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난 이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Chapter 1591 - Chapter 1600

1600 Chapters

제1591화

이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는 차를 들어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탁상 위의 경전을 펼쳤다. 책에 몰두해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으나, 눈앞에는 자꾸만 조금 전의 장면이 겹쳐졌다.심연희와 경장명이 나란히 걷던 모습, 신이 맺어준 한 쌍처럼 잘 어울려 보이던 두 사람의 그림자였다. 그러나 경장명에게는 이미 통방첩도 있고, 서장자도 있지 않은가.그는 스스로 빚은 단향을 피웠다. 두 시진 남짓 책을 읽다 보니 서서히 피곤이 몰려왔다. 굳이 본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저 서재의 서늘한 침상에 몸을 누이고 싶었다.여름밤이라도 침상은 차가웠다. 그러나 몇 번을 몸을 뒤척여도 잠은 오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몸을 일으켰다. 흠천감을 나온 뒤부터, 예전처럼 흔들림 없는 도심을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정녕 내 마음이… 그 아이에게 기운 것일까… 아니면 이 향의 탓일까.’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더 큰 문제는 여인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심연희와 혼인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예전에 심질환을 앓던 이들이 묘사하던 것과 흡사했다. 북을 두드리듯 요동치는 심장, 숨이 막히는 답답함까지. 그는 가슴께를 움켜쥔 채 쓴웃음을 흘렸다.“정녕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고작 한 여인 때문에 병이 날 지경이라니.입 밖에 내기만 해도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일이 아닌가.……어전.이영은 늦은 밤까지 등불을 밝히고 오늘 올라온 상소문들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마침내 마지막 장에 도장을 찍고 몸을 일으켰다.오늘 아침, 검오가 와서 전한 말이 있었다. 오라버니께서 며칠간 청수와 경전을 벗 삼아 수양에 들겠다며 휴가를 청하셨다는 것이었다. 분명한 핑계였다. 결국 피하고 싶었던 것이리라.이영은 탁상 위의 상소문 한 통을 집어 들었다. 오늘 올라온 글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볍게 팔을 늘이며 기지개를 켠 뒤, 그 상소문을 들고 금융궁으로 향했다.“폐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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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2화

이튿날.심연희와 심교은은 간단한 살림살이를 챙겨 각자 하녀를 데리고 국녀학으로 향했다.정연이 직접 두 사람을 위해 방을 배정해 주었는데, 친자매가 한방을 쓰게 되었으니 서로 다툴 일은 없을 터였다.“감사합니다.”심교은이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자, 정연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고맙다니, 말로만 하면 성의가 없지 않느냐.”심교은이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그럼 어떤 답례를 드리면 좋을까요?”정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올가을 과거에서 좋은 성적만 거둔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걱정 마십시오. 반드시 잘 해내겠습니다!”심교은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정연은 흐뭇한 눈빛으로 두 자매를 바라보았다. 머잖아 국공부의 아이들이 시험을 통과해 정식으로 동생이 되고, 이어서 생원과 진사가 되는 날이 오리라.그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상운국 여인들의 새로운 앞길을 열어 줄 희망이었다. 특히 도문군 같은 인재라면 이번 가을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더 나아가 전시에서 황제의 점필을 받아 장원, 방안, 탐화에 오르거나 진사가 된다면, 앞날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할 터였다.그래서일까. 정연은 국녀학에서의 하루하루가 힘으로 가득했다. 그 열정은 주진우조차 살짝 질투할 만큼 눈부셨다. 그러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진우란 늘 말로만 투덜거릴 뿐, 막상 집에 돌아가면 오히려 예전보다 더 다정해졌으니까.진우가 뭐라 했던가.‘이제 벼슬길에 올랐으니, 허튼놈들이 넘보지 않게 조심해야 하오.’정연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너희와 오래 함께하지 못하겠다. 내일이면 새로 서원을 맡으실 대인을 맞이해야 하니 준비를 해야지.”“새로운 분이 오신다고요?”정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장 대인께서 건강이 여의치 않아 폐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셨다. 오늘 아침에야 전해 들은 일이지.”심연희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장 대인의 기력이 그리 약해 보이지는 않았는데.정연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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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3화

“왜, 사내들은 모여 앉아 어느 집 아씨가 재주가 뛰어나다느니, 가문이 빼어나다느니, 얌전하고 살림을 잘한다느니 떠드는데… 우리라고 멋진 사내 이야기를 못 할 게 뭐야?”“설마 책만 파다 머리까지 굳어버린 건 아니겠지? 정녕 시집갈 마음이 없단 말이니?”“시집가야지. 좋은 사내라면 누가 마다하겠어? 시집을 가야 이렇게 총명하고 곱고 재주 많은 여인들이 태어나는 거 아니겠느냐?”학인들이 깔깔대며 웃으며 농을 주고받았다.심교은은 곁에서 말없이 앉아 있는 언니를 슬쩍 바라보았다.“언니, 어제 경 대인께서 따로 말씀은 없으셨어요?”심연희는 고개를 저었다.“아니. 아마 폐하께서 갑자기 정하신 일이겠지.”“너무 느닷없네요.”심교은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막 서원에 들어왔는데 경장명까지 오다니, 앞으로 마주칠 날이 얼마나 많아질까.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언니, 혹시 아직 마음이 남아 있는 건 아니죠?”심연희는 대답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힌 터였다.경장명은 체념한 듯 보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가 더 가혹한 말을 하지 않은 것은 그가 병약해 보였기 때문이었다.“그런데 폐하의 뜻은 뭘까요? 분명 언니와 천왕 전하의 인연을 바라시는 줄 알았는데… 어쩌자고 경쟁자를 서원에 들이신 걸까요?”심연희는 담담히 답했다.“폐하께서도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 경 대인은 학문이 깊어 선황께서도 직접 낙점하신 탐화랑이야. 그분이 서원에 오는 것만으로도 학인들에게는 큰 영광이지.”“맞아요. 경 대인의 학문은 워낙 유명하잖아요. 이럴 때 잘 배워 두는 게 좋죠.”심교은은 그렇게 말하며 다른 학인들이 뒷마당으로 향하는 걸 보고는 자신도 따라가려 했다. 경 대인이 어디에 머무는지 보고 싶었던 것이다.심연희는 붙잡을까 하다가, 이내 말없이 포기했다.그때 도문군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폐하께서 아씨와 천왕 전하를 위해 참으로 마음을 쓰고 계시군요.”심연희는 이해하지 못한 듯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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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4화

“언니와 경 대인은 절대 함께할 수 없어요!”심교은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송윤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히 웃었다.“그래, 알겠다.”“언니?”심교은은 의아스러웠다. 송 언니는 언제나 과거에만 뜻을 두고, 차라리 평생 혼인하지 않겠다던 사람이 아닌가? 혹시 자신이 오해한 걸까. 아니면 경 대인을 향한 마음이 조금은 있는 걸까?그러나 송윤선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네 생각이 맞아. 나 혼인할 마음은 없어.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니? 폐하께서 아무리 앞장서신다 한들, 여인이 평생 혼인하지 않고 살 수 있겠느냐.하잘것없는 사내라면 애초에 바라지도 않겠지. 하지만 경 대인처럼 한 사람만 마음에 두고 평생을 함께하려는 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가치는 있지 않겠니?”“……”심교은은 입술만 달싹이다가 끝내 삼켰다.송윤선이 부드럽게 다독였다.“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내가 서운해하지는 않을 테니.”심교은은 잠시 망설였다.이건 경 대인의 비밀이었으니 함부로 말하기 어려웠다.송윤선은 눈치 빠르게 웃으며 물었다.“혹시 말이 새어 나갈까 걱정되는 게냐?”심교은이 침묵으로 답하자, 송윤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안심하거라. 누구에게도 입 밖에 내지 않을테니.”잠시 고민하던 심교은은 낮게 속삭였다.“그저… 경 대인께 통방첩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훗날 서장자가 생기지 말란 보장이 어디 있겠어요?”그녀는 끝내 노골적으로는 말하지 못했다. 그저 조심하라는 뜻으로 흘려 한마디 던진 것뿐이었다.“……”송윤선은 순간 말이 막혔다.그렇다면, 평생 한 사람만 곁에 두겠다던 약속은 다 허울뿐이란 말인가?물론 이 세상에 첩 없는 사내는 드물었다. 하물며 경장명 같은 나이라면, 없다는 것이 더 수상했을 터였다. 혹자들은 그런 경우 사내로서 능력이 없는 게 아니냐 의심했을지도 모른다.이를테면 이천만 해도 스무 살이 넘도록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으니, 어떤 이는 불능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불도에 심취했다 하기도 하지 않았던가.심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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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5화

바로 그때였다.경장명이 학인들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이제 그만 쉬거라. 너무 늦었구나.”명륜당 안의 학인들은 차례로 서책을 정리한 뒤 공손히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심연희도 허둥지둥 도문군과 함께 책을 챙겼다.그런데 경장명이 곧장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도문군이 잽싸게 먼저 입을 열었다.“경 대인… 아니, 공자님.”경장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선을 심연희에게로 돌렸다.심연희는 간절한 눈빛으로 도문군을 바라보았다.‘제발, 가지 말고 곁에 있어 달라’는 묵묵한 부탁이었다.하지만 도문군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씨,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그러고는 이내 자리를 떠나버렸다.“……”심연희는 속으로 말을 잃었다.‘아니, 내 눈빛을 어찌 그리도 모른 척할 수가 있단 말인가…’‘교은아… 제발, 평소처럼 빨리 와줘…’바로 그때, 경장명이 입을 열었다.“낭자는 저를 봐도 그다지 반갑지 않은 듯하군요.”심연희는 고개를 들며 담담히 물었다.“병세는 좀 어떠하십니까?”경장명이 부드럽게 웃었다.“다른 이들이 없을 때는 저를 ‘오라버니’라… 아니, 낭자는 그 호칭을 꺼려하니 편히 불러주셔도 됩니다.”심연희는 무심코 명륜당 밖을 흘깃 바라보았다.경장명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국녀학에 있는 이들이라면, 낭자와 제가 혼약을 맺었다 파기한 사실을 모를 리 없겠지요. 그렇다면 오히려 더 당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혼약을 맺었었든, 파기했든, 여전히 지기로 지낼 수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심연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저는 공자의 신분으로 이 자리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있습니다. 서로 피하고 불편해하면, 결국 낭자도 저도 이곳에서 조화를 이루기 어렵겠지요.”“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훗날 ‘남녀 평등이란 과연 가능한가’ 하고 의심하게 될 겁니다.”심연희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경장명을 바라보았다.“듣고 보니… 정말 일리가 있군요.”경장명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다 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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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6화

명주도 눈치챘다.자신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말이다.아달이 억지로 불러내어 한참이나 붙잡아 두었으니, 당연히 제때 올 수가 없었다. 다행히 서원 안에는 예전부터 있던 장종과 이천이 데려온 검오를 제외하면 대부분 여인뿐이었다.지금은 장종이 떠난 자리에 경장명이 머물고 있었다.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아달이 이곳까지 들어와 지내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집요한 성정에 명주가 얼마나 시달렸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경장명이 미소를 머금고 다정히 말을 건넸다.“등을 챙겨 오지 못했는데, 낭자께서 잠시 길을 동무해 주시겠습니까?”“……”심연희는 난처한 듯 명주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선뜻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명주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자신은 그저 하인일 뿐, 모른 체하는 게 옳았다. 아니, 조금 전에도 아달이 공연히 흥분하며 ‘눈치껏 행동하라’고 하지 않았던가.명주는 눈치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잘 알기에 외면해야 했다. 심연희와 경 대인의 사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그때, 도문군이 다가와 아무 말 없이 명주의 팔을 붙잡았다.“아씨…”심연희가 놀란 눈을 크게 떴다. 도문군은 어째서 이러는 것일까?“수하가 보이지 않습니다. 함께 찾아보시지요.”낮게 내뱉은 그의 목소리에, 버티던 명주를 향해 한 마디가 더 덧붙었다.“수하가 사라져 둘째 아씨께서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방금 전까지 둘째 아씨께서 아씨를 급히 찾았습니다.”“……”명주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은근한 암시처럼 들렸다. 설마 도문군마저 경장명이나 아달에게 매수된 것일까?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긴 국녀학. 게다가 경 대인이 흉악한 자도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믿어도 좋을 사람이라 여겼다.명주는 도문군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끌려가면서도 등을 심연희에게 내밀었다.“그럼 소인은 수하를 찾아보겠습니다.”심연희는 두 손으로 등을 받아 들고 멍하니 서 있었다.“……”이게 어찌 된 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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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7화

황제가 내려준 이번 기회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그러나 함께 전해진 무거운 경계와 경책은 경장명의 가슴을 쿵 하고 울리게 했다.똑똑한 이라면 굳이 말끝을 길게 늘이지 않아도 뜻을 알아듣는 법.황제의 의도를 그는 너무도 잘 알았다. 자신을 국녀학에 들여보낸 것은, 매일 심연희와 마주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려는 뜻이었다.그리고 동시에 만약 이천이 조금이라도 심연희에게 마음을 둔다면, 남자의 본능적인 집착과 욕망이 깨어날지도 모를 터. 그때가 되면, 굳이 그녀가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아도 이천 스스로 나설 터였다.하지만 그 판에서 자신이 이길 확률은 크지 않았다.그럼에도 황제는 분명히 말했다. 심연희가 원하는 상대라면, 그가 누구든 황제가 친히 혼례를 허하겠다고.그런데 어찌 이 기회를 놓칠 수 있으랴. 경장명은 결코 물러서지 않을 작정이었다.심연희는 그가 공자들의 숙소로 향하는 뒷모습을 지켜보다, 등을 들고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경장명은 걸음을 일부러 늦추어 그녀가 곁에 설 수 있도록 맞춰 주었다.오늘은 달빛이 유난히 밝아 등롱이 없어도 길이 또렷하게 보였다.그럼에도 그는 두 손을 등 뒤에 가지런히 모으고, 입가에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여유롭고 흥겨운 모습으로 걸었다.그 순간, 심연희의 눈에 그는 경성에서 이름 높던 풍류와 재능을 겸비한 청년의 모습 그대로였다.공자들의 숙소에 닿자, 많은 학인들이 두 사람을 발견했다.누군가는 부러운 눈길을 보냈고, 또 누군가는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품었다.그러나 모두가 서원에 들어올 때 맹세한 바 있었다.살아 있는 동안, 결코 먼저 나선 이를 시기하거나 헐뜯지 않겠다고.오히려 남자와 스스럼없이 마주하며 용기 있게 발걸음을 뗀 동무들을 존중하겠다고.심연희는 국공부의 장녀였다.게다가 경장명과 혼약을 맺었다가 파혼한 사이였음에도 여전히 지기처럼 지내려 하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태도는 오히려 학인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국녀학에 들어온 이들 중 누구도 파혼이나 이혼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경장명이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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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8화

그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하늘빛마저 잿빛으로 가라앉은 지 벌써 사흘째였다.이영은 어전에 올려진 주청들을 훑어보며 조용히 당안을 불렀다.“오라버니는 뵈었느냐?”당안이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아뢰었다.“폐하, 천왕 전하께서는 이미 금융궁 연회전에 도착하셨습니다.”“벌써 와 계시단 말이냐?”이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웃었다.“그거 잘되었구나.”심초운은 며칠 전 궁을 다녀간 이후로 줄곧 궁 밖에 머물고 있었다.장사를 핑계로 내세우긴 했지만, 실상 어떤 이유인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오래 걸릴 것이라며 조용히 출궁한 상태였다.당안이 덧붙였다.“예,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이영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고, 당안은 그 뒤를 따랐다.금융궁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상 위에 음식이 정갈히 차려져 있었다.“며칠 사이 못 뵈었더니, 오라버니 얼굴이 한결 수척해지셨군요.”이영이 미소 띤 얼굴로 맞이하자, 이천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모아 절을 올렸다.“폐하, 오랜만에 문안드립니다.”“모두 일어나십시오.”매번 이렇게 격식을 갖추니, 이영도 더 할 말이 없었다.자리에 앉자, 송이가 하녀 둘을 불러 상을 더 차리게 한 뒤 조용히 물러났다.이영이 입을 열었다.“초운이가 궁 밖으로 나간 지 며칠쯤 되었느냐?”“나흘째입니다. 그 사이 단 한 번 돌아오셨습니다.”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니 당안이가 매일같이 나를 재촉했던 것이로군.”“오라버니께서는 출가한 것도 아니고, 관저를 비우신 것도 아닌데 어찌 저와 저녁 한 끼조차 함께하지 않으십니까?”“이미 휴가를 청했지 않습니까.”“휴가라니요?”냉정을 되찾게 해주겠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오히려 마음이 더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심연희를 가볍게 여기는 셈인데...이영은 부드럽게 눈빛을 누그러뜨리며 말을 이었다.“오라버니께서 휴가를 내셨다 해도, 조정에 나가지 않고 국녀학에 들지 않겠다는 뜻일 뿐이잖습니까. 그렇다고 저와 식사까지 피하셔야 하겠습니까?”이천은 그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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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9화

이천은 고개를 들어 이영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끝까지 따져 묻겠다는 눈빛을 거두지 않자, 마침내 입을 열었다.“그다지 이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이영은 입술을 달싹였다. 너무했다. 아니, 너무 매정했다.그녀는 밥을 두어 숟가락 떴지만, 오늘따라 입맛이 영 없었다. 심초운은 보이지 않고, 오라버니라는 사람은 재미는커녕 벽과 대화하는 듯하니, 그저 따분하고 심심할 뿐이었다.식사를 마친 뒤, 이천은 궁을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 누군가가 불쑥 몸을 날려 마차에 올라탔다. 문이 열리고 발을 들이자, 마차 등불 아래로 평상복 차림의 이영 얼굴이 드러났다.“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연희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연희를요?” 이천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체 심연희 앞에서 또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그건 좀 부적절하지 않습니까?”“뭐가 부적절하단 말입니까?” 이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이 시간에 연희를 찾다니요.”이천은 이영뿐 아니라 이진 역시 심연희를 찾아갔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심연희가 그렇게 대담하게 고백할 수 있었을 리 없지 않은가.“오라버니, 착각하지 마세요. 제가 연희를 찾는다고 해서 무조건 오라버니와 연희를 이어주려는 줄 아나봅니다?”이천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그게 아니라는 건가?이영은 고개를 저었다.“물론 아니지요. 연희를 찾는 데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게다가 오라버니께서는 연희에게 마음이 없으니, 계속 연희 등을 떠밀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닙니까?”“어찌 한 평생 오라버니만 붙잡고 있겠습니까? 경장명이야 허물도 많지만, 적어도 연희에게만큼은 진심이었습니다.”이천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왜 웃으십니까?”마차가 덜컹이자, 이영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더라면, 애초에 혼약을 파기하진 않았겠지요.”이영은 입을 다물었다.“그저 서장자일 뿐인데…”“폐하께서 남녀평등을 주장하시지 않았습니까. 남자가 첩을 여럿 두는 게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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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0화

서원 안, 복도에는 등롱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명륜당 안은 더욱 밝게 불이 켜져 있었다.이천은 그 광경에 잠시 놀랐으나 곧 기억이 났다. 문 대인이 이와 관련해 보고한 적이 있었고, 그는 그때 장종을 찾아보라고 지시했었다.하지만 장종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갔고, 지금은 경장명이 임시로 장종의 자리를 대신 맡고 있는 중이었다.그렇다면, 지금 경장명은 관저로 돌아간 걸까? 아니면 아직 서원에 머물고 있는 걸까?이영이 입을 열었다.“경장명 말입니다. 참 성실하더군요. 벌써부터 행림각에 머문다고 합니다. 오라버니 있는 원치각과 나란히 붙어 있어 있지요. 앞으로 더욱 자주 마주치겠습니다?”이천은 그런 여동생을 바라봤다.그녀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 표정 어딘가에는 장난기와 골려주려는 기색이 엿보였다.마치 그의 웃음거리가 될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정말이지 우습고도, 골치 아픈 여동생이었다.두 사람은 함께 원치각으로 향했다.“연희가 돌아오면, 좀 만나 이야기를 나눌 생각입니다.”이천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검오는 두 시진 전에 떠났다가 이제야 돌아왔다. 그는 차를 우려 내왔고, 마침 학사들도 수업을 마친 참이었다.이영이 말했다.“갑시다.”“같이 오랜만에 달이나 구경하러 가볼까요.”“전 가지 않겠습니다.”이천은 무심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그럼 별 구경은요?”이영은 끈질기게 물었다.“방금 전까지 연희를 보러 간다하지 않으셨습니까?”“그렇긴 하죠.”이영은 검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서 연희를 좀 데려와주렴.”검오는 주저하며 이천을 바라봤다.이천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사사로운 일이 아니라면, 내가 명을 내리지 않았어도 폐하의 명이라면 따르도록 하여라.”어차피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면, 황제의 명을 따르는 것이 가장 무난하고, 가장 안전했다.검오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예, 바로 다녀오겠습니다.”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돌려 사라졌다.이영은 다시 이천을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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