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911 - Chapter 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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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1화

쾅- 쾅- 쾅-밤이 깊어질 무렵, 손님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방 안에서 막 침대에 누워 쉬려던 설아는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어 밖을 보자, 복도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저... 여기서 하룻밤 자도 될까요?”유하는 복도에 서 있었다.설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곧장 이유를 알아챘다.“그 사람 피해서 온 거지?”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아도 유하에게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유하가 이쪽으로 숨어 들어오겠다고 찾아온 것만으로도 이미 놀라웠고, 솔직히 조금은 기가 막힐 정도였다. 설아는 말없이 몸을 비켰다.“들어와.”“감사합니다.”유하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씻고 양치를 마친 뒤, 손님방에 놓여 있던 잠옷으로 갈아입었다.“안쪽에서 잘래, 바깥쪽에서 잘래?”욕실에서 나오는 유하를 보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설아가 침대 끝을 툭 치며 물었다.“안쪽으로 갈게요.”그렇게 말한 유하는 안쪽에 누웠다.유하는 정말로 사람을 피하고 있었다.지금 유하는 마음이 텅 빈 것처럼 무뎠다. 아무런 감정도 올라오지 않았고, 더는 연기할 기운도 없었다. 다투는 것도 귀찮았고, 말을 섞는 일도 싫었다. 승현과 준서를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도 이미 늦어서 이리저리 따져 보니, 같은 이유로 오국수에게 붙잡혀 이곳에서 하룻밤 묵게 된 설아의 방이 그나마 몸을 피할 만한 곳이었다.물론 예전의 유하와 설아는 수도 없이 얼굴을 붉혔고, 수도 없이 다퉜다. 사이가 좋았던 적은 없었다.그래도 승현과는 달랐다.둘 다 강하고, 남을 쥐고 마음대로 흔들려는 성향이 짙었다. 다만 그중에서도 설아의 방법이 그나마 더 부드러운 편이었다. 유하가 원하는 쪽으로 맞춰 주는 척했고, 그 속내가 순수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적어도 숨이 막히는 기분은 덜했다.숨을 한 번 돌릴 여유는 있었다.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했다.사람도 그렇고, 행복도 그렇고, 결국 비교 속에서 더 또렷해지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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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2화

“엄마, 물 드세요.”함께 산에 오른 재윤이 아래쪽 돌계단에서 종종걸음으로 올라왔다. 재윤은 작은 가방에서 전에 유하가 사 준 캐릭터 물병을 익숙한 손길로 꺼내 유하에게 내밀었다.“고마워.”떨리는 손으로 물병을 받아 든 유하는 미지근한 물을 조금씩 나눠 마셨다. 그러면서도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설아는 그렇다 쳐도.아이한테까지 체력에서 밀리다니...여기까지 올라오는 동안 유하는 대체 몇 번이나 쉬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더 난처한 건, 유하는 손에 든 것도 하나 없는데 마실 물조차 아이가 내내 등에 메고 올라왔다는 점이었다.“가방은 제가 멜게요.”“괜찮아.”재윤은 물병을 다시 받아 뚜껑을 돌려 닫았다. 유난히 붉어진 유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재윤은 조그만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가득 담고 또박또박 말했다.“엄마는 물병 뚜껑도 제대로 못 닫잖아요. 그러다 쓰러지면 어떡해요?”“하하...”유하는 억지로 웃음을 흘렸다.‘정말 뚜껑이 제대로 안 잠겼던 건가?’유하는 멋쩍게 두어 번 웃더니, 얼굴이 더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정말 창피했다.곁에서 숨길 생각도 없는 비웃음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하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설아가 유하를 바닥에서 홱 잡아끌어 일으켜 세웠다.“됐어. 더 쉬면 너 진짜 못 일어나. 이러다 언제 올라가려고.”유하의 종아리가 후들거렸다. 자칫하면 그대로 휘청일 뻔했다.하지만 곧 설아의 손이 유하를 붙들었다. 설아는 반쯤 부축하고 반쯤 끌다시피 하며 유하를 산 위에 있는 절까지 데려갔다. 귓가에는 설아의 투덜거림이 끊이지 않고 따라붙었다.“그러니까 그냥 사람 불러서 업고 올라가자고 했잖아. 너는 정성이 부족하니 뭐니 하면서 꼭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하더니, 그러면 좀 버텨 보든가. 결국 나만 고생이네...”입으로는 줄곧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설아는 끝내 유하를 산 위까지 데려다 놓았다.그때쯤 산 위는 이미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였다. 유하는 별채에 딸린 작은 전각에 드러누울 듯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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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3화

“불교 믿어?”그 말을 들은 유하는 먼저 미간을 좁혔다. 고개를 살짝 돌려 책상 한쪽에 앉아 있는 설아를 바라봤다. 표정에 아주 옅은 이질감이 스쳤다.그렇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굳이 대답할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게다가... 며칠 전 오국수 집에서 설아와 승현은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전부터 두 사람은 남몰래 손을 맞춘 적도 있었고, 유하가 지금까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래 같은 것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번에도 좋은 뜻으로 다가온 건 아닐 터였다.유하는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흘려듣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다만 거기에 마음을 쏟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며칠 동안 유하는 설아가 곁에 머무는 것도 그냥 두었다. 붙잡지도 않았고, 일부러 내치지도 않았다. 어차피 설아는 어떻게든 다가올 사람이었다. 유하는 그저 조용히 지켜봤다.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지 보자는 마음이었다.역시, 결국 이 이야기가 나왔다.문제는 이번엔 또 무슨 속셈이냐는 거였다.달래려는 걸까?아니면 몰아붙이려는 걸까?유하는 잔잔하기만 한 마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요즘 유하는 점점 감정이 옅어지고 있었다. 특히 어떤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작은 불씨 하나조차 피어나지 않았다.“불교 믿냐고?”유하가 대답하지 않자, 설아가 다시 한번 물었다.“우리 고모할머니는 믿었어.”이번에는 유하가 입을 열었다.유하는 설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눈앞 책상 위에 반듯하게 펼쳐 둔 한지로 시선을 내렸다. 그 위에는 단정하고 고운 해서체의 작은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그럼 너는 안 믿는 거네.”설아 역시 책상 위에 적힌 경문을 내려다봤다.“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유하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바로 말씀하세요. 저한테 이런 식으로 에둘러 말할 필요 없잖아요.”서로 모를 리 없었다.뭘 새삼 꾸미고 있나 싶었다.“성격 급하네. 그래도 너랑 말하면 참 편하긴 해.”설아는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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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4화

한동안 법당 안, 책상 곁에 앉은 두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기마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꽤 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유하가 먼저 정적을 깼다.“계속 말씀해 보세요.”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설아가 일부러 아픈 곳을 찔러도 유하는 화를 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는 화를 낼 만한 감정 자체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분노 따위는 더욱 멀었다.하물며 상대가 설아였다. 이 사람의 독한 말버릇이야 유하도 하루이틀 겪은 게 아니었다.설아는 웃는 낯으로 물었다.“승현이 널 놓아줄 거라고 생각해?”유하는 대답하지 않았다.설아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요즘은 좀 잠잠하긴 하지. 그래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하나를 늘 곁에 두고 경계하며 사느니, 차라리 미리 해체해 버리는 게 낫잖아.”“너는 예전부터 너무 물렀어. 매정해야 할 때도 끝까지 못 가고, 항상 어딘가에서 손을 늦췄지.”“그러니까 오승현한테 자꾸만 기회를 줬던 거야. 이번엔 내 말 들어. 이번에는 오승현이 완전히 마음 접게 만들자.”“제가 물렀다고요?”유하는 굳이 맞장구도 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물었다.“어떻게 하자는 건지 말씀해 보세요.”“전에 네가 거절했던 그 방법 있잖아. 내 말대로, 그때 내가 말한 대로 밀고 가자는 거지.”‘아, 그 얘기...’유하는 잠시 생각한 뒤에야 떠올렸다.예전에 재윤이 병원에서 의식 없이 누워 있을 때, 설아가 처음 함께 손잡자고 하면서 꺼냈던 방법이었다. 그때 유하는 시시하고 번거롭다고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다.이른바... 쥐고 흔드는 방식.유하가 말이 없자 망설이는 걸로 여긴 설아가 한마디를 더 얹었다.“잊지 마. 오승현만 없었어도 너와 소성란 회장님은 지금보다 훨씬 오래, 훨씬 편하게 살 수 있었어.”다소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말이긴 했다.그래도 설아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승현이 제 오만을 믿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연우를 그렇게 방치하지 않았더라면, 괜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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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5화

세상일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유하는 그 말의 무게를 이미 뼈저리게 배웠다. 피와 눈물로 새겨 넣은 것 같은 가르침이었다.알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일이 다시 닥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산 위 절에서 기도를 올리는 마지막 날에.아침 공양을 마친 뒤, 유하는 다시 법당으로 돌아왔다. 방석 위에 단정히 앉아 책상에 몸을 기울이고 경문을 베껴 쓰기 시작했다. 마음속으로는 경문을 조용히 외웠고, 귓가에는 염주를 돌리며 목탁을 두드리고 불경을 읊는 스님의 소리가 잔잔히 번졌다.은은한 향내가 법당 안에 감돌았다.한 줄씩 써 내려가다 보니 어느새 점심때가 되었다. 법당 안에는 유하만 남아 있었다. 스님은 자리를 비웠다.그래도 유하는 멈추지 않았다.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다. 유하는 더 오래 산 위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이 기도의 경문만큼은 한 글자라도 더 베껴 쓰고 싶었다.쓸 수 있는 데까지 써 보자는 마음이었다. 유하는 진심으로 바랐다. 이 기도가 조금이라도 하늘에 닿기를.소성란은 불심이 깊었다.평생 자식도 없었고, 곁에 남은 혈육도 유하 한 사람뿐이었다.해마다 시간이 허락하면 소성란은 꼭 절에 들러 향을 올리고 절을 했다. 직접 오지 못하는 해에도 빠지지 않고 시주를 보냈다. 해마다 그렇게 했고, 거기서 멈추지도 않았다.유하가 아는 한, 소성란은 이름을 알린 뒤부터 Splendid 명의의 복지재단을 세웠다. 보육원을 만들어 고아들을 거두었고, 그 아이들의 기본적인 생활과 교육을 꾸준히 지원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데도 대학에 붙었지만 등록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신입생들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그런 식의 지원은 한둘이 아니었다.이유는 단순했다.유하와 소성란은 닮은 삶을 지나왔기 때문이었다.어릴 적에는 살아내는 것부터 힘들었다. 학교에 다니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났고, 선한 사람들을 만나 겨우 진창 같은 시간을 건넜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질척한 바닥에 발이 빠지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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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6화

나중에 일이 다 끝나면, 유하는 재윤에게 한번 물어볼 생각이었다. 자기 제자가 될 마음이 있는지. 그렇게 되면 재윤도 이제는 입을 바꿔, 더는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서서히 유하의 미소가 옅어졌다.떡 한 조각을 삼키고 나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배고픔이나 저혈당 때문에 생긴 어지럼증이라 여겼는데,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해졌다. 시야는 빙글빙글 뒤집히듯 흔들렸고, 어두운 촛불은 일그러진 채 번져 보였다.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유하는 다급히 떡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책상을 짚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향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문짝에 정면으로 부딪혔다.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유하는 눈을 손으로 감쌌다. 시야를 어지럽히는 뒤틀린 빛을 가리려는 듯, 손바닥으로 눈가를 눌렀다. 가슴은 거칠게 들썩였고, 숨은 자꾸만 가빠졌다.“왜 바닥에 앉아 있어?”문밖에서 설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급히 달려오는 발소리도 함께 들려왔다.설아는 원래 유하를 저녁 공양에 데려가려고 부르러 온 길이었다. 그런데 막 와 보니 유하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을 감싸고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난 줄 알고, 설아는 황급히 달려와 유하를 부축해 필사하던 책상 곁으로 데려갔다.“왜 이래?”유하는 책상을 붙든 채, 밀려오는 어지럼증을 버티고 있었다. 속에서는 울렁거림이 치밀어 올랐다. 입을 열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설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이마에는 식은땀이 밴 유하를 보고 바로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설아는 다급히 ‘사람 좀 부를게’ 하고는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유하는 그 말조차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한참 동안 숨을 고르고 나서야 겨우 속에서 치밀던 메스꺼움이 조금 가라앉았다. 유하는 팔을 책상 위에 얹고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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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7화

늦가을이 지나 초겨울로 접어든 때였다. 산바람은 매섭고 차가웠다.유하는 승현의 등에 업힌 채, 귓가를 스쳐 가는 거센 바람 소리를 들었다. 승현이 산길을 내달릴 때마다 몸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유하는 내려가는 내내 승현의 목덜미 가까이에 얼굴을 묻고,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하나는... 산바람에 얼굴이 시릴까 봐서였고,다른 하나는... 지금 고개를 들어 봐야 어차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고 있어도 앞은 새까맸다. 시야는 텅 빈 어둠뿐이었고, 눈 안쪽은 시큰거리며 따갑게 저렸다. 거센 바람 속에서 정신마저 점점 흐릿해졌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문득 바람이 멎었다.산 아래에 도착한 것이었다.유하는 그대로 안겨 차 안으로 옮겨졌다. 차문이 닫히자 매서운 바람은 바깥에 막혔다. 차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병원을 향해 달렸다. 그동안에도 유하는 줄곧 승현의 품 안에 안겨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유하의 발은 끝내 땅에 닿지 않았다.수많은 소리가 유하를 둘러쌌다.여러 검사가 차례로 이어졌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귀가 조금 조용해졌다. 유하는 병실 침대에 앉은 채, 마지막으로 내려질 결과를 가만히 기다렸다.병실 밖에서 승현이 먼저 결과를 받아 들었다. 손에 쥔 검사 자료를 한 장씩 넘기며, 자료를 가져온 의사와 이야기를 나눴다.“치료할 수 있습니까?”의사는 짧게 답했다.“네, 가능합니다.”가장 중요한 대답을 확인한 뒤에야 승현은 원인을 물었다.“눈 자체가 망가진 건 아니고?”의사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검사 결과로 보면, 눈은 과로에 가까운 상태입니다. 현재 기질적인 병변 반응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병변 때문에 생긴 문제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됩니다. 오승현 대표님, 환자분이 최근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습니까?”승현은 그를 올려다봤다.“그 말은... 심리적인 문제 때문에 이럴 수 있다는 뜻입니까?”“심리적인 문제만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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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8화

승현은 유하를 제대로 돌볼 생각이었다.의사의 당부를 끝까지 듣고, 필요한 내용까지 빠짐없이 적고 나자 승현은 병실 문을 열었다.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건 병상에 말 없이 앉아 있는 유하였다. 유하는 초점 없이 흐트러진 눈으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두고 있었다. 곧 승현이 들어온 방향이었다. 그 모습을 본 승현의 가슴 한복판이 세게 흔들렸다.병상 위의 유하는 지금 이때만큼은 차마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승현은 유하에게 다가갔다.아직 입도 떼기 전이었는데, 유하가 먼저 물었다.“의사가 뭐래?”“나을 수 있대.”“응.”유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결과가 놀랍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승현이 어째서 그렇게 빨리 산 위 절까지 올 수 있었는지조차, 유하는 이미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닥쳐온 모든 결과를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내가 제일 좋은 데로...”“알아.”유하는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얼굴을 둔 채, 입가에 엷은 웃음까지 띠었다.“네가 가진 힘이랑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한 적 없어. 다만, 내가 잘 이해가 안 되는 건 있어.”승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두 사람 사이에 쌓인 지난 시간이 절대 좋지 않았던 탓이었다. 승현은 유하가 이 일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줄 알고, 반사적으로 바로 해명했다.“나 아니야. 난 너 다치게 할 생각 한 적 없어.”승현은 그저 유하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만 바랐다.그런데 늘 방법이 틀렸다.게다가 지금이 어느 때인데, 승현이 이런 쓸데없는 짓까지 할 리 없었다.“하?”유하는 잠깐 멈칫하더니, 곧 웃었다. 웃음은 소리로까지 새어 나왔다. 웃다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고, 설명하기 어려운 서글픔까지 밀려오는 듯했다. 한참 웃던 유하는 그제야 웃음을 거두었다.“오승현.”유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나 있잖아, 요즘 산에 있으면서 진짜 많은 생각을 했어. 태어나서 지금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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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19화

유하는 자조하듯 웃었다.“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너를 만난 뒤로는 내 인생에 제대로 풀린 일이 없더라. 되는 일은 없고, 계속 꼬이기만 했어.”“W시가 애초에 나한텐 복이 없는 곳이었는지, 아니면 네가 그냥 날 망치게 하는 인간인 건지, 이제는 그것도 모르겠어. 넌 나한테 진짜 재수 없는 존재야. 우리 둘은 처음부터 안 맞았던 거겠지...”“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승현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이를 악물었는데도 턱이 떨렸다. 창백한 얼굴에는 식은땀이 잔뜩 배어 있었다. 몸까지 휘청거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위태로웠다. 유하가 첫마디를 꺼냈을 때부터 승현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승현은 유하가 자신에게 하나하나 따져 묻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하지만 이런 식은 견딜 수 없었다.유하가 이제부터 무슨 말을 할지 어렴풋이 짐작한 탓인지, 승현은 다급하게 말을 잘랐다. 거의 애원에 가까운 목소리였다.“그만 말해. 제발, 그런 말 하지 마...”“하...”유하는 짧게 웃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눈앞은 여전히 캄캄했지만, 승현이 바로 앞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승현의 숨소리도 점점 거칠고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게 느껴지자 유하의 입가에 걸린 웃음은 더 짙어졌다. 유하는 손을 더듬어 승현의 얼굴을 찾아냈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뺨에 손끝이 닿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 위로 참지 못한 통쾌함이 서서히 번졌다.유하는 가볍게 내뱉듯 말을 이었다.“오승현, 너 같은 재수 없는 인간이 끝까지 나를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난 거의 죽을 뻔했고, 지금은 눈까지 멀었어.”“그런데도 넌 아직도 날 안 놔주지. 그래 놓고 네가 날 미워하는 게 아니라고? 내가 죽길 바라는 게 아니라고?”유하의 웃음이 한층 깊어졌다.“넌 내가 죽길 진짜 바라는 거야. 하하하하... 너는 그냥, 날 죽이고 싶은 거잖아.”유하는 소리 내 웃었다.그 웃음은 날카롭게 병실 안을 긁었다. 결국 버티지 못한 승현이 허리를 꺾듯 숙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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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20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챈 설아는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설아는 의사와 간호사 몇 사람을 불러오고, 태건까지 불렀다. 감정이 눈에 띄게 무너져 있던 승현은 그렇게 해서 반강제로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그제야 병실 안이 조용해졌다.설아는 문을 닫고 돌아섰다. 병상 위에 앉아 조용해진 유하를 바라보는 설아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묘한 이질감이 함께 어려 있었다.유하는 이제 웃지 않았다.승현이 병실을 나간 뒤부터 유하는 줄곧 조용했다. 병상 위에 그대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가늘고 긴 눈매는 초점 없이 흐려져 있었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눈이었는데도, 그 흐릿한 눈동자에는 차갑게 식은 기색이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 몸짓에도 감정의 물결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설아가 방금 전의 장면을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조금 전까지 승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유쾌하게 웃던 사람이 정말 유하였는지 의심했을 것이다.설아는 그런 유하를 본 적이 없었다.예전에는 아무리 건드리고 자극해도, 기껏해야 유하를 화나게 만들거나 열받게 할 뿐이었다. 얼굴 붉히며 다투고, 심하면 한바탕 몸싸움까지 가는 정도였다. 웃음이라면, 없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자주 본 건 아니었다. 설아도 유하가 웃는 얼굴 자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다만, 방금 같은 웃음은 처음이었다.서늘하고, 어딘가 텅 빈 데가 있었고, 듣는 사람 등줄기를 식게 만드는 기운이 섞여 있었다.설아는 문에 등을 기댄 채 물었다.“왜 그래. 아까 걔가 뭐라고 했길래, 아니면 뭘 했길래 네가 그렇게 된 거야?”유하는 고개를 저었다.“그럼 방금 너희는 대체...”“전 기분 좋았어요.”유하가 그렇게 말하자, 무심하던 얼굴 위로 다시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얀 뺨에는 조금 전 크게 웃을 때 치솟은 열기가 아직 남아, 붉은 기색이 옅게 배어 있었다.겉으로 보기엔...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오히려 설아 쪽이 말문이 막혔다. 미간을 좁힌 설아는 결국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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