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921 - Chapter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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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1화

애초에 이런 부류의 사람은 유하에게 낯설지 않았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승현에 비하면 설아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그리고 가장 극단적인 쪽이라면 코시오도 있었다.워낙 많이 보다 보니 이제는 익숙해졌다.이미 무뎌질 만큼 무뎌졌다.유하가 입을 열었다.“배 대표님은 싫어요.”설아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불끈 섰다. 자칫하면 입에 문 담배를 그대로 깨물어 부러뜨릴 뻔했다. 어이가 없어 웃음부터 나왔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눈까지 저런 상태가 됐으니, 설아도 유하의 심정이 다소 이해됐다.“그래, 나 말고. 재윤이 보낼게. 너랑 놀아 주라고. 어차피 걔도 하루가 멀다고 네 쪽으로 가려고 하잖아...”유하는 미간을 좁혔다.막 무어라 말하려던 참이었다. 찰칵-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설아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그렇게 해. 내일 내가 애 데려다 놓을게. 너랑 같이 있게. 쉬어.”쾅!문이 닫혔다.병실에서 나오자마자 설아는 다급하게 입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려 했다. 안에서도 진작 한 대 피우고 싶었지만, 안에는 담배 냄새를 맡으면 안 되는 환자가 있었다.딸깍-라이터를 켰다.막 불을 붙이려는 순간,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병원이야. 기본은 지켜.”딸칵-설아는 라이터를 닫고 옆을 노려봤다. 같은 벤치에 앉아 있던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승현은 이미 겉으로는 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얼굴은 차갑고 담담했다. 다만 눈가만 아직 조금 붉어 있었다.그 꼴이 더 거슬렸다.설아는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더 꺼냈다. 승현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일부러 승현 쪽으로 내밀며 싱글싱글 웃었다.“어이구, 방금 울었냐? 눈이 다 빨갛네. 별꼴을 다 보겠다. 한 대 피울래? 속 좀 풀리게.”승현은 설아를 한 번 보고는, 딱히 화도 내지 않았다. 목소리도 차분했다.“담배 냄새 배면, 그 사람이 문 안 열어줘.”설아는 말문이 막혔다.설아는 곧바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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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2화

“난 진짜 널 이해할 수가 없어. 예전엔 일을 그렇게까지 다 망쳐 놓고, 이제 와서 다시 붙잡겠다고 발버둥 치다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병원 복도 긴 의자에 앉은 설아는, 손에 들고 있던 반쯤 꺾이고 구겨진 담배를 빙빙 돌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설아와 승현 사이에는 두 사람쯤 앉을 수 있을 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그만큼 거리를 둔 채 설아는 긴 의자 반대편에 앉아 있는 승현을 향해 말했다.설아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고, 동시에 승현이 이 정도는 당해도 싸다고 여겼다.분명 승현은 누구보다 유리한 자리에 있었다. 유하는 한때 승현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결혼이라는 관계도 있었고, 아이까지 있었다. 그런데도 승현은 제 손으로 그 모든 것을 끝장내 버렸다. 무슨 사정이 있었느니,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었느니 하는 말 따위로 얼버무릴 일도 아니었다. 분명 좀 더 부드럽고 덜 망가지는 방식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 방식 역시 결국은 속임수를 피할 수 없었겠지만.그래도 이렇게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조금 전 병실 안에서 들렸던 유하의 시원하게 터져 나오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았다.완전히 망가져 버린 사람의 웃음이었다.누가 대신 그 길을 걸었더라도, 초반에 그만큼 좋은 조건이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유하는 정말로 한때 승현에게 마음이 있었으니까.설아는 담배를 돌리던 손을 잠깐 멈췄다.이제는 병실 안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채 앉아 있는 유하도 도무지 알 수 없었고, 병실 밖에서 제 발로 벼랑 끝까지 기어들어 가는 승현도 이해할 수 없었다.“차라리 다행인 줄 알아. 소유하가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만약 내가 유하였고, 네가 내 남편이었으면, 넌 벌써 무덤에 들어갔고 네 무덤엔 잡초가 허리까지 자랐을 거야.”승현이 고개를 돌려 설아를 한 번 봤다.“난 오히려 걔가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어.”“뭐?”설아는 한 박자 늦게 뜻을 알아듣고, 곧장 노려봤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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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3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승현이 안으로 들어왔다.승현은 들어서자마자 병상 위의 유하를 봤다. 유하는 아까 승현이 나갔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아무 움직임도 없었고 안색은 창백했다. 소리를 들은 유하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길고 가느다란 눈매는 빛을 잃어 어두웠고, 동공은 초점을 놓친 채 흐트러져 있었다.“오승현?”유하는 눈은 보이지 않아도, 다른 감각은 오히려 더 예민해졌다. 게다가 함께 산 시간도 길었고, 그 시간은 유하에게 너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승현의 발소리만큼은 유하도 쉽게 알아들었다.“핸드폰.”유하가 오른손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산에서 내려올 때는 너무 급했다. 핸드폰은 가방과 함께 산 위 절에 두고 내려온 상태였다. 이런 일이 생긴 이상, 멀리 외국에 있는 이솔과 나연에게는 꼭 알려야 했다. 회사 일에 차질이 생기면 안 됐다.그런데 한참 동안 기다려도 손 위에 닿는 건 없었다.유하가 미간을 좁혔다.‘설마 잘못 들은 걸까?’‘방금 들어온 사람이 오승현이 아니라면, 누구지?’유하는 손을 내렸다. 막 입을 열어 확인하려던 때였다. 승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다 정리해 놨어. 네 눈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네 옆에서 널 잘 돌볼 거야.”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연락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유하는 어이가 없었다.승현은 유하가 다른 사람을 불러 제 곁에 두려는 줄 안 모양이었다. 물론 유하는 더는 자기에게 가족이 있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래도 돈만 있으면 좋은 간병인을 붙이는 일쯤은 어렵지 않았다. 더구나 돈을 쓰지 않아도, 부르지 않아도, 유하가 아프다는 사실만 알게 되면 스스로 찾아와 끝까지 돌보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분명 있었다.그런 의미에서라면, 유하는 늘 자신에게 잘해 주려는 사람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그 점 하나만큼은 유하 자신도 꽤 확신이 있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이번의 유하는, 승현에게 되갚아 줄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그런데 무슨 수로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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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4화

다행이라면, Splendid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결국 유하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 L-FDA 수상으로 회사 고위층의 입도 어느 정도 막아 둔 상태였다. 이제는 이사회 쪽 사람들조차 유하의 업무 배치나 일정에 쉽게 간섭할 수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꽤 자유로운 편이었다. 유하가 일부러 드러내지만 않는다면, 회사 쪽은 유하의 눈에 문제가 생긴 사실도 알기 어려웠다.솔직히 말하면, 유하는 회사 일에서 지나치게 강압적인 방식을 쓰는 걸 원래 좋아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소성란과 오랜 세월 함께 회사를 키워 온 동료들에 대한 예의도 있었다. 사실 L-FDA 상이 없었다고 해도, Splendid 안에서 유하의 자리를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 상은 어디까지나 윗선의 오래된 사람들 입을 닫게 하려는 의미가 더 컸다. 하루가 멀다고 유하 귀에 대고 ‘능력이 부족하다’라느니 뭐니 떠드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정말 마음먹고 강하게 밀어붙였다면, 유하는 Splendid 안에서 사실상 완전한 독단 체제를 만들 수도 있었다.다만 그건 재미가 없었다.회사 쪽 일까지 정리한 뒤, 유하는 승현에게 다시 이솔에게도 전화를 걸어 달라고 했다.회사 안에서 나연은 소성란이 직접 키워, 유하 곁에 붙여 둔 비서였다. 그래서 유하가 믿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유하가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나연 하나뿐인 건 아니었다. 회사 안에는 나연 외에도 이솔이 있었다. 유하가 가장 마음 놓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유하에게 그 두 사람은 밖에서 무슨 일을 벌이든 회사 쪽을 걱정하지 않게 해 주는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전화가 연결됐다.이솔은 나연만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유하에게 일이 생겼다는 말, 그것도 W시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폭발했다. 그러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따져 물었다. 또 오승현 그 개X식이 무슨 짓을 한 거냐고.어쩌면 당연했다.유하 곁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승현을 좋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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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5화

깊은 밤, 그린힐.산에서 내려온 뒤엔 이미 밤이 깊었다. 병원에 들러 이런저런 검사를 다 마치고, 차가 대문 앞에 멈춰 섰을 때는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이리저리 치이며 여기까지 오고 나니, 유하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잠도 쏟아졌다.유하는 승현의 품에 안긴 채 차에서 내렸다.초겨울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승현은 유하를 코트 안에 단단히 감싸안고, 걸음을 재촉해 집 안으로 들어섰다.시간이 늦었지만, 윤해월은 진작 연락받고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오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가, 승현 품 안에서 반쯤 잠든 채 기대 있는 유하의 옆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기색이 확 퍼졌다.“사모...”막 부르려던 윤해월을, 승현이 고개를 저어 멈춰 세웠다.“조용히. 약 달여서 위로 가져와.”“예, 예.”윤해월은 힘껏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뒤이어 들어온 태건의 손에서 한가득 든 약재 봉지를 받아 들고는 곧장 주방으로 뛰어갔다. 유하가 몸을 천천히 추슬러야 하는 상태라, 병원에 갔을 때 승현은 미리 아는 한의원 원장에게 연락해 약을 지어 놓은 상태였다. 한약이었다.이층에 올라 안방으로 들어간 승현은 유하를 조심스럽게 침대 위에 눕혔다. 그 뒤 승현은 유하 얼굴에 씌워져 있던 선글라스를 벗겨 냈다. 이것 역시 병원에서 의사가 당부한 것이었다. 빛 자극을 최대한 막으라는 뜻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오히려 더 함부로 둘 일은 아니었다.선글라스가 벗겨지자마자 유하가 눈을 떴다.“도착했어?”“응. 이모님이 약 달이고 있어. 너는 먼저 자. 약 다 되면 깨울게.”“그럼 나 안 잘래.”유하는 손을 더듬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앞으로 뻗은 손을, 더 큰 손이 붙잡았다. 승현이 유하의 손을 잡아 위로 끌어올렸다. 힘이 조금 세게 들어간 탓에 유하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유하는 그대로 승현의 따뜻한 가슴에 이마를 부딪쳤다.승현은 유하의 허리를 감싸안았다.“먼저 옷부터 갈아입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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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6화

하지만 승현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이제 남은 건 이 길 하나였다. 마지막에 기다리는 결과가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의 승현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아주 희미하더라도 완전한 끝을 향한 가능성 하나를 붙들고 싶었다.유하와 끝까지 함께 늙어 가는 삶.그것 하나를 바라고 있었다.승현이 부드럽게 물었다.“그럼 뭐 먹고 싶어? 내가 사 올게.”“진짜?”유하가 웃으며 되물었다.“응. 내가 네 옆에 있겠다고 했잖아.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말해. 내가 다 구해 올게.”“좋아.”유하는 웃었다.“나... 제일 좋아하는 사탕 가게에서 파는 사탕 먹고 싶어. 특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몇 가지 맛 있잖아. 그거 있어야 약 먹을 수 있을 것 같아.”W시에는 오래된 수제 사탕 가게가 하나 있었다. 대대로 내려온 집이었다. 결혼하고 지내던 몇 년 동안, 유하는 거기서 사탕을 자주 사 왔다. 자기가 먹기도 했고, 준서에게 챙겨 주기도 했다. 하지만 승현은 단 걸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사 왔을 때도, 유하가 건넨 사탕을 승현은 유하가 보는 앞에서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뒤로 유하는 승현에게 다시는 그 집 사탕을 사다 준 적이 없었다. 그러니 승현이 그 가게 이름을 알고 있을 리도 없었다.애초에 승현은 그런 쪽에 관심이 없었다.게다가 유하는 일부러 가게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그 집은 그린힐에서도 꽤 멀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이미 한밤중이었다. 가게는 진작 문을 닫았을 시간이었다. 당장 간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애초에 유하는 승현을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었다.승현이 말장난처럼 빠져나갈 틈을 줄까 봐 유하는 한마디를 더 붙였다.“네가 직접 사 온 것만 먹을 거야.”“그래.”승현은 뜻밖에도 무척 기쁜 얼굴이었다. 웃음도 깊어졌다.“네가 좋아하는 거면, 당연히 내가 사 와야지. 바로 다녀올게. 여기서 기다려.”유하는 잠깐 말이 없었다.승현은 들고 있던 약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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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7화

윤해월이 배숙을 들고 다시 올라왔을 때는 약그릇이 이미 비어 있었다. 윤해월은 그걸 보자마자 환하게 기뻐했다.“잘 드셨어요, 정말 다행이에요. 몸에 좋은 약은 원래 좀 써도 드셔야 하잖아요. 그래야 빨리 나으세요.”“네.”유하도 미소를 띠며 맞장구쳤다.“유하 씨, 이 배숙도 얼른 드셔 보세요. 지금 온도가 딱 좋아요. 배도 요즘 과수원에서 막 따서 바로 들어온 거라 엄청 싱싱하거든요.”윤해월은 일부러 배숙을 손잡이가 달린 컵에 따라 담아 왔다. 손에 쥐기 편했고, 마시기도 좋게 빨대까지 꽂아 두었다.유하는 그 컵을 받아 들었다.한 모금 마시자, 배 향이 부드럽게 번졌다. 달큰한 맛이 속까지 스며들었다.“맛있네요.”“어머, 그러면 배 과육도 좀 드실래요? 제가 떠먹여 드릴까요?”윤해월은 쟁반 위에 따로 담아 둔 배 접시를 들어 보였다.“아니에요. 그건 안 먹을게요.”유하는 배숙을 반쯤 마시고 멈췄다. 윤해월이 컵을 다시 받아 들자, 유하는 손을 내밀며 말했다.“저 세면 좀 하게 욕실까지 데려다주세요. 너무 졸려서 이제 자려고요.”윤해월은 잠깐 멈칫했다. 승현이 아직 밖에서 사탕을 사 오고 있는데, 기다리지 않아도 되냐고 묻고 싶었다.하지만 바로 다음 숨에 윤해월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유하를 부축해 욕실 쪽으로 이끌었다. 걸음을 옮기면서도 부드럽게 말했다.“맞아요. 일찍 주무셔야죠. 늦게까지 깨어 계시면 회복에 안 좋아요.”유하는 작게 웃었다.윤해월은 욕조에 물을 받아 두고, 유하의 옷까지 갈아입히는 걸 도와 물속으로 들여보냈다. 그러고 나서는 유하의 말에 다시 밖으로 나왔다.“다 씻고 나면 제가 부를게요.”유하는 대충 몸을 담그고 씻었다. 오늘 밤 내내 쌓인 피로를 물에 녹여 내듯 가만히 몸을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이 더 짙어졌다.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몽롱해지던 정신이 다시 조금 또렷해졌다. 유하는 윤해월을 들어오라고 했다.양치까지 마쳤다.평소처럼 이것저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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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8화

유하도 너무 지쳐 있었던 탓일까?몸이 피곤한 것도 있었지만, 더 큰 건 마음이 닳아 버릴 만큼 지쳐 있었다는 점이었다. 유하는 이튿날 정오가 다 되어서야 겨우 눈을 떴다. 승현이 깨우지 않았더라면, 오후까지 내내 잤을 것이고, 어쩌면 하루 종일 그대로 누워 있었을지도 몰랐다.승현은 유하를 품에 안고 있었다. 따뜻하고 말랑한 체온이 가득 안겼다. 향도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그 감촉에 승현의 마음이 자꾸 흔들렸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승현은 목소리를 낮춰 부드럽게 달랬다.“밥 먹고 다시 자. 빈속으로 자면 더 힘들어.”잠깐 말을 멈췄다가 승현이 다시 물었다.“잠옷으로 갈아입을래?”“응...?”유하는 반쯤 잠에 겨운 머리를 천천히 깨웠다.“아니. 밥 먹고 나서 다시 잘래.”유하는 정말 졸렸다.“알겠어.”유하가 아직 완전히 정신을 못 차린 걸 보자, 승현은 아예 유하를 가로로 안아 들었다. 그때 유하가 마침 크게 하품했다. 축 늘어진 손끝이 무언가에 스쳤다. 만졌을 때 표면이 울퉁불퉁하게 겹쳐 있었고, 종이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났다.유하의 손이 바로 움찔하며 물러났다.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대신 정신은 또렷해졌다.승현은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불룩하게 부푼 커다란 사탕 봉투를 한 번 바라봤다. 유하가 따로 묻지 않자, 승현도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유하를 안은 채 아래층 다이닝 룸으로 내려갔다. 의자에 유하를 조심히 앉히고, 승현도 옆자리에 앉아 직접 식사를 챙겼다.식탁에는 점심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유하가 앞을 보지 못하니, 승현은 식탁 위에 오른 열댓 가지 음식을 하나씩 모두 읽어 줬다. 그러고는 어떤 걸 먹고 싶은지 물었다. 승현이 직접 덜어주고, 잘라서 먹여 줄 생각이었다.그런데 다 설명을 마친 뒤에도,유하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승현은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심스레 물었다.“다 마음에 안 들어?”윤해월은 분명 말했다. 이 식단은 예전에 유하가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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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9화

승현은 아예 노트북과 서류 뭉치를 안방으로 들고 들어왔다. 방 안에서 일을 볼 생각이었고, 움직임도 최대한 소리를 죽였다.안방은 조용했다.침대 위, 이불 아래 둥글게 솟은 자리가 느리게 오르내렸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쳤고, 오래 쌓인 긴장까지 한꺼번에 내려놓은 유하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승현은 침대 곁에 앉아 서류를 넘기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다가도, 틈틈이 고개를 들어 유하를 바라봤다.고요하고도 평온한 기운이 감돌았다.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침실 문에서 아주 가벼운 소리가 났다.승현은 먼저 침대 쪽을 확인했다. 유하가 여전히 깊이 잠들어서, 소리가 났지만 깨지 않은 걸 확인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는 윤해월이 서 있었다.“대표님, 나 비서님 오셨어요. 아이 둘도 같이 데리고 오셨고요.”“그래.”승현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이모님은 여기서 사모님 곁 지켜 주세요. 소리 나지 않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요.”지금 유하는 앞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곁에는 늘 누군가가 있어야 했다.“네, 대표님.”...승현은 곧장 서재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자, 태건 옆에 열한두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둘이 서 있었다. 남자아이 하나, 여자아이 하나였다. 승현이 들어오자, 두 아이는 태건의 눈짓을 받고는 곧바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대표님, 안녕하세요.”“그래.”승현은 책상 뒤에 앉았다. 그러자 유하 앞에서 보이던 부드러운 기색은 사라졌다. 목소리도, 표정도 차갑게 가라앉았다.“여기 왜 왔는지 알고 있나?”남자아이가 먼저 대답했다.“알고 있습니다!”여자아이가 뒤이어 입을 열었다.“삼촌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저희는 선택된 후보로서 준서 도련님과 함께 사모님 곁을 지키고 잘 돌봐야 한다고요.”“준서 도련님과 사모님 사이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고, 사모님이 마음 편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오씨 가문 산하에는 여러 보육원이 있었다. 여러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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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0화

서재 안.두 아이를 먼저 유하에게 보낸 뒤에 책상 한쪽에 앉은 태건이 입을 열었다.“대표님, 방금 그 두 아이는 어떠셨습니까?”사람은 태건이 먼저 직접 보고 데려온 아이들이었다. 승현은 그전까지는 자료로만 대강 파악하고 있었고, 오늘이 사실상 첫 대면이었다. 아직은 어디까지나 후보일 뿐이었다. 최종으로 정해진 상태는 아니었다.“나쁘진 않아.”승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그 여자애는 속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으로 보여.”“희은이 말씀하시는 겁니까?”태건이 곧바로 받았다.“확실히 또래보다 일찍 철든 편이긴 합니다. 그래도 머리는 좋습니다.”“제가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 상태를 보며 사람을 고를 때, 희은이는 지금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나왔습니다.”“욕심도 있었지만, 선은 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제가 왜 왔는지조차 밝히기 전이었는데도요.”승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머리 좋은 건 맞지.”승현은 책상 위 자료를 무심하게 넘기며 말했다.“선을 알기만 하면, 속셈이 좀 있는 건 상관없어. 오히려 그런 쪽이 제대로 쓰면 더 쓸모 있을 때도 많으니까.”물론, 가장 중요한 기준은 따로 있었다.만약 희은이 최종 후보 가운데서 끝내 남게 된다 해도, 승현은 준서가 그 아이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 아래에 둘 사람 하나 제대로 눌러 두지 못하면, 무슨 자격으로 가문의 자리에 앉겠는가?가문의 주인이... 자기 사람보다 상대가 더 영악하다고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그럴 리도 없었다.오씨 가문 사람이 그런 걸 겁내고 늘 머뭇거리기만 한다면, 애초에 오씨 가문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승현은 희은 이야기는 더 길게 끌지 않았다. 다시 자료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남자애는... 성격이 좀 급해. 반응은 조금 느리고. 적어도 저 여자애보다는 느려.”“성찬입니다.”태건이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그 부분은 확실히 약합니다. 다만 제가 그동안 보육원에서 지켜본 바로는... 말 붙이는 속도나 즉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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