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41 - Chapter 50

100 Chapters

제41화

‘나태건... 미쳤나?’그게 유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친 첫 번째 생각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태건은 오씨 가문의 직계 후계자, 오승현 곁을 지키는 충성심 강한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어릴 적부터 가문에서 직접 교육하고 키워낸 만큼, 명령은 오직 ‘가주’ 단 한 사람에게서만 받는다.가문 내의 방계 인물들조차 태건 앞에선 함부로 말하지 못했고, 언제나 공손하게 대했다.말 그대로... 한 사람 아래, 모두 위.자연스레, 유하라는 이름만 걸친 ‘오씨 가문의 안주인’보다도 훨씬 더 높은 권위와 입지를 가진 사람이었다.지난 7년, 승현은 유하에게 늘 차갑고 무심했다.기분이 조금이라도 상하면 말없이 태건을 시켜 유하를 ‘처리’했고, 그럴 때마다 태건은 언제나 잔혹할 만큼 효율적이었다.유하가 망가진 모습도, 눈물로 범벅된 얼굴도, 태건은 아무렇지 않게 봐왔고, 단 한 번도 지금처럼 행동한 적은 없었다.‘이런 인간이 갑자기 이러는 건, 그냥 돌았다는 증거지.’유하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나태건이 오승현과 다른 게 뭐야.’‘겉으론 점잖은 척, 속으론 똑같은 쓰레기.’‘가식덩어리. 위선자.’유하는 한 손으로 태건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며, 차갑게 내뱉었다.“내려놔.”하지만 태건은 움직이지 않았다.“사모님, 다리에 상처가 있습니다. 걸을 수 없어요.”“그래도 너 같은 놈의 도움은 필요 없어!”단호한 말에도 태건은 대꾸하지 않고, 품속 유하와의 직접 접촉을 피하려는 듯, 자기 재킷으로 유하를 감싼 채, 반대 손으로 조용히 문을 열었다.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유하를 안은 그대로 바깥으로 나섰다.유하는 속이 미쳐버릴 것처럼 뒤틀렸다.‘이 오승현이 키운 개X끼... 주인 닮아가는 것도 유분수지. 제 맘대로야, 진짜.’유하는 얼굴을 태건의 가슴 쪽으로 돌려 바깥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X 같은 놈, 진짜 주제넘네.”그 순간, 태건의 걸음이 아주 잠깐 멈칫했다. 심장이 한 박자 놓친 듯, 조용히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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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화

안방은 유하가 마지막으로 다녀갔을 때와 거의 달라진 게 없었다.드레스룸 한편엔 유하가 미처 가져가지 못한 옷들이 여전히 걸려 있었고, 그녀는 그중 잠옷 두 벌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 욕실로 향했다.욕실 거울 앞에 선 유하는 술에 젖은 옷을 하나하나 벗어냈다.원래 피부가 하얀 편이었지만, 지금은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은은한 분홍빛이 감돌았고, 잘록한 허리와 매끄러운 곡선이 샹들리에 불빛 아래서 달빛처럼 은은히 빛났다.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그 달빛은 잿빛으로 변했다.등 한가득 멍 자국이 올라와 있었다.살결이 예민한 편이라 조금만 스쳐도 쉽게 자국이 남았는데, 오른쪽 종아리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유하는 말 없이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핑크빛 입술이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이게, 오승현이 내게 남긴 거야.’‘잊지 말자. 절대, 잊지 말자.’몸을 씻는 내내 상처를 스치는 통증에 숨이 끊길 듯했지만, 유하는 묵묵히 물을 끼얹었다.뜨거운 수증기에 어질어질해졌지만, 가까스로 숨을 고른 뒤 가볍고 얇은 잠옷으로 갈아입었다.방 안엔 난방이 잘 되어 있어서 춥진 않았다.침대 머리맡엔 뜯지 않은 연고 하나가 놓여 있었다.분명 윤해월이 두고 간 것이리라.유하는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가더니, 그 연고를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었다.‘나태건이 산 거야. 나는 안 써. 쓰고 싶지도 않아.’서랍장을 뒤져보니 예전에 쓰다 남은 아기용 연고가 몇 개 나왔다.아이를 키우다 보니, 집에 늘 약을 쟁여두는 습관이 생겼다.짐을 싸서 이 집을 떠날 때, 양육권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런 약들은 챙기지 않았었다.그런데 오늘, 그게 다시 필요해질 줄은 몰랐다.승현은 오늘 밤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지만, 유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기다림은 이제 충분히 했다.예전의 유하는, 집에만 있으면 아무리 늦어도 승현을 기다렸다.불을 켜두고, 옷을 정리해 두고, 따뜻하게 반겨주었다.묵묵히, 다정하게.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더는 그럴 이유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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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화

승현은 전화를 받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거실에선 윤해월이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준서를 달래고 있었다.그가 문을 열고 성큼 들어서자, 윤해월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곧장 상황을 보고했다.“대표님, 의사 선생님 모셔 와서 진료는 받았습니다. 사모님은 과로로 인한 심장 두근거림과 실신이었고요. 중간에 한 번 깼다가 약 드시고 다시 주무시는 중입니다.”“그래요, 알았어요.”승현은 짧게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준서를 바라봤다.승현이 들어오는 순간까지 울고 떼쓰던 준서는, 그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울음을 뚝 그쳤다.머뭇거리며 고개를 숙인 채, 아버지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서재로 와.”승현은 차분한 어조로 말하며, 먼저 계단을 올랐다.“준서 도련님...”윤해월은 걱정스레 불렀지만, 준서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조용히 아버지를 따라갔다.작은 얼굴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승현은 먼저 2층 안방으로 향했다.유하는 침대 위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창백한 얼굴에, 찡그린 미간... 잠든 얼굴마저 편치 않아 보였다.승현은 문가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다, 이내 말없이 문을 닫고 나왔다.서재.부자 단둘이, 한 명은 앉고, 한 명은 서 있었다.승현은 고급 수트를 입은 채, 묵직한 잎갈나무 의자에 몸을 기댔다.한 손은 의자 팔걸이에 얹혀 있었고, 긴 손가락이 무심히 표면을 두드렸다.얼굴에는 감정이라곤 읽히지 않았다.하지만 방 안은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찼다.준서는 꼼짝도 못 하고 서 있다가,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아빠... 엄마가 먼저 날 안 봤어요. 나 그냥 살짝 밀었을 뿐인데, 엄마가 그렇게 아픈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나도 놀랐어요...”‘처음엔 진짜 무서웠는데... 엄마 괜찮다니까, 아빠가 너무 무섭게 굴잖아.’‘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보고 어쩌라고...’처음의 공포가 가신 자리엔 억울함이 밀려왔다.엄마는 결국 괜찮다 했고, 아빠는 아무 말도 없이 쳐다보기만 한다.준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속으로 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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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4화

준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증조할아버지 댁에 가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거긴 재미있는 건 하나도 없고, 전부 지루하고 어려운 것들뿐이다.못 외우면 대나무 자로 손바닥을 찰싹 때린다. 아프다, 진짜.‘안 돼. 절대 거긴 못 가.’‘할아버지 집도 안 돼. 증조할아버지가 나서면 아무도 나 못 도와. 엄마는 도와주긴 해도... 엄마 말은 소용이 없잖아.’‘방법을 찾아야 해... 뭔가, 빠져나갈 방법을...’...한편, 승현은 서재를 나와 안방으로 들어갔다.노트북을 꺼낸 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일을 처리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살며시 문을 열고 나가 보니, 태건이 서 있었다.승현은 문을 닫으며 물었다.“무슨 일이지?”태건이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하연우 씨가 방금 연락을 주셨습니다. 대표님과 연락이 닿지 않아 저한테 전화하셨다고 하더군요.”승현은 안방에 들어온 뒤로 핸드폰을 무음으로 두었고, 전화가 온 줄도 몰랐다.별다른 해명 없이, 무심히 물었다.“뭐래?”태건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준서 도련님 관련 일입니다. 대표님께서 도련님을 대표님의 할아버님 댁으로 보낸다는 걸 예상했는지, 겁이 난 도련님께서 하연우 씨에게 전화해 대신 부탁해달라고 했답니다.” “당분간 그쪽에서 지내고 싶다고도 했고요... 제가 거절할까요?”승현은 짧게 웃었다.“왜 거절해? 준서가 그 정도로 애썼는데.”태건은 평소처럼 감정 없는 표정을 유지했지만, 그 말엔 약간의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도련님을 정말 그쪽에 보내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승현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여우 같은 눈매가 어딘가 묘하게 깊었다.“결정은 준서가 한 거야. 오씨 가문 사람이라면, 선택한 일에 책임질 줄도 알아야지.”“알겠습니다.”태건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물었다.“도련님 곁에 붙일 인원은 몇 명으로 할까요?”“최대한 적게. 없어도 돼.”그 말에 태건은 놀랐다.준서는 오씨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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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화

승현과 준서 사이에서 벌어진 일은, 그 시각 깊이 잠든 유하에겐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다.하지만 유하의 잠은 절대 평온하지 않았다. 온몸이 무거운 듯, 정신은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그 몽롱함 속에서 유하는 다시 몇 년 전, 대학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햇살이 교정의 계단을 비추고, 젊고 풋풋했던 시절의 승현이, 산뜻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계단 위에 서 있었다. 따사로운 빛 아래, 승현의 존재는 유난히 눈부셨다.그땐 유하도 몰랐다.승현은 원래부터... 저런 식으로 세상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란 걸.그는 갓 머리를 감은 듯 물방울이 맺힌 짧은 흑발, 맑고도 서늘한 여우 같은 눈매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계단 밑에서 얼어붙은 듯 서 있는 여대생 유하를 향해서.“나 좋아해? 얼마나?”청춘의 승현 목소리는 지금보다 훨씬 가벼웠고, 어딘가 미성숙한 냉기와 설렘이 섞여 있었다.그 말 한마디에, 어린 유하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올랐다.그 순간, 유하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좋아해요. 많이 좋아해요.”꿈속에서, 유하는 과거의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그리고 그 순간, 꿈은 형체를 바꾸기 시작했다....신혼집.승현은 붉은 리본이 달린 장난감 로봇을 유하에게 내던졌다.눈엔 분노가 가득했고, 그대로 문을 꽝 닫고 나가버렸다.방 안에 떨어진 로봇이, 기계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그 속엔 승현 특유의 저음이 겹쳐, 칼처럼 유하의 가슴에 꽂혔다.“소유하, 나는 널 절대 사랑하지 않아.”꿈은 끝이 없을 만큼 흔들렸고, 그 말이 메아리치던 순간, 유하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떴다.유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다.그 흐릿한 시야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 하나가 어른거렸다.몽롱한 정신 속에서,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유하는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무의식처럼 입을 열었다.“오승현... 나, 이제 너 안 좋아해.”누군가에게 답하듯, 혹은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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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6화

유하는 더 이상 질질 끌고 싶지 않았다.차라리 단칼에 끝내고, 하루라도 빨리 이 결혼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승현의 시선은 유하의 완벽하게 매끈한 라인을 따라 흐르다가, 곧 등과 다리에 퍼진 멍 자국 위에서 멈췄다.조금 전까지 어둑하던 눈빛은 차츰 식어갔고, 얼굴에서 남아 있던 욕망도 사라졌다.승현은 무심히 옆 협탁 위에 놓인 연고를 집어 들더니, 유하를 가볍게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말했다.“약 발라줄게. 아직 아파?”그 손길을 유하는 단번에 쳐냈다.차가운 눈빛으로 남자의 손을 밀어내며, 조소 섞인 말투로 뱉었다.“7년 동안 단 한 번도 다정한 척하지 않더니, 지금 와서 이게 무슨 짓이야?”‘내가 기억 상실이라도 온 줄 알아?’‘오승현, 당신이 날 어떻게 대해왔는지... 전부 생생하게 기억나.’‘지금 와서 뭘 가장한대. 가소롭기만 해.’하나하나 다 떠오른다.기다림, 외면, 무시, 냉정, 말 없는 상처들.그 세월 속에서 유하의 진심은 조금씩, 아니 하루하루 산산조각 나며 부서졌다.이젠 피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마음이었다....유하의 눈엔 이제 더 이상 미련도, 기대도 없었다.승현을 바라보던 예전의 애틋한 눈빛은 사라지고, 대신 깊은 피로와 단념만이 자리했다.그런 유하를 한참 바라보던 승현은, 무표정한 얼굴 아래 짙게 드리운 감정을 감춘 채, 갑자기 유하를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저항할 틈도 없이, 유하는 승현의 품에 갇혔다.그는 적당한 힘으로 여자의 어깨를 눌러 제어하며, 손에 쥔 연고를 유하의 여린 등 위에 조심스럽게 펴 발랐다.얇은 피부 아래로 솟은 견갑골이 손끝에 닿을 듯 떠올랐다.부드럽게 떨리는 그 움직임은, 마치 한 마리 날갯짓하는 나비처럼 섬세했다.‘이러다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 같아.’그 생각에, 승현의 손끝에 자연스레 힘이 더해졌다. 품 안의 여자는 말도 안 되게 부드럽고 따뜻했고, 피부는 숨 쉬듯 고왔다.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 승현의 몸은 남자로서의 본능적인 반응을 드러냈다.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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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화

하씨 저택.이른 아침, 연우네 가족 셋은 다이닝 룸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그 애는 아직 안 일어났어? 아침 안 먹나?”류정인은 단정한 자세로 브런치를 들며, 옆에 앉은 딸에게 가볍게 물었다.그 ‘애’란, 물론 어젯밤 승현이 보낸 아이, 준서였다.승현이 자기 아들을 별말도 없이 이쪽에 맡긴 건 꽤 의외였지만, 류정인은 놀라는 기색 없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신뢰라는 건 결국, 자산이니까.“엄마, 신경 쓰지 마세요.”연우는 별것 아니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어제 밤새 게임을 했대요. 아침은 그냥 자고 일어나면 먹으라고 할게요.”류정인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조용히 당부했다.“그래도 네가 좀 챙겨. 지금 승현한테는 그 애 하나뿐이야. 너무 대충 다루면 안 돼.”“알고 있어요.”연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유려한 눈매에 물기를 살짝 띄웠다.“준서가 요즘 저한테 푹 빠졌거든요. 그 엄마라는 사람보다 훨씬 더요. 게다가 그 아이는 아직 오씨 가문의 공식적인 후계자잖아요.”“그 아이만 확실히 잡고, 승현의 마음만 제대로 잡으면, 오씨 가문, 머지않았어요.”하지철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을 이었다.“그래도 어디까지나 남이 낳은 애다. 네가 진짜 오씨 가문의 여자가 될 거면, 아니,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서 직접 오씨 가문의 아이를 가져. 네 자식이 생기면, 그때는 그 애는 필요 없어져.”연우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나직하게 말했다.“네, 아빠.”“근데 말이다.”하지철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승현이, 요즘 여기에 잘 안 온다며? 너를 선택한다는 게, 확실한 거냐?”“걱정하지 마세요, 아빠.”연우는 여전히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승현이랑은 어릴 때부터 수십 년 인연이에요. 이번에 제가 귀국하자마자 자회사도 하나 만들어줬고, 아이까지 여기로 보냈잖아요. 시간문제일 뿐이에요.”하지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말을 돌렸다.“그나저나, 얼마 전에 승현이를 도와서 A국에 있는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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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화

“그때 내가 해외에만 나가 있지 않았어도, 소유하 따위가 그 틈을 파고들 기회는 없었어요.”연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내 인연을 가로채서, 당시에 내가 얼마나 조롱당했는지 알아요? 그래서 이번에 귀국한 김에 마음먹었어요.”“소유하,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내가 잃은 거, 다 되찾을 거고... 쟤가 아끼는 거, 하나씩 다 부숴줄 거예요. 살아 있는 게 고통일 만큼 만들어 줄 거라고요.”말끝에 연우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7년이나 시간을 줬는데도, 결국 승현이 마음 하나 못 잡았잖아요? 자기가 낳은 애는 누가 한 마디 꾀니까 바로 떠나버리고... 참 우스운 인생이에요. 천하고 능력 없는 것들의 한계죠.”류정인은 딸의 매끄러운 얼굴을 쓰다듬으며, 온화한 미소로 속삭이듯 말했다.“맞는 말이야. 우리 연우가 훨씬 예쁘고 똑똑하지. 그깟 소유하쯤이야, 상대도 안 되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어.”“엄마!”연우는 엄마 손에 볼을 살짝 비비며, 마치 아이처럼 다정하게 기대었다....‘대나무숲’ 아파트 단지.유하는 하루 종일 집에서 푹 쉬고, 겨우 종아리의 멍이 좀 가라앉았다.이제 걷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다.이른 아침, 유하는 공항으로 향했다.오늘은 고모할머니, 소성란이 해외 컬렉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며칠 전 직접 연락이 왔고, 유하더러 공항까지 마중 나오라 했었다.현관을 나서며 문을 잠그던 순간, 맞은편 복도에 대형 트럭 몇 대가 줄줄이 주차돼 있고, 새 가구를 들고 오가는 인부들로 북적이는 것이 보였다.‘해외에서 돌아온 새 이웃이 곧 이사 들어오나 보네.’유하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고, 차를 몰고 국제공항으로 향했다.생각보다 도착이 빠른 편이었고, VIP 출구 쪽에 차를 세우자마자 눈에 익은 인물이 보였다.바로 태준혁이었다.그는 고급 정장을 입고, 중후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중년 부부를 정중히 배웅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뒷모습만 봐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그 시선은 곧 유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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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화

유하의 눈은 다가오는 그 한 사람에게만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준혁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들리지 않았다.인파의 중심에 선 강렬한 분위기의 소성란 역시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옆에 있는 수행 직원에게 몇 마디를 건넸다.곧바로 기자들과 카메라들이 뒤에서 멈춰 섰고, 경호와 스태프들이 포토 라인을 정리했다.웅성이던 분위기는 순간 조용해졌고, 누구도 소성란의 결정을 거스르지 못했다.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미 하나의 권위였으니.소성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람들 뒤를 따돌리고 유하 쪽으로 다가왔다.유하도 그 순간 발걸음을 옮겼다. 반사적으로 걸어 나가면서도, 그 눈빛엔 밝은 기색과 함께 ‘그리움에 대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지...’정말 오랜만이었다.멀리서 봐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유하의 고모할머니 소성란.소성란이 가까이 다가오며 선글라스를 천천히 벗었다.유하를 위아래로 천천히 살피던 시선이 곧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유하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어쩜 이렇게 말랐어. 그 녀석은 대체 널 어떻게 돌본 거야?”그 말 한마디에 유하는 눈가가 붉어졌다. 머리 위로 전해지는 따뜻한 감촉이 너무 오래 잊고 지냈던 것이었기에, 울컥하는 감정이 목을 치밀어 올랐다.‘이 한마디, 이 손길... 그 어떤 위로보다 따뜻해...’“고모할머니...”간신히 입을 열었지만, 그 말 말고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러다 울겠다... 지금 여기서 울면 안 돼...’소성란은 정말 유하가 너무 오래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그리고 너무나도 외로웠던 지난 시간이 모두 한순간에 덮쳐왔다.소성란은 유하의 표정을 보자, 단번에 상황을 짐작했다.애써 웃지 않으려는 얼굴, 불안정한 숨결.‘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소성란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한번 유하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차 안에서 얘기하자.”“네...”유하는 조용히 대답하며, 소성란과 함께 이동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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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0화

“아직 디자인 손 안 놨다며? 작업실도 차렸다고 들었고.”소성란은 차에 오르자마자 본론부터 꺼냈다.“네 작업실로 가자. 얼마나 퇴보했는지 직접 봐야겠다.”“네, 알겠어요.”유하는 짧게 대답하고 차를 출발시켰다.도심을 빠져나가는 길목, 유하는 룸미러로 뒤를 힐끗 보다가 검은 SUV 두 대가 뒤따르고 있는 걸 알아챘다.“신경 쓰지 마. 내 스태프들이야. 어딜 가든 따라붙는 애들이지.”소성란은 미리 설명하듯 가볍게 덧붙였다.유하는 고개를 끄덕였고, 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어색해...’ ‘이젠 어떻게 말을 붙여야 할지도 모르겠네...’유하는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과거 유하가 결혼을 강행했을 때, 소성란은 단호하게 반대했다.하지만 유하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그 결혼과 함께 예술 활동도 거의 손을 놓다시피 했다.둘은 서로 연락을 끊었고, 그 어긋남은 무려 7년이란 시간을 만들었다....차가 한참을 달리던 중, 침묵을 먼저 깬 건 소성란이었다.“너, 태준혁이랑은 무슨 사이냐?”유하는 그 질문이 나올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잠깐 말을 잃은 뒤, 천천히 준혁과의 관계를 설명했다.“한 번, 정장 주문받은 적 있어요. 그 연으로 태씨 가문 연회에 참석한 게 전부고... 그 뒤로는 딱히 연락도 없었어요. 사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에요.”“그래, 그 정도면 됐어. 안 친한 게 낫지.”소성란은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짧게 말했다. 그러자 유하 마음속에 잔잔한 불안이 일렁였다.‘왜 그 사람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유하는 결국 조심스레 물었다.“혹시... 태준혁 대표님, 문제가 있는 사람이에요?”소성란은 유하를 잠시 바라보더니,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답했다.“문제 있는 건 태준혁 개인이 아니라, 그 집안 전체야. 태씨 가문이란 이름 자체가... 썩었지.”“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유하는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엔 당혹감이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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