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그때였다.경장명이 학인들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이제 그만 쉬거라. 너무 늦었구나.”명륜당 안의 학인들은 차례로 서책을 정리한 뒤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심연희도 허둥지둥 도문군과 함께 책을 챙겼다.그런데 경장명이 곧장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도문군이 잽싸게 먼저 입을 열었다.“경 대인… 아니, 공자님.”경장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심연희에게로 돌렸다.심연희는 간절한 눈빛으로 도문군을 바라보았다.‘제발, 가지 말고 곁에 있어 달라’는 묵묵한 부탁이었다.하지만 도문군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씨,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러고는 이내 자리를 떠나버렸다.“……”심연희는 속으로 말을 잃었다.‘아니, 내 눈빛을 어찌 그리도 모른 척할 수가 있단 말인가…’‘교은아… 제발, 평소처럼 빨리 와줘…’바로 그때, 경장명이 입을 열었다.“낭자는 저를 봐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듯하군요.”심연희는 고개를 들며 담담히 물었다.“병세는 좀 어떠하십니까?”경장명이 부드럽게 웃었다.“다른 이들이 없을 때는 저를 ‘오라버니’라… 아니, 낭자는 그 호칭을 꺼려하니 편히 불러주셔도 됩니다.”심연희는 무심코 명륜당 밖을 흘깃 바라보았다.경장명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국녀학에 있는 이들이라면, 낭자와 제가 혼약을 맺었다 파기한 사실을 모를 리 없겠지요. 그렇다면 오히려 더 당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약을 맺었었든, 파기했든, 여전히 지기로 지낼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심연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저는 공자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있습니다. 서로 피하고 불편해하면, 결국 낭자도 저도 이곳에서 조화를 이루기 어렵겠지요.”“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훗날 ‘남녀 평등이란 과연 가능한가’ 하고 의심하게 될 겁니다.”심연희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경장명을 바라보았다.“듣고 보니… 정말 일리가 있군요.”경장명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 하지 않았습니까.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