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전남편도, 아들도 내 발밑에 매달렸다: Chapter 31 - Chapter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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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화

이안에게 우유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마저도, 그 집에서는 늘 뒷전이었다.온 집 안은 이안 때문에 야단법석이었고, 윤제는 급히 예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예진은 막 집에 도착해 현관에서 신발을 벗던 참이었다.소파에 앉기도 전에 걸려온 전화.이안이 또 알레르기 발작을 일으켰다는 말에 예진의 몸이 반사적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하지만 곧 스스로를 붙잡았다. 입술을 꽉 깨물며,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약은 약통 두 번째 칸에 있어요. 설명서대로 복용시키면 되고요. 이안이에게 우유 알레르기 있는 건 벌써 몇 번을 말했는지 모르겠네요. 앞으로는 유제품 절대 주지 마세요.”윤제는 허둥지둥 약을 찾아 이안에게 먹였다.한참을 앓던 이안은 결국 호흡이 가라앉았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하지만 이런 상태로는 오늘은 어린이집은커녕 누군가 곁에서 종일 돌봐야 할 상황이었다.평소 같았으면, 예진이 새벽부터 밤까지 지극정성으로 돌보며 고생했겠지만, 지금은 예진이 집에 없었다. 윤제는 인상을 찌푸렸다.[곧 출근해야 하니까, 당신이 당장 와서 이안이 돌봐.]예진은 그 말에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안 가요. 이안이도 더 이상 날 엄마라고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런 애가 내가 옆에 있는 걸 원할 리도 없고요.”‘이젠, 정말 아니란 걸... 알았잖아. 내가 아무리 매달려도, 안 되는 게 있어.’[고예진!]윤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붉어진 눈가로 쏟아내듯 말했다.[투정도 정도가 있어야지. 지금 당장, 돌아와!]예진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이 남자는 결국 자신이 ‘투정’을 부리는 거라고 믿고 있을 테니까.‘이해할 생각도, 들을 생각도 없는 사람한텐...’‘더 이상 말을 섞지 않는 게 맞아.’핸드폰 화면이 서서히 어두워졌다.예진은 전화를 뚝 끊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옷을 갈아입은 뒤 조용히 주방으로 향했다.냉장고를 열고 재료를 꺼내는 손끝엔 더 이상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었다.한편, 전화기 너머에서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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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화

민혁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훨씬 넓고, 깔끔했다.넓은 통유리가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어서 바깥 풍경이 시원하게 내다보였다.창가 쪽에 자리한 책상에 앉은 민혁은 머리를 숙이고 서류를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사무실로 들어오는 예진을 바라봤다.그녀가 들어서는 걸 보자마자, 손에 쥔 펜을 내려놓았다.“예진 씨, 왔어요?”예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섰다.문쪽 벽을 지나가던 순간, 그녀의 시선이 벽에 걸린 문구 하나에 닿았다.‘정의를 수호하라,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 말라’라는 문구.양각으로 새겨진 붉은 색 문장은 고풍스러운 사무실 분위기와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았다.하지만 예진은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이 말...’머릿속 한켠에 잊힌 줄 알았던 오래된 기억이 문득 밀려왔다.대학교 전공을 선택하던 시절.집안에서는 예진에게 금융 관련 전공을 공부하라며 압박했다.향후 회사 운영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였다.하지만 예진은 그때 이유도 설명하기 어려운, 거의 집착에 가까운 법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그래서 몰래 지원서를 바꾸어 법학과에 원서를 넣었다.그리고 그 일로 집안에서 한동안 가족들과 얼굴을 붉혀야 했다.예진이 처음 법학과 수업을 들었을 때, 교수님이 칠판에 써 내려간 첫 문장이 바로 저 문구였다.‘그땐... 단순히 멋있다고 생각했는데...’잠시 멈춰 선 그녀를 바라보던 민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가볍게 기대며 팔짱을 끼었다.“왜요?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예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고, 응접용 소파로 다가가 보온 도시락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민혁도 곧 따라와 자리에 앉았다.“은주가 그러던데, 예진 씨 요리솜씨가 꽤 좋다고 하더라고요. 오늘은 내가 드디어 그 소문난 밥을 먹는 날인가 보네요.”예진은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사실 몇 번 대접하려다가 자꾸 일이 생겨서요. 이제야 제대로 대접하게 됐네요.”민혁은 말을 잇지 않고, 말없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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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화

민혁은 또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별로예요. 유학까지 다녀온 애들은 결국 대형 로펌이나 기업 법무팀, 아니면 아예 판검사 준비할 겁니다. 그 애들에게 여긴 그저 스펙 채우는 징검다립니다. 금방 그만두고 나가버려요.”예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류를 넘겼다.‘그 말도 일리는 있지.’“이쪽 분들은 어때요? 국내 명문대에 실무 경험도 있네요. 당장 나갈 일은 없어 보이는데...”민혁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이런 친구들... 경력 좀 있다고 자기 잘난 줄 알고, 연봉 몇 억씩 부르거든요. 여기가 그 정도로 여유 있는 사무실은 아니에요. 저도 감당 못해요.”예진은 살짝 웃으며 입술을 다물었다. 그리곤 다시 조심스럽게 몇 장을 더 넘겼다.“그럼 이쪽은요? 막 졸업한 신입인데, 성실해 보이긴 해요.”민혁은 이번에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신입이라... 솔직히 좀 버거워요. 여기 일도 많고 복잡한데, 아직 사회 경험도 없는 친구들은 감정적으로 쉽게 무너져요. 하루 이틀 하고 그만두면 오히려 더 피곤해져요.”예진은 서류철을 덮으며 가볍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결국 이 리스트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거잖아요. 그럼 도대체 어떤 사람이 필요한 건데요?”민혁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잠시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가장 이상적인 건... 명문대 졸업했지만 아직 취직 못 했고, 경력은 거의 없는데 일에 진심이고, 특히 법 쪽에 관심 많고, 당장 일자리가 절실한 사람...”예진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스스로도 모르게 두 눈이 반짝였다.‘이건... 나잖아?’“지금 말씀하신 조건... 그 사람, 바로 여기 있어요.”민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예진을 바라봤다.“예진 씨 본인 말입니까?”예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았다.그리고 눈빛은 이미 어딘가 진지하고 단단해 보였다.“저를 지원자로 생각해보시면 어때요? 말씀하신 조건, 제가 다 맞아요.”민혁은 잠시 난감한 듯 고개를 저었다.“제 비서 한다는 게... 생각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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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화

“한 번 입어볼게요.”예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그녀의 사이즈를 확인하더니, 예진에게 맞는 옷을 찾으러 안쪽으로 들어갔다.예진은 직원을 기다리는 동안 매장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한쪽 선반에 진열된 빨간 신상 백에 시선이 머물렀다.‘색감도 괜찮고, 디자인도 무난하네. 가격만 괜찮으면...’막 다가가려 할 때, 누군가 그녀보다 먼저 손을 뻗어 그 가방을 집어 들었다.예진은 그냥 직원에게 다른 걸 보여달라고 할 생각이었다.그런데, 익숙하면서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스쳤다.“고예진? 진짜 너 맞네?”예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가방을 들고 선 여자는 방연지였다.류아린의 친구로,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그 뒤에는 송선재가 서 있었다.부윤제의 절친 중 한 명.‘이 두 사람... 예전에 류아린이 주선한 파티에서 처음 봤었지. 그때 나도 있었고...’기억을 더듬던 예진이 말을 꺼내기 전에 선재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먼저 선수쳤다.“형수님 맞으시죠? 윤제 형한테 들었는데, 요즘 형수님 쇼핑 같은 거 잘 안 다니신다면서요? 집에만 계셔서 꾸미지도 않는다더니, 오늘 여기엔 웬일이세요??”‘이런 말투... 여전하네.’예진은 속이 살짝 불편해졌다.윤제의 친구들.늘 이렇듯 가볍게 선을 넘는다.그래도 과거엔 참았다. 예진은 ‘부윤제의 아내’였으니까.하지만 지금의 예진은... 윤제도 참아넘기지 않는데, 이 사람들까지 감당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예진은 차분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저, 지금 부윤제 씨랑 이혼 수속 진행 중이에요. 앞으로는 형수라고 부르지 않으면 좋겠어요.”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예진이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뜨려던 순간, 연지가 가볍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뭐라고? 너랑 윤제 오빠가 이혼한다고?”연지의 얼굴에선 순간적으로 감출 수 없는 기쁨 같은 감정이 스쳤다.‘그래, 네가 이 말 듣고 기뻐할 거라는 건, 사실 예상했어.’선재 역시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보탰다.“진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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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화

집안의 생활비는 전부 윤제가 부담하고 있었다.예진이 지금까지 써온 돈 역시, 그가 보내준 돈이었다.하지만... 예진은 알고 있었다.‘이건, 내가 당연히 쓸 수 있는 돈이야.’긴 세월 전업주부로 살아오며 아이를 키우고, 집을 돌보고, 삶의 모든 시간을 오롯이 가족에게 바쳤다.‘내가 일하지 않은 게 아니잖아.’‘내가 한 것은 세상에서 제일 고된 중노동이었어.’‘부부는 법적으로 공동체야. 남편이 버는 돈에 내 몫이 있는 건 당연하지.’예진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나랑 부윤제 씨는 법적으로 부부예요. 남편이 벌어들인 수입에는 아내인 나의 몫도 포함돼요. 나는 이혼하더라도, 내 권리는 하나도 포기 안 해요.”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둘을 또렷하게 바라봤다.“남의 가정사에 참견할 시간 있으면, 자기 인생이나 좀 챙기세요.”그 말에 연지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선재 역시 웃던 얼굴이 순간 얼어붙었다.‘아픈 데가 찔렸겠지.’선재는 집안은 탄탄했지만, 스스로 이룬 건 하나도 없었다.이십 대 후반이 넘도록 매일 술자리와 유흥만 반복하며 ‘아버지 덕에 사는 금수저’라는 말이 따라붙었다.연지는 그런 선재 곁을 맴돌며 겉으로는 선재의 여자친구처럼 행동했지만, 실상은 돈줄을 놓치지 않으려 눈감고 참는 게 다였다.선재가 다른 여자들과 엮여도 연지는 애써 모르는 척했다. 그렇게라도 곁에 있어야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그게 연지가 선재 옆에 붙어 있는 유일한 이유라는 것을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연지는 예진의 말을 들은 순간, 정면에서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앞으로 한 발 내디뎠다.“뭐라고?”하지만 선재가 팔을 뻗어 그녀를 막아섰다.마침 그때, 직원이 옷을 들고 다가왔다.예진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옷을 받아 피팅룸으로 들어갔다.커튼이 닫히고, 어둡고 좁은 공간이 그녀를 감쌌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가려지지 않았다.“고예진 진짜 웃기지 않냐? 지가 뭐라고!! 윤제 오빠랑 우리 아린이 사이에 끼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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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화

“허, 집 안에만 갇혀 살림만 하던 아줌마가 무슨 직장인 코스프레야. 정장을 산다고? 안 웃기냐.”“내 돈으로 뭘 사든 그쪽이 신경 쓸 일은 아니죠.”선재가 문 쪽에서 슬쩍 끼어들었다.“자기야, 그냥 커리어우먼 느낌 내고 싶어서 그런 거래. 귀엽잖아.”연지는 코웃음을 쳤다.“그럴 수도 있지. 근데 고예진처럼 사회에서 경력 단절된 지 오래된 사람이 무슨 직장? 나는 못 믿겠는데.”‘말만 하는 너희들 눈엔 안 보이겠지. 내가 얼마나 숨죽이고 살아왔는지.’예진은 대꾸할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예진 씨. 내일 면접 오실 때 졸업 증명서나 학력 증빙서류 꼭 지참해주세요.]“네, 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예진은 계산대로 걸어가 옷값을 결제했다.구석에서 옷을 정리하던 연지가 예진 쪽을 힐끔 보더니, 눈빛이 흔들렸다.‘면접이라고? 진짜?’그녀는 선재 쪽으로 걸어가 속삭였다.“고예진 진짜 일자리 구하는 거 아냐? 말도 안 돼...”선재는 입꼬리를 비뚤게 올렸다.“설마... 윤제 형이 자기 마누라 일하게 놔두겠냐? 오늘 밤에 슬쩍 떠볼게.”예진은 아무 말 없이 결제를 마치고, 입고 왔던 옷가지를 차곡차곡 접어 들었다.연지와 선재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조용히 매장을 나섰다....한편, 아린은 윤제가 운영하는 계열사에서 일하고 있었기에 출퇴근이 자유로웠다.오늘은 이안이 아파서 재택근무를 핑계 삼아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내가 이렇게 애까지 챙기는 거 알면 부윤제가 더 고마워하겠지.’점심때 약을 먹고 푹 잤던 이안이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던 아린은 잽싸게 다가갔다.“이안아, 어때? 좀 나아졌어?”이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응, 이제 간지럽진 않아.”하지만 아직 몸에 퍼진 붉은 발진은 그대로였고, 입술도 약간 부어 있었다.‘아직 안심하긴 이르네...’“괜찮으면 조금 더 잘래?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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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화

아린은 국수 그릇을 조리대 위에 툭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이모님, 그렇게 오랫동안 예진 씨 곁에 있었으면서 어떻게 계란국수 한 번 못 보셨어요?”유순자는 입꼬리를 비뚤게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못 봤지요. 사모님이 자기 아들 해주던 국수를 내가 옆에서 슬쩍 본다고요? 남의 손맛이라는 건, 슬쩍 훔쳐서 되는 게 아니에요. 훔친 건 결국 훔친 거고, 그걸로 만든 맛은 내 마음에도 안 남지.”‘지금 나를 돌려까는 거네? 대놓고 말은 못 하고...’아린은 눈을 부릅떴다. 당장이라도 뭐라고 쏘아붙일 기세였다.하지만 그 순간, 이안이 계단을 내려왔다.아린은 화를 꾹 누르고 이안에게 다가가 달콤한 콧소리로 말했다.“이안아, 왜 내려왔어? 아직 쉬어야지. 얼른 다시 올라가자!”그 모습을 본 유순자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앞에선 천사, 뒤에선 독사. 진짜 표리부동하긴.’“요즘 말로 하면, 완전 불여시지 뭐.”“할머니, 방금 뭐라고 했어?”이안이 유순자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아린은 바로 이안 뒤에 서서 유순자를 노려보았다.‘감히 내 앞에서 나를 이런 식으로 말한다고?’유순자는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이었다.‘착한 사람보다 무서운 건 권력 있는 악인이야.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나만 손해지.’그녀는 바로 얼굴에 웃음을 띠고 이안에게 다가갔다.“도련님, 그 계란국수 말이에요. 그건 도련님 엄마만 만들 수 있는 특별한 국수거든요. 다른 사람은 아무리 해도 그 맛이 안 나요. 진짜 먹고 싶으면 엄마한테 전화해서 직접 해달라고 해야죠. 알겠죠?”이안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엄마한테 전화하라고? 싫어. 나 아직 화났는데...’“나는 전화 안 할래. 할머니가 해 줘. 엄마한테 이안이 아팠다고, 국수 해달라고 해줘...”‘윤제 도련님을 꼭 닮았어. 저 입 꾹 다무는 성격 하나까지 똑 닮았네.’유순자는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꺼내들었다.‘계속 이 상태로 버티면... 진짜 이혼까지 가고 말겠어. 그러기엔 너무 아까운 부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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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화

30분쯤 지나 배달 주문한 치킨이 도착했다.아린은 치킨이 든 봉투를 들고 이안의 방 앞에 섰다.문 안에서는 여전히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계란국수 한 그릇 못 먹은 게 저렇게 삐질 일이야?’아린은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이안아, 고모가 계란국수보다 더 맛있는 거 가져왔는데?”이안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여전히 말이 없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돌린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아린은 기다렸다는 듯 치킨 상자를 열어 문 앞에 살포시 내려두었다. 곧 기름진 고소한 향이 방 안 가득 퍼졌다.‘이 냄새, 치킨이다!’이안은 벌떡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튀어나와 문을 벌컥 열었다.눈앞에 놓인 황금빛 치킨 상자를 본 순간, 눈이 반짝였다.‘역시... 애는 솔직해. 고예진은 맨날 몸에 안 좋다며 안 사줬으니 얼마나 먹고 싶겠어.’아린은 치킨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옮겨 놓았다.이안은 젓가락도 없이 손으로 집어 먹기 시작했다. 입 주변이 기름 범벅이 되도록 허겁지겁 먹는 모습에 아린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고모, 고모가 최고야!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주잖아.”아린은 흐뭇하게 웃으며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래, 우리 이안이 먹고 싶은 거, 고모가 다 사줄게.”‘건강이니 뭐니, 그게 다 무슨 상관이야. 이 애만 내 편 들어주면 그걸로 된 거지.’...그날 저녁, 윤제는 퇴근길에 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이안 상태를 확인한 후, 별일 없다는 말에 안심했다.“아린아, 이안이 잘 돌봐줘서 고맙다. 너 아니었으면 진짜 걱정했을 거야.”“...”그동안 이안을 돌보느라 고생한 아린 생각에, 윤제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불러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겸사겸사, 아린의 생일을 어떻게 챙겨줄지 이야기도 나눠볼 요량이었다.새로 생긴 바에 도착했을 땐 친구들이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윤제가 들어서자 분위기가 한층 들떴다.“오! 드디어 애아빠 오셨네!”임건우는 친구들 중 윤제 다음으로 나이가 많고 성격도 비교적 차분한 편이었다.막내 송선재는 특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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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화

서은주는 요즘 새로 오픈한 이 근처 바에서 일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막 휴게실에서 나와 홀 쪽을 둘러보던 순간, 앞쪽 VIP 좌석에 앉아 있는 윤제와 그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다.‘저기 앉은 건 부윤제 맞지? 저 사람들... 다 뭐지?’은주의 눈썹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게다가 귀에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형수님’, ‘예진 씨’...그 소리에 은주는 그대로 옆 테이블, 윤제 일행의 등 뒤에 자리 잡고 앉았다.그리고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그렇게 싸운 거면, 네가 좀 풀어주지 그랬냐?”건우가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말했다.윤제는 잔을 기울이며 씩 웃었다.“내가 언제부터 그런 걸 했다고. 좀만 지나면, 이안 엄마는 매번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다시 집으로 기어들어올 거야.”그 말에 은주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뭐? 기어들어온다고?’윤제의 얼굴엔 은근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선재가 다시 말을 이었다.“근데 오늘 내가 형수님 봤잖아요. 연지랑 백화점 갔다가... 출근룩을 사던데? 내일 면접 본다고 하던데요? 윤제 형, 형수님 일하게 하는 거예요?”그 순간, 윤제가 들고 있던 담배를 꾹 누르며 재떨이에 비벼 댔다. 손끝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태현은 비웃듯 코웃음을 쳤다.“형수님이? 일? 전업주부가 언제 사회생활 해봤다고. 형이 허락하든 말든, 된다고 해도 받아줄 회사가 어디 있겠냐?”선재도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근데 태현아, 난 진짜로 들었어. ‘내일 면접 있다’고 분명히 말했어.”세 사람의 시선이 윤제로 쏠렸다.윤제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눈앞의 이 셋 앞에선 애써 태연한 척했다.‘진짜 면접 본다고? 고예진이? 그동안 뭐 하나 제대로 한 적 없던 사람이?’그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면접 좀 본다고 뭐 달라지냐? 어차피 붙지도 못할 거야. 이안 엄마를 누가 뽑겠냐?”세 사람은 그 말에 맞장구치며 웃었다.은주는 더는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허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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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화

윤제는 아까까지만 해도 큰소리치며 호언장담했다. 자신이 전화 한 통만 하면 이안 엄마는 당장 다시 기어들어온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그런 그가 지금, 가정법원에서 온 이혼소장 문자를 받아 제대로 뒤통수를 맞았다.‘체면을 중시하는 윤제 성격에... 속으론 지금 폭발 직전이겠지.’건우는 윤제의 굳은 얼굴을 보고 슬쩍 선재와 태현에게 눈짓을 보냈다.그제야 두 사람도 분위기를 감지하고 입을 다물었다.눈치 빠른 건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말투는 살짝 낮추고, 분위기를 전환하듯 부드러웠다.“윤제야, 여자들이 원래 좀 그런 거 있잖아. 괜히 극단적인 말 하면서 남자 반응 떠보려는 거...”“예진 씨도 진심으로 이혼하려는 건 아닐 거야. 그냥 너한테 관심 끌려고 그러는 거지.”태현도 재빨리 맞장구쳤다.“맞아요. 형수님이 형 좋아하는 거야 우리가 다 아는 거잖아요. 형 없으면 못 사는 사람처럼 굴었잖아요. 그리고 이안이도 있는데, 설마 진짜 이혼까지 가겠어요?”건우와 태현이 슬쩍 선재를 바라보자, 선재도 바로 따라붙었다.“건우 형이랑 태현 말이 맞는 듯. 형수님도 이제 나이 꽤 됐고, 이안이까지 있는데... 쓸만한 경력도 없고, 요즘같은 세상에 학벌 하나로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게다가 형수님 친정도 요즘 형편없잖아요. 형이랑 헤어지면 솔직히... 누가 형수님 데려가겠어요?”‘그래, 맞아. 다들 이렇게 말하는데 내가 뭘 걱정하는 거지.’윤제는 속으로 천천히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예진이도 결국 날 못 떠나. 그게 현실이야.’사람은 흔들릴 때일수록 주변의 말에 기대어 중심을 잡으려 한다.윤제도 그랬다.지금, 친구들의 입이 내뱉는 그 ‘확신’이 꼭 필요했다.잔에 술을 가득 따르고, 단숨에 들이켰다.그제야 윤제의 얼굴에 깔렸던 음침한 그림자가 조금 옅어졌다.그리고 다시,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갔다.“애도 낳았고, 몇 년 동안 내가 몇 번을 데리고 잤는지도 모르는데... 이젠 누가 봐도 중고야. 그런 여자를, 누가 데려가.”‘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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