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Chapter 881 - Chapter 8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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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1화

쾅!그 순간, VIP룸 문이 한 발에 걷혀 열렸고 찬바람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확 밀려들었다.문턱에 선 하도원은 검은 슈트 차림이었고 공기까지 얼려 버릴 듯한 냉기가 온몸에서 번졌다. 하도원은 소파에 짓눌린 채 몸부림치는 임서율을 바로 발견했다.“악!”김정수는 반응할 틈도 없이 하도원의 발길질에 가슴이 정통으로 얻어맞고 기가 빠진 고무풍선처럼 뒤로 날아가 테이블에 거칠게 처박혔다.하도원은 곧장 임서율의 곁으로 달려가 자신의 코트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렀다. 임서율을 내려다보는 하도원의 눈빛에는 가까스로 참고 있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한없이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뒹굴며 신음하고 있는 김정수를 바라보았다.“네가 감히 내 사람한테 손댔어?”김정수는 가슴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하도원의 얼굴을 확인하자 김정수는 술기운이 절반 날아갔다.“하... 하 대표님? 임 대표가... 하 대표님의 사람이었습니까? 저는 전혀 몰랐습니다. 오해가 있었어요. 게다가 진짜 하 대표님의 사람이라면 왜 이렇게까지 직접 나와서 거래를...”“일하러 나온 건 서율의 커리어 때문이야. 네가 여자는 프로젝트 협상하러 나가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만들었냐?”하도원이 한 걸음 내딛자 구두 밑에서 유리 파편이 바스락거렸다. 하도원은 김정수의 옷깃을 거칠게 틀어쥐어 문짝에 꽝 하고 내리꽂았다.“여자가 일하러 나왔다고 너 같은 인간에게 모욕을 당해야 해?”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도원의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김정수의 얼굴로 꽂혔다.우드둑!김정수의 콧대가 부서지며 피가 순식간에 얼굴을 뒤덮었다. 괴성이 터졌지만 하도원의 손아귀는 벽에 못질하듯 김정수를 틀어막아 단 한 치도 버둥거리지 못하게 만들었다.차주헌도 거의 동시에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가 난장판이 된 현장을 보고 한순간 굳어 섰다. 그때 하도원이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차가운 말투로 지시했다.“승윤아, 사람 몇 데리고 3층 VIP룸으로 와서 여기 쓰레기부터 정리해. 그리고 공지 올려.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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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2화

김정수는 두려움 때문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는 온몸을 덜덜 떨며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 내려다보았다.“저... 저도 모르겠습니다.”차주헌은 바지를 조금 걷어 올리더니 쭈그려 앉아 김정수의 두 손을 차갑게 훑어봤다.“모르겠다고? 그러면 일이 더 쉽게 됐네. 두 손 다 잘라버려.”김정수는 고개를 치켜들고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술이 맞물렸다.“아... 안 됩니다. 차 대표님, 사실 저는 임 대표가 하 대표님의 여자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알던 사이잖습니까. 돈이 필요하시면 드릴 테니, 이번 한 번만 살려 주십시오.”차주헌은 코웃음을 치더니 손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그건 힘들 것 같아. 네가 입에 올린 임 대표는 내 전처야. 그런데 네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것 같아?”김정수는 그제야 눈이 동그래졌다.“아... 임... 대표가 전처라고요...”몇 해 전 차주헌과 임서율의 관련 스캔들이 도시 전체에 퍼졌던 일이 번개처럼 스쳤다. 이후 차주헌이 강수진과 결혼했고, 그 뒤로 전처는 자취를 감췄다. 세월이 흐르면서 김정수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망했어. 이젠 끝장이겠네. 내가 어쩌다 그런 분을 건드렸지...’해성 그룹 쪽의 일을 떠올리며 김정수는 머릿속에서 임유나와 임서율, 이 두 사람이 헛갈렸다는 걸 깨달았다.김정수는 털썩 무릎을 꿇고 스스로 머리를 연거푸 내리쳤다.“진짜 제가 술이 과했습니다. 제가 착각을... 절대 일부러 괴롭히려던 게 아닙니다.”“그런 소리는 나한테 해 봐야 소용없어. 가서 하 대표님한테 빌어.”차주헌은 천천히 일어서며 뒤쪽에 선 진승윤을 향해 말했다.“승윤 씨, 저놈이 아까 어느 손으로 임서율한테 손댔는지 확인해요. 대답을 못 하면, 두 손을 다 처리해요.”말을 던진 뒤, 차주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VIP룸을 빠져나갔다.이 방의 유일한 장점은 방음이었다. 안에서 아무리 소란을 피워도 밖으로는 한 줄기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하도원은 임서율을 데리고 곧장 병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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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3화

조현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남자 친구라는 사람이 진짜 몰랐어? 임서율 씨는 임신이야. 벌써 한 달이나 됐다고.”하도원은 몇 초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조현우를 보았다.“서... 서율이가 임신이라고? 한 달? 그게 정말이야?”하도원과 친했던 조현우도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응. 보고서가 여기 있어. 믿기 힘들면 직접 봐.”하도원이 보고서를 받아서 보았다. 그러자 하도원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도원조차 자신이 아버지가 될 거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최근 내내 하도원은 임서율이 결혼을 망설인다고만 생각했다. 온갖 이유를 상상했지만, 이런 상황일 거라고는 한 번도 짐작하지 못했다.차주헌에게서 들은 대로 임서율은 해외 본사에서 진행되던 네 개의 프로젝트를 해성 그룹으로 돌렸다가 상사 안나에게 적발됐다. 그 결과 400억이나 되는 배상 요구가 떨어졌다. 임서율을 누구보다 잘 아는 하도원은 그제야 깨달았다. 임서율은 결혼을 피한 게 아니라, 결혼하면 그 빚이 하도원에게까지 얹힐까 봐 두려웠다. 아직 하도원의 회사도 안정되지 않은 지금 시점에 임서율은 그 부담을 끝내 혼자 짊어지려 했다.그런 생각을 하니 하도원의 가슴은 서늘하게 조여 왔다. 그동안 임서율이 혼자 감당한 무게를 생각하니, 마음이 칼로 그은 듯 아팠다. 그런데도 임서율은 단 한마디의 원망도 하지 않았다.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고 임서율이 나왔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임서율의 표정에 여러 감정이 겹쳤다. 임서율은 살짝 입술을 다물었다가 하도원 앞에 서서 그의 손에 들린 결과지를 흘낏 보았다.“결국 다 알게 되었군요.”하도원이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서율아, 나한테 계속 숨길 생각이었어? 어쨌든 이것만 기억해 둬. 지금 난 우리 아이의 아빠야.”하도원은 자세를 조금 낮추되 단호함을 숨기지 않았다.“앞으로 어떤 결정을 하든, 나도 말할 권리와 결정할 권리가 있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나랑 상의해.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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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4화

그렇게 되면 정말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하도원은 임서율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회사 일도, 남은 돈도 신경 쓰지 마. 내가 방법을 찾을게. 요즘 우리 회사가 프로젝트를 몇 개를 더 따냈어. 네가 짊어진 부채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그러자 임서율이 미간을 좁혔다.“도원 씨 회삿돈으로 제 빚을 메우겠다고요? 그만둬요. 저는 도원 씨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아요.”“이제 넌 임신한 몸이야. 모든 에너지는 너 자신과 아이에게 써야 해.”하도원은 이런 식으로 일일이 남을 설득하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은 오직 임서율뿐이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조현우는 두 사람의 줄다리기가 더는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조현우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입을 열었다.“형, 조금 진정하고 오늘은 그냥 돌아가. 돌아가서 천천히 상의해도 되잖아.”곧이어 조현우가 임서율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임서율 씨, 단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게요. 임서율 씨는 체질상 임신이 쉽지 않은 편입니다. 그러니 이번 아이는 꼭 지켜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세요.”임서율은 그 자리에서 굳어 섰다. 조금 전까지 가벼워진 심장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느낌이었다. 요컨대 임신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안정기는 아니고 이번에 잃어버리면 앞으로 임신이 훨씬 어려워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그래도 임서율은 여전히 의문이 남았다.“선생님, 저는 이해가 안 돼요. 제가 체질이 약하긴 해도 임신이 문제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거든요.”예전에 차주헌과 함께 지낼 때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임신 자체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중에 차주헌이 애초에 생식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더욱 문제가 자신에게 있지는 않다고 믿고 있었다.그러자 조현우가 담담하게 설명했다.“난관에 부분적인 막힘이 있었어요. 이번 임신은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까워요.”임서율의 표정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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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5화

“아니면... 아이가 태어나면 너를 할아버지로 모실까?”조현우가 입꼬리를 비죽 올리더니 말했다.“내가 안 도와줬어도 그 정도 호칭은 원래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그럼 다음에 제대로 한턱낼게. 아니면 필요한 거 있으면 생각해 보고, 나중에 문자로 보내줘.”계속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하도원은 임서율이 약을 타러 간 방향으로 시선이 자꾸만 끌렸다. 조현우는 하도원의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복도를 뚫고 날아갈 기세인 걸 보고 고개를 내저었다.“참 답이 없네. 형은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 보고 임서율 씨한테 혼까지 빼앗겼네.”하도원은 굳이 반박하지 않고 조현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먼저 가 볼게. 넌 네 일이나 봐.”조현우는 하도원의 뒷모습을 보며 웃다가, 고개를 내저으면서 진료실로 들어갔다.하도원은 복도를 걸으며 진승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승윤아, 우리 회사에서 당장 협의 가능한 프로젝트들을 전부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오후에 전 회사 회의 잡고, 앞으로 일주일은 전 직원 초과근무 공지해.”진승윤은 얼떨떨했다.“하... 하 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방금 임서율 씨랑 병원 간다고 하시지 않았어요?”“큰일은 아니고... 서율이가 임신했어. 정란 아주머니한테 연락해서 당분간 서율의 식단 잘 챙겨 달라고 해.”진승윤은 잠시 조용해졌다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정말입니까? 임서율 씨가 임신을... 와, 축하합니다! 대표님, 몇 달 뒤면 아버지가 되시겠네요. 그러면... 차 회장님께도 전해 드리는 게 좋겠어요. 아직 병원에 계시잖아요. 임서율 씨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아시면, 분명 기운이 좀 나실 거예요.”“그래. 오늘 밤에 시간 내서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릴게.”최근 하도원과 차진만의 사이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우선 회사 업무부터 정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 요즘은 몸도 좀 챙기셔야 합니다. 강도를 너무 높이면 건강에 무리가...”진승윤은 하도원이 임서율 때문에 겨우 나아진 수면을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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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6화

“괜찮아. 요즘은 의학이 훨씬 발달했어. 그러니 몸도 차근차근 돌보면 돼. 게다가 지금은 이미 아이가 우리한테 찾아왔잖아. 다른 건 잠시 내려놓고, 우리 아이부터 잘 지키자.”하도원이 임서율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리며 예민해진 마음을 달랬다.임서율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도원 씨... 만약에... 만약 제가 뱃속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들어줄 수 있어요?”하도원은 미간이 본능적으로 찌푸려졌다.“왜... 왜 안 낳겠다는 거야?”조현우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마음이 조금은 기울 줄 알았다. 실제로도 진료실에서 임서율의 표정에는 기쁨 대신 힘이 빠진 서운함이 어렸다. 앞으로 임신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도 임서율은 아이를 포기해도 되겠는가고 물었다.하도원의 얼굴이 굳어지고 눈빛의 온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잠시 뒤, 그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네 뜻을 존중할게.”뜻밖의 대답에 임서율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이유는... 안 물어봐요?”“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네가 내린 결정이면 분명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믿어. 그래서 네 뜻을 존중해.”그 말을 마치고 하도원은 임서율의 손에 들린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휴지통 쪽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임서율이 급히 하도원의 손목을 붙잡았다.“아니에요. 됐어요. 그냥... 아이를 낳을게요.”그 말에 하도원은 걸음이 멈췄고 잠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임서율이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표정만 봐도 마음을 읽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임서율의 속내가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그때 갑자기 조현우의 말이 머리를 스쳤다.“형, 임신하면 감정이 평소보다 훨씬 요동쳐.”조금 전 임서율의 들쑥날쑥했던 마음도 조현우가 한 말이 맞다는 증거였다.하도원은 더 묻지 않았다.“일단 집으로 가자. 천천히 생각해.”하도원은 방금 버리려던 약봉지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임서율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문이 열리자마자 김정란이 달려 나왔다. 임서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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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7화

하도원은 두 사람 곁을 지나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왠지 모르게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김정란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서율 씨, 대표님이 왜 그러세요? 두 분께서... 다투신 건가요?”“저 때문이에요. 대표님 탓은 없어요.”임서율은 하도원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고 김정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뭐라도 드실래요? 지금 바로 해 드릴게요.”조금 전까지는 임서율도 배가 고픈 줄을 몰랐는데, 막상 먹을 걸 묻자 배에서 꼬르륵하고 소리가 났다.임서율이 머쓱하게 웃었다.“죄송하지만 갑자기... 매콤하고 새콤한 생선탕이 당기네요. 그런데 이 시간에는 생선이 없겠죠?”김정란이 난처하게 웃었다.“생선은 없어요. 대신 닭이 있어요. 닭고기 볶음을 해 드려도 될까요?”“좋아요. 요즘은 새콤하거나 매운 것만 먹고 싶어요.”“그럼 바로 준비해 올게요.”“고맙습니다.”누군가 자신을 위해 밥을 지어 주는 일, 그 소소한 온기는 임서율의 마음속에서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주방으로 가던 김정란이 한마디 덧붙였다.“이제 임신하셨으니까 괜히 많이 돌아다니지 마세요. 임신 초기의 3개월은 특히 조심해야 해요. 넉 달 차면 태동이 느껴질 거예요.”임서율이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넉 달이면 벌써 태동을 느낄 수 있나요?”“그럼요. 저도 예전에 임신했을 때 또렷이 기억해요. 넉 달쯤 되니까 배 속에서 살짝살짝 아기가 움직이는게... 참 신기해요.”김정란은 자신이 임신했을 때를 떠올리자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표정만 봐도 임신이 김정란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임서율은 느낄 수 있었다.임서율은 무심코 아직 평평한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지금 배 속의 아이는 겨우 심장 뛰기 시작한 정도일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생명이었다.‘그래서 의사들도 아이를 지우려면 좋기는 두 달이 되기 전에 낙태 수술을 받으라고 권고했던 거였군.’김정란은 임서율이 어딘가 망설이는 기색을 알아채고 조심스레 물었다.“서율 씨,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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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8화

임서율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뭔가를 깨달았다.‘그래, 잘못은 어른들에게 있는 거지 아이에게 있는 게 아니야. 지금 아이를 지운다면 결국 어른들의 죄를 아이에게 떠넘기는 셈이겠지. 아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인데 말이야.’임서율이 벌떡 일어나더니 급히 말했다.“아주머니, 방에 좀 다녀올게요. 닭고기 볶음이 되면 불러 주세요.”“네. 다녀오세요. 요리가 완성되면 바로 부를게요.”김정란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서율은 쿵쿵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갔다.임서율이 문을 철컥 밀치고 들어가니, 하도원은 막 화상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임서율이 들이닥치자 하도원이 화면을 향해 짧게 말했다.“잠깐만요.”하도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임서율의 앞으로 와서 눈썹을 살짝 내리깔고 물었다.“무슨 일이야?”임서율은 화상 회의 중인 줄도 모르고 서류 보는 줄만 알았다. 곧장 숨을 고르고 터놓았다.“도원 씨, 저... 아이 낳을게요. 제 말 믿어 주세요. 이름도 생각해 놨어요. 사실 금방 생각한 게 아니라 예전부터 생각했죠. 아들이면 하예성, 선물이라는 뜻이 있는 이름이고, 딸이면 하청아, 어때요?”너무 갑작스러운 고백에 하도원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그 사이 화면 너머로 주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하 대표님, 결혼하셨나요?”“하 대표님의 결혼 소식을 들으신 분 있어요?”“없는데요?”“어쩐지 요 며칠 에너지가 넘치시더라니... 곧 아빠가 되시나 봐요.”그 순간, 노트북 스피커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하 대표님, 이렇게 빠르다니요. 아무 얘기도 없더니 갑자기 아버지가 되시는 거예요?”“축하합니다. 하 대표님!”임서율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무슨 상황이에요? 설마 아까 회의 중이었어요?”“응.”하도원은 임서율이 부끄러워서 귀까지 붉어진 표정을 보며 장난스레 말했다.“그러니까 아까 날 놀린 거네? 겉으로는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이름까지 다 정해 놓고 말이야.”임서율은 당황한 나머지 하도원의 가슴을 살짝 밀면서 말했다.“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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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9화

회의실의 분위기는 몹시 팽팽했다.하도원은 마음을 가다듬고 무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봤다. 조금 전에 임서율 앞에서의 온기는 흔적도 없었다.“회의 계속하죠.”주주들도 하도원의 성격은 잘 알고 있었다. 대체로 하도원은 이런 인사치레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안 해도 되는 건 또 아니었다. 하도원의 취향과는 무관하게 그들은 정해진 덕담을 빠짐없이 건넸다.“대표님, 축하드립니다.”“이렇게 빨리 아버지가 되실 줄이야.”“결혼식 날짜가 잡히면 미리 알려 주세요. 꼭 참석하겠습니다.”하도원은 손가락을 톡, 톡 책상 위에 두 번 두드렸다.“결혼식을 올리게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급할 것 없습니다.”“정말 잘 되었네요. 하 대표님께서 드디어 결혼하시네요.”“그러게 말입니다. 저희가 축의금을...”“인사치레는 여기까지 하죠.”하도원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가라앉았다.조금 전에 알려줬던 좋은 소식은 마치 없었던 일인 것만 같았다.“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죠.”하도원은 슬라이드 한 장을 넘겼다.“신에너지 프로젝트 2차 투자 유치는 다음 주 수요일까지 전략적 투자자 3곳 이상 확정 지어야 합니다. 장 부대표님이 총괄하고, 법무팀은 전 과정에 참여해 계약 조항 검토해 주세요. 각종 상황에 대한 리스크 보장안도 같이 제출하세요.”갑자기 지목된 장재원의 웃음기가 굳었다.“하 대표님, 다음 주 수요일이면... 고작 닷새 남았습니다.”“그래서 야근이 필요합니다. 각 부서 인원 전원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세요.”하도원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해외 사업부서는 아리남 권역 미회수 대금 지연 건을 집중적으로 처리하세요. 이번 주 안에 전담팀을 파견해서 현지 실사 및 독려해야 합니다. 연체 위약금 일할 계산한 내역은 재무팀에서 동시에 협력사에 통지해 주세요. 이 업무는 이 팀장이 직접 책임지고 하세요.”그러자 이명수는 이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곧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대표님, 아리남 몇몇 곳은 지금 태풍 시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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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0화

하도원은 김정란이 말이 없는 걸 보고 고개를 들어 물었다.“아주머니, 왜 그러세요?”그제야 김정란이 정신을 차렸다.“대표님, 음식이 다 됐어요. 내려오셔도 됩니다.”“네.”하도원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내내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아직 밥도 못 먹었다.아래층으로 내려가며 하도원이 당부했다.“아주머니, 요즘 서율의 식단에 좀 더 신경 써 주세요. 입맛이 들쑥날쑥할 테니 조금씩 자주 먹게 하고, 매일 메뉴도 바꿔 주세요.”김정란이 대답이 없자 하도원이 다시 쳐다봤다. 김정란은 표정이 어딘가 묘했다.“아주머니,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김정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대답했다.“네. 대표님, 소식을 들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서율 씨가 원하는 건 바로 해 드리고, 한 가지 반찬만 너무 많이 드시지 않게 챙길게요. 그쪽은 제가 경험이 많아요.”김정란은 사실 아이 둘을 낳아 키웠기 때문이다.“그럼 아줌마한테 맡길게요.”하도원은 김정란을 늘 신뢰했고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으로 그녀를 불러오지도 않았을 것이다.“다만, 대표님,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말씀해 보세요.”김정란이 난처한 듯 웃었다.“앞으로는 임서율 씨를 서율이라고 부르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방금 순간 율이를 부르는 줄 알고 깜짝 놀랐거든요... 이름이 너무 비슷해서 자꾸 헷갈려요.”“그럼 앞으로는 사모님이라고 부르세요.”그제야 김정란은 얼굴이 환해졌다.“네. 알겠습니다.”그때 임서율이 두 사람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드디어 내려오셨네요. 저 진짜 배고파서 쓰러질 뻔했어요.”임서율이 먹보처럼 귀엽게 굴자 하도원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이제부터는 배고프면 먼저 먹어. 누구도 기다릴 필요 없어.”하도원은 의자를 당겨 앉았다.임서율은 젓가락을 들어 김정란이 갓 볶아 낸 닭고기 볶음을 먼저 한 점 집어 맛봤다. 바삭한 식감에 알싸한 마라 향이 퍼지고 뒤이어 진한 매운 향이 입안 가득 번졌다.임서율이 주먹을 꼭 쥐고 환하게 웃으면서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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