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31 - Chapter 40

100 Chapters

제31화

[엄마, 언제 집에 와요?]어둠이 내려앉은 밤거리.천천히 달리는 차 안,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준서의 어린 목소리는 맑고 또렷했다.유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전방을 바라보며 담담히 답했다.“엄마는 일이 있어서 오늘은 못 가.”[아...]살짝 실망한 듯한 숨소리가 들렸다.잠시의 정적 후, 준서가 다시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엄마, 당분간 아예 집에 안 와요?]유하는 그 질문에 말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2초, 아니 3초쯤 침묵한 뒤, 차가운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엄마는 당분간 계속 바빠. 그러니까 아빠랑 잘 지내.”[알았어요.]작게 가라앉은 준서의 목소리.[그럼 엄마, 나중에 집에 오면 꼭 전화해 줘요. 나 엄마 보고 싶을 것 같아요.]“그래...”통화가 끊기고, 유하는 고개를 돌려 꺼진 핸드폰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짙은 속눈썹이 살짝 떨리고, 운전대를 쥔 손가락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준서가 이렇게 직접 전화한 게... 벌써 1년은 된 것 같은데.’‘보고 싶다고 말한 것도... 오늘이 처음이네.’오씨 가문 본가.준서는 전화를 끊자마자, 조금 전의 그 풀이 죽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환하게 웃으며, 서둘러 다른 번호를 눌렀다.“연우 이모! 엄마한테 이모가 말한 대로 다 물어봤어요!”하씨 저택.연우는 부모님과 함께 거실에서 대화 중이던 승현에게 미소 띠고 일어났다.“잠깐 전화 좀...”조용한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으며, 부드럽게 물었다.“그래, 우리 준서. 엄마가 뭐래?”[오늘도 집에 안 오고, 며칠 동안도 안 올 거래요!]연우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눈은 차분했지만, 그 속엔 숨길 수 없는 만족이 번졌다.‘그래, 소유하. 이 정도는 알아서 물러나 주는 게 서로 편하지.’‘승현 곁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오씨 가문과 우리 집이 손잡는 건 시간문제야.’‘그땐 모든 게 내 것이 되겠지.’[이모?]준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이모, 왜 말이 없어요?]순간 생각이 깊어졌던
Read more

제32화

류정인은 박영심과 벌써 몇 년째 돈독한 사이였다.그 시절, 오승현과 하연우의 약혼 이야기도 사실은 몇 해 전 두 사람이 한참 골프 치고 와인 마시던 날, 가볍게 웃으며 정한 ‘말뿐인 약속'에서 시작된 것이었다.결국 약혼은 흐지부지됐지만, 두 사람의 사이까지 틀어진 건 아니었다.오씨 가문과 하씨 가문의 왕래는 여전히 활발했고, 류정인 역시 그 세월 동안 승현을 친아들처럼 챙겨 왔다.그런 류정인이 직접 입을 열자, 승현의 얼굴에 망설임이 스쳤다.그때, 연우가 조용히 거실로 들어왔다.그의 곁으로 다가간 연우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살며시 흔들며 말했다.“승현아.”승현은 연우를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눈매가 사르르 풀렸다.“그래.”두 사람의 눈빛이 서로를 향해 머무는 그 모습.그 안에 스며든 애틋함.그걸 지켜보던 류정인은 하지철의 팔을 살짝 쿡 찔렀고, 두 사람은 눈인사를 나누며 조용히 거실을 빠져나왔다.그저 흐뭇한 미소만 남긴 채로....밤은 깊고, 달빛은 청명했다.바람에 흔들리며 사각거리는 소리 속, 유하의 차량이 조용히 골목을 돌아 작업실 앞에 멈췄다.유하는 원피스를 살짝 들어 올리며 차에서 내렸다. 무심코 맞은편 새로 지어진 단독주택을 바라봤다.이사팀은 이미 며칠 전 철수했고, 집 안은 여전히 불이 꺼져 있었다.‘곧 해외에서 올 박사라는 새 이웃, 아직 안 들어왔나 보네.’크게 신경 쓰지 않은 채, 유하는 작업실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요즘 유하는 틈만 나면 이곳에서 작품집을 정리했다.생활에 필요한 물건들과 여벌 옷도 이곳에 다 있었기에, 이제는 아예 이곳에서 밤을 보내는 날이 더 많았다.샤워를 마치고,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수면복으로 갈아입은 뒤, 유하는 바로 작업 공간으로 들어섰다.두툼하게 펼쳐진 포트폴리오 안에는 그간의 작업물, 아이디어 스케치, 콘셉트 설명, 작품에 담긴 의미와 스토리까지 하나하나 정리돼 있었다.유하가 직접 손으로 그린 의상 일러스트는 페이지 곳곳에 붙어 있었고, 완성
Read more

제33화

세한은행 IT팀 회의실.회의를 막 마친 유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평소 친하게 지내던 팀원 몇 명이 재빨리 달려와 그녀를 둘러쌌다.“팀장님, 진짜 안 가면 안 돼요? 이렇게 괜찮은 상사... 다시 만나기 힘들단 말이에요.”“맞아요! 너무 갑작스럽게 이러시는 거 아니에요?”“팀장님, 저희 진짜 아쉬워요...”“...”그야말로 우르르 몰려든 IT팀 직원들.유하는 잠시 당황한 듯 웃었다.‘이 팀... 참 정든다.’‘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얼굴을 보니까,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네.’일할 땐 누구보다 냉정하고 프로페셔널한 유하였지만, 평소 팀원들에겐 제법 유쾌하고 따뜻한 리더였다. 프로젝트가 잘 끝나면 늘 고생한 직원들에게 커피, 식사, 상품권, 심지어 소소한 휴가까지 챙겨줬다.IT팀 특성상 업무가 빡빡하고 고된 날이 많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유하의 세심한 배려가 팀에겐 큰 힘이 되었다.이젠 그런 팀장이 떠난다고 하니, 다들 아쉬워할 수밖에 없었다.유하는 웃으며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내가 직접 골라온 후임이에요. 사람 괜찮고 능력도 있어요.”이젠 직책도 내려놨고, 회의도 끝났으니 그동안 유지했던 딱딱한 표정도 자연스레 풀어졌다.미소가 얼굴에 번지자,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졌다.사실 유하는 원래도 예쁜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밝게 웃는 순간, 그 누구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팀 내 남직원들이 우르르 외쳤다.“아 진짜... 팀장님 웃는 얼굴 한 번 보면 버그도 해결되고 코딩도 술술 됐는데... 이제 누구 보고 일합니까, 우리...”여직원 몇 명도 장난스럽게 거들었다.“그러니까요! 우리 눈 호강이 사라졌어요!”유하는 일부러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뭐야. 내 얼굴 보고 말 잘 듣는 거였어요?”그 순간, 다들 손사래를 쳤다.“아, 아뇨! 절대 그런 뜻이 아니고요!!”예전 팀장 시절의 위엄은 여전했다.유하가 살짝만 표정을 굳혀도, 분위기는 곧바로 정돈됐다.동료들을 바라보는 유하의 눈엔 묘한 감정이 스쳤다.정든 얼굴들. 함께
Read more

제34화

유하가 통화를 끊고 오승현에게 전화를 걸려는 찰나, 이솔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야, 네가 왜 사과를 해? 잘못한 건 오승현 그 미친놈이지. 공사 구분도 못 하고 로펌에까지 손대는 건 제정신 아닌 거잖아.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그리고, 도와주겠다고 먼저 나선 건 나야. 결과가 이 모양인 건 내 팔자지. 솔직히 말해서... 변호사 접고 집안일 물려받으면 되는 거고. 진짜 힘든 건 너잖아.]이솔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오승현 뜻은 명확해. 오씨 가문 권력으로 지금 W시에서는 네 사건 맡을 수 있는 변호사, 없을 거야. 유하야... 너 이제 어떡할 거야?]유하는 말이 막혔다.‘그 사람, 정말 여기까지 할 줄은 몰랐어.’‘그동안 내가 해준 모든 건, 아무 의미도 없었던 걸까...?’이솔은 한층 더 격해진 감정으로 쏟아냈다.[진짜 열 받는다. 네가 그 사람 위해 얼마나 해줬는데? MB그룹 같이 거대한 회사를 같이 지켜준 사람인데, 이혼하면서 그저 ‘조금’ 받겠다는데도, 그걸 못 줘? 말이 되냐?][하연우에겐 회사 하나를 턱 하니 만들어 주더니, 너한텐 아무것도 못 주겠다고? 7년을 함께 살아놓고 이게 말이 돼?]이솔의 분노는 단순한 친구의 편이 아니라, 그간 지켜본 유하의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유하는 꾹 참아왔던 눈물을 삼키며, 간신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내가 다시 방법 찾아볼게. 그리고, 네 로펌 쪽 일도 내가 처리할게. 처음부터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정말 미안해.”이솔은 잠시 조용하더니, 담담히 말했다.[유하야, 오승현이 원하는 게 바로 이거야. 네가 겁먹고, 나 때문에 물러서길 바라는 거. 절대 그 흐름에 말리지 마. 나도 우리 교수님이랑 동기들 통해서 다른 쪽 길 찾아볼게. 아직 방법은 있어.]그러더니 익숙한 듯한 쿨한 말투로 말을 마무리했다.[그리고 솔직히, 돈이랑 권력만 따라가는 로펌이라면 나도 미련 없어. 변호사 안 해도 돼. 나? 잘 사는 부모님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Read more

제35화

N Laugh, 2층 프라이빗 라운지.넓고 화려한 프라이빗 룸 안, 명품 정장과 고급 드레스를 입은 젊은 남녀 십수 명이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그 중심에 오승현과 하연우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서로의 어깨가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이 자리에 모인 인물들은 모두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이었다.오씨 가문과 하씨 가문, 그리고 그 주변 권세가들 사이에서 자라온 인맥들.자연스레 말투도 가볍고, 대화도 막힘이 없었다.“승현아, 이번에 만든 신설 법인 있잖아. FK테크, 맞지? 기술팀은 구성 끝났어?”승현의 오른쪽에 앉은 배남진이 와인잔을 굴리며 물었다.이 질문에 룸 안의 시선이 일제히 승현에게 향했다.MB그룹은 원래 중공업 기반의 정통 재벌 기업이었다.그 영향력은 W시를 넘어서, 전 세계 중공업 시장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그런 그룹에서 갑자기 지금껏 한 번도 손댄 적 없는 AI 기술 산업에 뛰어든다는 소식은, 이미 시장과 언론 사이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고, 이 자리에 앉은 친구들, 즉 그룹 내부를 조금 아는 사람들에겐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왜냐하면, 계속 컴퓨터공학을 하고 싶어서 계속 이 분야만 붙잡고 살던 승현이, 결국 다시 그 길을 선택했다.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승현이 원래 컴퓨터공학 쪽에선 ‘천재’ 소리 듣던 사람이었다는 것.하지만 MB그룹의 고위층, 특히 아버지 세대는 그런 승현의 성향을 못마땅해했다.‘쓸데없는 취미에 빠져 가문을 이을 준비도 안 한다’며, 대학교 시절부터 금융경제 쪽으로 방향을 틀게 했고, 결국엔... 억지로 결혼까지 밀어붙였다.그때가 정확히 7년 전.승현은 그 모든 걸 억지로 수용하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컴퓨터공학 박사 학위를 따내는 동시에 금융경제학 박사도 함께 취득해 버렸다.그 성과는 논문, 특허, 실험실 기술자료로까지 이어졌다.그런데도 가문은 승현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하지만 7년이 흐른 지금, 승현은 더 이상 ‘말 잘 듣는 아들’이 아니었다.이사회를 반년 만에 장악하고,
Read more

제36화

승현은 남진을 옆으로 흘깃, 싸늘하게 노려봤다.남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분위기를 풀듯 웃었다.그리고 곧바로 연우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야, 연우야. 너 그쪽에서 몇 년 유학했다면서? 그렇게 인맥 많으면서 ‘유산’이란 사람에 대해 더 알아본 거 없어? A국 상공회의소니 뭐니 다 기웃거렸을 거 아냐?”연우는 도도한 눈매에 살짝 웃음을 머금으며, 잔잔히 입을 열었다.“‘유산’이라는 사람, 사실 우리 쪽보단 지도교수 쪽의 이름이 훨씬 더 유명해. A국 과학아카데미 종신회원이자 ‘투자의 신’으로 불리는 알렉스 타일 교수.”“그 사람 밑에 있던 AI 팀은 지금 A국 정보국과 손잡고 빅데이터 회사 운영 중이고, 핵심 멤버들 전부 정부 보호 리스트에 있어. 우리가 따로 알아낸 정보는 거의 표면 수준이야.”연우는 말을 잠시 멈추고, 눈에 반짝이는 빛을 숨기지 않은 채 덧붙였다.“근데, 최근에 들은 소문인데... ‘유산’이 우리나라로 돌아온다고 하더라. 팀도 같이 이끌고 오는 모양이고.”‘이 기회, 절대 놓치면 안 돼.’연우는 시선을 테이블에 떨어뜨리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그리고... 내 벤실베니아 지도교수님이 ‘유산’의 지도교수님이랑 비즈니스 파트너 사이야. 그래서 부탁드렸더니, ‘유산’이 우리나라에 오면 한 번 정도는 나랑 면담해도 괜찮다고 하셨어.”그 말에 방 안의 시선이 다시 연우에게 쏠렸다.“와... 연우 너 진짜 능력 있네.”남진은 감탄하며 웃었고,“나중에 꼭 소개 좀 해줘. 이 정도 인재면, 나도 한 번쯤은 얼굴 보고 싶다. 얼마나 괴물인지 궁금하네.”연우는 얌전하게 웃으면서도, 바로 옆에 앉은 승현의 손등에 하얀 손을 살며시 포개며 말했다.“승현이가 이렇게 날 믿고 FK테크 맡겨줬잖아? 이제 FK는 우리 둘의 회사나 마찬가지인데, 당연히 최선을 다해야지. 승현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그 말에 승현은 잠시 연우를 바라봤다.남자의 냉철한 이목구비가 그 순간만큼은 살짝 부드러워졌다.“그래. 네 말이 맞아.”그는 손에
Read more

제37화

연우의 그 한마디가 떨어지자, 룸 안 여기저기서 작은 웃음들이 새어 나왔다.그 웃음에는 어떤 존중도 없었다.‘내? 웃기지도 않지.’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유하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다.오승현의 친구들이란 대개 이런 식이었다.겉으론 예의를 차리는 듯하면서도, 속으로는 유하를 지우고 연우를 ‘정실’로 취급했다.하지만 유하도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 하나 사람답게 생각하진 않았다.그 사람들의 시선 따위 무시한 채, 그저 조용히 오승현만을 똑바로 바라봤다.말 한마디 없이.침묵이, 오히려 더 강하게 방을 짓눌렀다.‘오늘 이 자리는, 당신 스스로 만든 무대겠지.’‘내가 올 걸 뻔히 알면서 이걸 준비한 거라면, 이건 공개적인 조롱이야.’유하는 알고 있었다.승현이 지금 자신을 이 자리에 ‘오게 했다’는 걸.연우, 이 무리, 이 공간.모두 그가 만든 무대의 일부였다.‘그래. 오승현, 당신이 얼마나 더럽게 나오든, 난 절대 당신 때문에 무너지지 않을 거야.’유하는 소란을 피울 생각도 없었다.이 자리에선, 그저 더러운 사람들만 있을 뿐이니까. 그래서 그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내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당신이 가장 알잖아. 대화할 생각 없으면... 이쯤에서 끝내자.”그 한마디는 단순한 제안이 아니었다.물러서지 않겠다는 선언. 지금 자신을 잘라내면, 둘 다 끝이라는 경고. 유하는 손해도 감수할 수 있었지만, 자신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 건 절대 못 참았다.지금까지 자신을 버티게 해준 건 오씨 가문도 아니고, MB그룹도 아니었다.물론, 등을 돌린 가족도 아니었다.그저 곁에서 함께 울고, 함께 웃어주던 몇 명의 진짜 친구들.‘내가 여기까지 온 건, 그 친구들 덕분이야.’‘그런 사람들까지 건드린다면... 나도 끝까지 갈 거야.’MB그룹? 그렇다, 맞서기엔 너무 큰 상대일지 모른다.하지만 유하도 죽을 각오로 싸우면, 적어도 상처 하나쯤은 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유하의 발끝이 문 쪽에서 살짝 바깥
Read more

제38화

곧이어 룸 안은 완전히 비워졌다.문은 조용히 닫히고, 태건의 발소리도 멀어졌다.호화로운 조명이 어둡게 깔린 프라이빗 룸 안,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승현은 깊숙이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황금빛 은은한 조명이 남자의 날카롭고 선이 굵은 이목구비를 따라 떨어졌다.얼굴 반쪽은 그림자에 잠겨... 그 자체로 위압적이고 위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방 안에 단둘인데, 왜 이렇게 숨이 막히지...’유하는 문 옆에 서 있었다.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분명 사람은 두 명뿐인데, 오히려 아까보다 공기가 더 무겁고, 더 차가웠다.‘이 사람의 기운이 이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어.’‘숨을 틀어막히게 만드는 압도적인 존재감...’“아까는 그리 당당하게 말하더니, 왜 가만히 서 있기만 해?”승현의 저음이 공간을 가르듯 퍼졌다.짧은 앞머리 아래, 날카로운 눈매가 그대로 유하를 겨눴다.“와서 말해. ‘부탁’하려면 그에 맞는 태도가 있는 법이지.”유하는 그대로 멈춰 섰고, 움직이지 않았다.‘지금 이 사람한테 다가가면, 진짜... 끝이다.’유하는 알았다.조금 전 자신의 ‘협박’이 승현의 심기를 정면으로 건드렸다는 걸.지금의 승현은, 건드려선 안 될 선을 넘은 상태였다.하지만 유하도 물러설 수 없었다.그래서 숨을 고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혼은 당신과 나, 우리 둘 사이의 문제예요. 내 조건이 과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협상하면 돼요. 조정도 가능해요. 하지만 내 친구까지 건드리는 건... 절대 용납 못 해요.”“와.”짧고 차가운 한 단어.승현은 유하의 말을 끊었다.“소유하.”그는 이름을 낮게, 또렷하게 불렀다.“내가 가진 ‘인내심’이 얼마나 짧은지 모르나 본데, 그건 너한테도, 너 친구한테도 똑같이 적용돼.”그 순간, 공간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듯했다.유하는 말 없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이 사람, 진심이야. 지금 이대로 버티면, 이솔까지 위험해질 수 있어.’유하는 결국 조용히, 한 걸음 내디뎠다.그리고 또 한
Read more

제39화

호화로운 프라이빗 룸 안. 고요한 침묵 속에 남겨진 두 사람 사이로, 묘한 숨소리가 흘렀다. 유하는 차가운 크리스털 테이블에 몸을 반쯤 기댄 채, 헐떡이는 숨을 억지로 다잡고 있었다. 하얀 니트는 어깨까지 흘러내렸고, 허리를 찌르듯 타들어 가는 통증에 눈가엔 금세 물기가 맺혔다. ‘아파. 근데 이 사람 앞에선, 그 말조차 허락되지 않아.’ 승현은 어지러이 흐트러진 셔츠와 젖은 이마 끝으로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 숨이 섞인 얼굴.예전의 유하라면 한 번쯤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유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승현은 누구라도 단번에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마저 홀릴 만큼 치명적으로 잘생긴 얼굴을 가졌다.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얼굴은 유하에게 어떤 매력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등이 너무 아팠기 때문일 것이다.그 통증이, 유하를 완전히 현실로 끌어냈다.‘이 얼굴조차 보기 싫어. 이제는, 혐오스러워.’ 하지만 승현은 천천히 유하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귀 가까이 낮고 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내가 요즘 당신을 너무 봐줬나 봐. 감히 협박까지 하고, 이제는 나한테 조건을 걸어?” “쓰읍... 아파요...!!”유하의 귀가 강하게 깨물렸다. 민감한 부위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에, 유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자, 계속해. 내가 뭘 좋아하는지 잘 알잖아.”승현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아래에 흐트러진 채 놓인 유하를 내려다보며, 여우 같은 눈매에 흐릿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날 찾은 이유, 이거 아니었어?”유하는 이를 악물고,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오늘 이 자리에 찾아온 건, 승현에게 친구를 봐달라고 빌기 위해서였고, 그렇다면 마땅히 ‘빌미’를 내놓아야 했다.이건, 거래였다.그 사실을 유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마음속으로 이해한다 해도, 이 모욕감은 익숙해지지 않았다.그리고 유하는 오늘 처
Read more

제40화

유하는 승현을 이렇게 그냥 보내줄 수 없었다.‘이대로 보내면, 오늘 밤 쏟아부은 모든 게 다 허사가 돼.’유하는 반드시 결론을 들어야만 했다.“내 친구가...”손목이 거칠게 붙잡히더니, 그대로 힘껏 잡아당겨졌다.쿵.유하의 이마가 승현의 단단한 가슴에 박혔다.“여보, 협상이란 건 그렇게 하는 거 아니지. 이걸로는 부족해. 오늘 밤, 집에 있는 당신을 내가 본다면... 그럼 그냥 넘어가 주지. 착하게 굴어. 알겠지?”말을 끝낸 승현은 유하의 손목을 홱 뿌리치고, 그대로 자리를 나섰다....승현은 단호하게 룸 문을 닫고, 문 앞에 서 있던 태건을 스치듯 흘깃 봤다.차가운 눈빛에, 목소리도 그에 걸맞게 낮고 냉담했다.“연우가 날 찾았다고?”태건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네, 대표님.”잠시 승현은 태건을 말없이 바라봤다. 표정 하나 없이 서 있는 그의 얼굴은, 마치 감정이 제거된 기계 같았다.“사모님 데려다줘. 그리고 준서한테도, 오늘 밤은 얌전히 있으라 해.”단호한 한마디를 남기고, 승현은 옆 룸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문이 닫힐 때까지, 태건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반듯하게, 똑바로 서 있을 뿐....“승현아, 이제야 왔네.”문이 아직 완전히 닫히기도 전에, 연우가 그의 팔을 덥석 잡았다.살짝 토라진 듯한, 동시에 애교가 섞인 목소리.연우의 눈동자는 승현의 얼굴과 몸을 빠르게 훑었다.남자의 입술이 유난히 붉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저 싸가지 소유하...’“금방 왔잖아.”승현은 연우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다정한 웃음을 지었다.“비서한테 들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아, 맞다.”연우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 누르며, 핸드폰을 살짝 들어 보였다.목소리엔 자부심이 스며 있었다.“우리 지도교수님이 아까 연락해 오셨거든. 타일 교수님의 천재 제자 ‘유산’ 기억하지? 그 사람이 일주일 뒤에 팀 이끌고 귀국 확정이래.”“지금 유산이랑 미팅 잡으려고 조율 중이야
Read more
PREV
123456
...
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