞추었고, 그러다 그가 그녀의 옷고름을 풀려 하였기에 잠을 한숨도 못 잔 것이었다.정녕 의관을 차려 입은 수치로운 짐승과도 같았다!심초운은 그녀의 매서운 눈길에 눈을 껌뻑였다. 왜 이영이 자신을 이토록 매섭게 바라보는 것일까.“심초운, 지금부터는 나에게서 물러나 있어라.” 이영이 말했다. 그러다 말끝을 누그러뜨리며, 너무 차갑게 대했다간 그가 상처받을까 싶어 덧붙였다. “내 조건을 들어줄 때가 오거든, 그때 다시 가까이 오너라.”심초운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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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7화

이영은 이내 곧 입을 벌렸다가 다물며 말했다. “안 돼, 안 된다. 오라버니가 장가를 간다 해도 과부는 안 돼.”심초운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천하의 황자마마께서 과부에게 장가를 간다니, 안될 말이지요.”“하지만 오라버니를 유혹할 규수가 있을 리 없지 않느냐.”그 말에 심초운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렇다, 대황자를 유혹하러 갈 만한 양반집 규수가 있을 리 없었다.그렇게 되면 그는 이영과 평생 인연을 맺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절망감이 몰려왔다.“누님, 이 일은 서두를 수 없는 일이니, 너무 엄격하게만 하지 않으시면 안 될까요?” 그가 이영을 바라보는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영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황족의 후사를 두는 일이 해결되지 않고는, 그녀의 마음이 놓일 수 없었다.설령 자신이 자식을 낳는다 하더라도, 혼자 낳는 것보다는 오라버니와 함께 아이를 길러가는 편이 마음 편하고 즐거울 터. 그녀는 한편으로는 단호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손을 조용히 잡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초운아, 넌 반드시 해낼 수 있다. 나는 너를 믿는다.”이영의 눈빛은 마치 달빛처럼 아름다웠다.심초운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이영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곧장 상소문에 시선을 돌렸다.심초운은 그 자리에 선 채 망설였다. 방금 그저 잠시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인데도, 밤새 쌓인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그러나 그녀가 공무를 보고 있으니, 더 이상 방해할 수는 없었다.그는 조용히 자리를 나섰다.심초운이 문을 닫고 떠난 뒤, 이영은 고개를 들어 그의 뒷모습을 멀리 바라보며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서재에서 나오자, 초구와 당안, 송이는 이미 분위기를 눈치챘다.초구가 다가와 물었다. “도련님, 어찌 되셨습니까?”심초운은 살짝 한숨을 쉬고, 당안과 송이에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뒤 초구를 데리고 금융궁을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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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8화

비풍정 아래, 심초운은 오랜 사색에 잠겨 있었다.과거 이영과 흠천감에 자주 드나드시던 시절, 그는 당안과 송이 고모, 그 밖의 사람들과 함께 이 정자에서 누님을 기다리곤 했다.해마다 반복되던 일상이었건만, 비풍정은 여전히 옛 자리에 있었고, 흠천감 또한 옛 모습 그대로였다.다만, 용 사부께서는 이제 먼 곳으로 떠나셨고, 그는 여전히 흠천감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는 처지에 머물러 있었다.그때 초구가 머리를 싸쥐며 나직이 말했다.“도련님, 그냥 마마께서 명을 내려 황자 마마께서 흠천감을 떠나 궁 밖으로 별저를 옮겨 살게 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심초운은 쓴웃음을 지었다.“그 분 손에 들린 것이 흠천감의 인장이다. 곧 다음 감정의 증표지.”“이제 사부님도 계시지 않으니, 그 분께서 그 자리를 잇게 된다면 그리 간단한 문제만은 아니다.” “그 분께서 흠천감을 지키고 계신 한, 누님이라 하여도 억지로 움직이게 하실 수는 없을 것이다.”초구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면 다른 수를 찾아야겠군요. 황자 마마께서 흠천감을 나서시기만 한다면, 그제야 저희가 손쓸 틈이 생길 것입니다.”심초운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문제는… 어느 집안의 규수가 감히 황족의 장자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겠느냐는 것이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초구는 투덜거리듯 혼잣말을 내뱉었다.“마마께서도 참, 어찌 이토록 어려운 숙제를 주셨는지…”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심초운의 눈빛이 번뜩이며 그를 바라보았다.“누님을 험담하지 마라.”초구는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입을 막았다.“송구합니다! 종이 경거망동하였습니다. 다음부턴 절대로… 절대로 입조심하겠습니다!”스스로를 꾸짖듯 뺨을 철썩 한 대 내리쳤다.심초운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그만두어라. 네 뺨을 때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초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조아렸다.“역시 도련님께선 자비로우십니다…”아직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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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9화

“감사드립니다, 마마.”심초운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소우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앞으로 우리는 한 식구가 될 사이인데, 그리 예를 차릴 것 없다.”“영이라 부르거라.”혼례를 치른 뒤에도 마마라 부르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거북하고 어색하겠는가.사실 소우연 자신도, 이육진과 마음을 나눈 이후로는 대개 그를 ‘부군’이라 불렀지, ‘왕야’혹은 ‘태자’나 ‘폐하’ 같은 딱딱한 칭호는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진이에겐 이름을 부르고, 내게는 어마마마라 불러도 된다.”“그리고 나나 폐하를 뵐 때도, 영이를 대할 때처럼 편히 대하도록 해라.”비록 혼례는 아직 올리지 않았으나, 성지가 이미 내려졌으니, 초운은 이영의 정식 시군이나 다름 없었다.곧, 한 가족이라는 뜻이었다.무엇보다도 어릴 적부터 곁에서 지켜보아 온 아이라, 눈에 거슬릴 것 하나 없는 아이였다.이제 와서 일부러 어려워할 이유가 있을까.심초운은 말없이 입술을 다문 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예, 어마마마.”얼굴은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수저를 들었으나, 마음은 여전히 술렁거렸다.그는 은근히 이천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연희의 생일 잔치 날, 진이도 오고… 누님도 함께 가신다 들었습니다. 혹… 형님께서도 함께 하시겠습니까?”그 순간, 반찬을 집던 이천의 손이 멈칫하였다.세속의 일에는 마음을 두지 않던 그였기 때문이다. 무릇 자신 수행에 방해되는 일이라면 굳이 나설 뜻도 없는 자였지만, 이번만큼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이영의 시군이 될 자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내민 청이었다.심초운은 용강한의 제자이기도 하였다.그의 사부인 용강한이 경성을 떠나기 전, 이천에게 수차례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너는 나처럼 세상과의 인연을 끊을 수 없다. 너에겐 태어날 때부터 가문이 있었고, 피를 나눈 혈육이 있었으니, 세상과 등을 지는 길은 너의 길이 아니다. 넌, 이전의 감정들과는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황실을 어지럽히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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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0화

어느덧, 심연희의 생신날이 되었다.이른 새벽부터 국공부는 분주하게 돌아갔다.황태녀와 황자, 그리고 진녕공주까지 친히 국공부로 행차하기로 한 날이었기 때문이다.황가 사람들이 친히 오는 날이었기에, 저잣거리의 잔칫날보다도 더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심연희는 오늘을 위해 곱디고운 분홍빛 치마저고리를 꺼내 입고, 머릿단장 또한 정성을 다해 꾸몄다.그 무렵, 심교은이 아침 일찍 심연희의 방을 찾아왔다.손에 꼭 쥔 조그만 함 하나를 내밀며 해사하게 웃었다.“복숭아꽃 비녀예요.”투명한 백옥을 조각하여 만든 정결하고 고운 비녀였다. 그녀는 마치 보물을 자랑하듯 들고 흔들며 말했다.“참 고운 비녀긴 한데, 오늘처럼 단정히 꾸미셨을 땐 조금 수수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냥 평소에 꽂으시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심연희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다. 네가 준 선물을 어찌 마다하겠니.”그러고는 손수 머릿결 위로 비녀를 들어, 적당한 자리에 꼽았다.거울을 살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꽤 잘 어울리는걸.”심교은은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그럼요. 도사님이 그러셨어요. 이 비녀가 언니에게 최고의 인연을 데려다줄 거래요.”인연이라… 심연희는 문득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이번 생일이 지나면, 심국공부 내외는 그녀의 혼처를 정할 생각이었다.그녀 또한 그것이 가문을 위한 일이며, 여자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수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허나 단 한 번도 마주 앉아본 적 없는 이와 혼인을 한다는 것은 너무 낯설고, 또 두려운 일이었다.“언니…?”심교은이 조심스레 물었다.“왜 그래요? 생일날인데, 왠지 언니가 조금 슬퍼 보여요.”심연희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괜찮아.”그러곤 거울을 덮고 몸을 일으켰다.“어서 가자. 곧 오라버니도 오실 테고, 폐하와 공주마마도 도착하실 거야.”심교은은 두 손을 꼭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맞아요! 황자마마께서도 오신다지요? 들었어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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