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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부자의 배신, 이혼만이 답이다!: Chapter 1181 - Chapter 1190

1452 Chapters

제1181화

하지율은 주용화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약간 따뜻하긴 했지만 열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하지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자책했다.D국의 공기는 원래 습하다. 어젯밤은 내내 비가 내려서 춥고 습했다.그러니 바닥은 더 차가웠을 것이다.그런데 주용화를 바닥에서 재웠으니...주용화가 아닌 하지율이 바닥에서 잤다고 해도 감기에 걸렸을 것이다.만약 이 중요한 시기에 주용화가 감기에 걸린다면 D국을 떠나는 건 물론, 킬러들을 피해 도망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하지율은 천천히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을 떴다.침대 위의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 하지율은 다시 주용화 곁으로 걸어갔다.어떻게든 일단 주용화를 침대에 눕혀 한기를 피하게 해야 한다.하지만 주용화는 덩치가 고지후만큼 컸다.아무리 하지율이 요즘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해도 덩치 차이가 많이 나는 남자를 침대에 눕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하지율은 반나절 동안 노력해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주용화를 등에 업었다.이때 주용화가 드디어 눈을 떴다.주용화는 천천히 눈을 뜨고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주용화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잠겨 있었다. 하지율은 그 목소리에 약간 놀랐다.“화야 씨, 지금 어때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침대에서 조금 쉴래요?”주용화가 하지율을 쳐다보았다.그 눈빛은 평소와는 아주 달랐다. 마치 을씨년스러운 밖의 날씨처럼 차갑고 어두웠다.주용화가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네.”하지율은 주용화를 부축해 침대에 눕힌 뒤 물었다.“화야 씨, 아직도 머리가 아파요?”주용화는 한참 멍하니 앉아 있다가 대답했다.“네.”하지율이 물었다.“혹시 약은 챙겼어요? 아니면 평소에 머리 아플 때 무슨 약을 먹었어요?”한참 지난 뒤 주용화가 얘기했다.“지병이에요. 약을 먹어도 소용없어요.”“그렇군요. 그럼 일단 잘 쉬고 있어요. 아침 사러 나갈 건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주용화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일단 쉬고 있어요. 금방 돌아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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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2화

유민재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저기... 튼튼한 밧줄 같은 거 찾아서 주용화부터 먼저 묶어두세요. 불안하면 수갑이나 족쇄 같은 거라도 써요. 그러면 쉽게 못 빠져나올 거예요.”하지율은 그 말을 듣고 그대로 얼어붙었다.유민재에게 전화한 목적은 주용화가 평소에 먹는 약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그런데 유민재는 주용화를 묶어두라고 하고 있다.하지율이 말했다.“유민재 씨,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유민재는 농담이 아니라고 당장 말하고 싶었다.하지만 하지율은 주용화의 진짜 상황을 모르고 있었고 이 시기의 주용화가 얼마나 무서운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유민재는 한숨을 내쉬고 표현을 바꿨다.“주용화의 두통은 오래된 지병이에요. 발작이 오면 성격이 이상할 정도로 거칠어지고 감정도 극도로 불안정해져요. 심하면 가족도 못 알아봐요. 그때는 거의 이성이 없어요. 지금은 딱히 특효약도 없고요, 이런 상태를 확실히 진정시켜 주는 약도 없어요. 의사도 정말 많이 만나봤는데 여전히 별 소용이 없어요.”하지율이 물었다.“주용화 씨는 대체 왜 그런 병을 앓게 된 거예요?”유민재가 답했다.“원인은 복잡해요. 불면증도 이유 중 하나고 심리적인 요인도 있어요. 하여튼 치료가 쉽지 않아요. 의사 말로는 해결하려면 심리적인 것부터 치료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말하자면 주용화의 병은 대부분 심리적 요인에 달려 있었다.원래부터 좋은 사람인 건 아니지만 발병하면 더 극단적인 상황만 자꾸 일어났다.게다가 주씨 가문은 오래된 가문 문제도 있고 유전적 요소도 있다.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그런 부분은 해결하기 어렵다.아무래도 사람은 완벽할 수 없는 법이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외모도 훌륭하고 머리도 비상해서 천재가 많이 나지만 대체로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솔직히 말해서 주용화는 한동안 발병하지 않았다.예전 같았으면 한두 달에 한 번은 꼭 그랬지만 하지율 곁에 붙어 지낸 뒤로는 감정이 안정적으로 유지됐었다.최근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지만...그 생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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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3화

“그동안은...”유민재가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하지율에게 조심스럽게 일러줬다.“하지율 씨는 가능한 한 주용화에게서 좀 떨어져 계세요. 다칠지도 모르니까요.”지금의 주용화는 머리가 거의 멍해서 본인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바로 예의와 염치가 있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지금의 주용화는 이성 잃은 짐승이라고 해도 될 만큼 위험했다.그 주변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모두 위험해질 수 있었다.하지율은 주용화에게 특별한 존재였다.하지만 유민재는 하지율의 안전을 두고 도박하고 싶지 않았다.만에 하나 주용화가 이성을 되찾은 뒤 하지율을 다치게 만든 걸 후회하면 그땐 어떻게 할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유민재가 다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방 안에 가둬두는 방법도 있어요. 문을 안에서 못 열게 잠가두고 음식은 주지 말고 물만 좀 넣어두세요. 걱정하지 마세요. 주용화는 하지율 씨를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음식이 없으면 체력이 떨어지고 그러면 주용화의 공격성도 훨씬 낮아질 것이다.예전에 그분도 그런 식으로 했었다.하지율은 유민재의 말을 듣는 내내 미간이 찌푸려졌다.‘이게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맞나?’사람을 방에 사흘 동안 가둬두고 밥도 주지 않고 물만 주면 배고파서 미쳐버릴 것이다.하지율은 문득 주용화의 말이 떠올랐다.본인에게는 친구가 없다고, 유민재와는 속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는다고 했었다.유민재는 솔직히 좀 믿음직하지 않았다.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하지율은 굳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알겠어요. 알려주셔서 고마워요.”유민재는 하지율이 본인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하지율 씨,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네.”전화를 끊고 나서도 하지율은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바이올린을 켜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억지로 한 곡 켠다고 해도 효과가 있을지 몰랐고 무엇보다 주변의 시선을 끌 게 뻔했다.노엘슨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그건 정말 큰 일이다.하지율은 밖으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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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4화

하지율은 몸이 굳었다. 온몸의 솜털이 한꺼번에 곤두서며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몸이 본능적으로 위험한 기운을 감지하고 있었다.그 감각은 하지율이 늘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느끼던 것이었다.하지율은 마치 못에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듯 주용화의 시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지율 씨였군요.”하지율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용화 곁으로 다가갔다.“화야 씨, 먼저 뭐라도 좀 드실래요?”주용화는 무심코 미간을 문질렀다.“머리가 너무 아파서 일단은 못 먹겠어요.”하지율이 말했다.“안 먹으면 머리가 더 아파요. 회복에도 안 좋고요. 조금이라도 먹는 게 낫지 않을까요?”주용화의 동공이 흔들렸다.지금 이 순간, 주용화는 핏빛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 갇힌 것처럼 아무것도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그런데도 걱정으로 흔들리는 하지율의 눈빛만은 그의 시야에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들어왔다.주용화의 이성이 조금, 아주 조금 되돌아왔다.주용화는 시선을 내리깔고 대답했다.“알겠어요.”하지율이 주용화를 부축해 일으켰다.남자의 손은 차가운 돌덩이처럼 비정상적으로 차가웠다.주용화는 두 주먹을 쥔 채 꽉 움켜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질 정도였다.마치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참아내는 듯 숨소리까지 거칠어졌다.하지율은 이상함을 느끼고 무의식적으로 주용화를 바라봤다.주용화의 눈에서 붉은빛이 번뜩이며 살기가 스치듯 지나갔다.이윽고 주용화의 입술 사이로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지율 씨, 빨리 가요.”주용화가 마른침을 삼키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지금 주용화는 온 힘을 다해 본인을 통제하고 있었다.머릿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이성이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줄처럼 조금만 건드리면 그대로 끊어질 것 같았다.이 이성마저 놓아버리면 주용화는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해칠 것이다.하지율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화야 씨...”하지만 이윽고 하지율의 목이 확 조여 왔다.주용화의 차가운 손끝이 목덜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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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5화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두통은 이전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지금 이렇게 정신이 또렷한데도 머리는 여전히 찢어질 듯 아팠으니까 말이다.주용화는 무심코 머리를 더듬었다가 예상치 못하게 붕대를 만졌다.그 순간 기억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주용화는 바로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떠올렸다.주씨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이 고질병은 뼛속에 새겨진 저주 같았다.정신이 나갔을 때는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르지만 정신이 맑아지면 자신이 뭘 했는지 또렷하게 기억한다.어떤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죽이고 깨어난 뒤 그 기억을 떠올리고 완전히 미쳐버린다. 다시는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말이다. 어떤 사람은 미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그 저주는 마치 주씨 가문 역대 가주의 숙명처럼 이어져 왔다.머리가 좋고 비상할수록 더 쉽게 미친다. 예외는 없다.주용화는 굳은 표정으로 본능적으로 주위를 살폈다.언제 그랬냐는 듯 밖의 비는 멎어 있었고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곁에 있는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고요하고 단정한 얼굴에 옅은 빛이 덧씌워져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하지율은 침대 옆에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고개가 조금씩 까딱거리는 모습은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미 잠든 상태였다.주용화는 하지율의 눈 밑에 그려진 짙은 그늘과 미간 사이의 초췌함을 발견하고 하지율이 제대로 쉬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주용화는 옆에서 꾸벅꾸벅 잠든 하지율을 한참이나 가만히 바라보았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꾸벅꾸벅 졸던 하지율의 팔이 결국 힘이 풀려 떨어져 버렸다.주용화가 무의식적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하지율이 먼저 눈을 떠버렸다.시선이 마주치자 둘 다 잠깐 멍해졌다.먼저 정신을 차린 건 하지율이었다. 하지율은 옆에 있던 탁상 스탠드를 손에 쥔 채 낮게 물었다.“화야 씨, 좀 괜찮아졌어요?”주용화는 하지율의 행동을 보자 저도 모르게 머리의 상처를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아마 주용화의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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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6화

주용화의 시선이 하지율의 얼굴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마치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마음속에 박아 넣으려는 듯 집요한 눈길이었다.“그때 지율 씨는 연주회를 앞두고 매일 바이올린을 켰죠. 그 선율이 들려올 때마다 나는 기적처럼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어요.”‘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확신에 찬 주용화의 고백을 직접 마주한 하지율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누군가의 생존이 자신의 연주에 저당 잡혀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더 커다란 부채감으로 다가왔다.하지율은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듯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의 연주로는 안 되는 건가요? 증상을 조금이라도 완화할 방법이...”“지율 씨만큼의 기량이 아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의 연주로는 해결되지 않더라고요.”이미 해리를 꺾고 거장의 반열에 오른 하지율이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도 그녀보다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는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 주용화의 말은 단순한 아첨이 아닌 서글픈 사실이었다. 게다가 그 오만한 거장들이 이름 모를 경호원의 불면증 치료를 위해 매일 밤 활을 켤 리도 만무했다.“이건 일종의... 정신 치료법이에요. 음악이 통했다면 다른 비슷한 방식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여러 방면으로 시도해 봐요. 참, 음악 말고 이전에 시도해 본 다른 방법은 없었나요?”“없었어요.”단호한 주용화의 대답에 하지율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그럼 지금부터라도 다른 길을 찾아보죠.”하지율은 문득 예전에 고윤택을 재울 때, 아이의 머리맡에서 매일 밤 동화책을 읽어주던 평온한 기억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 거칠고 위태로운 남자에게도 그런 다정함이 약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이 피어올랐다.생각에 잠긴 채 물끄러미 주용화를 바라보던 하지율은 주용화 역시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기분 탓일까. 지난번 야외에서 습격을 당한 이후로 주용화의 눈빛에는 설명하기 힘든 낯선 열기가 서려 있었다. 그 시선이 닿는 곳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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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7화

하지율의 말에 주용화가 미안한 듯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해 짐이 되었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미안해요... 이번에는 지율 씨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네요. 오히려 짐이나 되고...”하지율이 자책 섞인 남자의 말에 답하려는 순간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는 ‘강병주’ 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하지율은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선배.”“응, 지율아. 나 지금 D국이야, 방금 도착했어.”“번거롭겠지만 며칠 동안은 일부러 눈에 띄게 움직여서 노엘 가문의 시선을 끌어주세요. 그놈들 신경이 사방으로 분산되어야 우리가 움직일 틈이 생길 테니까요.”하지율의 영리한 제안에 강병주가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화답했다.“문제없어. 판을 흔드는 건 내 전공이니까.”잠시 후, 웃음기를 거둔 강병주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덧붙였다.“정말 내 도움 없이 괜찮겠어?”그러나 강병주의 걱정에도 하지율은 단호하기만 했다.“아뇨, 선배는 충분히 도와주고 계세요.”“같이 떠나는 것도 방법이야. 노엘 가문의 개자식들이 눈치챈다 해도 감히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테니까.”강병주의 든든한 제안에도 하지율은 차분함을 잃지 않았다.“선배와 함께라면 전 떠날 수 있겠지만 화야 씨는 안 돼요. 그 사람들이 화야 씨를 고이 보내줄 리가 없거든요.”하지율은 고개를 돌려 주용화를 바라보았다.그는 묵묵히 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모든 신경은 이쪽의 통화 내용에 쏠려 있는 듯했다.“화야 씨가 몇 번이나 절 구해줬는지 몰라요. 그러니 이번에는 제가 화야 씨의 안전을 책임져야 해요.”강병주 또한 목숨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사내였기에 소중한 사람을 저버리지 못하는 하지율의 완고한 성정을 이해했다.그는 결국 설득을 포기한 듯 무거운 한숨을 내뱉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그래... 조심해. 무슨 일 생기면 곧바로 전화하고. 바로 달려갈 테니까.”“걱정하지 마요, 선배. 이미 마중 나올 사람들까지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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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8화

하지율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저요?”“침대를 나한테 양보하면 오늘 밤 지율 씨는 어디서 자냔 말입니다.”바닥에서 자는 건 무리였다. D국의 밤공기는 뼈를 파고들 듯 서늘했고 하지율은 이런 일촉즉발의 상황에 스스로 몸을 망쳐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전 의자에서 눈 좀 붙이면 돼요. 지금은 화야 씨 상태가 제일 중요하니까요.”그 말에 주용화는 조용히 제 발치에 놓인 넓은 침대를 훑었다.잠시 망설이던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제안을 건넸다.“침대도 넓은 것 같은데... 올라와서 같이 자는 건 어때요?”만약 다른 남자가 이런 소리를 지껄였다면 하지율은 단번에 불순한 의도를 읽어내고 안색을 굳혔겠지만 주용화의 눈빛은 지나칠 정도로 담백했다. 그건 욕망이라기보다 그저 고생하는 상대에 대한 투박하고 순수한 배려에 가까웠다.“아니에요, 괜찮아요.”하지율은 선을 긋듯 대답한 뒤 고개를 숙여 미리 정리해 둔 이야기 목록을 살폈다. 주용화도 하지율의 단호한 성격을 잘 알기에 오해를 살 만한 권유를 더는 입에 담지 않았다.모든 준비를 마친 하지율은 조명의 밝기를 낮추고 마음을 가라앉히는 아로마 향초에 불을 붙였다.곧,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서너 개의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주용화는 전혀 잠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고윤택이라면 분명 세 번째 이야기가 끝나기 전에 곯아떨어졌겠지만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리는 주용화에게서 그런 평범한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였다.하지율은 인내심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주용화를 위해 준비한 이야기는 서른 개 남짓. 만약 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면 내일은 또 다른 고육책을 찾아야만 했다.하지만 문제는 뜻밖의 곳에서 터졌다.어제 밤새 주용화의 곁을 지키느라 한숨도 자지 못한 하지율이 자신이 내뱉는 단조로운 이야기 소리에 취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것이었다.주용화는 조용히 하지율의 미간에 어린 피곤함과 눈가의 짙은 그늘을 바라보며 얇은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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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9화

하지율이 미안한 기색으로 입을 떼기 전, 분위기를 읽어낸 주용화가 먼저 말을 꺼냈다.“지율 씨 혼자 밤새 의자에서 자게 놔둘 수는 없었어요. 지금 이 낯선 곳에 우리 둘뿐이잖아요. 앞에는 내가 침대에서 잤고 뒤에는 지율 씨가 침대를 썼으니 따지고 보면 효율적이라 할 수 있죠.”한 침대에서 살을 맞대고 잔 것은 아니었기에 하지율도 크게 민망해하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미안함이 앞섰다.주용화를 치료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해 놓고 결국 따뜻한 침대에서 편히 잠든 건 자신이었기 때문이다.하지율의 복잡한 표정을 읽은 주용화가 덧붙였다.“게다가 난 낮에 딱히 나갈 일도 없으니 지율 씨가 나간 뒤에 방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면 돼요. 안 그러면 온종일 심심해서 못 버틸걸요.”하지율은 주용화가 자신의 미안함을 덜어주려 일부러 가벼운 투로 말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그의 배려 섞인 고집에 그녀도 더는 고집 피우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전 씻고 나가서 아침 사 올게요.”하지율이 방을 나선 지 10분쯤 지났을까.방문을 두드리는 조심스럽고도 가벼운 소리와 함께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하지율이 벌써 돌아온 줄 알고 고개를 돌렸던 주용화는 문가에 서 있는 중년 여성을 발견하고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민박집 주인이었다.김해숙은 침대에 앉아 있는 주용화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아까 그 아가씨가 밥 사러 나가면서 자기 없는 동안 총각 좀 봐달라고 부탁하길래 왔어. 필요한 거 있으면 사양 말고 편하게 말해.”주용화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정중했다.“고맙습니다.”주인은 손사래를 치며 방 안으로 한 걸음 더 들어왔다.“아니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 예전에는...”그녀는 헛기침하며 조금 쑥스러운 듯, 과거의 무례를 사과하려는 듯 말을 이었다.“내가 두 사람을 너무 박하게 대했지.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주용화의 눈빛이 깊어졌다. 처음과는 확연히 달라진 그녀의 태도가 의아했던 모양이었다.“왜 갑자기 사과하시는 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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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0화

김해숙은 주용화의 곁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자신과 고락을 함께할 수 있는 여자는 절대 놓치지 말고 소중히 여겨야 한다며 한참 동안이나 훈수를 늘어놓았다.평소의 주용화라면 분명 상대가 시끄럽고 무례하다 느끼며 살기 서린 눈빛으로 싸늘하게 내쫓았을 터였다.그런데 오늘따라 어찌 된 일인지 귀를 울리는 그 수다스러운 목소리가 지극히 듣기 좋게만 느껴졌다.특히 김해숙이 당연하다는 듯 입버릇처럼 내뱉는 ‘그쪽 여자 친구’ 라는 표현은 주용화의 기분을 묘하게 고조시켰다. 가슴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풀리며 설명하기 힘든 깊은 만족감이 몰려왔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지율이 아침을 들고 돌아왔다. 김해숙은 하지율을 보자마자 뜬금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한마디를 툭 던졌다.“남자 친구가 참 괜찮은 사람이네. 아가씨가 복이 많아.”김해숙이 그녀와 주용화의 관계를 굳게 오해하고 있었지만 하지율은 굳이 정색하며 해명하려 들지 않았다.낯선 타국에서 굳이 구구절절 사적인 관계를 설명해 괜한 이목을 끌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그날 밤에도 하지율은 잠 못 이루는 주용화의 곁에서 이야기를 이어갔다.주용화는 귓가를 울리는 그 따스한 목소리에 의지한 채 기분 좋은 안도감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그렇게 긴장과 안도가 공존했던 사흘이라는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마침내 약속된 시간에 맞춰 하지율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헬기가 준비되었습니다.”하지율은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강병주는 정확히 세 시간 후에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가 화려하게 움직여 노엘 가문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사이 하지율은 주용화를 데리고 은밀히 헬기에 몸을 실어 봉쇄된 도시를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그다음 다른 국가를 거쳐 미리 준비한 개인 전용기로 갈아탄 뒤 M국으로 돌아가는 치밀하고도 빈틈없는 탈출 경로였다.강병주가 이토록 위험한 시기에 갑자기 D국에 나타난 것은 분명 단숨에 노엘 가문의 관심을 끌 만한 사건이었다.강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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