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그들이 나를 버릴 때, 나는 세상을 가졌다: Chapter 941 - Chapter 950

962 Chapters

제941화

주방은 널찍하고도 환했다.안에는 각종 조리도구와 신선한 식재료가 가득 놓인 대리석 조리대가 세 줄이 서로 엇갈리게 배치됐다.반목 터틀넥의 몸에 붙는 검은 니트를 입은 승현이, 짙은 흑색 니트 소매를 가볍게 걷어 근육선이 또렷한 아래팔을 드러낸 채, 문에서 가장 가까운 조리대 앞에 서서 고깃덩이를 자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칼질은 한 번 한 번이 정확했고 힘이 실려 있었다.승현의 곁에는 고기를 크게 자를지, 작게 자를지 낮은 목소리로 알려 주는 윤해월이 서 있었다.유하가 승현이 만든 밥을 먹겠다고 했고, 승현 역시 자기 요리 실력이 겨우 무난한 수준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유하가 일부러 곤란하게 만들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도, 정작 먹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승현은 오후에 일을 일찍 정리한 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미리 주방에 들어와 진지하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목장에서 막 들여온 초원 한우를 썰고 있던 승현의 귀에, 도발과 비웃음이 뒤섞인 목소리가 주방 입구 쪽에서 날아들었다.“왜, 이제는 ‘집에서 살림 잘하는 남자’ 역할로 갈아탔어? 제법 그럴듯하게 흉내 내네. 힘들지도 않나 봐.”누구 목소리인지 알아들은 승현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계속 고기를 썰었다.윤해월은 대표님이 입을 열지 않으니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민망한 침묵 속에 한쪽에서 굳어 있었다. 당장이라도 솜뭉치를 구해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재윤을 따라 유하를 찾으러 가지 않고, 일부러 승현을 긁으러 주방까지 온 설아가 침묵을 견딜 리 없었다. 설아는 아주 자연스럽게 조리대 옆으로 다가와, 짙은 적갈색으로 물들인 네일이 돋보이는 손을 뻗어 이미 손질해 둔 고깃조각을 집으려 했다. 하지만 뻗어 들어온 칼끝에 손이 밀려났다.“쯧, 손 다치면 배상해야 하는 거 알지?”설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배상할 수 있어.”승현은 냉담하게 답하며 칼을 도마에 푹 꽂았다. 설아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윤해월에게 말했다.“이제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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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2화

‘우리 재윤이도 참 다루기 힘든 성격이야.’‘오승현이 끼어들어서 늘 내 일을 망쳐 놓는데, 나도 너같은 미친놈을 좋게만 볼 수 없지.’‘이 미친놈만 끼어들지 않았어도 내가 진작 유하를 우리 집안으로 끌어들였을 거야.’‘그랬다면 지금처럼 몇 번이나 비틀어 돌아가는 이런 복잡한 사제 얘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거야.’“내가 볼 땐 네가 그냥 빨리 포기하는 게 나아. 그래야 다들 좀 조용해지고, 유하도 더 많은 좋은 남자들을 만날 수 있지.”“꿈 깨.”승현은 식칼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설아의 두서없는 말을 차갑게 잘라 냈다. 승현의 시선이 설아를 훑듯 내려앉았다.“난 늘 한 가지가 이상했어. 나랑 누나 사이의 거래는 이미 끝난 지 오래됐는데, 누나는 왜 아직도 유하를 놓지 못하고 계속 나랑 유하 사이에 끼어들어서 일을 어지럽히는지. 이제야 알겠네.”승현은 가늘고 긴 여우 눈매를 천천히 치켜올렸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에는 뜻밖에도 옅은 웃음기가 감돌았고, 숨길 생각조차 없는 비웃음이 스며 있었다.“누나는 진짜 돌아가신 배 회장님의 딸이네. 아버지를 보고 배운 게 있다더니, 하는 짓이 아주 판박이야.”...주방 안에서 팽팽하게 맞선 두 사람과는 달랐다.재윤의 모습을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아이의 보드랍고 순한 목소리가 들리자 유하의 기분은 눈에 띄게 풀어졌다. 온몸의 긴장도 한결 가벼워졌다.유하는 한동안 재윤의 손을 잡은 채 이런저런 말을 많이 건넸다.몇 번이고 재윤의 뜻이 확실한지 확인한 뒤였다. 예상하던 대답이었음에도 유하는 길게 숨을 내쉰 뒤 조금 아쉬운 기색을 담아 말했다.“이렇게 정하는 건 아무래도 너무 소박하네. 내가 여기 일 마무리하면, 우리 로즈 가든으로 돌아가서 내 스승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정식 절차를 한 번 더 밟자.”유하의 스승은 당연히 소성란이었다.유하와 소성란은 본래 스승이자 벗 같은 사이였다. 유하가 첫 제자를 들이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 사실을 소성란에게 알리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고모할머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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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3화

그건 유하가 직접 선택한 길이었다.게다가 이제는 앞으로 재윤의 일에도 유하가 제대로 책임지고 나설 수 있게 됐다. 그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설아는 재윤의 엄마로서 재윤을 맡기기에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하니까.한번 통제를 놓치면 아이가 다칠 수도 있었다. 전에는 설아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다 보니 지나치게 간섭하기도 어려웠고, 쉽게 말을 얹기도 곤란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주방 안.그 한마디를 던지고도 설아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는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승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조리대 위에 손질해 둔 고기를 데쳐 냈다. 그러고는 갖가지 양념과 재료, 약재를 함께 뚝배기에 차곡차곡 담고, 물을 부은 뒤 불을 올려 약한 불에서 오래 끓이기 시작했다.그 일을 마치고 나서야 승현은 몸을 돌렸다. 손에 묻은 물기를 냅킨으로 닦아 내면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조리대에 기대선 채 무표정하게 서 있는 설아를 바라봤다. 그 입가가 서서히 올라갔다.“내 말... 틀린 거 아니지. 그 이유 말고는 누나가 왜 굳이 내 아내를 붙잡고 안 놓는지 모르겠거든.”“누나 동생 배남진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배남진은 설아보다 체면은 조금 더 챙기더라. 근데 새삼 대단하긴 하네. 배 회장님의 유전자가 진짜 강하긴 한가 봐.”“배 회장님께서도 예전에 체면도 없이 아무나 꼬시고 아무 침대나 올라가던 분이었는데, 배씨 집안 남매도 딱히 다를 게 없네. 아버지랑 선 긋겠다고 말은 해 놓고, 실제로는 남의 집안에까지 손을 뻗잖아. 그것도 하필 내 집안에.”“음... 누나랑 배남진, 진짜 아버지한테 잘 배운 자식들이네. 칭찬해 줘야겠어.”승현은 손에 들고 있던 냅킨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일부러 과장되게, 느리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아, 그러고 보니 누나 남편 바람난 것도 혹시 배씨 집안 가풍에 제대로 물든 결과였나? 대단하다, 진짜. 배씨 집안은 여러모로 대단해.”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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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4화

‘뭘 시켜 먹어도 되냐고 묻는 거야?’‘여길 무슨 식당쯤으로 아나?’ ‘나를 무슨 요리사로 보나? 내 성격이 그렇게까지 좋게 보였나?’눈앞에서 순하고 수줍고 해맑기만 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윤을 빤히 바라보던 승현은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애야. 아직 애잖아. 애야...’ 그렇게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고 나서야 승현은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뭐 먹고 싶은데?”어차피 재윤이 뭘 먹고 싶다고 하든, 나중에 메뉴 이름만 윤해월에게 넘기면 그만이었다. 승현이 직접 만들 생각은 없었다. 승현이 만드는 건 유하가 좋아하는 것, 유하가 먹고 싶어 하는 것뿐이었다.다른 사람은?먹든 말든 상관없었다.재윤은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얌전히 말했다.“승현 삼촌, 스승님이 드시는 걸로 저도 먹겠습니다.”‘이 애도 자기 엄마랑 똑같이 사람 성질 건드리네.’승현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주방을 나와 거실을 지나고, 현관문 가까이 다다랐을 때, 설아는 끝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 웃었다. 웃으면서 재윤의 어깨를 툭 치려 손을 뻗었다.“좋네, 좋아. 이제야 좀 사람 같다. 우리 아들이 역겹기만 한 건 아니었네. 이제 보니까 네가 여기 남아 있어도 큰 문제는 없겠다.”“계속 그렇게 해. 승현 삼촌이 열받아서 수명 깎이고 픽 쓰러지면, 그땐 엄마가 상 줄게.”재윤은 몸을 비틀어 설아의 손을 피했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차갑게 입을 열었다.“엄마, 방금 뭐 하시려던 거예요?”재윤은 위층에서 내려와 주방 문 앞에 한참 서 있었기에, 안에서 벌어진 그 한바탕을 빠짐없이 다 봤다. 설아 상태가 미묘하게 좋지 않다는 걸 눈치채지 않았더라면, 재윤도 그 타이밍에 끼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설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재윤이 다시 말했다.“무슨 일을 하든, 먼저 결과부터 생각하고 움직이실 수는 없어요?”설아의 웃음이 멎었다. 현관홀에 마주 선 두 사람 사이로 몇 초 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러고 나서 설아는 제 앞에 선 제 아이를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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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5화

“준서가 먼저 고르고 나면 제가 고를게요.”‘준서가 먼저 고른다?’‘그러면 재윤은 남은 쪽을 가져가겠다는 뜻이잖아.’설아는 속으로 좀 화냈다.그 두 아이가 저마다 뛰어난 장점이 있는, 충분히 키워 볼 만한 괜찮은 싹이라는 건 설아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아는 몹시 거슬렸다.설아는 늘 먼저 쥐고, 먼저 골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에게 양보해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낳아 놓은 자식은 어째 저렇게 물러터졌는지.설아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기분이 가라앉은 채로 말을 내뱉었다.“양보, 양보, 맨날 양보지. 재윤이 너, 진짜 준서가 그걸 고맙게 받아 줄 거라고 생각해? 설마 나중에 둘이 같은 사람 좋아하게 돼도 또 양보하려고?”“이야, 배재윤 너 진짜 통 크다. 내가 어쩌다 너 같은 걸 낳았을까? 좀 나아졌나 했더니, 여전히 물렁하기는...”“맨날 양보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재윤이 너랑 준서가 뭐, 형제처럼 하나를 서로 먼저 고르라고 양보해 줄 사이야?”설아의 말은 갈수록 거칠어졌고, 점점 선을 넘기 시작했다.재윤은 무표정한 채 그 말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설아의 말이 점점 더 엉뚱한 데로 치닫자, 재윤도 끝내 참지 못했다. 재윤은 문짝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가실 거예요, 안 가실 거예요?”설아는 차갑게 굳은 재윤의 얼굴을 한번 흘겨보더니, 혀를 차듯 ‘쯧’ 소리를 냈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밖으로 나가면서도 중얼거렸다.“내가 안 가면 여기 남아서 저녁이라도 먹고 갈 줄 알아? 저 승현 삼촌이 네 음식에 독이라도 타 놓으면 어쩌려고.”설아가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재윤은 곧바로 한마디를 덧붙였다.“스승님께서 부탁하신 일, 잊지 마세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쾅!그대로 문을 닫아버렸다.몇 초 뒤, 현관 홀에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재윤은 길게 숨을 내쉰 뒤 몸을 돌려 위층으로 향했다....재윤의 모습이 막 계단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직후였다. 1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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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6화

승현은 더 이상 유하의 유일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준서 역시 더는 유하의 유일한 아이로만 남지 못했다.소성란을 제외하면, 유하의 곁에, 유하의 삶 안에 다시 하나의 중요한 존재가 들어온 셈이었다. 그것도 유하가 스스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허락하고, 늘 닫아 두기만 하던 세계의 문을 직접 열어 맞이한 사람이었다.그 의미는 전혀 같지 않았다.승현은 몸을 약간 숙였다. 마디가 뚜렷하고 보기 좋게 큰 손이 조리대 위를 짚었다. 짙은 검은색 몸에 붙는 니트 소매는 걷혀 있었고, 드러난 아래팔에는 단단히 긴장한 근육이 도드라졌다. 핏줄도 옅게 불거져 있었다. 가슴은 천천히, 그러나 무겁게 들썩였고 호흡은 점점 가빠졌다.‘계속 참아야 하나?’이미 양보할 만큼 양보했고, 맞출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유하에게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는 걸까?지금 당장 참고 있던 걸 놓아 버리면, 유하를 집 안에 가둬 두고 재윤과 떼어 놓는 일쯤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해 버리면, 그다음은?그 뒤에 따라올 결과를 승현이 감당할 수 있을까?유하가 승현을 더 미워하게 만들고, 더 역겨워하게 할 생각인가?승현이 바라는 게 정말 그런 것이었나?승현은 눈앞에서 뿌옇게 김이 오르는 뚝배기를 바라봤다. 공기에는 고기 냄새와 약재 향이 짙고 풍부하게 섞여 퍼져 있었지만, 승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전혀 다른 장면이었다.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눈을 감고 수술실에 누워 있던 유하.배는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고,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던 모습.묘비 앞에서 아무 표정도 없이 서 있다가,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유하.숨결마저 죽어 버린 사람처럼 가라앉아 있던 유하.그 뒤로 이어졌던 분노, 무너짐, 따져 묻는 목소리, 두려움, 공포, 겁, 통제하지 못할 만큼 흔들리던 감정까지.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 마침내 한 얼굴 위에서 멈췄다.열아홉 살의 유하였다.새하얀 옷을 입고 눈발 속에 서 있었다. 머리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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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7화

이래저래 한바탕 뒤엉키고 나서야 결국 저녁 시간이 됐다.아마도 이건 유하가 그린힐에서 먹은 저녁 가운데 가장 묘하고도 부산스러운 식사였을 것이다.유하는 보지 못했지만.식사 시간이 되자 윤해월은 잠시 시력을 잃은 유하를 부축해 아래층 식탁으로 데려왔다. 그러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승현이 곧바로 유하를 넘겨받아, 긴 식탁 한쪽 자리에 앉혔다.“스승님.”재윤이 다가왔다. 재윤은 승현이 보내는 경고 섞인 시선을 못 본 척한 채, 유하의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재윤이 왔네.”유하는 웃으며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손을 더듬어 뻗었다. 그러자 보드랍고 서늘한 작은 손이 유하의 손을 잡았다.승현은 그 모습을 눈앞에서 빤히 지켜보며, 당장이라도 그 작은 손을 떼어 내고 싶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간신히 참아 냈다.“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 옷을 얇게 입었어? 아니면 어디 아픈 거야?”재윤의 차가운 손이 닿자, 원래부터 몸이 약한 데다 큰 병까지 앓고 난 아이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유하의 마음이 금세 조여 들었다.“아까 밖에 나가서 놀다가 장갑 끼는 걸 깜빡했습니다. 스승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밥 먹고 나면 금방 따뜻해질 겁니다.”아픈 게 아니라면 다행이었다.유하는 작게 숨을 돌리면서도 안심이 되지 않아 다시 당부했다.“밖은 추우니까 다음에 또 나갈 땐 꼭 따뜻하게 챙겨 입어. 답답하다고 귀찮아하지 말고.”“알겠습니다, 스승님.”재윤이 얌전히 대답했다.“알았어. 다음에 재윤이 또 나갈 일 있으면 내가 옆에서 챙겨서 더 입히면 되잖아. 일단 밥부터 먹어. 이러다 음식 식겠다.”옆에 있던 승현이 끝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러더니 유하와 재윤이 맞잡고 있던 손을 떼어 내고, 유하를 자기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내가 한 음식 먹고 싶다며. 내가 먹여 줄게.”승현이 한 음식?유하는 조금 뜻밖이라는 듯 멈칫했다. 그제야 전에 자기가 승현이 만든 밥을 먹고 싶다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물론 그때는 그저 승현을 골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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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8화

그런데 승현의 손이 유하의 입가에 닿기도 전에, 유하가 힘주어 밀어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승현도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비틀거리며 식탁에 부딪쳤고, 다행히 재빨리 탁자를 짚어 바닥에까지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컵과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져 요란하게 깨졌다.몸에 붙는 검은색 니트 자락에 국물이 튀었다.승현의 낯빛은 이미 먹구름처럼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한동안 식탁은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식탁에 앉아 있던 아이들 역시 놀라 굳어 버린 채, 감히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자기가 반사적으로 한 번 밀어낸 일이 이렇게까지 크게 번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유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이모님?”“예, 여기 있어요.”곁에서 대기하던 윤해월이 황급히 대답했다.“아이들 데리고 다른 데로 가서 밥 먹게 해 주세요.”“예, 알겠어요.”윤해월은 얼른 세 아이를 불러 별채 다이닝 룸 쪽으로 이끌었다. 재윤은 걱정스러운 듯 유하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괜찮아. 밥 많이 먹어. 한창 클 때잖아.”유하는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아이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 식당 안에는 유하와 승현만 남았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공기만 점점 더 무겁게 가라앉았다.그렇게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의 유하가, 마치 농담이라도 던지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네가 날 때릴 줄 알았어. 내가 좀 과하게 반응했네. 미안.”승현의 낯빛이 더 심하게 굳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넌 내가 진짜 그렇게 보였어?”“오승현, 오해하지 마.”유하는 빛도 초점도 없는 눈을 뜬 채, 승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번졌다.“어쩌면 내가 내 식으로 넘겨짚은 걸 수도 있지. 너랑 알고 지낸 지난 9년 동안, 네가 나를 곤란하게 만들 때마다 나는 늘 한 번쯤 너를 때려주고 싶었거든. 다만 무서워서 못 했고, 해 봤자 내가 못 이길 거라서 못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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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9화

‘역시...’승현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유하에게 조금도 뜻밖의 일이 아니었다. 유하는 승현의 품에 안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 이제 연기 못 하겠어?”그럴 줄 알았다. 승현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참을성 있게 굴 수 있겠는가? 또 어떻게 그렇게 순순히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유하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다 하는 척하면서.하지만...“이 정도도 못 버티겠으면, 너 진짜... 아!”유하가 비웃듯 말을 잇기도 전에, 허리를 감싼 팔에 갑자기 힘이 들어갔다. 다음 순간 몸이 가볍게 들리며 두 발이 바닥에서 떨어졌다. 유하는 놀라 짧게 소리를 냈다.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승현의 무릎 위였다.승현은 의자에 앉은 채, 품에 안은 유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유하의 등이 승현의 가슴에 맞닿도록 바짝 붙인 자세였다.승현의 턱이 유하의 머리 위에 가볍게 닿았다. 들고 나는 숨결이 유하의 체취와 뒤섞였다. 너무도 익숙한 재스민 향이었다.9년 동안 함께 살며 아침저녁으로, 낮과 밤으로 맡아 온 향이었다. 이미 뼛속 깊이 스며들어 도저히 떼어 낼 수 없는 것이었다.익숙한 향이 코끝을 스치자 승현 안에서 들끓던 슬픔과 분노가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미간에 깊게 팬 주름도 서서히 풀렸다.“내가 뭘 연기했는데?”승현이 조용히 물었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다정함이 진득하게 밴 것처럼 들렸다.유하는 잠깐 굳었다.눈이 보이지 않게 된 뒤부터 유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를 전부 승현의 가장 아픈 곳에 찔러 넣듯 던져 왔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승현이 보일 수많은 반응을 수도 없이 떠올려 봤다. 분노할까? 미쳐 날뛸까? 이성을 잃고 폭발할까? 아니면 무너져 내릴까?그런데 유하가 끝내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하나 있었다.다정함.‘다정해?’유하는 거의 웃음이 터질 뻔했다. 속이 비틀릴 만큼 비웃음이 치밀었다.‘그래, 내가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지난 결혼 생활 내내 유하를 속이고 기만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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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0화

시력을 빼앗기고 나면, 남은 다른 감각은 더 예민해진다.저녁 식사가 끝나고 이층 침실로 돌아와 쉬고 나서도, 유하는 여전히 목덜미 아래 눈물에 젖었던 자리가 타들어 가듯 따가웠다.유하는 승현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예전의 유하에게는 놀라움보다 두려움이 훨씬 컸다. 그때 유하는 승현의 눈물을, 먹잇감을 물어뜯기 전에 흘리는 짐승의 가짜 자비쯤으로 여겼을 뿐이었다.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눈으로 볼 수 없게 되자 피부에 닿는 감각이 훨씬 선명해졌다. 유하는 그제야 처음 알았다. 눈물이라는 게 이렇게 온기를 품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마치 끓는 물방울이 떨어지듯, 사람을 그대로 화상 입힐 만큼 뜨겁다는 걸.유하는 그 감각이 싫었다.방으로 돌아온 뒤에도 유하는 손가락으로 계속 눈물에 젖었던 자리를 문질렀다. 살갗이 벗겨질 정도가 되어도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았다.약을 들고 올라온 윤해월은 문을 열자마자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사... 유하 씨!”윤해월은 허둥지둥 쟁반을 내려놓고 달려와 유하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벌겋게 올라온 목 언저리를 조심스레 살피다가, 정작 윤해월 자기 눈부터 먼저 붉어졌다.“유하 씨, 이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윤해월은 약상자를 찾아와 눈가를 붉힌 채 유하의 상처 부위에 약을 발랐다. 유하는 윤해월이 손대는 대로 가만히 있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 없었다.약을 다 바른 뒤에야 윤해월은 쟁반 위의 약그릇을 유하에게 건넸다.“눈 다친 데 드시는 약이에요. 끓인 지 얼마 안 돼서 지금은 좀 식혀 놨어요. 혹시 대표님이 쓰다고 느끼실까 봐 사탕도 같이 가져오라고 하셨어요.”윤해월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에 싸 둔 사탕을 유하 손안에 쥐여 주려 했다.하지만 유하는 잡지 않았다.사탕은 손가락 사이로 그대로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윤해월은 멈칫했다.“이모님.”유하가 웃으며 말했다.“저 지금은 사탕 안 먹고 싶어요. 정과 같은 거 좀 가져다주세요. 딸기 밀크레이프도 먹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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