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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1화

유하가 MB그룹에 출근하지 않은 동안, 자연스레 오광진이 본사에 상주하며 주요 의사결정을 맡아왔다.이용석은 다시 한번 하연우가 제출한 AI 자동화 연구 개발 프로젝트 계획서를 회의에서 안건으로 꺼냈다.팀 내부의 개발 인력은 전면 교체된 상태였다.계획 자체의 완성도도 꽤 높아졌고, 실제로 충분히 검토해 볼만한 가능성이 있었다.하지만 유하가 이사회 지분이 가장 많은 이사 중 하나라는 사실, 그리고 유하와 연우 사이가 어떤지 이사회 사람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광진은 직접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바로 유하에게 연락해 판단을 맡기기로 했다.오광진의 설명을 조용히 듣고 난 뒤, 유하는 전달받은 계획서 세부 내용을 찬찬히 확인했다.이번 건은 확실히 이전보다 훨씬 발전된 계획이었다.특히 새 개발팀의 역량이 상당했고, 자동화 분야에서 이미 성과가 있던 인물들이 모여 있었다.성공 가능성은 꽤 높았다.그리고 무엇보다 표면상으로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실제 이 개발팀은 청산이 국내로 데려온 사람들이란 걸... 유하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청산은 해외 학술 연구 쪽에서 오래 지냈고, 그쪽으로 탄탄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이 프로젝트를 감당하기 충분한 능력자들이다.유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지금 또 거부한다면, 이사회를 통째로 적으로 돌리는 꼴이었다.사적인 감정 때문에 발목 잡는다고 비난받을 게 뻔했다.하지만 사실 이번엔 애초에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하연우가 여기까지 했는데, 굳이 막을 필요가 있을까?’‘아니지. 오히려 길을 열어줘야지.’‘기분 좋게 AI 자동화 연구에 몰두하도록...’‘대체 뭘 하려고 이렇게 기를 쓰는지,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네.’유하가 아는 연우라면, 좋을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도둑을 평생 가둬둘 수도 없다.오씨 가문, 승현, 코시오...그 복잡한 매듭이 풀리기 전까지 연우와 하씨 집안 문제는 반드시 정리해야 했다.그리고 그 후에는 이 모든 판에서 완전히 빠져나와야 했다.지금 연우는 조급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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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2화

연우는 몇 마디로 통화를 정리하고 나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청산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청산이 약속대로 연우를 위해 해외 연구진을 데려온 만큼... 협력을 원활하게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연우는 약속한 부분을 지켜야 했다.잠시 후에 통화가 연결됐다.청산의 목소리는 차갑고 담담했다.[무슨 일입니까?]“별일은 아니에요.”연우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마웠다는 말부터 죽 이어서 전했다.그리고 프로젝트가 통과됐으니, 나중에 확정 분배 계약도 넣겠다고 덧붙였다.[필요 없습니다.]청산의 목소리는 아주 평온했다.[그런 거 아니라, 하 대표님이 말씀하신 그 부분... 저와 유하 사이에 좋은 일 만들어준다던데, 그건 어떤 방식으로 하실 겁니까.]청산이 먼저 꺼내는 말을 들은 순간, 연우는 속으로 긴장이 풀어졌다.요구가 있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바라거나 얻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언제든 잡을 약점도, 틈도 생기니까.그렇다면 협력은 훨씬 안정적으로 굴러간다.연우는 목소리가 훨씬 부드러워졌다.“사실 임 대표님이랑 소유하 씨 사이에서 제일 큰 문제는요, 둘이 너무 오래 알아서 너무 익숙하다는 거예요. 근데 이런 경우엔요.”“그 ‘익숙함’을 조그만 충격으로 깨주기만 하면 돼요. 소유하 씨가 임 대표님을 다른 각도로 보게 만들고, 그다음에 천천히 계획을 단계적으로 진행하면 됩니다.”모든 일은 한 번에 끝내는 게 아니다.한술 밥에 배부를 리 없다.사실 연우는 더 빠르고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걸 청산에게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아직 청산을 완전히 믿지 못했고, 청산이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협력 관계를 함부로 뒤엎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위약금 정도는 청산이 못 낼 돈도 아니고.그리고 무엇보다 유하는 지금 당장 판을 뒤엎을 생각이 없었다.그런 상태에서 함부로 약을 올리는 방법을 줄 필요는 없었다.잠시의 정적 후, 청산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조금의 기색 변화, 약간의 인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말씀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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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3화

“어...?”유하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청산의 말을 듣고 입이 반쯤 열린 채, 한동안 말이 안 나오는 얼굴로 말했다.“하연우가 낸 게 이런 이상한 아이디어야?”며칠 전 청산이 유하에게 솔직하게 모든 상황을 털어놓은 뒤로, 유하는 청산과 연우가 어떤 식으로 협업하는지도 대강 알게 되었다. 좀 미묘하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연우라면 진짜 저럴 수도 있겠다’ 싶은 면도 있어 굳이 뭐라고 하진 않았다.하지만 그래도, 정말로...‘하연우, 이 일에 너무 진심이네... 참, 고생이다, 고생.’[그래서 우리 유하는 어떻게 생각해?]청산이 웃으며 물었다.“어? 나?”유하는 난감함을 감추지 못한 채 한참 머뭇거리다 결국 짜낼 수 있는 대답을 겨우 꺼냈다.“그냥... 그렇게 해. 어차피 쇼는 제대로 해야지. 선배를 힘들게 해서 미안.”‘일단 하연우부터 진정시키는 게 먼저지. 하연우가 눈치채면 끝이야.’청산은 낮게 웃었다.[그래.]...아침. 아주 이른 시간.유하는 옷장 앞에 서서 곧 하러 가야 할 일을 떠올렸다. 한참 고민 끝에 결국 상·하의가 따로인 연청색 데님 세트를 골랐다.보통 데님보다 훨씬 밝은 연청색 소재, 치맛단에는 알록달록한 꽃 자수가 촘촘히 놓여 있었다. 윗도리는 반팔 크롭 재킷.평소 같으면 한 번쯤 말아 올렸을 긴 흑발은 오늘따라 깔끔히 뒤로 묶어 등 위로 곧게 떨어졌다.다이아몬드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걸고, 핸드폰의 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검은색 미들 힐을 신고 집을 나섰다.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태건은 문을 나서는 유하를 보자 순간 멍해졌다.태건은 이런 유하의 모습은 처음이었다.단정하면서도 성숙한 분위기. 강단 있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게 또 묘하게 어울렸다.유하는 태건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지금 너무 긴장해서, 손으로 미니 백을 꽉 말아쥐고 있었다.심지어 늘 신경 쓰이던, 도무지 따돌릴 수 없는 태건에 대해서도 오늘만큼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유하가 진실을 알고 난 뒤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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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4화

지금 이 소개팅 자리, 유하가 보기엔 그저 ‘하연우 식의 말도 안 되는 작전’이었지만.유하는 얼마 전에도 소개팅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이런 분위기의 자리에 끼어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긴장이 밀려오면서 청산과 미리 맞춰둔 대사도 거의 다 잊어버릴 뻔했다.정확히 말하면, 잊지 않았다 해도 입이 떨어질 리가 없었다.하필 상대가 모르는 사람이었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문제는 여기 앉아있는 여자가 허아윤이라는 사실이었다.유하와 아윤의 아버지는 사업상 몇 번 파트너로 함께 일한 적이 있다.아무리 둘이 또래라지만, 협력 관계였던 집안의 딸 앞에서 이런 연극을 해야 한다니... 유하는 진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귓불까지 후끈하게 달아오른 유하는 무의식적으로 청산을 쳐다봤다.하지만 청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만 아주 미세하게 들썩일 뿐, 유하를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웃음을 참느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유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아윤의 시선을 마주했다.가볍게 기침하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저... 그, 허... 허아윤 씨. 잠깐만요. 두 분... 제가 좀 말씀드릴 게 있어요.”“네...?”아윤은 도무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아윤은 본능적으로 맞은편의 청산을 바라봤다.청산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그제야 아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한 듯했다.아윤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문가에 서 있던 유하가 이성을 꽉 붙잡은 듯 이를 악물고 말을 내뱉었다.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전날 밤 청산과 맞춰본 문장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죄송한데요... 그... 이 소개팅, 여기서 끝내주시면 안 될까요? 저...”“왜요?”아윤은 완전히 멍해졌다.“제가... 말씀드릴게요.”드디어 청산이 고개를 들었다. 입꼬리엔 감추지 못한 웃음기가 있었고, 아윤을 향해 약간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정말 죄송합니다, 허아윤 씨.”말은 부드러워도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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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5화

‘소개팅으로 날 자극하겠다고?’‘하연우... 진짜 별별 생각을 다 한다.’유하는 속으로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렸다.연우도 설마 청산이 모든 걸 유하한테 털어놨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그래서 유하는 아예 연우가 원하는 방향대로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 연극을 해주기로 했다.어차피 소개팅 상대도 연우 쪽에서 사람을 불러 세워놓은 거라고 들었으니까.핵심은 소개팅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고.그런데...“왜 이렇게 진짜 소개팅처럼 왔지?”“허아윤 씨 말이야.”아까 울컥하며 나가던 아윤의 얼굴이 떠올랐다.진짜 상처받은 사람의 표정이었다.청산은 그런 유하의 표정을 보고 웃었다.“쇼는 원래 진짜처럼 해야지.”유하는 머리가 찢어질 듯 아팠다.“내가 나중에 선물이라도 하나 사서 보낼게. 선배가 허아윤 씨한테 전해줘. 사과한다고.”지금 유하가 직접 나서는 건 더더욱 안 된다.왜냐하면 이 판에서 ‘소유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당사자’여야 하기 때문이다.아윤은 정말 충격받은 눈치였고, 게다가 허씨 가문의 아가씨였다.오늘 이후 소문이 어떻게 번질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어차피 일은 벌어졌고... 되돌릴 수도 없지. 그냥... 끝까지 가는 수밖에.’“자, 그럼 우리...”돌아가자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유하가 몸을 돌리는 찰나, 어느새 가까워져 있던 청산과 정면으로 부딪혔다.턱-몸이 고스란히 남자의 품으로 파묻혔다.유하는 그대로 굳었다.귓가에 남자의 강하고 규칙적인 심장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얇은 셔츠 너머로 전해지는 열기가 너무 가까이서 느껴졌다.잠깐 정신이 멎은 사이... 유하의 몸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그러나 등이 벽에 닿기 직전, 청산의 손이 유하의 허리를 감아안았다.강하게가 아니라 단단하게 ‘붙잡는’ 느낌이었다.유하는 몸을 문에 부딪히진 않았지만, 그보다 더 뜨겁고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졌다.5월이 곧 다가오는 날씨, 얇은 옷, 붙잡힌 허리 위로 전해지는 남자의 큰 손바닥.그 열감은 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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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6화

“나...”유하는 차 문손잡이를 꽉 잡은 채 청산의 눈을 바로 보지 못했다.머릿속이 한꺼번에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혼란스러웠다.“나... 집으로 갈래.”지금은 무조건 진정해야 했다.진정하고, 정신을 차린 후, 그다음을 생각해야 했다.“그래.”청산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압박도, 재촉도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집에 도착하면... 나한테 문자해. 알겠지?”유하는 몇 초간 숨을 멈춘 듯 서 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빠르게 멀어져가는 유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청산은 천천히 들고 있던 오른손을 올렸다.아직도 그 손끝엔 방금까지 닿아 있던 유하의 부드러운 감촉이 남아 있는 듯했다.가볍게 코끝에 가져가자 은은한 자스민 향이 스쳤다.청산은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었다.방금 유하는 청산의 손길을 피했다.그건, 청산에게는 최상의 신호였다.예전까지 유하가 청산의 접촉을 피한 건 그저 ‘거리감’ 때문이었다.너무 가까운 신체 접촉을 좋아하지 않아서, 그것뿐.하지만 조금 전 유하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눈을 못 마주치고, 숨이 빨라지고, 닿는 순간 온몸이 예민하게 굳어버리고...그리고, 도망치듯 피했다.단순한 거부가 아니라 ‘자극’과 ‘감정’이 뒤섞인 예민함.다시 말해 청산을 남자로 ‘의식하고 있다’라는 신호였다.너무 좋았다.이게 바로 청산이 원하던 것이었다.엉성하고 우스꽝스러운 하연우식 계획에도 기꺼이 참여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오랜 시간 서로 너무 잘 알아서 너무 익숙해서 건너지 못한 경계선.이번만큼은 그 선을 느끼게 하고, 그 선 위에 서게 하고, 손끝으로라도 건드리게 만드는 것.그것만으로도 한 걸음 크게 내디딘 셈이었다.그리고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유하는 절대 놓칠 수 없다.절대로.청산은 작은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하연우... 이번엔 좀 쓸모 있었네.’물론, 연우의 연애 조언은 절반은 걸러 들어야 하지만, 나머지 절반 중 아주 일부분은 꽤 쓸 만했다.차 안.조용한 뒷좌석.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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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7화

그날 집에 돌아온 뒤, 유하는 또다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최근 들어 반복되는 증상이었다.오랜 시간 잠잠히 가라앉아 있던 마음이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린 듯, 서로 어긋나는 감정과 장면들이 밤마다 밀려왔다.쉴 틈 없이 정신을 흔들어 유하는 결국 잠들지 못했다.다음 날 아침.유하는 진짜 눈에 띌 정도의 다크서클을 달고 일어났다.느릿느릿 아침을 먹고 나서야 핸드폰을 들었다.화면엔 읽지 않은 메시지 여러 개, 부재중 전화 한통.전부 청산이었다.부재중 전화는 보지 않은 척 지나치고, 메시지를 눌렀다.가장 먼저 보이는 건 어젯밤 도착한 것.집에는 무사히 들어갔냐는 내용.하지만 유하는 답장하지 않았다.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어젯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을 무음으로 던져두고, 이것저것 정신없이 버둥거리다가 결국 온밤을 뒤척이며 보냈다.하지만 이제는 계속 무시할 수 없었다.‘피할 수 있는 건 어제까지였고... 이제는 답해야지.’전화는 안 된다.청산의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차라리 차가운 핸드폰 화면 너머로 말하는 쪽이 훨씬 안전했다.유하는 스크롤을 가장 아래로 끌어내리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어제 집에 와서 너무 바빴어. 정신없어서 답장을 못 했네. 미안.]딱 봐도 허술한 변명....집에서 막 아침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마시던 청산은 그 문자를 보자마자 피식 웃었다.‘하루 늦더라도 답해 준 게 어디야.’‘그치만... 유하 이런 습관은 좀 고쳐야겠는데.’청산은 생각 끝에 긴 손가락으로 천천히 자판을 두드렸다.[그래? 나 피하는 게 아니면 됐다.]메시지를 확인한 유하는 다시 굳어졌다.‘이걸... 뭐라고 받아 줘?’‘어떻게 이어가?’또 도망가고 싶었다.청산에게서 피하고 싶었다.그러나 곧이어 청산이 바로 다음 메시지를 보냈다.[아침 먹었어? 오늘 일정 없으면 나랑 바람 쐬러 갈래? 기분 좀 풀게.]‘안 가!!!’유하는 속으로 거의 소리 지르다시피 거부했다.지금은 청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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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8화

필요한 새틴 원단은 당연히 전부 수작업으로 짜인 최고급품이어야 했다.원단 쪽은 Splendid의 자원 라인을 통해 들여오면 가장 좋은 수종과 가장 다양한 질감을 한 번에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시간 낭비도 거의 없었다.진짜 문제는 웨딩드레스의 베일이었다.드레스 전체는 자수와 수작업 장식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하지만 이 드레스가 사용될 결혼식은 왕실 예식이다.완전히 전통 공예만 사용할 수도 없었고, 베일만큼은 반드시 레이스를 써야 했다.게다가 기계 작업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기계 레이스는 섬세함이 부족하고, 결도 만족스럽지 않고, 왕실 규모의 예식에 올릴 품격에는 턱없이 모자랐다.여러 종류의 수공 레이스를 검토한 끝에 유하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건 ‘레이스의 여왕’이라 불리는 아랑숑 레이스였다.이미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예 기술이기도 하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정교하고 우아한 레이스로 손꼽히는 소재.왕세자와 왕세자빈의 결혼식에 사용하기엔 그야말로 완벽했다.베일의 도면이 가장 먼저 완성되었고, 유하는 이 레이스 베일을 직접 뜨기로 결심했다.아랑숑 레이스 기술은 난도가 높고 공정도 복잡하지만, 유하는 소성란에게 기초부터 탄탄히 배워두었기 때문에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물론 어마어마한 체력과 시간이 필요할 뿐.하지만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필요한 기본 재료들을 모두 확정한 뒤, 유하는 바로 리베르에 있는 Splendid 본사로 목록을 보냈다.지금의 유하는 소성란 회사의 공식 경영진 중 한 명이었기에 이런 조달 과정은 문제 될 게 없었다.소재들이 도착하기만 하면, 바로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자재 목록을 전송하고 나서야 유하는 허리와 어깨가 쑤시는 걸 느꼈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새벽 두 시였다.피로에 절어 천근만근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작업실 불을 끄고 나가려던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소성란이었다.‘고모할머니가 자재 리스트 확인하시려나...’유하는 서둘러 전화받았다.[도면은 확정된 거야?]소성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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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9화

유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좋아요.”‘그럼 한번 해보자. 꼭 정상까지 올라가 보자.’...원래는 소성란이 본론만 말하려는 줄 알았다.그래서 일 얘기 끝나고 나서는 최근의 사소한 일상 몇 마디를 더 나누었다.유하는 어느새 졸음이 밀려와, 이제 슬슬 소성란과 통화를 마무리하고 자신도 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소성란의 다음 말이 유하의 졸음을 단숨에 쫓아버렸다.[아, 그리고 하나 더. 너랑 명훈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누구...?’졸음에 녹슨 머릿속이 굼뜨게 굴러가다가 몇 초도 안 돼 완전히 맑아졌다.그리고 이어진 건... 깊고 끝없는 침묵.소개팅 얘기.유하는 말이 없었지만, 소성란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나 아까 명훈이 그 녀석한테도 물어봤다. 명훈이가 너 인상 좋다고, 꽤 마음에 든대. 너는? 이렇게 오래 끌 거면 되든 안 되든 말은 해야지. 싫으면 그냥 말해. 내가 다른 애로 바꿔줄 테니까.]‘지명훈한테 이미 물어봤다고?’‘근데 지명훈은 왜 말 안 했지?’유하는 쓰게 웃었다.사실 요즘 이것저것 일이 몰리다 보니까, 어른들의 눈을 피하려고 지명훈이랑 짜고 소개팅을 질질 끌던 것조차 까먹고 있었다.‘근데 지명훈... 연기 진심이었네.’‘어른들 앞에서 쉴드 치는 데 그렇게 적극적일 줄은.’‘진짜 소개팅 자체가 무서운가 보네.’‘선물 교환하고 나서는 따로 본 적도 없는데...’‘어디서 인상 좋다는 얘기가 나와?’뭐라 했어도 유하는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그렇지만 지명훈과 계속 공조하는 건... 다시 생각해 봐도 아니다.요즘 이미 귀찮고 골치 아픈 일이 너무 많다.게다가 남자 문제까지 더하면 유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유하는 그저 마음 쓰는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랐다.“고모할머니.”유하는 단어를 고르며 조심스레 말했다.“저 이제 곧 아주 중요한 단계 들어가서... 점점 바빠질 거예요. 이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정말...”[그럼, 명훈이는 싫다는 거네.]소성란이 유하 말을 바로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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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0화

[유하야, 네 지난 결혼이 얼마나 불행했는지 나도 짐작이 간다. 네가 겁나고 두려운 것도 알고. 그렇지만 그 그림자에 평생 갇혀 살 순 없지 않니?][오승현 같은 자식은 세상에 드물어. 한 번 걸린 것도 참 재수 없는 거야. 그 인간은 이미 잘라냈잖아. 그럼 이제 겁날 게 뭐니?]소성란이 한숨을 내쉬었다.[너는 항상 그래. 밀어내고, 피하고, 내가 조금이라도 기대할 틈을 안 줘. 그럼 내가 어떻게 맘을 놓겠니?]“고모할머니...”유하는 입술을 달싹이며 눈이 벌겋게 젖어 들었다.[억지로 떠미는 게 아니다.]소성란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다.[이런 일이야 당연히 천천히 가야지. 조급해선 안 돼. 네가 누굴 좋아한다고 당장 결혼하라고 내가 그러겠니?][그건 너무 경솔하지. 그렇지만 네가 자꾸 이런 문제만 나오면 도망가니까... 내가 안 밀어붙이면 너는 진짜 다 포기할 것 같아서 그래.]“알겠어요.”유하가 작게 말했다.[알긴 뭘 알아!]소성란의 볼륨이 갑자기 확 올라갔다.[너 지금 또 하나를 버렸잖아. 이러면 언제 끝이 나? ...됐다, 너 한번 들어와. 내가 직접 나서서 또 소개팅 주선할 거니까!]소성란은 확신했다.유하는 분명 소개팅을 제대로 하지 않았을 거라고.그러니 직접 옆에서 감시해야 한다고.유하는 답답하고 난감했다.고모할머니 뵈러 가는 건... 당연히 가고 싶었다.한동안 못 봤으니 보고 싶은 마음도 크고.그렇지만, 돌아가서 또 소개팅이라니.유하의 머릿속에 어떤 남자의 얼굴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유하는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그 잔상을 털어냈다.[왜? 남자 만나라니까 이젠 집에 오는 것도 싫으냐?]유하가 아무 말이 없자, 소성란은 곧바로 고음으로 몰아붙였다.“아니에요.”유하는 어쩔 수 없이 답했다.“갈게요. 갈게요, 가긴 하는데... 소개팅은... 만나서 얘기해요. 고모할머니, 너무 늦었어요. 얼른 주무세요.”겨우겨우 화난 소성란을 달래서 잠자리에 들게 하고, 유하는 바로 모레 아침 비행기를 예약했다.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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