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Chapter 71 - Chapter 80

790 Chapters

제71화

의사는 진단서를 툭 던지듯 내밀었다.“됐어요. 수납하시고 링거 맞으세요.”하도원이 손을 뻗으려던 찰나 임서율이 한발 먼저 진단서를 낚아챘다.그녀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움켜쥐며 말했다.“감사합니다, 선생님.”하도원의 입꼬리가 비꼬듯 올라갔지만, 굳이 말은 아끼며 두 팔을 가슴 앞에 포갰다.그는 아무 말 없이 임서율을 지켜보았다.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임서율이 간신히 문 앞까지 도착했을 때,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중심을 잃으려는 그 찰나 하도원이 재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그의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진짜 별나다니까요. 내가 옆에 있는데, 꼭 혼자 다 하려 들고.”지금껏 버티던 게 무의미하게 느껴질 만큼 임서율은 자신이 얼마나 무리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그 순간 진료실 안쪽에서 의사가 덧붙였다.“환자분, 지금은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예요. 거기 앉아서 간호사 기다려서 링거 맞으세요. 수납은 남편분이 하시면 됩니다.”임서율은 깜짝 놀라며 급히 손사래를 쳤다.“아뇨, 저 사람 제 남편 아니에요.”“그래요? 그럼 남편분은 안 왔어요?”“그건...”임서율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녀의 남편은 지금 그의 첫사랑과 함께 있었다.하도원은 아무 말 없이 그녀 손에서 진단서를 가져갔다.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로 날아들었다.“여기서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지 말고.”이번만큼은 임서율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진료실 안이 너무 붐벼서 정신이 없던 탓에 그녀는 조용한 복도 쪽 벤치로 자리를 옮겼다.눈을 감고 잠시 숨을 고르고 있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주헌아, 오늘 정말 고마워. 마중 나와준 것도 고마운데, 갑자기 비행기 멀미까지 나서 병원까지 오게 할 줄은 몰랐네.”“별말씀을요. 어차피 지나던 길이라 괜찮아요. 건강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그래도 병원에서 한번 확인하셔야 마음이 놓이죠.”그 목소리를 듣자 임서율의 눈이 저절로 떠졌다. 고개를 돌리니 그녀의 오른편으로 세 사람의 모습이
Read more

제72화

임서율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우연이네요. 병원에 오신 거예요?”강수진은 본인도 어색했는지 머쓱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네. 저희 엄마가 방금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기내에서 산소가 부족했는지 조금 어지럽다고 해서요. 걱정돼서 주헌이랑 같이 병원에 들르기로 했어요.”말을 마친 강수진은 임서율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엄마를 소개했다.“엄마, 여긴 제 회사 동료 임서율 씨예요. 저한테 많이 도움도 주시고 정말 좋은 분이에요.”심수련은 반가운 얼굴로 다가오더니 임서율의 손을 덥석 잡았다.“임서율 씨, 정말 고마워요. 우리 수진이가 아직 어리고 부족한 게 많아서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그때 강수진이 어머니 귀에 소곤거렸다.“엄마, 서율 씨는 청력이 좀 안 좋아. 입 모양 보면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 천천히 말해.”“아이고, 장애인이었어?”심수련의 말에 임서율의 얼굴이 굳었다.지금껏 수없이 불편을 겪어도 누가 대놓고 장애인이라고 말한 적은 없었다.강수진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임서율에게 조심스럽게 설명했다.“서율 씨, 저희 엄마가 성격이 좀 직설적이세요. 가끔 말이 너무 솔직해서 실수할 때도 있는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심수련은 그런 분위기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반가운 듯 임서율의 손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다.“어머, 수진이 동료라더니 정말 예쁘네요. 우리 딸이랑 닮았어. 아까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말고요. 아, 이 사람은 우리 수진이 남자 친구예요.”그러고는 자랑이라도 하듯 차주헌을 임서율 앞으로 끌어다 세웠다.차주헌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턱선은 잔뜩 굳어 있었고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강수진도 당황한 듯 얼굴빛이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인 채 임서율의 눈치를 살폈다.임서율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차주헌을 바라보았다.“강 팀장님 남자 친구셨군요.”차주헌은 입술을 다물고 잠시 시선을 피하더니, 임서율을 향해 수화를 했다.[돌아가서 설명할게.]그러나 임서율은 손짓을 끝
Read more

제73화

차주헌의 얼굴은 이미 잔뜩 굳어 있었다.그는 입을 가린 채 마른기침을 한 번 하고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강수진 씨 어머니 모시고 잠깐 진료 보러 왔습니다.”하도원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부러 어조를 길게 끌었다.“아... 그래요?”임서율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하도원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누구도 봐주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그 한마디만 듣고도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뭔가 터지겠구나.’아니나 다를까. 하도원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은 폭탄처럼 무자비했다.차주헌을 향한 마지막 체면 한 장마저 모조리 찢어버리는 말이었다.“자기 와이프가 길에서 쓰러질 뻔한 건 외면하면서, 첫사랑 엄마는 직접 병원에 모시고 와요? 와, 진짜 대단한 남편이고 효자시네요.”그 말에 차주헌은 물론 옆에 있던 강수진조차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입술을 꾹 다물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한 얼굴로 조심스레 나섰다.“하 대표님, 그건 주헌이 잘못이 아니에요. 제가 부탁해서 같이 온 거예요. 지금 이건...”“강수진 씨, 그만하시죠. 제가 이런 여우짓엔 면역이라서요. 뻔한 연출은 전혀 안 먹히거든요. 뭐, 어차피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진료 안 보실 거예요? 시간 낭비 마시고 얼른 들어가세요.”하도원은 강수진이 말을 잇기도 전에 단호하게 잘라버렸다.강수진은 눈물 한 방울 흘릴 틈도 없이 그대로 굳은 채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차주헌만큼은 하도원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더 엮였다가는 좋을 게 없었다.“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그는 짧게 인사만 하고는 강수진과 심수련을 데리고 임서율이 진료를 받았던 바로 그 진료실로 향했다.하도원은 코웃음을 흘리며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느긋하게 임서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울 거예요?”임서율은 코끝을 훌쩍이더니 정신을
Read more

제74화

임서율은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시선을 황급히 거두었다.“됐어요.”그녀는 창백한 입술을 꾹 다물고 얼굴을 돌렸다. 훔쳐보다가 딱 걸리다니, 창피해 죽을 지경이었다.‘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하도원은 손목시계를 힐끔 바라보더니 무심히 말했다.“난 곧 미팅 있어서 그러는데, 진료실에 가서 차주헌 불러올까요?”임서율은 힘없이 웃었다.“하 대표님도 참. 그런 농담은 정말 무서워요.”지금 이 상황에서 차주헌을 다시 부른다면 그야말로 스스로 바보라고 광고하는 셈이었다.“그럼 난 갈게요.”하도원은 등받이에 걸어둔 외투를 들어 무심하게 어깨에 걸쳤다. 그런데 임서율이 갑자기 그를 불러 세웠다.“하 대표님, 잠깐만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딱 5분이면 돼요.”그가 지금 떠나버리면 이후엔 다시 연락하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더 늦기 전에 속도를 내야 했다.하도원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계약을 빨리 체결하길 바라는 거라면, 차주헌이 당신한테 프로젝트 전권을 맡기겠다고 해야죠. 그러면 내가 사인할게요.”임서율의 미간이 좁게 찌푸려졌다.“왜요?”그녀는 곧바로 덧붙였다.“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제 능력을 착각하거나 하 대표님이 절 봐준다고 생각하진 않아요.”하도원은 고개를 약간 돌려 그녀를 흘끗 봤다.“난 능력도 없으면서 여우짓만 하는 사람이랑은 일 못 합니다. 시간 낭비니까요.”임서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대로 전하겠습니다.”하도원은 긴 손가락으로 병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임서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차주헌의 성격상 저 말을 그대로 전하면 또다시 하도원과의 관계를 의심할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강수진이 끼어들면 임서율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잘 굴러가던 프로젝트가 엉망이 될 건 불 보듯 뻔했으니까....진료실, 심수련의 진료가 끝나고 강수진이 그녀를 부축했다.“엄마, 다음부턴 어디 불편하면 꼭 말해요. 억지로 참지 말고.”“응
Read more

제75화

심수련은 카드를 들여다보다 끝내 마음이 불편했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수진아, 그동안 번 돈 다 집에 보태느라 네가 고생이 많았어. 그래도 네 동생 결혼하고 나면 조금은 숨 돌릴 수 있을 거야.”“괜찮아요, 엄마. 예전에 나 대학 보내려고 동생이 먼저 학교 그만뒀잖아요. 걘 나보다 똑똑했어요. 계속 공부했으면 분명 나보다 잘됐을 거예요.”강수진이 심수련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하자 심수련은 코끝을 훌쩍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수진아, 주헌이랑 얼른 결혼 얘기 꺼내. 그런 남자 놓치면 평생 후회해.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노리고 있을지 몰라.”“알아요, 엄마.”강수진은 입으로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차주헌은 임서율과 이혼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그 여자는 단순한 대체품이 아니라, 어쩌면 이미 차주헌 마음 깊숙이 자리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차주헌 본인이 아직 그걸 자각하지 못했을 뿐.그 시각, 진료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차주헌은 의사로부터 심수련의 상태가 심각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안도했다.검사 결과지를 챙겨 병실로 향하던 중, 문틈 너머로 익숙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무심결에 걸음을 멈춘 그는 병실 안에 있는 임서율과 눈이 딱 마주쳤다. 임서율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언젠가 누구보다 익숙했던 눈동자였건만, 지금 그 짧은 몇 초의 눈 맞춤은 낯설기 그지없었다.잠시 머뭇거리던 차주헌은 결국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의 시선이 임서율 팔에 꽂힌 링거로 향했다가 병실 안을 둘러봤다.“하 대표님은?”“갔어.”임서율의 목소리엔 늦겨울 바람처럼 싸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차주헌은 조금은 굳어 있던 어깨를 풀며 그녀의 링거를 가리켰다.“의사는 뭐래?”“폐 감염이래.”차주헌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아니, 사무실도 옮겼잖아.”그 말에 임서율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먼지 켜켜이 쌓인 그 사무실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던가.게다가 폐에 염증이 생긴 게 하루이틀 된 일도 아니었
Read more

제76화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임서율이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도 차주헌은 혼자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가만히 있어도 불만인 거야?’차주헌은 여전히 찜찜한 얼굴로 손목 위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그 반복적인 손짓은 그가 인내심의 끝에 다다랐다는 신호였다.임서율은 그런 그의 습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근데... 네 얼굴에 다 써 있어.”임서율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 웃음은 차갑다기보다 조롱에 가까웠다.“그래서? 내가 지금 뭐라도 해야 해?”차주헌은 분명 바라고 있었다.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범한 척 굴며 강수진네 사정도 좀 봐줘라는 말을 해주길. ‘그걸 원하는 거겠지.’그녀의 건조한 말투에 차주헌의 얼굴이 더 굳어졌다.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됐어. 더 말하지 말자. 수진이 엄마는 그냥 몸 좀 안 좋아서 치료 때문에 잠깐 병원 들른 거야. 오늘이 마지막이야.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고 괜히 너까지 신경 쓸 일 없게 할게.”임서율은 눈가가 잠깐 흔들리더니,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그래?”차주헌은 의자를 끌어와 그녀 옆에 앉았다.“서율아, 아까 하 대표 있었잖아. 혹시... 그 사람한테 계약 얘기 좀 꺼내봤어?”그는 하도원이랑 엮이는 건 죽기보다 싫었지만 지금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프로젝트 권한 절반은 하도원에게 있었고 그를 빼고는 이번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무엇보다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하도원은 느긋하게 굴 수 있었지만 차주헌은 아니었다.특히 차 회장에게 내놓을 보고가 없다는 게 더 큰 압박이었다.임서율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이 남자에게 이제 더는 기대할 것도, 바랄 것도 없었다.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늘 일 이야기거나 강수진 이야기뿐, 정작 그녀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괜찮아. 이제는 다 끝났으니까.’그녀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꾹 참고 하도원이 남기고 간 말을 전했다.“하 대표님이 그러시더라. 이번 프로젝트, 강수진 손 타
Read more

제77화

“전화하신 이유가 뭡니까? 설마... 돈 주시려고요?”차주헌은 순간 멈칫했다.“...무슨 돈 말씀이십니까?”“당신 와이프 병원비요. 내가 대신 냈거든요. 그 돈, 원래 당신 몫 아닌가요?”“얼마입니까. 지금 바로 계좌로 보내드리겠습니다.”“백만 원.”잠깐의 침묵.차주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수화기 너머로 하도원의 냉소가 스치듯 들려왔다. “뭡니까, 설마 떼먹을 생각은 아니겠죠?”“...아닙니다. 곧 보내겠습니다.”차주헌은 수년간 하도원을 봐왔지만 이 남자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그 거대한 자산을 가진 하도원이 고작 백만 원 때문에 이렇게 따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끊겠습니다.”역시나 하도원답게 의미 없는 말은 한 글자도 허용하지 않는다.차주헌은 망설이다가 수화기 가까이 입을 댔다. “잠시만요.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오아시스 프로젝트 말입니다. 왜 갑자기 강수진을 책임자 자리에서 배제하신 겁니까? 그 사람, 저희 회사에서 처음부터 주도해온 인물입니다.”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곧 냉소가 섞인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차주헌 씨.”말의 시작부터 이미 비수가 날아왔다. “병원 가서 머리부터 바꾸세요. 당신 머릿속엔 지금 강수진밖에 없잖아요. 그 여자가 아니었으면 이 프로젝트 지분이 나한테 넘어왔을 것 같습니까?”한 마디, 한 마디가 뼈를 찔렀다. “그런데도 아직도 그 여자를 앞세우겠다고요? 가슴에 손 얹고 솔직히 말해봐요. 강수진 기획안이 임서율 씨 안보다 진짜 낫다고 생각합니까?”그 말에 차주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변명할 겨를도 없이 하도원의 말은 더욱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내 성격 알잖아요. 한 번 한 말은 절대 안 바꿔요. 당신이 연애를 하든 감싸고 돌든 난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일은 달라요. 오아시스 프로젝트 책임자는 무조건 임서율 씨입니다. 이건 확정이에요.”뚝.전화는 그 말과 함께 무자비하게 끊겼다. 귀에 남은 건 싸늘한
Read more

제78화

차주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별일 아니야. 됐어. 그냥 나중에 수진이한테 한마디만 하면 돼.”그 말에 임서율은 말없이 손끝을 꽉 쥐었다.긴장 때문인지 희고 가느다란 손끝이 어느새 석류즙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됐어.’그 단 한 마디로 조금 전 자신을 의심하고 상처 줬던 말들을 모두 지워버렸다.늘 그렇듯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그때였다.병실 문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고 곧 강수진이 어깨를 기대듯 문을 밀고 들어왔다.“주헌아, 서율 씨 보러 온 거면 나한테도 말 좀 해주지 그랬어?”차주헌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그냥 방금 지나가다가 들른 거야.”강수진의 시선이 병상에 앉은 임서율 위로 흘렀다.눈길 하나에 담긴 기분 나쁜 낯빛, 임서율은 그 섬세한 뉘앙스를 단번에 읽어냈다.“서율 씨, 무슨 일 있으세요? 아까까진 멀쩡해 보였는데... 하필 우리 엄마 병실 바로 옆이라니, 기막힌 우연이네요?”얇게 겹쳐진 웃음 속, 의도적인 말끝에 임서율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차주헌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을 건넸다.“서율아, 링거 오래 맞는 거 안 좋아. 가능하면 약으로 버티는 게 낫지 않을까?”임서율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의사가 링거 맞으라 그랬어.”“며칠 맞으랬는데?”차주헌이 그녀의 링거를 가리키며 덧붙였다.“오늘 하루만.”그 대답에 임서율은 속으로 짧게 안도했다.하루만이라서 다행이었다. 며칠 더 맞아야 했다면 또 어떤 말을 들어야 했을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그럼 저녁에 내가 데려다줄게.”그 순간, 강수진이 옆에서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끼어들었다.“주헌아...”차주헌은 옆으로 돌아 그녀를 바라봤고 강수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아까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엄마 오늘은 링거 안 맞아도 된대. 내일 다시 오면 된다고 하셨어.”잠시, 애매한 침묵이 흘렀다.그리고 곧 차주헌이 임서율을 향해 말을 꺼냈다.“그래. 서율아, 저녁에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먼저 수진이 어머
Read more

제79화

강수진이 정말 선물을 깜빡한 건지, 아니면 차주헌이 일부러 예비 장모에게 잘 보이려고 그랬던 건지.그건 아무도 모른다.밤이 되자 임서율은 링거를 마친 뒤, 조용히 병원을 나섰다.1층으로 향하는 복도를 따라 걷던 중, 우연히 강수진 어머니의 병실 앞을 지나게 되었다.그곳에서 마주친 장면은 낯설고도 이상하게 익숙했다.차주헌이 병실 의자에 앉아 강수진 어머니와 다정히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그 옆에 붙어 앉은 강수진은 사과 껍질을 정성스럽게 깎고 있었다.그 셋의 분위기는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살아온 진짜 가족처럼 평화로웠다.무심한 웃음, 자연스러운 눈빛, 편안한 거리감까지.복도 끝에서 찬 바람이 불어왔다.임서율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얇은 겉옷을 꼭 여몄다.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아무 말 없이 발길을 돌려 병원을 떠났다....집에 도착했을 땐 밤 아홉 시가 훌쩍 넘은 시각이었다.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그녀는 배달 음식을 대충 시켜 끼니를 때웠다.‘아버지 생신 선물도 다시 사야겠네.’그녀가 직접 고른 선물은 이미 강수진의 어머니 손에 들어가 있었다.결국 다음 날, 다시 쇼핑몰에 들러 같은 선물을 고르고 택시에 몸을 실었다.목적지는 임씨 본가.거실은 마치 그녀가 오든 말든 전혀 상관없는 사람인 양 여전히 시끌벅적했다. 그 익숙한 분위기에 임서율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이 집이 낯설어지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을까.’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그녀를 알아본 건 가정부 장희수였다.“큰 아가씨, 오셨네요.”그 한마디에 거실에 있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임서율은 어깨를 낮추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오늘 아버지 생신이잖아요. 얼굴 뵈러 왔어요.”장희수는 반가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사장님도 분명히 좋아하실 거예요. 제가 곧 불러올게요.”“네.”하지만 임서율은 알고 있었다.이 집 안에서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걸.그 순간, 왼쪽 뺨에서 찌릿한 통증이 퍼졌다.“맞
Read more

제80화

임서율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그 눈빛엔 서늘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엔 얼음 같은 경멸이 서려 있었다.그 싸늘한 표정에 임유나는 괜히 심장이 더 조여들었다.얼굴에 붉은 기운이 확 올라오더니 결국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내 말 안 들려? 선물 내려놓고 당장 나가라고!”임서율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그 무반응이 오히려 임유나의 신경을 더 긁었다.“네가 뭐라고 여기 와? 이 집에 너 반기는 사람 하나라도 있어? 어차피 차주헌이 주는 돈도 이제 끊길 거잖아. 첫사랑 돌아왔다며? 같은 학교였다던데? 말 다 했지 뭐.”결국 임유나가 손을 뻗어 그녀를 밀치려던 순간, 임서율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차갑고도 깊은 눈동자.그 안에는 감정을 억누른 채 간신히 버텨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날 선 침묵이 담겨 있었다.그 눈빛에 임유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삼켰다.임서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너 지금, 아주 보기 흉해. 그래도 겉으로는 체면이라도 차릴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보는 사람마다 임씨 가문이 교양 없는 집안이라고 하겠네.”그 말에 임유나의 얼굴이 확 굳었다.임유나는 이 집으로 성인이 되어서야 돌아온 아이였다.한때는 시골에서 자라며 손에 흙을 묻히던 아이였고 말투며 태도며 어느 것 하나 정제되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다.아버지 임규한이 그녀를 데려온 뒤로 정식 예절 교육을 받았지만 결국 중도에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 그 가식마저 벗어버린 채 본색을 드러내고 있었다.임유나의 입매가 일그러지며 터져 나왔다.“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밖에서 그렇게 개처럼 살지도 않았고 내 삶도 이 지경까진 안 됐어. 전부 너 때문에 망가졌어.”임유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말을 이어갔다.“잊지 마. 난 이 집 핏줄이고 넌 그냥 데려온 애에 불과해. 부모님이랑 피 한 방울 안 섞인 철저하게 남.”임서율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이 집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얼마나 외
Read more
PREV
1
...
678910
...
79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