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481 - Chapter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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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1화

정말 난처한 순간이었다.연락처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공항에서 찾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유하는 핸드폰을 쥔 채 머쓱하게 서 있었다.그러나 그 난감함은 오래가지 않았다.옅은 장미 향기가 바람을 타고 스치듯 다가왔고, 유하는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시야 한쪽에서 아름답게 반듯한 손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손등은 희고 매끈했고, 손가락은 길고 가늘며 관절이 도드라져 단정한 선을 만들고 있었다.손목에는 영문이 섬세하게 뚫린 은팔찌가 감겨 있었고, 그 속을 길고 가는 붉은 실 끈이 관통해 팔에 몇 바퀴 감겨 있었다.차갑고 매끄러운 은빛, 그리고 선명한 붉은 끈.이 조합은 묘하게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차갑고도 관능적인 느낌을 풍겼다.“안녕하세요, 지명훈입니다.”남자의 목소리는 예상외로 아주 부드럽고 따뜻했다.유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가장 먼저 보인 것은 깨끗하게 떨어지는 하얀 턱선.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 연한 분홍빛 입술.좁고 곧게 뻗은 콧대.마지막으로 가늘고 길며, 살짝 처진 듯 보이는 눈매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검은 머리는 결이 살아 있는 듯 자연스러웠다.한쪽은 귀 뒤로 넘겼고, 다른 한쪽은 흐트러진 채 뺨 옆으로 흩어져 있었다.전체적인 얼굴은 차갑고 선이 뚜렷한데, 웃을 때는 또 놀랄 만큼 따뜻했다.소성란은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지명훈은 정말 잘생겼다.심지어 ‘정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만큼 소성란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예술을 오래 해온 탓인지, 유하는 아름다운 것에 유난히 약했고 또 강하게 감탄하며 좋아했다.그래서 잠시 멍하게 바라보다가 자신이 예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황급히 손을 내밀었다.“죄송해요. 지명훈 씨가 너무 잘생기셔서... 잠깐 정신이 좀...”그러나 명훈은 유하와 악수하지 않았다.대신 유하의 손끝을 아주 가볍게 잡아서 자신 쪽으로 조금 끌어당기더니, 유하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Y국에서는 흔한, 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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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2화

유하는 충격받았다.‘제대로 들은 게 맞나?’‘아직도 학생이라고?’‘그것도 대학원생이라지만... 이제 스물네 살?’‘고모할머니, 대체 무슨 생각이세요!’‘너무 어린데!’순간, 유하의 명훈을 바라보는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잠시 망설인 뒤 조심스레 말했다.“저... 제가 아이가 있다는 건 아시죠? 아홉 살이에요.”“네, 알고 있어요.”명훈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사진도 봤어요. 정말 귀엽더라고요. 저는 아이들 좋아합니다.”“감사합니다.”마침 직원이 음식을 가져와 잠시 대화가 끊겼다. 직원이 자리를 뜨고 나자 유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저기... 아직 대학원 다니실 나이면 우선 학업에 집중하셔야죠. 이런 건 그렇게 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결혼은 신중해야 하는 일이고요.”“그러면... 제가 졸업할 때까지 기다리고 싶으신가요?”명훈이 되물었다.“그럼 몇 년은 더 걸릴 것 같은데요. 저는 박사과정까지 갈 가능성이 높아서요.”“아니에요.”유하는 깊게 숨을 들이켰다.“제 말은... 지명훈 씨가 저보다 너무 어리고, 아직도 한창 젊으니까... 저희는 안 맞는다는 뜻이에요.”식탁 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그럼... 소유하 씨는 제가 싫으신 건가요?”“그건 아니에요.”유하는 난처하게 고개를 저었다.“다른 건 몰라도... 결혼은 안 돼요. 안 맞아요.”“알겠습니다.”그 말이 떨어지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얕은 미소를 유지하던 명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표정은 오히려 조금 더 환하게 바뀌었다.“그러면... 이야기하기 훨씬 편해졌네요.”“네?”유하는 눈을 깜빡였다.“사실은요.”명훈이 난처하게 웃었다.“제 부모님이 제가 공부만 파고드는 걸 정말 싫어하세요. 벌써 2년 전부터 결혼하라고 난리셔서...”“도저히 못 버티겠더라고요. 그래서 잠깐 도망치듯 귀국했는데...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유하는 바로 이해했다.‘다들 사정이 있구나.’그 사실을 알고 보니 명훈이 왠지 동병상련처럼 느껴졌다.“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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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3화

“제 제안, 소유하 씨 생각은 어떠세요?”레스토랑 2층 창가.명훈이 조용히 물었다. 오른손 손가락이 왼쪽 손목의 은팔찌와 붉은 실을 천천히 굴렸다.“그 제안이란 게...”유하가 막 입을 떼려던 순간, 가방 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맞은편의 명훈은 가볍게 손짓하며 말했다.마치 ‘신경 쓰지 말라’는 듯한 제스처였다.그제야 유하는 핸드폰을 꺼냈다.화면을 본 순간, 말이 턱 막혔다.‘청산 선배?’며칠 전 전통찻집에서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지금 이 상황.유하는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약간... 어색해졌다.명훈에게 양해를 구하듯 손을 흔든 뒤, 조용한 구석으로 이동해 전화받았다.“선배?”[나야.]반대편에서 들려온 청산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담담하고 부드러웠다.[저녁은 먹었어? 나 요즘 새로운 맛집 찾았는데... 잠깐 기다리면 데리러 갈게.]익숙한 말투.순간, 유하는 잠시 멍해졌다.‘정말 오랜만이다.’8년 전, 대학 시절.둘은 늘 이렇게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맛집을 찾아다녔다.재밌는 것도, 새로운 것도 늘 함께 공유했다.그 시절은 유하에게 가장 즐거웠던 때였다.무심코 ‘응’ 하고 대답할 뻔했지만, 유하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조금 난처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오늘은 힘들 것 같아. 지금 밖에서... 누구랑 저녁 먹고 있어.”잠시, 청산이 말이 없었다.그리고 곧 들린 목소리는 차분했다.평소와 다름없이 착 가라앉은 음색이었다.[밖에서 일 이야기하는 중이야? 미안. 내가 방해했네. 다음에 보자.]“아니야.”과거가 떠올라서인지, 유하는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말투는 솔직하고 담백했다.“우리 고모할머니가 잡아주신 소개팅 중이야. 상대는 고모할머니 오래된 친구분 댁 아들이고... 거절하기 좀 어려워서.”“오늘 마침 귀국해서 내가 공항 데리러 갔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같이 밥 먹는 중이야. 그러니까 오늘은 안 돼.”유하가 이렇게까지 솔직하고 담백하게 말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청산은 오래도록 침묵했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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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4화

두 집안 어른들 모두 해외에 있는 상황이라, 서로를 감싸 주는 일이 그리 번거롭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자, 유하는 결국 명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일단 고모할머니 마음부터 좀 진정시켜야지.’계속되는 재촉도 솔직히 더는 버티기 싫었다.“그런데요, 우리가 말한 ‘서로 도와주는 것’이라는 게... 그냥 어른들께 ‘괜찮은 사람이라서 좀 더 알아보는 중이다’ 정도로 말씀드리는 거지, 그 이상은 아니에요. 시간을 벌기 위한 거니까요.”유하는 다시 한번 분명히 선을 그었다.“물론이죠.”명훈은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유하 씨. 이제부터 우리는 서로 협력하는 좋은 파트너네요.”“저야말로요. 잘 부탁드립니다.”두 사람이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그리고 동시에 긴 숨을 내쉬었다.이제 끝없이 이어지는 소개팅 스트레스에서 비록 잠시일지라도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마음이 가벼워지자 식탁 위 음식이 갑자기 더 맛있어 보였다.두 사람은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식사를 마쳤다.계산할 때는 나이가 더 있는 쪽이 내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유하가 끝까지 고집해 계산을 끝냈고, 둘은 나란히 계단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거리가 좁혀지자, 유하의 코끝에 다시 익숙하면서도 은근히 매력적인 장미 향이 스쳤다.진하지 않고, 맑고 은은한 향.시중 향수와는 결이 다른 독특함이 있었다.오래 남는데 답답하지 않고, 부드럽게 스며드는 향.‘역시... 집안이 향수 만드는 집이라 그런가?’명훈의 집안이 몇 대째 향수를 연구해 온 가문이라고 들었다.그렇다 보니 명훈도 이미 업계에서는 꽤 이름 있는 사람이었을 거다.의류 사업을 하며 향에도 관심이 많은 유하였지만, 지금 맡은 향은 사용된 모든 원료가 쉽게 분별하기 어려웠다.호기심이 일었다.“혹시... 명훈 씨 지금 쓰고 계신 향수... 어느 제품인가요?”명훈이 웃었다.“바람꽃의 기억.”“바람꽃의 기억...”유하는 그 이름을 조용히 따라 되뇌었다.그리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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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5화

“교수님, 소유하 씨를 만났습니다.”객실 안, 명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네. 역시 교수님 말씀대로였습니다. 소유하 씨가 교수님께서 조향하신 ‘바람꽃의 기억’을 아주 좋아하시더군요. 아마 어떤 어른께 선물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네, 그래서 먼저 교수님께 여쭤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셔츠 단추를 다 풀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흘리듯 떨어뜨렸다.군더더기 없이 정돈된 허리선과 단단한 등 근육이 드러났다.연한 흉터 몇 줄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균형을 해치기보다 오히려 거칠게 다듬어진 매력을 더했다.명훈은 상의를 벗은 채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움직일 때마다 손목의 은팔찌와 붉은 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걸어가며 남은 옷들을 하나씩 바닥에 흘리듯 벗어 떨어뜨렸다.전화기 너머, 교수의 짧은 목소리가 들렸다.[알았다.]“그럼 교수님께서 직접 만드셨던 그 몇 병... 다음번에 소유하 씨를 만날 때 전달하겠습니다. 아마 아주 좋아할 겁니다.”[그래.]뚝-전화가 끊겼다.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와 뜨거운 수증기가 번져 나왔다....밤공기 위로 도시의 불빛이 강물처럼 흐르는 시각.이 시간의 W시의 도로는 여전히 차가 꼼짝거릴 정도로 막혀 있었다.유하는 창밖의 느리게 밀려가는 차선을 잠시 보다,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고모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그쪽에서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전화가 거의 바로 연결됐다.[어떄? 마음에 들어? 느낌 있어?]소성란의 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고모할머니, 이제 겨우 한 번 봤어요.”유하는 난처하게 말했다.[그게 뭔 상관이야? 사람은 첫인상이 제일 중요해. 첫눈에 느낌 오면 그걸로 충분한 거지.]소성란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명훈과 오늘 약속한 ‘협력 관계’라는 단어가 떠올라, 유하는 한층 더 조심스럽고 애매하게 답했다.“괜찮긴 했어요...”[결혼은 언제로 잡을까?]유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성란이 들뜬 목소리로 끼어들었다.[이번엔 내가 직접 네 웨딩드레스 디자인한다! 결혼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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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6화

태건이 아는 유하는 그렇게 쉽게 누군가를 마음에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하물며 오늘 같이 딱 한 번 본 남자에게 호감을 느낀다?그런 건 유하에게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아무리 그래도... 저 남자를 얼마나 알았다고...?’‘그리고 그게 재혼 문제라면 더더욱...’태건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 지명훈이라는 남자... 확실히 우월한 외모는 납득이 갔다.하지만 유하가 잘생긴 남자를 못 봐서 흔들릴 사람인가? 절대 아니었다.오승현만 해도 그렇다.얼굴만 놓고 보면 지명훈보다 더 나았던 시절도 있었다.‘그럼... 젊고 잘생겨서 마음에 든 거야?’답답한 마음만 한 겹씩 쌓여갔다.잠시 침묵하던 태건은 결국 막히는 차선 사이에서 문장을 조심스럽게 정리하곤 용기 내 입을 열었다.“사... 대표님. 혹시... 재혼을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유하는 바로 돌아보지도 않았다.대답은 짧고, 차가웠다.“그게 나와 나 비서 사이의 일인가?”경계와 불쾌함이 분명하게 묻어났다.‘보안이든 뭐든 일로써 관여하는 건 그렇다 쳐도...’‘결혼 문제까지 끼어들어? 진짜 한가하냐, 나태건.’유하의 마음속에서 짧게 툭 튀어나오는 불만.“그런 뜻이 아닙니다.”태건은 황급히 설명을 이어갔다.“오 대표님 유언에...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소 대표님께서 재혼 의향이 있으시면, 먼저 오씨 가문의 어른들이 남자분 인품을 살펴보시는 게 좋다고...”“만약 괜찮은 분이라면, 오씨 가문에서 직접 결혼식을 준비해 드린다고... 최고의 예우로 진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그러면 오 대표님께서도... 다른 그곳에서도 안심하실 거라고.”“인품을 살펴준다고?”유하는 코끝으로 비웃음을 흘렸다.‘오승현이 무슨 인품을 따져?’‘저 같은 놈 하나만 더 안 걸리면 그걸로 감사해야지.’‘오승현이 그렇게 대범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어?’‘웃기는 소리 하네. 차라리 진짜 재혼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그 귀신 같은 오승현이 무덤에서 기어 나와 시비 걸지만 않으면 그걸로 됐지.’생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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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7화

알고 보니 박영심도 이렇게 환하고 찬란한 풍경화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어머님의 마음이 원래는 이런 빛인가요?’그동안 어둠 속에서 헤매던 그림들만 보아 와서 유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이토록 밝고 아름답다니.기억이 퇴화된 게...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유하는 한순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때, 옆에서 박영심의 들뜬 목소리가 튀어 들어왔다.“어때? 내가 그린 거 D국의 한 섬에 있는 마을이야.”D국.그 단어가 귀에 닿는 순간, 유하는 온몸이 굳어 버렸다.눈동자에 어두운 그림자가 슬며시 내려앉았다.방금 전까지 밝게 웃던 박영심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되물었다.“D국...의 마을이요?”“그래!”박영심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나 어릴 때, 할아버지가 나 D국으로 데려갔잖아. 국제 예술제 시상식 때문에. 그때 한동안 거기 살았는데, 정말 예뻤어!”“그래서 그때 할아버지한테 말했지. 나 대학 가면 D국에 갈 거라고! 그 나라의 F시에 가서 미술 배울 거라고!”말이 그 지점에 닿는 순간, 박영심의 표정이 쓱 떨어졌다.그리고 입술이 삐죽 나왔다.“근데 내가 다 컸는데도... 오광진 그 나쁜 놈이 나 학교 못 가게 막았어! 집에만 가두고, 나가게도 안 해! 진짜 얄미워, 오광진!”유하는 그제야 이해했다.왜 아까 오광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는지.박영심의 기억이 그 시절로 돌아간 것이었다.열여덟 살의 박영심.유하는 천천히 박영심을 바라봤다.투정은 하고 있지만, 눈동자는 생기로 가득했고 표정은 싱그럽게 빛났다.기억속의 그 나이 때처럼 순수하고, 기대로 가득한 그 얼굴.‘그 후에, 어머님께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그 예쁜 마음을 짓누른 건... 그곳에서 있었던 불행한 일이었나요?’유하의 생각이 그곳까지 미치자 가슴속이 서늘하게 저렸다.그 순간이었다.“어머? 왜 울어?”박영심이 유하를 보고 깜짝 놀랐다. 금방이라도 화낼 것 같던 얼굴이 한순간에 걱정으로 가득 찼다.급하게 다가와 손끝으로 유하의 눈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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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8화

‘코시오... 진짜 죽일 놈이네.’유하는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났다.방 안에서는 베개 두 개, 인형 몇 개가 날아다닌 뒤, 갑자기 오광진이 움직였다.그는 이불째로 박영심을 통째로 끌어안더니, 투정 부리는 아이 다루듯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헝클어 놓았다.박영심이 화가 나 주먹을 휘두르자 그 손목을 붙잡고는, 입을 맞추고 깨물고 장난치기 시작했다.“야아아!”박영심이 크게 소리쳤다.유하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비명에 반사적으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그 모습을 본 순간 얼굴이 벌겋게 될 만큼 당황해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제발요... 내 앞에서 이러지 마세요!’코시오에서 보았던 그림들만 해도 버거웠는데, 이런 장면까지 보게 되면 유하는 정말 못 버틴다.‘우리... 서로 적당한 공간은 좀 지켜요... 제발...’잠시 후, 머리도 옷도 엉망진창이 된 채 오광진이 방에서 나왔다.얼굴엔 박영심이 할퀴어 만든 상처가 몇 줄 있었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부끄러움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다.“오늘 밤은 유하가 좀 어머니 봐드려라.”그 말투조차 당연한 듯 담담했다.유하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이게 오씨 가문의 유구한 전통인가?’‘이 집안 남자들의 저런 뻔뻔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유하는 겉으로는 다정하게 웃으며 답했다.“걱정 마세요. 제가 잘 챙길게요.”오광진은 애초에 걱정하지도 않았다.이해할 수 없는 건 많았다.왜 박영심은 기억을 잃으면서 수많은 사람은 못 알아보는데, 뒤늦게 만난 유하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이렇게까지 믿고 의지하는지...처음 만났을 때부터 박영심에게 있어 유하는 특별한 존재였다.지금은 그 특별함이 더 깊어졌다.그리고 다행히도 유하는 한 번도 그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깊은 밤.침실에는 작은 무드 등 하나만 켜져 있었다.유하는 박영심 옆에 누워 있었고, 비록 피곤해 눈이 감길 듯했지만, 박영심이 아직 잠들지 못했다는 건 뚜렷하게 느껴졌다.그래서 그냥 조용히 입을 열었다.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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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9화

‘귀신이라도 보신 거야?’유하는 방금 들은 말을 되짚으며 침대에 누운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머릿속이 하얘진 채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환청이라고 하기엔 방 안은 너무 조용했고, 이 넓은 침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유하와 박영심 딱 둘뿐이었다.게다가 자신이 귀가 어두운 편도 아니었다.‘여우 눈?’‘그놈?’‘약혼자...?’약혼자는 둘째 치고, 여우 눈의 남자라니, 박영심이 말하는 그 사람은 오승현?설마 준서는 아닐 것이다.박영심이 기억이 뒤엉켜 손자 존재까지 잊고 난 뒤로는 괜히 자극될까 싶어 준서를 본가에 데려온 적도 없다.그리고 아무리 기억이 퇴행했다고 해도 애를 어른으로 착각할 리는 없지 않은가?거기다 유하의 약혼자라니... 말이 되나?하지만 승현은 이미 죽었다.그렇다면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어머님... 기억이 더 심하게 흐트러진 건가? 이젠 없는 사람까지 보이고?’새벽 공기마저 차갑게 느껴지며 유하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었다.갑자기 너무 무서워진 나머지 이불 끝을 붙잡아 꾹 당겨 올리고, 몸을 웅크려 숨듯 파고들었다.‘내일... 내일 반드시 다시 확인해야 해.’그렇게 다짐했지만, 심리적 불안 때문인지... 혹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함 때문인지...유하는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을 뜬 채로 밤을 새워 버렸고, 동이 틀 무렵엔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생길 정도로 피곤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아침.유하는 잠에서 갓 깨어난 박영심을 거의 달려들 듯 붙잡고 물었다.“어머니, 그... 약혼자요.”“응...?”박영심은 아직 반쯤 꿈속이었다. 하품하며 눈을 비비고 있었다.“여우 눈... 그놈 말이에요.”유하는 더욱더 조심스럽게 말했다.“그게 뭔데?”박영심은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그리고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잠깐! 유하야! 너 언제 약혼했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순식간에 박영심은 완전히 깨어나 있었고, 손목을 붙들고 따져 묻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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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0화

양석훈은 박영심의 주치의였다.유하는 오광진이 급히 움직이는 걸 보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따라갔다.병원에 도착해 양석훈을 만나자, 그는 상황을 간단히 듣고는 곧장 박영심의 상태를 자세히 점검하기 시작했다.문진, 촉진, 반응 검사...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느라 시간이 꽤 흘렀다.그 사이, 이 방 저 방을 오가며 모두 정신이 없었고, 유하는 입술만 깨물고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었다.유하의 의심은 여전했지만, 묻고 싶어도 분위기가 어떤 질문도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박영심 상태가 급한 만큼 오광진이 본사에 출근할 수 없게 되었고, 유하 역시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일단 MB그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출근길부터 유하는 마음 한쪽에 언뜻 거칠고 어두운 그림자 같은 초조함이 계속 걸렸다.‘왜 이렇게... 불안하지.’아마도 승현이 남긴 상처가 아직 몸 깊숙한 곳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말도 안 될, 이치에 맞지 않는 추측임을 알면서도 어제 박영심이 한 그 말이 유하를 괜히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 했다.그렇지만 박영심의 병력은 실제였고, 최근 정신 상태가 불안정했던 것도 사실이었다.“말이 돼... 그럴 리가 없지.”유하는 자신을 다독여도 묘하게 꺼림칙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엘도라에서의 그날, 유하가 직접 본 것도 분명 사실이었다.‘그게 어떻게 가짜겠어. 내가 환각을 본 것도 아닌데...’그럼에도 마음 밑바닥에서 웅덩이처럼 번져 오르는 그 기이한 불안감.마치 진짜 문제는 박영심의 병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유하는 그 원인을 정확히 잡아낼 수가 없었다.병 때문인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어떤 가능성 때문인지...점점 생각은 흐려지고 불안만 쌓여 갔다.결국 그날 하루 종일 유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집중하지 못했고, 사소한 일에도 자꾸 놀랐고, 손끝이 자꾸 식어갔다.그리고 업무에도 티가 나기 시작했다.“소 대표님? 소 대표님?”룸 안.RS그룹 김도성 대표가 의견을 한참 내놓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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