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의 모든 챕터: 챕터 801 - 챕터 810

841 챕터

제801화

“하하하, 그거 괜찮네.”평소에는 각자 바쁘다 보니 좀처럼 길게 이야기를 나눌 일이 없었는데, 이날은 오랜만에 만난 터라 장진철 교수와 승현은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았다. 병원 건물 아래에 도착하자 장진철 교수는 곁에 선 젊은이를 힐끗 보며 말했다.“그래서, 포기할 생각은 없는 거지?”“네.”승현은 미소를 지은 채,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할아버지, 유하 없으면 제가 못 살아요.”“말도 안 되는 소리.”장진철 교수는 눈을 흘겼다.“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도 잘 살아.”“저는 아마 안 될 것 같아요.”승현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농담처럼 덧붙였다.“유하가 옆에 없으면 밤에 잠이 안 와요. 잠 못 자는 건 정말 큰 일이거든요.”그 말을 하는 사이, 검은색 차 한 대가 앞에 멈춰 섰다.장진철 교수를 태우러 온 차였다.두 사람은 그대로 서 있었다. 장진철 교수는 잠시 승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조금 좁혔다.잠시 뒤, 승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아버지, 혹시 우리 할아버지 부탁받고 저 설득하러 오신 건 아니죠?”“누가 네 사사로운 일까지 신경 쓰냐.”장진철 교수는 손을 내저었다.차에 타기 전, 그래도 한마디는 덧붙였다.“유하는 평소에 부드럽고 말 잘 듣는 아이 같아 보여도, 속은 꽤 고집 센 편이야. 자기가 정한 일은 웬만해선 안 바꿔... 너무 몰아붙이면 안 된다. 네 그 성질, 좀 누그러뜨려.”승현은 웃음을 조금 더 깊게 지었다.“알겠습니다, 할아버지.”차 문이 열렸다.차에 오르기 직전, 장진철 교수는 다시 창문을 내리고 밖에 선 승현을 보며 말했다.“승현아. 너희가 오래 함께했고, 아이까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정말 안 되면, 그때는 놓는 것도 방법이다.”“다 지나간다. 나이 더 먹어 보면 알게 돼. 시간 앞에서는 뭐든 모래 같아. 사람이 붙잡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어.”승현은 눈빛을 깊게 가라앉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는 그저 지금 이 시간을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같은 시각, 다른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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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2화

병실 안.유하는 침대 머리맡에 기대앉아 있었다. 붕대로 단단히 감긴 손가락을 가끔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다.기다리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김 교수도, 장진철 교수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했다. 치료도 가능하다고 했다.그런데도 긴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얼마나 걸릴까?’‘정말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그리고... 가장 곤란한 문제도 있었다.장진철 교수가 와 준 건 분명 기쁜 일이었지만, 그가 승현을 통해서 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잠시 후면, 어쩌면 승현과 마주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졌다.‘어떻게 봐야 하지.’‘청산 선배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유하는 머리가 아팠다.그때 병실 문이 갑자기 열렸다. 유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휠체어를 탄 청산 혼자 들어오고 있었고, 뒤에는 다른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그제야 유하는 숨을 내쉬었다.“무슨 일이야?”유하의 시선이 문 쪽에 머무는 걸 보고, 청산도 고개를 돌려 뒤를 한번 확인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문을 닫았다.“아무것도 아니야.”유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휠체어를 몰고 다가오는 청산을 바라보다가 잠시 망설였다.“장진철 교수 일은... 내가...”“와 주셔서 정말 다행이야.”“어?”유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청산은 들고 있던 처방전 두 장을 테이블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 안경을 고쳐 썼다.“이건 장진철 교수랑 김 교수가 써준 거야. 내용도 거의 비슷해. 치료 과정에서 장진철 교수 제자가 와서 침도 놓아줄 거래. 금방 좋아질 거야.”말투는 차분했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웃음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하지만 유하는 오히려 미간을 찌푸렸다.“선배.”유하가 참지 못하고 불렀다.“응?”청산은 고개를 들어 유하를 봤다.“정말... 괜찮아?”유하는 남자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말끝에는 망설임이 묻어 있었다.청산은 미소 지었다.“뭐가 괜찮지 않은데?”유하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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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3화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승현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을 것이다.청산도 그건 알고 있었다.오늘 승현이 한발 물러선 것도 장진철 교수의 처방을 유하가 쓰지 않게 될까 봐서였다는 걸.그런데도 청산은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편하기는커녕 불편했다.솔직히 말하면, 많이.“왜?”유하는 눈을 깜빡였다.“김 교수님도 정말 대단해. 선배의 손도 고쳐준 사람이잖아. 내 손도 충분히 고칠 수 있어.”유하는 청산을 믿고 있었다.청산이 데려온 의사도 믿었다.다만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선택지가 하나인 건 아니니까.‘어떻게 말해야 청산 선배가 덜 신경 쓸까?’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그런데 앞에 있던 남자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휠체어 팔걸이에 한 손을 짚고 몸을 기울이며 다가왔다. 너무 가까워서 숨결이 닿는 것 같았다.유하는 멈칫했다.“왜?”“유하.”청산은 목소리를 낮췄다. 가슴안에서 올라오는 답답함을 눌러 삼키듯.“나한테... 키스 한 번만 해줄래?”그는 확인하고 싶었다.무엇을 확인하고 싶은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어?”유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너무 갑작스러웠다.대화의 흐름이 이렇게 튈 줄은 몰랐다.그런데도 청산에게서 그대로 드러나는 불편함이 느껴졌고, 승현의 일까지 겹친 상황이라 유하는 끝내 거절하지 못했다. 왼손을 들어 청산의 차가운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차가웠다.유난히.‘왜 이렇게 차갑지? 사고 전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유하는 그대로 멈춰 있었다. 청산이 기다리다 못한 듯, 얼굴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서늘한 입술이 유하의 손바닥을 스쳤다.유하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본능처럼 고개를 들었고, 그대로 청산과 시선이 마주쳤다. 서로가 너무 가까웠다. 청산의 안경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뜨거운 시선이었다.그것은 청산 피부의 차가움과는 전혀 다른 열기였다.이와 동시에 유하의 심장이 빨라졌다.유하가 손을 떼려는 순간, 청산의 눈매가 살짝 내려앉았다. 그리고 낮게 불렀다.“유하야.”유하의 가슴이 철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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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4화

실망이 묻은 목소리였다.‘어? 없는 거야?’청산이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키스를 요구한 데다, 바로 전에 그런 분위기까지 만들어 놓고서... 연애든, 스킨십이든 먼저 다가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던 유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못 잡았다.유하는 손을 빼보려 했지만, 빠지지 않았다.다행히도 청산의 눈은 가려져 있었다. 유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얼굴이 달아오른 걸 느끼며 조심스럽게 몸을 기울였다.그때, 밖에서 갑작스럽게 큰 소리가 울렸다.깜짝 놀란 유하는 몸을 움찔하며 바로 물러났다.청산은 유하가 빼내려던 손을 붙잡은 채 감정을 흘리듯 그녀의 손가락 끝을 가볍게 물었다. 그러고는 짧게 숨을 고르며 안경 없이 물기 어린 눈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누구야?”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밖에서는 한동안 아무 대답이 없었다. 두어 번 더 묻고 나서야 망설이는 차동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대표님, 하연우 씨입니다.”병실 안의 두 사람은 동시에 멈칫했다.‘하연우?’‘우리가 알고 있는... 그 하연우?’서로의 표정이 묘해졌다.들어오라는 말이 떨어지고 나서 문이 열렸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연우가 들어섰다. 관자놀이 쪽에는 유난히 큰 밴드가 붙어 있었다.그 모습을 본 유하의 시선이 더 복잡해졌다.‘이건 또 무슨...’“할 말이 있어. 너랑. 단둘이.”연우는 침대 옆의 청산을 한번 훑어본 뒤, 시선을 유하에게 고정했다. 늘 빛나던 눈에는 아무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얼굴에 늘 걸려 있던 완벽한 미소도 사라진 상태였다.“무슨 일로?”유하는 연우의 상태가 왜 이런지 대충 짐작은 갔다. 그래도 이렇게 찾아온 건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단둘이 이야기하자는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다.연우를 믿을 수 없었다.연우도 더 고집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앉으라고 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의자를 끌어와 유하의 반대편 침대 옆에 앉았다.그리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너희가 고발한 거지?”연우가 물었다.‘빠르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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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5화

“이게... 무슨 뜻이야?”작은 테이블 위에 놓인 붉은 벨벳 장식의 보석함과 봉인된 서류봉투를 훑어본 뒤, 유하는 병상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연우를 바라봤다. 표정에는 분명한 혼란이 담겨 있었다.‘이게 뭘 하자는 건지?’연우가 오늘 이곳까지 찾아온 것만 해도 이미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런 방식일 줄은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손을 대보지도, 열어보지도 않았지만, 유하는 직감적으로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어느 정도 짐작 갔다.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이건 무슨 의미야.’‘양보? 하연우가 양보한다고?’‘어이가 없네.’유하는 얼마 전에 산으로 끌려갔을 때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코시오의 임시 거처에서 연우가 얼마나 노골적으로 굴었는지, 박영심을 해칠 계획을 숨기지도 않았고, 유하가 그 산에서 죽을 거라 확신하는 듯한 태도였다.그랬던 연우가 지금 와서 이러는 건... 대체 무슨 행동인가?유하의 경계심은 단단히 올라갔다.테이블 위의 물건에는 시선조차 오래 두지 않았다. 곧바로 연우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을 기다렸다.“네가 나를 왜 미워하는지는 알아.”연우는 테이블 위를 한 번 보고, 이를 악물었다. 감정을 누른 채 말투는 차분하게 유지했다.“고발 증거자료에 들어간 다른 내용들은 일단 치워 두고, 코시오 건만 말하자면, 그건 승현이가 먼저 나한테 제안한 협력이었어. 위에서 시킨 일이고, 절차도 다 지킨 합법적인 일이야.”연우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지금 네가 원하는 건 내가 다 내놨어. 그러니까 재판에 가게 되면, 고발 증거자료에 적힌 나에 대한 허위 내용들, 네가 직접 나서서 분명하게 설명해 줘. 그렇지 않으면, 난 너를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야.”끝으로 갈수록 말은 분명한 협박이 되어갔다.유하와 청산이 함께 정리해 제출한 고발 증거자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난 상태였다. 신고자가 청산이었고, 내용도 극히 민감했다. 특히 코시오와 관련된 부분은 더 그랬다.그래서 조사팀이 빠르게 꾸려졌다.하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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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6화

자칫하면, 정말로 감옥에 가게 될 수도 있었다.연우는 가만히 앉아 속절없이 무너질 생각이 없었다. 감옥만은 절대 안 된다. 감옥에만 가지 않으면, 다음에 다시 일어설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이런 죄명까지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연우는 승현을 통해 이미 고발 증거자료를 확인한 적이 있었다.코시오 관련 부분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명시돼 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파고들기 시작하면 버텨낼 수 있을 만큼 안전한 내용도 아니었다.그러나 유하가 나서서 과거 승현이 연우에게 베풀었던 특별함과 호의 때문에 질투와 원한을 품었고, 그 감정으로 인해 자료에 허위 내용을 적었고, 정보를 잘못 전달했다고 인정만 해 준다면, 연우에게는 빠져나갈 길이 있었다.그 생각에 연우는 맞은편에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청산을 한 번 바라봤다. 자신에게 했던 일들이 떠오르자,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었다.연우는 테이블 위에 놓인 보석함과 서류봉투를 가리키며 유하를 바라봤다.“자료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정정만 해 줘. 그러면 이것들 전부 네 거야. 그리고 난 승현이한테서도 완전히 물러날게. 다시는 너희 앞에 나타나지 않겠어.”“어?”유하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가, 겨우 이 한 글자를 내뱉었다.‘뭐라는 거야?’순간 귀를 의심했다.연우의 사고방식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이렇게 비틀린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유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아무 말도 하기 싫어질 정도였다.오래 이어진 침묵 끝에 유하가 입을 열었다. 표정은 복잡했고,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하연우... 마침 여기 병원이잖아. 신경과부터 한번 가 보는 게 어때? 머리.”권유였다.유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옆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청산이었다.연우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지금 무슨 소리야? 무고랑 명예훼손이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우선, 네가 말하는 그 죄보다는 살인 청부나 반역 혐의가 훨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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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7화

지금 그 두 물건을, 연우는 다시 집어 들고 와서 내밀었다.마치 유하에게 베풀어 주기라도 하는 듯한 태도로.‘내가 원한다고?’‘누굴 모욕하는 건지...’‘정말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해.’유하는 그저 황당했다.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연우는 아직도 이걸 ‘남자 문제’로 국한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이런 이유로 자기를 고발했다고 믿고 있는 거야?’유하는 말문이 막혔다.‘정말로 아프면 약을 먹어야지, 왜 밖에 나와서 남을 괴롭히는지...’“하연우.”유하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표정에는 아무런 기복도 없었고, 목소리 역시 담담했다.“잘 들어, 이 말은 정말 마지막으로 할게.”“너랑 오승현의 과거, 나는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쓰고 알고 싶지도 않아. 둘이서 체면 잃을 짓할 거면, 문 닫고 단둘이 있을 때만 해. 나 끌어들이지 말고.”“내가 너를 고발한 이유는 단순해. 네가 법을 어겼고, 내 가족과 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실제 피해를 줬기 때문이야. 이건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야.”“그리고 나는...”유하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그걸 그냥 넘길 수 없는 사람이고.”“그래서 고발했어.”유하는 차갑게, 그러나 또렷하게 연우를 바라보며 한 글자씩 물었다.“이제 이해했어?”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유하는 미간을 찌푸렸다.“차 집사님, 손님 좀 내보내 주세요.”“네.”차동석이 다가오려는 순간, 그동안 침묵하던 연우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하얀 이불 위에 내려와 있던 유하의 오른손을 거칠게 붙잡았다.너무 빨랐고, 거리가 가까웠다.피할 틈이 없었다.유하는 남아 있는 왼손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나려는 청산을 막았다. 고개를 아주 작게 저었다.괜찮다는 뜻이었다.그리고 붕대로 감긴 채 아직 완전히 낫지도 않은 자기 오른손을 한 번 내려다봤다. 잠깐 미간이 좁혀졌지만, 곧 표정은 다시 펴졌다.유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연우를 봤다.“손 놔.”아주 차가운 목소리였다. 표정과 똑같았다.사람을 밀어내는 묘한 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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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8화

유하는 손에 쥐고 있던 보석함을 바닥으로 던졌다.청산은 이미 침대 옆 호출 버튼을 눌러 의사를 부른 상태였고, 몸을 숙여 조금 전까지 세게 붙잡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유하의 오른손을 감싸 쥐었다.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괜찮아? 어디 아파?”“괜찮아.”유하는 고개를 저었다. 타이밍이 좋았다. 연우가 깊게 쥐기 전이었고, 통증도 아직 본격적으로 올라오지 않았다.다만 유하는 고개를 돌려, 차동석에게 붙잡힌 채 멍하니 서 있는 연우를 바라봤다. 특히 관자놀이 근처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에 시선이 머물렀다.그 자리는 원래부터 큰 밴드가 붙어 있던 곳이었다.유하는 그 상처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날 밤 하씨 저택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그 이후의 상황까지 진주연에게서 이미 들었다. 최근 하씨 집안이 겪고 있는 일들도 마찬가지였다.유하는 놀랍지는 않았다.고발을 결심한 순간부터, 충분히 예상했던 일들이었다. 게다가 연우가 결국 버려질 거라는 것도 이미 마음속으로 계산이 끝나 있었다.하지철이 사생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유하는 그런 인간의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 읽고 있었다. 자식조차 ‘사람’이 아니라 ‘자원’으로 여기며 키우는 부류.그런 부모를 유하 역시 알고 있었다.아니, 겪어왔다.유하의 부모 둘 다 그랬다.유하는 짧게 숨을 들이마신 뒤, 감정이 거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하연우, 아직도 모르겠어? 너... 사실 좋은 패를 들고 있었어.”“네가 뭘 알아!”연우가 갑자기 소리쳤다.“너는 다 가졌잖아! 다 가진 사람이 뭘 안다는 거야!”그 순간, 연우의 관자에 붙어 있던 밴드 사이로 피가 더 번져 나왔다. 선명한 얼굴을 타고 붉은 선이 흘러내렸다. 분노와 혼란이 뒤섞인 모습은 이전의 단정하고 완벽한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유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지금의 연우를 바라봤다. 늘 빛나는 미소를 달고 살던 사람, 언제나 여유롭고 화려해 보이던 여자가 이렇게 망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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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9화

유하는 가볍게 웃었다.“다시는 볼 일 없을 거야.”조사팀이 경찰까지 동반해 바로 사람을 데려갔다는 건, 이미 어느 정도는 사건의 파악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코시오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해도, 살인 청부와 고의적 가해만으로도 몇 년은 충분히 수감될 사안이었다.게다가 하지철 쪽이 그동안 해 온 일이 정말 유하에게만 국한됐을까?태씨 가문까지 건드렸고, 승현조차 속이려 들었던 집안이었다.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도 적지 않을 것이다.예전에 조사 과정에서 확인했던 하지철 쪽의 과거 기록들이 떠오르자, 유하는 속으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정말, 대담한 거 하나는 알아줘야 하는 사람들이야.’...그 후 한동안, 유하는 바깥의 소란과는 거리를 두고 재활과 손 치료에만 집중했다.이전에는 장진철 교수가 한 번 다녀간 일 때문에 승현이 그걸 빌미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효과가 있어도 그 처방은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승현은 그 이후로 병원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장진철 교수도 직접 오지 않았다. 대신 장진철 교수의 제자인 곽성한이 정기적으로 병실을 찾아와 침 치료를 진행했다.그 덕분에 유하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이제야 승현이 했던 말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정말로 더는 자신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말.‘그럼 됐어. 손이 다 낫고 퇴원만 하면, 더 이상 얽힐 이유도 없을 거야.’그렇게 마음도 점점 가벼워졌다.하지만 곧 청산이 먼저 퇴원했다.그는 회복이 다 끝나서가 아니었다. 다리 골절 재활이 어느 정도 진행돼, 지팡이를 짚고 걸을 수 있게 되자마자 국정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청산을 자주 불러냈다.코시오 입국 이전, 국경 간 공격 프로그램 방어벽과 관련된 사안 때문이라고 했다.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유하도 자세히 묻지 않았다. 다만 코시오를 아직 붙잡아 둘 수 있는 기간 안에 위에서 서둘러 확인해야 할 것들이 많은 듯했다.프로그램 개발자인 청산은 빠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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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0화

“그건...”유하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뭔가 묻고 싶었지만, 끝내 말을 삼켰다.“좀 생각해 볼게요.”바로 답을 주지는 않았다.상대도 재촉하지 않았다. 사안의 중요성과 관련된 이해관계를 간단히 설명한 뒤, 어떤 결정이든 좋으니 정리되면 최대한 빨리 연락을 달라고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조사팀이 나간 뒤.유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간병인이 영양식 점심을 밀고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감사합니다.”그렇게 말한 뒤에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평소처럼 식사를 내려놓고 바로 나가야 할 간병인이 오늘은 자리를 뜨지 않고 곁에 서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누군가 가까이 다가왔고, 은은한 향기가 코끝에 스쳤다.유하는 그제야 번뜩 고개를 들었다.눈앞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승현이 서 있었다. 남자는 여우처럼 휘어진 눈매로 웃으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왜 온 거야! 내 간병인은 어디 있어?”“쉬게 했어. 오늘은 내가 간병인 대신이야.”유하가 알아차렸다는 걸 보자 승현은 아주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포장된 도시락을 하나씩 열어 놓고, 햄 한 조각을 집어 유하의 입가로 가져갔다.유하는 고개를 돌려 피했다. 미간이 찌푸려졌다.“나가.”이어 바로 따져 물었다.“안 온다고 했잖아. 또 거짓말이야?”“난 그런 약속 한 적 없어.”유하가 먹지 않자, 승현은 음식이 식을까 봐 햄을 자신의 작은 그릇에 내려놓으며 웃었다.“내가 말한 건, 네가 퇴원하기 전까지는 내가 책임진다는 거였어. 다만 요즘 좀 바빠서 못 왔을 뿐이지.”‘이 인간 진짜...’“그리고.”승현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여보, 사실은 내가 보고 싶었을 거야.”유하는 대답하지 않았다.하지만 승현의 말이 틀렸다고도 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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