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Chapter 1581 - Chapter 1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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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1화

“버르장머리 없는 놈!”경성세가 분을 못 이겨 벼루를 집어 던졌다. 경장명은 피하지도 않고 맞아 이마가 단숨에 붉게 부어올랐다.어찌 피하지 않는단 말인가? 미친 게 틀림없었다.“아버지께서는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허튼소리 하는 적이 없습니다.”“이것이야말로 불효다!”경장명은 효도냐 아니냐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다만 가슴속 깊이 밀려드는 건 이루 말할 수 없는 패배감이었다. 차라리 그날 몽춘을 붙잡지 말았어야 했다. 그 한순간의 연민, 그 몇 해의 외로움에 휘둘린 충동이 화근이 된 것이다.경성세도 아들을 모를 리 없었다.“좋다. 그렇다면 내일은 우리가 먼저 파혼을 말하러 가야겠다. 만약 심초운이 직접 찾아와 파혼을 고한다면, 그땐 어찌할 작정이더냐!”“아버지, 저는…”경장명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하고 싶지 않으나, 원치 않는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이놈아!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네 뜻이 무슨 대수란 말이더냐! 설마 그 집안이 먼저 들이닥쳐 파혼을 외치게 만들 작정이더냐?”“소자… 아버지 뜻을 따르겠습니다.”그제야 경성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집안의 치욕이었다.…….국공부.초구는 일부러 서신을 들고 와 심연희를 보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아씨, 내일은 국녀학에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심연희가 고개를 들었다.“무슨 까닭이냐?”“대인께서 말씀하시길, 내일 경부에서 파혼을 고하러 올 거라 하셨습니다.”“파혼이라니!”심연희는 벅차오르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곁에 있던 심교은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그럼 제가 오라버니를 불러와야 하지 않을까요? 또 숙부님들도 모두 모셔와야겠지요?”“숙부님들은 당연히 모셔야지. 다만 오라버니는 학업이 바쁘니, 내가 봐서 결정하면 될 거야.”심연희가 차분히 대꾸했다.심교은은 또 깔깔 웃으며,“오라버니 공부하는 꼴 보니, 올가을에는 장원급제라도 할 기세예요.”“그만큼 힘써서 배우니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심연희가 미소 지었다.초구가 보며 거들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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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2화

정오 무렵.하인들은 미리 경부에서 혼약할 때 보내온 예물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앞마당에 내놓았다.심초운과 심연희는 다시 꼼꼼히 확인한 뒤, 파혼은 자신들이 먼저 꺼낸 일이니 미안한 마음을 담아 답례 몇 가지를 더 얹어 두었다.드디어 정오가 되자, 과연 경부와 중매쟁이가 모습을 드러냈다.그러나 나타난 이는 경성세와 중매쟁이뿐, 정작 경장명은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양쪽 모두 겉치레로는 예를 차렸다. 중매쟁이가 중간에서 서류를 맞추며, 정혼 당시 오간 예물을 하나하나 다시 확인했다.경성세는 남는 물품은 단호히 거절했다.“양가 인연이 여기까지라니 참으로 유감입니다. 허나 남은 물건을 저희가 차지할 수는 없습니다.”심초운이 고개를 끄덕였다.“경 대인이 훗날 꼭 좋은 배필을 만나길 빌겠네.”경성세 역시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감사합니다, 황부마마.”그리하여 반 시각도 채 안 되어 모든 파혼 절차가 끝났다. 모였던 가족들도 차례차례 흩어지며 집안은 금세 조용해졌다.심교은이 언니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드디어 자유로운 몸이 되었네요, 언니!”심초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다가 초구를 발견하고 말했다.“그래도 한 짐은 덜었구나. 그럼 나는 궁으로 돌아가마.”“오라버니, 감사합니다. 평안히 가세요.”두 자매는 문밖까지 나와 심초운을 배웅했다. 부모가 모두 자리에 없는 상황에서, 결국 그가 스스로 혼약을 끊어낸 것이다.심교은은 어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살짝 웃었다.“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말씀하셨잖아요. 언니가 어떻게 하든, 늘 가족들은 언니 편이라고요.”심연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또 아버지가 사리를 분별하는 분임을 알았기에, 자신도 용기를 내어 파혼을 결심할 수 있었던 것이다.경부.경성세는 파혼을 마치고 돌아온 뒤에야 경장명을 방에서 나오게 했다.“결국 두 사람이 갈라섰구나. 너와 심연희는 다시는 인연이 없을 게다.”경장명은 씁쓸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어딜 가느냐?” 아버지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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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3화

심연희는 정연과 마주서자, 그녀의 맑디맑은 눈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정연은 미소를 지었다.심연희가 과연 천왕 전하를 사모하는구나. 그래서 결국 혼약까지 물린 것이리라.“주 부인을 뵙습니다.”심연희가 살짝 몸을 낮추어 예를 올렸다.정연은 그녀가 들고 있는 보퉁이를 흘끗 보며 물었다.“연희야, 혹시 천왕 전하를 찾아가려는 게냐?”심연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 아닙니다.”“아니더냐?” 정연은 쉽게 믿지 않았다.심연희와 이천 사이에 인연이 있다는 건, 그녀에게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무엇보다, 얼마 전 이진이 경성을 떠나기 전 따로 자신을 찾아와 부탁하지 않았던가.국녀학에 몸담고 있는 이상, 기회가 된다면 꼭 심연희와 이천을 이어달라고…심연희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정말 아닙니다. 전 그저 연못의 연꽃을 보러 나온 것뿐이에요.”하지만 지금 계절은 연잎만 푸르를 뿐, 꽃봉오리도, 꽃도 피어 있지 않았다. 도대체 뭘 보겠다는 건지.정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마침 나도 천왕 전하를 뵙고 전할 말이 있다. 함께 가자구나. 이따 네게도 해줄 얘기가 있단다.”“……”심연희는 속으로만 절규했다.‘아니… 이건 너무 노골적이잖아…’“가자구나.”정연은 그녀의 손을 이끌어 곧장 원치각으로 향했다.정자에 앉아 한가로이 바람을 쐬던 검오는 두 사람을 보았으나, 굳이 방해하지 않았다.요즘 맡은 직책이란 게 그저 한가하기만 해, 위험도, 고생도 없었으니 말이다.정연은 방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천왕 전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나이다.”안에서는 책장을 덮는 소리가 났다.이천은 정연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말했다.“문 대인, 들어오시오.”심연희는 얼른 정연의 소매를 붙잡았다.“저… 전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그러나 정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이천의 성품은 너그럽고도 너그러웠다.게다가 그녀는 소우연과 의자매처럼 지냈으니, 그런 정연에게 이천은 언제나 친절하게 대했다.정연은 심연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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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4화

정연이 물러가자, 방 안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고요해졌다.심연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지난번에 전하께서 제 옷을 빌려 입으셨던 거, 직접 빨아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그녀는 커다란 보자기를 공손히 내밀어 올렸다.이천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고맙게 여길 것 없다.”그에게 있어선 누구라도 마땅히 도와야 할 일이었으니, 특별할 것도 없었다.그는 곧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시며 어색함을 가렸다.“차 한 잔 하겠느냐?”“전하께서 번거롭지 않으시다면….”그녀는 옷만 건네고 바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번거로울 것 없다.”모처럼 다시 마주한 자리였다.이천은 마음속 감정이 이미 엷어졌다고 믿었으나, 환히 서 있는 심연희를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조임이 가슴께로 몰려왔다.아마도 진정향의 기운이 아직 남아 있어서일 터였다.“앉거라.”그가 옆자리를 가리키며 몸을 일으켰다.심연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둥근 탁자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겉으로는 담담한 듯 보였으나, 속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만큼 쿵쾅거렸다.사내를 향해 이렇게 먼저 다가오는 여인은 아마 자신이 처음일 것이다.이천은 태연히 꽃차를 골라 직접 우려내고,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폐하께서 새로 보내주신 꽃차다. 향이 좋더구나. 한번 마셔보거라.”심연희는 찻잔을 받았으나, 뜨거움에 오래 들지 못하고 이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색함을 덮으려 입을 열었다.“전하께서는 꽃차를 즐겨 드시는 편이신가요?”“그저 그렇다.”그저 그렇다니.이영이 어찌 이천의 기호를 모르실 리가 있을까.아니면… 이 꽃차는 혹 공주마마께서 따로 준비해 보낸 것은 아닐까.이천 역시 속으로 짐작했다. 본디 자신이 꽃차를 즐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이 차는 아마도 이영이 심연희를 위해 마련한 수일지도 몰랐다.계책이 거듭되니,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심연희는 찻잔을 감싸쥔 채, 낮은 목소리로 속내를 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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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5화

“아닙니다. 전하의 옷이었으니, 제가 직접 빨고 싶었습니다.”순간, 심연희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자신이 어쩐지 철없는 아이처럼 느껴졌다. 꼭 소설 속에서 남자의 눈길을 끌기 위해 안간힘 쓰는 여주인공 같았다. 그러나 현실 속의 자신은 그들만큼 대담하지도 못했다.소설 속 여주인공들은 적어도 하나쯤은 내세울 재주가 있지 않은가. 정성껏 수놓은 향낭이라든가, 사내가 좋아할 음식을 손수 마련한다든가.그런데 자신은 무엇을 내보일 수 있단 말인가.심연희는 이천을 똑바로 바라보며 용기를 짜냈다.“전하, 소첩이 춤 한 곡 올려도 되겠습니까?”“…무엇이라?”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전하께 너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나 다른 건 잘하지 못하고, 다만 거문고와 글씨, 그리고 춤 정도만 조금 익혔을 뿐입니다.”“그중에서도 춤은 그나마 자신 있는 편입니다.”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그가 거절할 틈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춤사위를 펼쳤다.쫓겨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겼다. 부끄러움 따윈 내려놓았다.가늘지만 힘 있게 다져진 몸짓, 흩날리는 소매 끝이 마치 창공을 나는 새 같았다. 어떤 순간은 밝고 찬란했으며, 또 어떤 때는 수줍게 고개를 숙여 은은한 매혹을 풍겼다.심연희가 청년을 향해 던지는 시선마다, 마치 한 치의 빈틈 없이 계산된 듯 환하게 빛나거나, 혹은 수줍게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리는 듯했다.이천은 그녀의 춤사위를 지켜보며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 없었다. 겉으로는 태연히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무심한 척했으나, 곁눈질로 스며드는 그녀의 웃음은 밝고 당당했다.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는 억지로 꾸민 요염함도, 쭈뼛거리는 주저함도 없었다. 오히려 숨김없이 드러낸 눈빛과 몸짓은 오직 한 가지 뜻, 바로 자신을 향한 진심 어린 구애였다.이천의 마음이 흔들렸다.이것이 과연 진정향의 탓이란 말인가, 아니면 그의 본심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인가?만약 향의 약효라면, 그 힘이 사라진 뒤에도 그는 이 소녀에게 마음을 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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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6화

그는 소녀가 부끄러움과 분노에 몸을 떨며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눈빛에서 연민이 스쳤으나, 차마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심연희가 물러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이천은 정신을 가다듬었다. 묘하게 가슴께가 저릿했다. 손으로 가슴을 눌러가며 고개를 돌리니, 곁에 피워둔 이영이 내려준 향이 은근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과연,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향의 탓이란 말인가.……“아씨, 어떠셨습니까?”명주는 원치각 뜰을 나서는 심연희를 보고 서둘러 다가와 물었다.심연희는 입술을 꼭 다문 채 고개만 저었다.“안 좋으셨습니까?”“가면서 말하자.”명주의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짐작하건대, 기대했던 답을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심교은이 책을 안고 다가왔다.“언니, 이제 집에 가도 되겠습니까?”“그래.”심교은은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 여겼다. 상처 난 마음을 괜히 더 건드리느니, 차라리 저택에 돌아가 묻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아까 건양관에서 주… 아니, 여기서는 문 대인이라 불러야지. 문 대인께서 방금 전하셨습니다. 내일부터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학자들이 원하면 서원 강당에서 진시까지 남아 글을 익히다 돌아가도 된다 하셨습니다.”“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남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심연희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은 씁쓸했다. 이천이라는 사람, 어찌 그리도 돌같은 심장을 가졌단 말인가. 정작 자신은 부끄러움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언니?”심교은은 언니가 넋이 나간 듯한 기색을 보이자 명주를 흘끗 보았다. 명주는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방금 심연희와 이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곧 과거 시험이 열리는데… 책운이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심연희가 문득 그의 이름을 떠올렸다.심교은이 대답했다.“아예 집에도 들어오지 않고, 국자감에서 먹고 자며 공부만 한다 합니다. 그만큼 결심이 단단한 것이지요.”“그럼 너는?”“저도 학업을 위해 서원에 들어가 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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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7화

그가 웃었다. 네가 잊은 것이냐, 아니면 또 속이는 것이냐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심연희는 그 웃음을 보고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네, 당연하지요.”경장명은 마침 국녀학의 학자들이 삼삼오오 나오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이곳에 서서 말하기도 어색하니, 길을 걸으며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그가 옆의 넓은 길을 가리켰다.심연희도 여기 서 있는 것이 썩 편치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그들은 나란히 길을 걸었다. 국녀학을 벗어나 다른 학자들과 멀어지자, 경장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이천과 검오가 국녀학에서 나오고 있었고, 그 역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경장명은 못 본 체하며, 곁의 소녀만 바라보며 물었다.“오랜만이군요. 그간 평안하셨습니까?”“네, 그럭저럭 잘 지냈습니다.”심연희가 짧게 대답하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덧붙였다.“경 대인께서는 어떠하십니까?”그는 사실 좋아 보이지 않았다.경장명은 옅게 미소 지었다.“네, 병을 좀 앓았습니다만,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어쩌다 병이 드신 겁니까?”말을 꺼내고 나서야, 심연희는 스스로 놀랐다. 설마 혼약 파기 때문이란 말인가.경장명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히 말했다.“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에 걸리는 법이지요.”어찌 그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혼약이 파기되고 난 뒤, 병이 깊어진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이다.그 병은 다름 아닌, 상사병이었다.심연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단지 그녀가 보고 싶어서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경장명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기억하십니까? 그때 약속했던 것 말입니다. 혼약은 파기했어도, 우리는 형제 같고 지기 같은 사이라 했지요. 그래서… 안부도 묻고, 또 요즘 마음이 편안하신지 여쭙고 싶었습니다.”마음이 편안하냐고… 세상에 그렇게 모든 일이 뜻대로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던가.아니, 어쩌면 유독 자신에게만은 그런 날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이천, 그는 너무도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었다.“무슨 일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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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8화

“대인, 괜찮으십니까?”심연희는 경장명의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병은 정말 다 나으신 겁니까?”경장명은 자신을 향한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작은 온기는 마음을 건드렸지만, 그것 하나로는 결코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다.“…아직 다 나은 건 아닙니다. 어쩌면 이 생이 다하도록 다 낫지 못할 수도 있겠습니다.”“그럴 리가 있습니까? 폐하에게 부탁하여 태의원 어의에게 다시 진찰을 받아보심이 어떨까요.”경장명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이미 태의를 불러 진맥을 받았습니다. 심각한 병은 아니니 염려 마십시오.”마음의 병은 죽을 만큼 큰 병은 아니다. 다만 사람을 잠식하고 괴롭힐 뿐이었다.심연희는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혹시… 저 때문입니까?”“아…”그가 어찌 솔직하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에 그녀를 다시 보지 못한다면, 그때는 무얼 붙잡고 살아야 한단 말인가.경장명은 곧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 제가 그리 약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정말입니까?”“물론입니다.”심연희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조심스레 말했다.“사실 저희 둘은 이미 혼약을 파기했으니, 다시 마주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대인께서도 아시다시피, 세상 사람들은 저희 파혼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저를 찾으신다면, 오히려 경 대인께 흠이 있다고들 할 것입니다.”“저는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경 대인께서는 상관치 않으셔도, 결국 혼담이 다시 오가게 되실 터인데, 그때 남들이 묻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경장명은 쓸쓸히 웃었다.“다시는 혼담을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그의 대답에 심연희는 문득 떠올렸다. 그가 예전에 무릎 꿇어 혼약을 파기하지 말라 애원하던 모습을 말이다. 자존심을 내려놓은 채 애달픈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순간을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심연희는 입술을 떨며 물었다.“경 대인, 다시 혼담을 받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파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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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9화

“아닙니다, 경 대인.”“저희는 이미 파혼을 했으니, 더는 서로 왕래할 이유가 없습니다.”경장명이 한 걸음 다가서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폐하께서도 남녀평등을 권하셨습니다. 훗날 조정에 나아가 함께 벼슬을 할 수도 있는데, 남녀가 지기로 지내는 것이 어찌 부당하단 말씀이십니까. 그저 혼약이 깨졌을 뿐인데, 어째서 다시는 만나선 안 된다고 하시는지요?”그가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자, 심연희는 미약하게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했다.“대인을 그토록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그 분이 저를 거절할까 두려운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제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앞으로 그저 가을에 있을 과거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싶을 따름입니다.”“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비록 자신은 옛날에야 탐화랑에 머물렀지만, 걸어온 길이 있었고, 그녀에게 전해줄 수 있는 경험도 많았다.심연희가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경장명이 먼저 말을 이었다.“반드시 돕겠습니다, 낭자. 제가 대인이라 불리지 못하고, 오라버니라 불러 달라던 그날, 낭자께서도 저를 오라버니라 부르지 않으셨습니까.”그 말에 심연희는 문득 지난날을 떠올렸다. 파혼을 하던 날, 앞으로는 형제처럼, 지기처럼 지내자던 그의 말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무심코 그를 오라버니라 불렀던 기억을 그녀는 잊을 수 없었다.경장명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앞날이 어찌되든, 낭자에게 도움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학문이든, 낭자 마음이 향한 이든, 그 모든 길에서 말입니다.”“만일 제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요?”경장명은 쓸쓸히 웃었다.“그래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저는 여전히 서원에 나와 낭자를 찾아뵐 것입니다.”“만약 제가 아예 만나 뵙지 않고, 차갑게 대한다면요?”그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눈빛이 부서질 듯 흔들리고, 숨결마저 거칠게 요동쳤다.“경 대인, 괜찮으십니까?”심연희는 본능적으로 앞으로 다가서며 다급히 물었다.경장명이 가슴께를 움켜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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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0화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심연희의 눈빛에는 연민이 어려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토록 자신을 괴롭히는 걸까. 마치 자신이 대단한 인물이라도 되는 듯, 그의 몸이 무너져 가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도 그저 경성의 수많은 귀한 규수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경장명의 감정이 다시 요동치더니, 호흡이 거칠어졌다. 심연희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알겠습니다. 부디 흥분하지 마십시오.”“저희는 앞으로 그저 평범한 지기일 뿐, 그 이상은 드릴 수 있는 약속이 없습니다. 저는… 제 일생, 만약 사랑하는 이와 혼인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다시는 시집가지 않을 것입니다.”“그렇다면… 제가 곁에 있겠습니다.”“……”심연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그가 말한 곁에 있다는 뜻은 무엇일까. 자신이 시집가지 않으면, 그 또한 평생 혼자 남겠다는 뜻일까?아니면 그녀가 마음을 둔 이의 길을 묵묵히 도와주겠다는 말인가. 알 수 없었다.“이제부터 낭자를 여동생처럼 모시겠습니다. 제게 여동생이 하나 더 생긴 셈이지요.”심연희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으나, 더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뒤를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저는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교은이가 기다리고 있거든요.”“예.”그는 애써 아쉬움을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조롭게 풀려간다면, 이제는 매일같이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 터였다.오랜 기다림 끝에 다시 마주했건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잔잔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토록 스스로를 낮춰야 겨우 그녀의 연민을 얻는다는 사실이 가슴을 저몄다. 그는 지금 도박을 하고 있었다. 이천이 끝내 속세의 정에 무심하다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진 것이었다.심연희는 경장명과 작별을 고하고 자신의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차에 오르자 심교은이 다급히 말했다.“아까 천왕 전하께서, 언니와 경 대인이 나란히 걷는 걸 보셨습니다.”“언제 보셨다는 것이냐.”심연희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야 조금 전이었을 터.“그분께서… 무슨 반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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