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421 - Chapter 430

464 Chapters

제421화

유하는 이 배에서 내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그때가 되면, 유하가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상황에서는 승현을 한 번 더 믿고, 어떻게든 배를 멈추게 해 육지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아직 망설이고 있을 때, 승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한 가지 잊지 마. 네 고모할머니는 지금 의식이 없어. 네가 돌아가도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이야. 게다가 네가 지금 가면, 위험 가능성까지 같이 데려가는 거라고. 진짜 그럴 거야?”유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좋아. 하지만 15일 동안만큼은 나랑 거리 두자.”“안 돼.”유하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을 때, 승현이 웃으며 말했다.“이 15일만 지나면 우리 사이 끝이잖아. 근데 그게 너무 억울하단 말이지. 그래서 이 15일은 보상받을 거야. 네가 싫다고 해도 난 끝까지 버틸 거야. 그 외에는 손대지 않아.”‘보상은 무슨 보상!’유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눌렀지만, 승현의 태도를 보니...‘그래도 이번엔 진짜로 이혼할 마음이 있긴 한가 보네.’ 그런데 유하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승현이 또 말했다.“그리고, 그렇게 오래 안 했는데 넌 안 그립냐? 게다가 나 이렇게 몸도 좋고, 잘생겼고, 힘도 괜찮잖아. 예전에 너도 꽤 좋아했잖아?”“여보, 손해 볼 건 없잖아.”참을 수 없던 유하는 커피를 그대로 승현의 머리 위에 들이부었다.컵을 탁 내려놓으며 낮게 욕했다.‘진짜, 뻔뻔하기는...’그리곤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 나갔다.식당은 다시 조용해졌다.유하가 나가자, 멀찍이서 구경하던 프랑시스가 낄낄거리며 뛰어왔다.그는 커피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승현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너도 오늘은 당했네.”프랑시스는 신나게 의자에 털썩 앉더니...“근데 너 그 와이프, 겉보기엔 되게 온순해 보이던데 성질 장난 아니더라?”승현은 냅킨으로 얼굴의 커피를 닦아내며, 프랑시스를 힐끗 보았다.“나한테만 그래.”말할 때 ‘나한테만’에 유독 힘을 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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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2화

배는 천천히 항구로 다가가고 있었다.유하는 갑판에 서서 바다 건너 다채로운 색으로 물든 항구 도시를 바라보았다.하얀 원피스 자락이 바람에 살짝 흩날렸다.유하는 얼마 전에서야 알았다.자신이 코시오에게 납치당해 Y국에서 D국까지 끌려왔다는 걸.그 섬... 미루도는 생각보다 훨씬 멀었다.“바람이 찬데, 옷이라도 하나 더 입지.”갑자기 어깨 위로 검은 롱코트가 툭 떨어졌다.이어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닿고, 낯익은 차가운 백단향이 코끝을 스쳤다.유하는 본능적으로 몸을 빼려 했지만, 남자의 힘을 이길 수는 없었다.“가만히 있어.”승현의 턱이 유하의 머리 위에 닿았고, 손이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보상받는 거, 약속했잖아. 거절은 안 돼.”“그런 약속, 한 적 없어.”숨을 막히게 하는 그의 기운에 유하는 이를 악물었다.‘이 사람, 진짜 어쩜 이렇게 뻔뻔할까.’하지만 승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늘 그렇듯 자기 방식대로 밀어붙였다.두 사람은 그렇게 뒤에서 꼭 붙어 서 있었다.턱끝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서로의 그림자가 겹쳤다.누가 봐도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연인처럼 보였을 것이다.승현의 품 안에 있던 유하의 눈에서 불을 뿜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승현아, 도착했어!”배가 부두에 닿자, 프랑시스가 머리를 헝클인 채 선실에서 뛰어나왔는데, 갑판에 있는 둘을 본 순간, 잠시 멈칫했지만 금세 싱긋 웃었다.“아이고, 방해했네. 난 먼저 내려간다!”“이거 놔!”승현이 여전히 품을 풀지 않자, 유하는 결국 그의 손등을 세게 할퀴었다.피부 위로 붉은 자국이 선명히 남았다.승현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아프지도 않네.’유하가 배에서 내리려 하자, 승현이 다시 손을 잡았다.“어디 가?”“병원.”“상처가 또 아파?”승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의사 부를게.”그가 프랑시스를 부르려 하자, 유하가 급히 막았다.“필요 없어.”잠시 생각하다가, 유하는 결국 솔직히 말했다.‘여기서 혼자 돌아다니다 또 잡히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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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3화

“이건... 직접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의사가 망설이며 말을 아꼈다.승현은 눈썹을 찌푸린 채 의사의 손에서 서류를 낚아채듯 빼앗았다.단숨에 마지막 페이지로 넘긴 시선이 결과란에 닿자,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코시오...!”짙은 분노가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그 미친놈, 감히...!’손에 쥔 종이가 구겨질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다.승현은 숨을 몇 번 고르며 억누르듯 숨을 내쉬었다.잠시 생각을 가다듬은 뒤, 차갑게 말했다.“결과 삭제해. 새로 만들어.”의사가 순간 눈을 크게 떴다.“그건 규정상...”“내가, 새로 만들라고 했어.”승현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그 눈빛에 압도된 의사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미 병원 쪽에는 ‘승현의 사람들’이 와서 이야기를 끝내놓은 상태였다.오승현이 누군지, 어떤 사람들인지... 다들 잘 알고 있었으니까....검사가 끝난 뒤, 유하는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의사에게 다가갔다.어설픈 D국말로 물었다.“선생님, 결과... 괜찮나요?”의사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전반적으로 건강하십니다.”그는 새로 준비한 보고서를 내밀었다.유하는 급히 받아 펼쳐보았다. 몇 가지 가벼운 수치 외엔 문제없었다.‘다행이다... 진짜 아무 일 없네.’결혼식 전 코시오에게서 받은 약을 먹은 뒤로부터 유하는 늘 불안했다.몸에 이상은 없었지만, 결과를 보기 전까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 인간이 나한테 무슨 짓을 했을지 누가 알겠어...’하지만 지금 그 무게감이 조금은 내려앉았다.그 순간, 허리가 단단히 잡혔다.유하의 몸이 그대로 승현의 품으로 끌려갔다.승현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쥔 채 낮게 말했다.“이번엔 다행이었지만,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바로 말해. 알겠어?”잠시 멈추더니,“아니, 다음은 없어. 그런 일, 다시는 안 생길 거야.”‘말은 잘하지.’유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그 말을 믿는 사람이 어딨어.’잠시 후, 조용히 물었다.“근데 아무 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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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4화

요즘 유하는 정말로 예민해져 있었다. 숨을 길게 들이쉬고는 겨우 한마디 꺼냈다.“너 할 일 없냐? 그...”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그 프랑시스 있잖아. 아직 일 남았다며? 코시오 처리해야 한다고.”‘제발 그 일이나 하러 가라. 멀리 좀 떨어져 있어라, 제발.’승현은 피식 웃었다.“걱정 마. 다 알아서 진행 중이야. 지금은 우리 같이 있을 시간, 충분하니까.”그는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생각해 보니까 우리 여행 같이 해본 적 없네. 이 기회에 좀 돌아다니자. 괜찮잖아?”“안 괜찮아.”유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단칼에 잘랐다.“그냥 꺼져.”승현은 오히려 웃음을 지었다.“너랑...”그 한마디로 모든 걸 결정하듯, 그는 유하의 손을 가볍게 잡아끌었다.햇살이 쏟아지는 거리 위를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뒤에서는 차 한 대가 천천히 따라붙고 있었다.유하는 더 이상 힘을 쓰지 않았다.‘이젠 그냥 피곤해... 게다가 지금은 배로 돌아가기도 무섭고.’그녀는 알았다.오승현이란 사람은, 일단 한번 내뱉은 건 무조건 한다. ‘지금 배로 돌아가면... 진짜 이틀은 침대에서 못 내려올 거야.’‘이 미친놈.’유하는 생각할수록 화가 났고, 승현의 손을 살짝 뿌리치려 했지만, 오히려 더 꽉 잡혀버렸다.유하는 손톱으로 남자의 손바닥을 세게 눌렀다.피가 배어 나오는 느낌이 들자 승현은 오히려 손을 더 세게 감았다.‘하... 이러면 내가 더 지는 거잖아.’유하는 결국 힘을 뺐다.‘미친놈 상대로 싸워봤자 손해지.’오후 햇살은 여전히 따뜻하고 눈부셨다.하얀 원피스 끝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고, 그 위로 걸친 검은 롱코트 자락이 파도처럼 너울거렸다.앞서 걷는 승현은 암회색 셔츠를 느긋하게 걷어붙인 채 단단한 팔뚝과 날렵한 어깨선을 드러내고 있었다.바람이 불 때마다 얇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어 탄탄한 근육의 윤곽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승현의 걸음엔 늘 그랬듯, 거만한 여유가 섞여 있었다.유하와 승현의 손은 여전히 맞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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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5화

“지금 뭐 하는 거야!”바닷가 레스토랑의 야외 테이블 앞, 유하는 머리칼에 잔뜩 걸린 하얀 레몬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분노에 찬 눈빛을 보냈다.‘이게 미쳤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다.바람에 꽃 한 송이가 날아가자, 잠깐 멍하니 서 있던 승현은 돌연 표정을 바꾸더니 그 나무로 다가가 꽃을 한 움큼씩 뜯기 시작했다.결국 꽃이 뜯겨 나가 반쯤은 민둥이 된 레몬 나무, 그리고 그 꽃들이 전부 유하의 머리 위에 얹혀 있었다.“진짜 이해가 안 돼.”‘코시오보다 더 무섭다, 이 미친놈은...’그나마 피해자는 나무였다.한창 꽃이 필 시기인데, 절반은 이미 승현의 손에 날아갔다.‘저 나무, 올해는 열매도 못 맺겠네.’유하의 머릿속엔 한 문장만 맴돌았다.‘오승현, 인간 아님. 진짜 개다.’그런데 정작 당사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그는 바로 레스토랑 주인을 불렀다.그러고는 아까 그 나무를 가리키며 정중히 물었다.“저 레몬나무, 사장님 소유죠?”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승현은 곧장 계산기로 가격을 따졌다.꽃이 핀 나무의 추정 수확량과 나뭇값까지 다 합산해서 무려 6배의 금액을 내밀었다.사장이 손사래를 쳤지만, 승현은 미소로 밀어붙였다.“괜찮아요. 대신 주소 하나만 주세요. 제가 직접 옮겨갈 테니까.”“그럼 제가 인부들 불러서 캐서 보내드리면 될까요?”승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여기에 두세요. 그 나무는 여전히 사장님 거예요. 다만... 앞으로 잘 좀 부탁드립니다.”사장은 말이 없었다.그리고 옆에서 듣고 있던 유하는 더 말이 없었다.‘진짜... 완벽하게 미쳤다.’결국 주인은 딱히 손 쓸 도리가 없었다.진심으로 사과하고, 감사 표시로 두 사람에게 환하게 웃었다.“제가 직접 요리해 드리겠습니다. 무료로요.”마침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승현은 기꺼이 수락했다....잠시 후, 유하는 머리에 레몬꽃을 잔뜩 꽂은 채로 식탁에 앉아 있었다.칼과 포크를 쥔 손끝에 분노가 맺혔다.‘이 굴욕적인 자세로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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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6화

“알아, 너는 혼자서도 잘해낼 사람이지.”승현이 프랑시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그딴 말 하지 마라.”프랑시스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그를 노려봤다.“너 아직 제정신이냐? 우리 지금 코시오 그 늙은 괴물 결혼식 박살내놓고, 그놈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곧 반격 들어올 거라고! 그런데 넌 지금 신혼이네 뭐네 하고 놀고 있어? 나는 일하고 넌 놀고? 안 돼, 내일은 바꿔!”쾅!승현이 귀찮다는 듯 프랑시스의 머리를 툭 쳤다.“뭘 바꿔, 너 맞고 싶냐?”“씨X!”프랑시스는 벌떡 일어나 욕을 터뜨렸다.“야, 그게 무슨 소리야! 내 말은, 내일은 네가 일하고 내가 술 좀 마시러 간다고! 나 요즘 참느라 미칠 지경이야...”“잠깐, 잠깐만... 너 술 마셨지? 야, 너 나 몰래 술 마셨지! 너는 마시고 나는 금주? 장난하냐?”‘이 새끼, 친구고 뭐고 끝이야. 절교야 절교.’프랑시스는 분노로 얼굴이 벌게졌다.승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너랑 내가 같냐? 넌 술 한잔이면 사고 치잖아. 지금 시국에 네가 사고 한 번 더 내면, 우린 진짜 끝이야. 조용히 있어. 내가 아는 한, 넌 이 상황에 술 안 마신다. 알았지?”“내가 언제 사고 쳤는데! 술은 인생의 윤활유야! 나 지금 말라 죽겠다고, 이 나쁜 놈아!”승현은 고개를 저으며 소리 높여 투덜대는 프랑시스를 억지로 끌고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투명한 유리문을 ‘탁’ 닫아버리고, 거실 한쪽에 단단히 닫힌 침실 문을 힐끗 바라봤다.그리고 낮게 말했다.“됐어, 이제 진짜 얘기하자.”프랑시스가 헝클어진 붉은 머리를 마구 쓸어 올리며 씩씩거렸다.“지랄... 그래, 말해봐.”승현은 발코니 난간에 기대서 멀리 바다를 바라봤다.붉게 물든 석양이 수면 위에 퍼지고 있었다.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계획을 바꿔야겠어.”순간 프랑시스의 얼굴이 굳었다.“미쳤냐? 그 계획 세우느라 우리가 몇 달을 준비했는데, 지금 와서 바꾼다고? 이 타이밍 놓치면 코시오를 다시 칠 기회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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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7화

“놔.”유하는 더 이상 화내고 싶지 않았다.그래서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다.하지만 승현은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그는 허리를 숙여 유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따뜻한 숨결이 피부에 닿았다.숨이 뒤섞이고, 공기가 엉켜 들끓었다.유하가 몸을 빼려는 순간, 승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가만히 있어. 잠깐만 이렇게 안고 있게 해줘.”“비켜.”유하는 냉정하게 말했다.“토하겠으니까.”“입은 여전히 독하네.”승현이 낮게 웃었다.유하가 발로 그를 밀치자 그제야 몸을 뗐다.하지만 바로 옆에 걸려 있던 코트를 들어 그녀의 어깨에 덮었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유하가 반항했지만, 그는 단단히 단추를 잠갔다.그리고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나가자.”“어딜. 나 잘 거야.”“다녀와서 자.”승현이 가볍게 웃으며 돌아봤다.그러고는 그녀의 분노로 달아오른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유하가 놀라 손을 올리기도 전에 승현이는 그녀를 한 팔로 번쩍 안아 들었다.맨발 그대로.호텔 로비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유하의 얼굴이 화끈거렸다.‘이 미친놈... 사람 많은 데서!’차는 이미 대기 중이었다.승현은 자연스럽게 문을 열고 그녀를 태웠다.유하는 들어가자마자 정강이를 힘껏 걷어찼다.“나 돌아갈 거야! 신발도 안 신었는데!”“괜찮아. 내가 네 다리가 되어줄 테니까.” 승현이 태연하게 말했다.‘다리 같은 소리 하고 있네.’유하는 더 말할 기운도 없었다.이 인간과 싸워봤자, 언제나 지는 쪽은 유하였다.그녀는 몸을 말아 코트를 꼭 여몄다.그리고 창밖만 멍하니 바라봤다.불빛이 스쳐 지나가고, 밤이 서서히 짙어졌다.‘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네... 묻고 싶지도 않아.’이상하게, 이번엔 승현도 조용했다.차 안엔 오직 바람과 엔진 소리만 흘렀다....얼마나 지났을지도 모르고, 노을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어둠이 깊게 내려앉았다.차는 조용히 멈췄다.창밖엔 부드러운 등불이 켜진 정원이 보였다.승현이 먼저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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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8화

별빛이 가득한 은하의 그림자가 방 안을 물들였다.하지만 승현의 말이 끝나자, 유하의 눈빛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다.조금 전까지의 멍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언제나처럼 냉정하고 담담했다.“오늘 내 생일 아니야.”“알아.”승현이 잔잔히 웃었다.“그래도 금방이잖아. 그때쯤이면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겠지. 그래서 미리 해주고 싶었어.”‘열흘 남짓 뒤면 완전히 끝이야.’유하는 그 생각에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그래, 어차피 다 끝날 일인데.’“필요 없어.”그녀는 말끝을 차갑게 잘랐다.“내 생일, 너랑 함께 안 보내.”유하에게 ‘생일’이란 단어는 이미 지독한 트라우마였다.그건 축하가 아니라, 굴욕의 날이었다.결혼 7년 동안, 매년 하연우의 생일이면 승현은 꼭 해외로 날아갔다.그리고 그가 그곳에 있는 동안, 유하는 언제나 ‘연우와 승현의 친구들’에게 감금당했다.빈집, 잠긴 문, 아무도 없는 어둠 속.도와달라고 외쳐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혹시 내가 연우한테 방해될까 봐 그랬겠지.’그렇게 합리화하려 해도 그건 결국 버려진 기억이었다.그래서 지금 승현의 입에서 ‘생일’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유하는 그저 역겹기만 했다.‘이 남자는 정말 기가 막히게 나를 상처 주는 방법만 알아.’유하는 별빛으로 반짝이는 천장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차가운 눈으로 승현을 마주했다.“나 피곤해. 돌아가서 잘래.”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하지만 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는 유하의 허리를 감싸 들어 조용히 식탁 앞으로 데려갔다.탁-라이터 불빛이 켜지며 케이크 위의 초가 하나둘 타올랐다.“여보, 소원 빌어봐.”승현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지만, 유하에겐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독처럼 느껴졌다.‘진짜 징글징글하다. 이 인간.’유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숨을 내쉬며 짧게, 거칠게 말했다.“코시오 빨리 끝장내고, 오승현이 내 인생에서 꺼져버리게 해주세요. 다시는 이 인간 얼굴도 안 보게 해주세요.”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촛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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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9화

밤은 조용히 내려앉았고, 밖에서는 별들이 빙글빙글 도는 듯했다. 나무로 둘러싸인 작은 오두막 안은 외부와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소리만으로도 온도가 달라지는 곳, 두 사람의 거리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웠다.유하는 몸을 돌리려 했지만 허리는 누군가의 팔에 걸려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이 가늘게 오가던 순간, 승현의 목소리가 가슴의 울림과 함께 스며들었다. “여보, 나랑 한 곡 출래? 이 별빛 배경, 내가 꽤 공들여 준비한 거거든. 이런 밤엔 춤이 빠지면 섭섭하지.”좋은 밤이라, 그 말엔 틀림이 없었다.하지만 ‘좋은 때’라니...‘좋은 건 풍경뿐이지.’유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눈을 들었다.빛나는 은하가 허공에서 흩날리고 있었다.승현의 말투는 익숙하고도 애매했다. 무심한 농담 같다가도 진지한 요청 같았다.유하는 손끝으로 바로 옆을 지나는 별들을 스치듯 만졌다. 말은 담담했고, 표정은 더 담담했다. “근데... 가짜는 가짜야.” 그 한마디로 거절이 명확해졌다. 그날 밤, 승현과 유하는 호텔로 돌아가지 않고, 둘은 그대로 이곳에 머물렀다.아마 하루 종일의 피로가 쌓였던 탓일까... 유하는 이불을 덮자마자 금세 잠들었다.고른 숨소리가 조용히 퍼졌다.하지만, 그 옆자리의 승현은 끝내 잠들지 못했다.그는 천천히 눈을 뜬 채 가만히 어둠 속에서 그녀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오늘따라, 이상하게 잠이 안 온다.’미약한 별빛이 방안을 스민다. 승현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했고, 그는 조용히 유하의 등 쪽을 바라봤다. 얇은 잠옷 너머로 드러난 어깨선과 쇄골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 모습은 마치 날갯짓을 준비하는 새처럼, 가냘프고 강렬했다.승현은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하... 음...”유하는 어딘가 낯선 열기에 눈을 떴다. 숨이 거칠게 오르내리고, 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너무 가까웠다.‘뭐야... 이 온기...’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뒤를 돌아볼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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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0화

“어이구야, 네 잘생긴 얼굴이 왜 이렇게 부었냐?”프랑시스가 승현 주위를 빙빙 돌며 비아냥거렸다. 눈빛엔 순도 백의 고소함이 가득했다.“궁금해?”승현이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그 표정이 너무 태평해서 프랑시스는 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곧장 손을 들며 외쳤다.“스톱! 안 궁금해! 듣기 싫어!”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승현이 행복할수록 자신은 괜히 더 고통스러웠다.“젠장, 나는 죽어라 일하고 있는데 넌 편하게 고기나 먹고, 와이프랑 놀고...”프랑시스가 이를 갈았다.“진짜, 인간도 아니다!”“정정할게.”승현은 담담하게 커피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고기’는 아니고... ‘국물’만.”그는 마치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그 말 뒤에 담긴 미묘한 여운은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국물만?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이 자식, 얼굴에 다 쓰여 있잖아.’프랑시스가 책상을 ‘쾅’ 치며 소리쳤다.“똑같아, 이 미친놈아!”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외쳤다.“안 되겠다. 나 술 마실 거야. 큰 통으로, 아주 퍼마실 거야!”“안 돼.”승현이 단칼에 잘랐다.“엘도라 일 끝나면 네가 술 마시고 죽든 말든, 술통에 빠져 죽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한 방울도 안 돼. 만약 마시면 너희 집 술 전부 없애버릴 거다.”프랑시스가 중지를 세워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악마 같은 놈. 지옥이나 가라.”승현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오늘따라 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그래서 진행은 어때?”그 질문에 프랑시스는 눈을 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아... 이 미친놈은 일 얘기할 땐 꼭 타이밍을 이렇게 잡는다니까.’프랑시스는 일 얘기가 나오자마자 표정이 달라졌다. 헝클어진 붉은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역시 코시오 쪽에서 움직였어. 너랑 네 와이프가 따로 나간 며칠 동안, 그놈들 사람들이 멀찍이 따라붙었더라. 근데 이상하게 손은 안 대더라고. 그래서 우리 쪽에서도 건드리지 않았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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