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51 - Chapter 60

100 Chapters

제51화

‘대나무숲’ 아파트 단지.리아 작업실 앞.고급 승용차 몇 대가 줄지어 서 있었고, 8명 되는 스태프들이 삼삼오오 모여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작업실 내부에선 소성란이 유하의 작품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살펴보고 있었다.어떤 장에선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어떤 장에선 미묘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보였다.책을 절반쯤 본 시점, 소성란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옆에서 조용히 기다리던 유하를 바라보며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정말 안 서운해? 후회는 안 돼?”유하는 잠시 멍해졌다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자 어이없고 또 조금은 답답한 듯 웃었다.“고모할머니, 오시는 길 내내 계속 물으셨잖아요. 진짜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요...”승현이 외도를 했고, 자신은 이혼을 결심했다고 말한 뒤부터 소성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돌아오는 내내 ‘서운하지 않아?’, ‘정말 끝낼 거야?’, ‘후회 안 해?’라는 질문이 반복되다 못해 이제는 유하 귀에 박힐 지경이었다.‘이러다 진짜 기절하겠어...’그런 유하의 태도에 소성란도 그제야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렸다.그러나 잠시 후, 소성란은 일부러 화난 척하며 테이블을 툭 쳤다.“왜, 몇 마디 더 물었더니 귀찮아졌어?”“설마요.”유하는 자리에서 살짝 앞으로 다가와 소성란의 손등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고모할머니랑 이렇게 오랜만에 뵙는 건데요.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이야기만 해도 좋아요. 뭐든 다 듣고 싶고, 같이 있고 싶어요.”“그래? 이제야 그런 말이 나와?”소성란의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나이 든 목소리엔 금방이라도 눈물이 맺힐 듯한 울컥함이 스쳤다.‘이렇게 보고 싶었는데, 왜 그땐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안 나왔을까...’“7년이야, 유하야. 무려 7년이 지났다고. 고모할머니가 몇 번이나 7년을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내가 연락하지 말랬다고 정말 한 번도 안 찾아오고, 연락 한 통 없고... 내가 고집부린 건 그렇다 쳐.”“근데 너까지 똑같이 고집부릴 거야? 날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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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화

유하는 소성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예전부터 언젠가 소성란과 관계가 회복되면 준서를 꼭 한 번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해오기도 했다.하지만 지금은 말이 쉽지 않았다.소성란은 애초부터 오승현을 탐탁지 않아 했고, 이번 외도 문제 역시 유하는 비교적 담담하게 말할 수 있었다.하지만... 아들의 마음이 엄마와 멀어졌다는 이야기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그걸 어떻게 말해...’‘내가 열 달 품고, 죽을 고비 넘겨 낳은 애가...’‘그 인간 외도 상대한테 마음이 더 간다고... 엄마보다 그 여자가 더 좋다고...’‘내가 양육권을 포기하려 한다는 말까지 들으면...’‘고모할머니 심장, 진짜 멈출지도 몰라.’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야 겨우 풀리기 시작한 참이었다.유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고모할머니, 준서 얘긴... 조금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오승현이랑 재산 분할 얘기도 아직 진행 중이라서요.”소성란은 오랜 시간 상류층을 상대하며 자신이 곧 ‘자산’이자 ‘권력’이 되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만큼 고위층 가정의 이혼이나 재산 정리, 양육권 분쟁이 얼마나 복잡한지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더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한 마디는 남겼다.“그래도, 조만간 시간 내서... 그 아이 얼굴 좀 보여줘. 내 증손자니까.”“네, 알겠어요.”유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소성란은 다시 책상 위에 놓인 포트폴리오를 집어 들었다.조용히 몇 장을 넘기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네가 그동안 작업한 것들, 전반적으로 괜찮더라. 손 감각도 살아 있고, 디테일도 무너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감각이 죽진 않았어. 아주 망가진 건 아니라 다행이네.”소성란 특유의 냉정한 평가 기준으로는, 이 정도면 꽤 만족스러운 반응이었다.유하는 그 말을 듣고 눈빛이 확 밝아졌다.소성란의 입에서 저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이 업계에서 꽤 값진 인정이었기 때문이다.‘고모할머니는 절대 일에서는 립서비스 안 하는 분인데...’‘그래도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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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화

유하의 표정 속 망설임과 걱정... 소성란은 놓치지 않았다.비록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사이였지만, 유하가 지금 얼마나 불안한지, 그 눈빛 하나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도대체 오씨 가문에서 이 아이를 얼마나 짓눌렀으면...’소성란의 기억 속 유하는 거침없고, 눈빛 하나에도 에너지가 넘쳤다. 기발하고 대담하고, 어디서든 자신감이 가득한 아이였다.하지만 지금의 유하는 어딘가 꺾여 있었고, 한 발짝을 내딛는 것조차 주저하고 있었다.소성란의 마음이 순간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왜? 옛날에 그 독특하고 당차던 예술 천재가 이젠 겁이 나서 기회 앞에서도 물러서는 거야?”소성란의 말엔 가벼운 농담조의 어조가 섞여 있었지만, 그 속엔 단단한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지금 네가 의심하는 건 뭐야? 자기 자신이야? 아니면, 내 눈이 틀렸다는 거야?”그녀는 유하를 바라보며 한 치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잊지 마, 유하야. 넌 7년이라는 시간을 묵묵히 쌓아온 사람이야.”그리고 한발 다가서며 단호하게 덧붙였다.“넌 지금 혼자가 아니야. 고모할머니가 뒤에 있어. 뭘 무서워해?”그 말은 곧장 유하의 가슴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그래...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이제,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잖아.’불안했던 마음이... 그 말 한마디에 뿌리를 내리는 느낌이었다.유하는 코끝이 시큰해져 오는 걸 꾹 참고, 조용히 숨을 들이쉬었다.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었다.“네. 고모할머니, 회사 정리는 며칠 안에 마무리될 것 같아요. 그때 바로 ‘Splendid’로 찾아갈게요.”소성란의 미소가 깊어졌다.“그럼 시작이네. 질질 끌 일 없지.”단호한 성격답게 소성란은 바로 다음 일정을 꺼냈다.“내일 저녁에 음악인 초청 리셉션이 있어. 예술계랑 상류 인사들 많이 와. 너, 나랑 같이 가자.”“좋아요. 같이 갈게요.”...음악인 초청 리셉션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소성란과 유하는 별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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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화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7년 전, 유하와 소성란은 심하게 다투고 연락을 끊었다.승현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정확히 말하면 소성란이 먼저 등을 돌렸다고 믿고 있었다.‘둘 사이 이미 끝난 줄 알았는데... 왜 다시 붙어 다니는 거지?’계단 위에서 그 둘을 마주한 순간, 승현은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불편함, 당혹스러움, 그리고 복잡한 짜증이 뒤섞였다.하지만 소성란은 그런 승현을 향해 단 한 번 차갑게 시선을 주었을 뿐...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승현이 인사할 틈조차 없이 말이다.그 뒤를 유하도 조용히 따라 올랐다. 마찬가지로 아무런 표정 없이,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승현을 투명 인간처럼 지나쳐갔다.“여보...”승현이 당황한 듯,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무심코 손을 뻗어 유하의 팔을 잡으려 했지만, 유하는 가볍게 몸을 틀며 피했다.승현의 손에 걸린 건, 유하의 팔에 걸쳐 있던 별빛처럼 반짝이는 오간자 숄의 끝자락뿐.그 실루엣은 남자의 손끝에서 너무도 가볍게 미끄러져 내렸다.그 찰나의 감촉.은근한 체온, 고급 원단 특유의 촉감.승현의 눈길이 그녀의 뒷모습에 고정되었다.그제야 비로소 유하의 오늘이 ‘낯설게’ 느껴졌다.검은 튜브톱 드레스 위로 드러난 맑고 빛나는 어깨와 팔선. 건강하게 붉어진 피부 위에 은은하게 얹힌 오간자 숄.가녀린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며 계단을 오를 때마다 찰랑이는 그 천의 움직임.그리고 목에 두 번 감긴 실버 체인 위로 작은 사파이어 펜던트가 섬세하게 빛났다.단아하게 올린 머리, 그사이에 꽂힌 고전적인 은핀.화장은 은은했지만, 그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고 아름다웠다.‘언제부터... 저렇게 우아했지?’승현의 시선은 유하의 허리에서 골반 선까지, 숄 사이로 드러나는 실루엣을 따라 내려갔다.‘저 허리...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 그 부드러움...’그 기억이 본능처럼 되살아났고, 승현의 목젖이 저절로 움직였다.‘안고 싶다... 지금 당장.’계단 위에 서 있던 준범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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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5화

“연우가 너 좋아하는 건 누가 봐도 뻔하잖아!”준범의 말에 승현은 말없이 옅은 미소만 지었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그는 창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손끝으로 창 옆의 자동 버튼을 누르자 두꺼운 자수 커튼이 부드럽게 올라갔고, 그 아래로 넓게 트인 전망이 드러났다.2층 VIP 룸은 무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도록 전면이 시원하게 설계돼 있었다.이 자리는 소위 ‘누구를 내려다보는 자리’였다.뒤에서 준범이 계속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근데 나 진짜 방금 잘못 본 거 아니지? 소유하... 소성란 선생님이랑 같이 있었지?”말끝이 조금 올라갔다.“두 사람 다 ‘소’ 씨던데, 혹시 친척? 아, 아니겠지. 소성란 선생님은 원래 가족 없다고 했잖아. 혼자 일군 사람으로 유명하잖아?”준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아무래도 성만 우연히 같은 거겠지. 소유하가 감히 그런 분이랑 엮일 리 없지.”‘소유하 같은 애가...’‘그냥 지방 출신에, 밑바닥에서 수작 부려서 오씨 가문까지 올라온 건데...’‘설마 그런 인물이랑 진짜 연이 있겠어?’준범은 얼마 전 연우의 부탁으로 유하에 대해 따로 조사한 적이 있었다.유하는 평범한 지방 소도시 출신.결혼 이후 친정과도 연을 끊은 채, 오직 오씨 가문이라는 ‘신분 상승 수단’에 집착한 여자.준범의 눈엔 유하가 그저 처세와 잔머리로 버텨온 싸구려 기회주의자였다.“근데 너 요즘 왜 이렇게 수다쟁이가 됐냐?”승현은 소파에 널브러진 준범을 힐끔 보며 가볍게 한마디 툭 던졌다.날카롭고, 깊은 눈빛.그 순간, 바로 옆 라운지에서도 커튼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승현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그곳... 맞은편 창가에 서 있는 유하와 시선이 딱 맞닿았다.그 둘은 잠깐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봤다.‘바로 옆 룸이었어?’예상치 못한 거리.생각보다도 가까웠다.그 짧은 눈맞춤 이후, 유하는 먼저 시선을 돌려 안쪽으로 들어갔다.묘하게 단호하고, 조용한 움직임이었다.‘피했네.’승현은 아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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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화

방문하는 인사들마다 하나같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성란에게 제자가 있다는 것도 의외지만, 그 수가 손에 꼽을 만큼 적은 데다,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디자이너들이 대부분이었다.그런데 이 젊은 여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고, 분명히 낯설었다.더 놀라운 건, 소성란이 이 여자를 ‘천재’라고 소개했다는 점이었다.소성란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이 아이는 내가 직접 가르친 첫 제자예요. 그동안 조용히 내 곁에서 실력을 쌓고 있었죠. 이제 때가 돼서, 세상에 내보내려 합니다.”실제로 유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소성란의 손에 맡겨져 디자인과 감각을 배웠다. ‘문하생’보다는 ‘수제자’에 가까웠고, 사실상 ‘비공식적인 입문자’였던 셈이다.이후 유하의 성까지 들은 이들은 한층 더 술렁였다.‘소유하’는 성까지 같았다.궁금해하는 눈치들이 곳곳에 있었지만, 아무도 함부로 묻진 않았다.‘소성란 선생님은 예전부터 자신을 혼자라 했지.’‘가족 없는 사람처럼 살아왔고,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그걸 굳이 찔러 묻는 건 실례지.’여기 모인 이들은 이 바닥에서 몇십 년을 굴러온 사람들이니, 말 한마디가 가지는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그냥 속으로만 눈치 보면 되는 일이지.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잖아.’유하는 내내 조용히 소성란의 곁에 서 있었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상대의 말과 반응을 경청하며 천천히 자리를 익혀갔다.소성란이 유하를 이 자리에 데려온 건, 명함을 돌리고 네트워킹하라는 뜻이 아니라, ‘얼굴을 익히라’는 의도였다.결국 중요한 건... 말이 아닌 결과, 즉 작품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인파로 붐비던 라운지 안도 조금씩 조용해졌다.그때 전체 행사장의 불이 꺼졌다.어둠이 덮이는 순간, 대화는 자연스레 멈췄고, 사람들은 고개를 돌려 창밖 아래를 바라보았다.오늘의 이 행사는 예술계의 저명한 아티스트들, 그리고 떠오르는 신예들이 직접 무대에 오르는 밤이었다.같은 예술계에 몸담은 유하로서도 흥미가 가지 않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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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화

“저 드레스... 내가 직접 만든 웨딩드레스 고급 맞춤복이야.”소성란은 무대 위, 하프를 연주하며 달빛 아래 선녀처럼 빛나는 연우를 이를 악물고 바라보며 말했다.유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동시에 고개 한쪽이 기울어졌다.‘고모할머니한테 오승현이 바람난 상대가 하연우라는 건... 내가 말 안 했는데?’‘그렇다면 그 웨딩드레스, 단순히 하연우가 사서 입은 것일 수도 있었지?’‘‘Splendid’ 제품을 사려면 그만한 재력과 커넥션이 필요하니까.’‘그저 ‘고가 거래’일 수 있는데, 왜 고모할머니는 이렇게까지 분노하는 거야?’‘설마... 둘 사이에 뭐 개인적인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유하의 궁금증이 올라오려던 찰나, 소성란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투엔 확실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저 옷, 오승현이 몇 달 전에 직접 ‘Splendid’ 찾아와 ‘웨딩 테마’ 맞춤복으로 의뢰한 거야.”유하의 눈이 커졌다.소성란은 말을 이어갔다.“그때 난 너희가 결혼할 때 제대로 된 예식도 없이 혼인신고만 했다는 걸 기억했거든.”“오승현이 ‘웨딩드레스 콘셉트’로 맞추겠다고 하니까, 나는 그게 네 결혼식 보강이라 생각했어. 결혼 생활이 잘 풀리고 있는 줄로 알았지.”“솔직히 나는 그 남자 별로였지만... 그래도 네 결혼인 줄 알고, 이왕이면 네가 예쁘게 입는 게 낫겠다 싶어서 받아들인 거였어.”여기까지 말한 소성란의 표정은 참기 힘든 울컥함과 씁쓸함이 뒤섞여 있었다“그런데, 네가 어제 이혼 얘기 꺼내고... 나는 그 드레스 그냥 잊어버리자고 했던 거야. 어차피 넌 결혼식 안 할 거고, 쓸모도 없잖니.”“그런데 지금, 그 드레스를 입고 무대 위에 저 여자가 올라왔잖아.”소성란은 주먹을 꼭 쥐었다.“저 애가... 오승현 바람 상대 맞지?”유하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소성란의 얼굴엔 분노와 모멸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그 드레스는 단순한 맞춤복이 아니었다.요즘 소성란은 디자인만 맡고, 제작은 대부분 팀이 담당했다.하지만 그 드레스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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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8화

반대편 라운지 안은 말 그대로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류정인은 우아하게 나무 의자에 앉아 무대를 퇴장하는 딸의 뒷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고 있었다.조명 아래 반짝이는 드레스, 하프 앞에 앉은 연우의 모습은 그야말로 ‘선녀’ 그 자체였다.류정인은 그 드레스가 어디 제품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세계 하이엔드 브랜드 중 하나인 ‘Splendid’의 고급 맞춤 드레스.당시 드레스가 집에 도착했을 때, 오승현이 직접 말했다.드레스 하단의 장미 자수는 ‘Splendid’의 창립자, 소성란 선생님이 직접 한 땀 한 땀 수놓은 것이라고.요즘 소성란이 거의 직접 손을 대지 않는다는 건 상류층이라면 다 아는 사실.그런데 그 소성란이 손수 만든 드레스를 입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왕실, 글로벌 VVIP, 혹은 각국 명문가의 ‘정점’에 선 사람뿐이었다.이건 단순한 드레스가 아니라, 신분과 위상의 상징이었다.그 드레스 하나가 무려 60억 원에 달한다는 건 덤이었다.그리고 오늘 무대에서 사용된 하프 역시 F국 박물관에서 전용기로 공수해 온 수백 년 된 고급 골동품이었다.하씨 가문이 그런 걸 준비할 수는 없었을 거고, 이건 전적으로 승현 덕이었다.류정인과 하지철은 연우가 무대에 나설 때, 일부러 승현의 반응을 눈여겨봤다.그가 창밖으로 연우를 바라보던 눈빛.그건... 누가 봐도 ‘빠져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애써 꾸미지 않아도 드러나는 감정. 진심은 감춰지지 않았다.승현이 이토록 정성을 들여 연우를 빛내주는 모습은 그 자체로 확신이 되었다.이건 단순한 호의가 아니고, 마음이 실린 행동이었다.유하만 잘 정리된다면, 하씨 가문과 오씨 가문의 혼사는 시간문제였다.하지철은 속으로 매우 흡족했다.가볍게 헛기침한 뒤, 이미 자리로 돌아와 있던 승현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승현아, 오늘 연우를 위해 이렇게까지 준비해 줘서 삼촌으로서 참 고맙고 든든하구나.”승현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별말씀을요, 삼촌. 당연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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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9화

승현이 노크 후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소성란의 라운지는 이미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상태였다.대형 창을 덮은 두꺼운 자수 커튼은 모두 내려져 있었고, 천장엔 백색 조명이 밝게 켜져 있었다.입구 근처엔 서너 명의 정장을 입은 체격 좋은 남자들이 조용히 서 있었다.말 그대로 그 안은 ‘긴장감이 맺힌 폐쇄된 공간’이었다.승현은 순간적으로 공기를 감지했다.‘기류가... 심상치 않네.’하지만 그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늘 그렇듯 부드럽고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 소성란의 맞은편에 섰다.이어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고모할머니, 오랜만입니다. 그간 건강은 괜찮으셨는지요?”소성란은 나무 의자에 등을 기대며,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그 입으로 ‘고모할머니’라는 소리는 하지 말게. 괜찮았던 몸도, 자네 얼굴 보니 식겁이니까.”승현은 그 말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어차피 이 자리에선 먼저 감정이 흔들리는 쪽이 지는 거니까.’자리 잡은 후, 이번엔 소성란 옆에 앉아 있는 유하에게 시선을 옮겼다.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불렀다.“여보.”유하는 고개를 돌려 아예 응답조차 하지 않았다.‘저럴 줄 알았지... 그래도 괜히 기대했네.’하지만 소성란은 승현의 이런 ‘눈치 없는 태도’가 더 거슬리는 듯, 테이블을 쳤다.탁!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본론부터 말하지. 이번에 내가 제작한 ‘월화로즈’ 드레스, 그거 내가 회수하겠어.”‘월화로즈’.하연우가 오늘 무대에서 입은 웨딩드레스의 공식 이름이었다.승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고모할머니, 그건 좀 억지입니다. 해당 드레스는 정식으로 비용을 지불한 맞춤 오더였고, 그 이후 누가 입든 그건 제 권한이죠.”소성란은 코웃음을 쳤다.“푸훗. 그래, 참 뻔뻔하네.”“‘Splendid’ 고급 맞춤복, 그중에서도 내가 직접 관여한 드레스는 단순히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야.”“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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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화

“정말 얼굴도 양심도 다 버렸구나.”처음부터 유하 결혼식을 위한 드레스가 아니라고만 했어도 소성란은 절대 이 의뢰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직접 디자인에 참여한 것도 모자라, 한 땀 한 땀 손으로 수놓은 장미 드레스까지 결국 바람난 내연녀가 무대 위에서 입는 꼴이라니.연우는 그 드레스를 입을 자격도 없고, 승현이라고 해서 소성란한테 그런 짓을 할 권리도 없었다.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승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고모할머니께서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단 한 마디도 확답한 적이 없습니다.”“당시 ‘Splendid’ 측 직원이 ‘소유하 씨를 위한 드레스냐’는 질문을 건넸을 때, 저는 그저 차를 마시며 애매하게 미소만 지었을 뿐입니다.”그 말은, 자신이 말하지 않았으니, 오해는 상대의 몫이라는 계산이었다.쾅!소성란이 테이블을 세게 쳤다.그 충격에 잔에 담긴 차가 파르르 떨렸다.그리고 눈매에는 살기가 서려 있었다.“오 대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렇게 나오는 거야? 정말 나랑 끝을 보자 이거지?”승현은 여전히 덤덤했다.“하연우 씨가 부족하다면, 오씨 가문이 그 빈자리를 채우면 됩니다.”“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상황은 고모할머니께서 먼저 무리하신 거고요.”‘결국, 날 자극하려는 거네.’소성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살기는 더 진해졌다.“그럼, 더 이상 대화는 무의미하겠네?”승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침묵은 곧 인정이었다.밖에서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비서 태건이 다급히 들어오려고 할 때, 입구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단숨에 가로막았다.태건은 가장 먼저 손을 뻗은 남자의 팔을 유연하게 꺾어내며 들어가려 했지만, 나머지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소성란은 문 쪽에 단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낮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전할 말 있으면, 그대로 문밖에서 말해요.”태건은 조용히 승현을 바라봤다.손엔 힘이 들어가 있었고, 턱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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