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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나를 버린 그들에게: Chapter 121 - Chapter 130

168 Chapters

제121화

서지원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아무한테도 안 줬어.”‘성규연은 원래 이런 물건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 않았나? 그런데 왜 갑자기 가방을 묻는 거지?’“그래?”성규연은 차갑게 코웃음 친 뒤 강아연의 가방에서 꺼낸 손수건을 그의 얼굴에 던졌다.별것 아닌 동작처럼 보였지만 힘은 가볍지 않았다. 마치 서지원의 뺨을 한 대 후려친 것 같았다.“뭐 하는 거야?”서지원은 이유도 없이 화를 내는 성규연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던진 손수건이 자신이 강아연에게 줬던 것임을 알아보는 순간 멈칫했다.순간 분위기가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서지원은 숨을 한번 내쉬고 더 숨길 생각 없이 솔직히 말했다.“그래, 내가 강아연 씨한테 가방을 줬어. 전에 내가 실수로 그 여자 가방을 눌러서 망가뜨렸거든. 그냥 새 걸로 물어 주려던 것뿐이야...”“서씨 가문 도련님은 참 통도 크네. 한 번 물어 주는 가방이 억대로부터 시작하고.”성규연이 차갑게 웃었다.“그 여자는 그걸 또 덥석 받았고. 자기가 그럴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하나?”“규연아, 그딴 식으로 비꼬지 마!”서지원이 미간을 찌푸렸다.“강아연 씨는 어쨌든 네 아내잖아. 좀 비싼 가방 하나 받는 것도 안 돼?”“지금 그 여자 편드는 거야?”질문 형식이었지만 어조는 단정에 가까웠다. 성규연은 음울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서지원, 예전에 네가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잊었어?”특히 ‘뭐라고 했는지’라는 말에는 이를 갈듯 힘이 들어갔다.예전에 서지원은 성규연과 강아연이 정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강아연은 성규연에게 아무 도움도 될 수 없는 여자라며 하루빨리 이혼하라고까지 권했다.“그런데 지금은 또 무슨 뜻이지?”성규연의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을 마주하자, 늘 떳떳함을 자부하던 서지원의 눈에 뜻밖에도 죄책감이 스쳤다.맞았다. 예전에 그는 줄곧 강아연을 깎아내리고 심소연을 치켜세웠다. 심지어 성규연에게 빨리 강아연을 버리라고 부추겼다.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자신이 강아연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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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생각해 보면 내 잘못도 있지.”봉연우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내가 지원이를 너무 놀렸어. 가방 하나 산 걸 보고 무조건 마음 있는 여자한테 주려는 줄 알았으니까. 사실 친구나 형수한테 줄 수도 있는 거잖아. 별 의미 없는 선물일 수도 있고. 그렇지?”그는 말하면서 서지원을 바라봤다.서지원도 봉연우의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성규연 앞에서 자신과 강아연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고 선을 그어 쓸데없는 오해를 막으라는 뜻이었다.두 사람 모두 강아연이 이미 서지원의 수표를 받았고 이혼까지 마음먹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아연과 성규연의 결혼은 사실상 끝까지 와 있었다.그렇지만 그 사실을 성규연에게 굳이 말하지 않았다. 성규연 성격상 강아연에게 그렇게 마음을 쓸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혼하면 이혼하는 거고, 그 사소한 일 때문에 친구 사이까지 틀어질 필요는 없었다.“맞아.”서지원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난 그냥 변상하려던 것뿐이야. 다른 마음은 없어. 알잖아, 난 남한테 약점 잡히는 거 싫어해. 특히 강씨 집안 사람한테는 더 그렇고.”그 말은 성규연에게 하는 설명인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말이기도 했다.‘강아연에게 느낀 감정은 순간적인 동정일 뿐, 절대로 이성적인 호감일 리 없어. 강아연은 강명우의 딸이야. 오히려 아버지 빚을 딸에게라도 받아 내고 싶을 정도인데 그런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어. 그래, 분명 그런 거야.’몇 번이고 스스로 암시하고 나자 서지원의 눈빛은 한층 확고해졌다.성규연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얇은 입술만 일자로 굳게 다물었다.“자, 이렇게 말이 정리됐으면 별일도 아니네.”봉연우가 적당히 마무리했다.“다들 일찍 들어가 쉬어. 내일이 무슨 날인지 잊은 건 아니지?”그 말을 듣자 성규연이 잠시 멈췄고, 서지원도 눈을 내리깔았다.내일...“내일이 아주머니 수술하는 날이잖아요. 아주머니, 긴장돼요?”영상통화 화면 속 정도희가 웃으며 물었다.“난 하나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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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그 약제가 없으면 환자분의 현재 수치가 수술에 가장 적합한 상태까지 올라오지 않아요. 이대로는 수술을 진행할 수 없어요.”“뭐, 뭐라고요?”강아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하지만 그 약값은 이미 제가 결제했어요. 제 걸로 예약된 거 아니었어요?”“원칙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의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그 약제를 요구한 사람이 이 병원 최대 투자자라고 해요. 저희가 거스를 수 없는 분이라서...”‘병원의 최대 투자자...’강아연은 굳었다.경성시 병원의 최대 투자자는 미래 그룹이었다.‘미래 그룹. 그리고 성규연...’강아연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전화를 들고 곧장 성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차갑기만 한 전원 꺼짐 안내음만 들려왔다.강아연의 심장이 더 깊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즉시 진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모님? 무슨 일이세요?”수화기 너머 진 비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강아연은 구명줄이라도 잡은 듯 다급히 물었다.“규연 씨는요? 지금 어디 있어요?”“그게...”진 비서의 목소리에는 난처함이 묻어났다.“저도 모르겠습니다. 대표님 휴대전화가 꺼져 있어서 저도 연락이 닿지 않아요.”진 비서조차 성규연과 연락할 수 없었다.강아연은 심장이 반쯤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갑자기 의사의 소매를 붙잡았다.“선생님, 정말 병원에 그 약이 딱 하나밖에 없어요?”“네.”의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게다가... 몸 상태를 끌어올리는 마지막 약제도 어제 오전에 이미 어머님께 투여했어요. 병원 창고에는 더 남아 있지 않아요.”강아연은 멍해졌다.이 약은 일단 투여를 시작하면 수술 전까지 중간에 끊어서는 안 됐다. 그렇지 않으면...“큰일 났어요!”간호사가 수술실에서 급히 뛰어나왔다.“환자분의 활력징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강아연은 마음 한가운데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해 몸이 휘청하며 거의 쓰러질 뻔했다.의사는 곧바로 수술실로 돌아가 주정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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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심소연이 성규연을 물에서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었나? 그러니 성규연이 그렇게까지 사랑한 거구나. 하지만 분명...’강아연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강아연?”바로 그때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강아연이 고개를 들자 휠체어에 앉은 심소연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간호사들은 심소연이 나타나자 금세 뿔뿔이 흩어졌다.강아연이 심소연을 바라보며 입을 열려 했지만, 심소연이 먼저 말을 잘랐다.“안에 들어가서 얘기해요.”강아연은 어쩔 수 없이 심소연을 따라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의사가 상자 하나를 꺼내 열어 심소연에게 보여 줬다.“심소연 씨, 성 대표님께서 준비해 주신 약제입니다. 병원에 남은 마지막 한 개입니다.”“들었죠?”심소연은 강아연을 흘끗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이건 규연이가 특별히 저한테 준 거예요. 사실 제 재활에는 이렇게 좋은 약까지 필요 없는데, 제가 말만 하면 규연이는 바로 가져다주거든요.”그 말투에는 승리자의 우쭐함이 가득했다. 20억짜리 약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마디만 하면 성규연이 곧바로 가져다준다는 걸 강아연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강아연은 심소연의 도발에 휘말리지 않으려 애쓰며 숨을 한번 내쉬고는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심소연 씨, 어차피 이렇게 좋은 약까지 필요 없다고 했으니, 그 약을 저한테 양보해 주면 안 될까요?”사실 이 약은 애초부터 강아연이 돈을 내고 예약한 것이었다. 빼앗긴 사람이 도리어 빼앗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고 부탁해야 하는 꼴이었다.강아연은 끝없는 서글픔을 느꼈지만 방법이 없었다. 심소연에게는 성규연의 편애와 서영란의 비호가 있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만 뻗으면 가질 수 있었다. 반면 강아연에게는 지금 이 약 한 개가 절실했다.“아연 씨도 이 약이 갖고 싶어요?”심소연은 웃으며 일부러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그런데 아연 씨 태도를 보니까 그렇게 급해 보이지는 않는데요?”“어떤 태도를 원하시는 건데요?”강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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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심소연의 오만한 눈빛과 마주한 강아연의 두 다리는 바닥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어 핏물이 배어 나왔다.밖에 있던 사람들은 그 말을 듣자 하나같이 고개를 빼고 안을 들여다봤다.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한 표정이었다.“왜요? 싫어요?”심소연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했다.“싫으면 그만둬요. 나도 남에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대신 이 약은 꿈도 꾸지 말아요!”심소연은 탁 소리가 나게 상자를 닫아 의사에게 밀어줬다.“저 지금 바로 이 약 맞을게요.”“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의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상자를 든 채 심소연에게 약을 투여할 간호사를 부르러 나가려 했다.의사가 문밖으로 나서는 순간, 강아연이 다급하게 외쳤다.“잠깐만요!”하지만 의사는 강아연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약이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아 보이자 강아연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소리쳤다.“무릎 꿇을게요!”“잠깐.”심소연이 느긋하게 입을 열자 의사가 곧바로 멈춰 섰다.심소연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이 움직였다. 그 순간부터 강아연은 완전히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심소연은 그 기분을 한껏 즐겼다. 그녀의 입가에 뜻을 이뤘다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그럼 꿇어 봐요. 강아연 씨.”강아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꽉 쥔 손바닥은 이미 아픈 감각조차 사라진 상태이었다. 가슴은 은근히 쥐어짜듯 아팠고, 마치 수술대 위에서 활력 징후가 급격히 떨어지는 주정애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다.심소연이 일부러 자신을 모욕하려는 걸 뻔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아무 쓸모도 없는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엄마의 목숨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결국 강아연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심소연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말했다.“심소연 씨, 부탁할게요. 그 약 나한테 줘요.”사람들의 얼굴에는 처음의 흥미 대신 어느 정도 동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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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강아연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아팠고 특히 아랫배에서 다시 통증이 몰려왔다. 하지만 지금 뼛속까지 사무친 원망에 비하면 그 정도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녀는 심소연을 죽일 듯 노려봤다. 눈은 새빨갛게 충혈되어 금방이라도 피눈물 두 줄기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지옥 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사람처럼 섬뜩했다.심소연은 그 표정에 잠깐 압도됐지만 금세 평정을 되찾고 코웃음 쳤다.“그런 얼굴로 날 잡아먹을 듯 봐도 아무 소용 없어.”그녀는 바닥을 힘겹게 짚고 있는 강아연의 손을 내려다봤다. 눈에 잔인한 빛이 스치더니 발을 들어 그대로 손등을 밟았다.“아...”강아연은 미간을 깊게 구긴 채 얼굴이 종이처럼 하얗게 질렸다.심소연은 오히려 더 세게 짓밟았다. 일부러 발을 비틀어 문지르기까지 했다. 손등의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배어 나와 바닥의 먼지와 피범벅이 된 살점이 뒤엉킬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강아연은 온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심소연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로도 강아연에게 준 타격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몸을 숙여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솔직히 말해 줄까? 규연이는 네가 이 약을 네 엄마 수술에 쓰려고 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그래도 나한테 줬어. 왜냐하면 그 사람 눈에는 네 목숨도 목숨 취급을 못 받거든. 네 엄마 목숨은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고...”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료실 안에서 ‘쨍그랑’ 거친 소리가 터졌다.사람들이 깜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돌아봤다. 강아연이 책상 위 유리 꽃병을 바닥에 내리쳐 깨뜨린 것이었다. 심소연이 놀란 순간 강아연은 바닥의 유리 조각을 집어 들었다. 한 손으로 심소연의 어깨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날카로운 조각을 꽉 쥔 채 그대로 그녀의 목에 갖다 댔다.“세상에...”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가냘프고 약해 보이던 강아연이 이런 일을 저지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목 피부가 베이는 따끔한 통증을 느낀 심소연은 순식간에 겁에 질렸다.“너, 너 뭐 하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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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피가 묻은 유리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본 사람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마시며 비명을 질렀다.심소연은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강아연도 심소연에게 거칠게 깔린 충격 때문에 아랫배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아...”강아연은 배를 감싸 쥐었다. 고통이 너무 심해 거의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게다가 몸 아래로 무언가 따뜻한 것이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다.옆에 있던 경호원들은 심소연이 잡으라고 한 사람이 강아연이라는 걸 확인하자 멈칫하며 서로 얼굴만 바라봤다.강아연이 성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사실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하지만 성규연이 떠난 뒤 성씨 가문 어르신이 자신들에게 심소연의 재진을 호위하라고 지시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뭘 멍하니 있어?”심소연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뒤 강아연을 가리키며 악을 썼다.“빨리 저 여자 잡으라고!”그런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굴 한쪽이 화끈거리며 아팠다.“윽...”심소연은 굳었다. 밖의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걸 느끼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만졌고, 손바닥에 피가 가득 묻어 나오는 순간, 진료실에 심소연의 무너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아아악! 내 얼굴! 내 얼굴!”심소연은 강아연이 긁어 놓은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두 눈은 튀어나올 듯 커졌고 목소리는 미친 듯 떨렸다.“나, 나... 얼굴이 망가졌어...”극심한 공포가 한순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심소연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눈을 뒤집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강아연 역시 극심한 복통을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진료실은 더 큰 혼란에 빠졌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서둘러 강아연과 심소연을 각각 다른 진료과로 옮겼다....연성, 공동묘지.가느다란 비가 끊임없이 내렸다. 묘지 전체에는 잿빛 안개가 내려앉아 원래도 쓸쓸한 풍경을 더욱 서글프게 만들었다.성규연은 검은 정장을 입고 오른손으로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왼손에는 꽃다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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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특히 성규연은 당시의 온화하고 점잖은 청년에서 이제는 결단이 빠르고 냉정한 미래 그룹의 대표로 변해 있었다.모든 것이 변했다. 사람도, 세상도 더는 예전 같지 않았다.“미안하다. 원래 강명우도 너희한테 보내 줬어야 했는데!”서지원은 묘비의 사진을 어루만지며 원망스럽게 말했다.“강명우가 죽어도 떨어질 곳은 지옥 밑바닥이야. 저 애들이랑 만날 자격 따위 없어.”성규연이 차갑게 말했다.“그래도 난 못 받아들여! 강명우는 애초에 저 셋 목숨값을 치러야 했어!”서지원은 새빨개진 눈으로 성규연을 바라봤다.그는 지금까지도 성규연이 당시 강명우를 살려 둔 결정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성규연처럼 냉정한 사람이 정말 강아연의 애원 하나 때문에 강명우를 살려 줬다는 말을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게다가 강명우에게 형이 확정되기 전 성규연이 그와 한 번 따로 만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규연아, 우리한테 숨기는 거 있어?”서지원이 따져 물었다.성규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두운 눈빛이 찰나 더 짙어졌고 옆으로 늘어뜨린 손이 서서히 주먹으로 굳었다.“됐어. 오늘 어렵게 다 모였는데 5년이나 지난 일로 또 이러지 말자.”봉연우가 두 사람의 팽팽한 분위기를 끊고 서지원을 바라봤다.“너도 그래. 규연이가 너보다 덜 괴로운 것도 아닌 거 뻔히 알면서 굳이 상처에 소금을 뿌려야겠어?”“나도...”서지원은 입을 열었다가 자신이 지나쳤다는 걸 인정하고는 결국 의심과 원망을 삼키고 딱딱하게 말했다.“미안해. 내가 좀 흥분했어.”성규연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술 한 잔을 건넸다.세 사람은 묘비 앞에서 술잔을 기울여 땅에 술을 부었다. 세상을 떠난 절친들을 위한 제사였다.연성의 빗줄기는 갈수록 거세져 모든 것을 씻어 내리듯 쏟아졌다.공동묘지 밖에 차 한 대가 멈췄다. 키 크고 늘씬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잘생긴 얼굴에는 부드럽고 지적인 분위기가 배어 있었다. 그는 우산을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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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병실 밖에는 구경하러 몰려든 사람들이 가득했다. 사정을 모르는 몇몇이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기 시작했다.“그것도 몰라요? 아까 정형외과 진료실에서 여자 둘이 붙어서 싸웠어요. 얼마나 심하게 싸웠는지 피까지 났다니까요!”“게다가 다친 사람이 미래 그룹 성 대표님의 여자친구래요. 성씨 가문 어르신도 직접 병원에 와서 병원 전문가들을 긴급 소집해 치료하고 있다더라고요.”“그렇게 심해요? 그럼 사람 다치게 한쪽은 완전히 끝났겠네요?”“그러게 말이에요. 경찰까지 왔으니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걸요.”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당시의 일을 떠들었다.“약 하나 때문에 남은 인생을 망쳐요? 너무 충동적인 거 아니에요?”“무슨 약이래요? 난 남자 하나 두고 싸웠다고 들었는데요? 아까 둘이 싸우면서 한 말 못 들었어요? 약 싸움이 아니라 남자 싸움이었잖아요!”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이야기는 점점 사실에서 멀어졌다.“그리고 사람 다치게 한 여자가 내연녀라면서요? 남의 남자 빼앗아 놓고 본처까지 다치게 했대요!”“네? 그 여자가 내연녀였어요? 난 생긴 것만 보고 그쪽이 본처인 줄 알았는데.”“말도 안 되죠. 요즘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어도 내연녀가 본처보다 저렇게 당당하겠어요? 게다가 성씨 가문 어르신이 직접 병원까지 왔다잖아요. 누가 본처고 누가 내연녀인지 뻔하죠. 저 여자는 분명 성 대표님한테 끈질기게 달라붙는 내연녀일 거예요. 본처한테 한 번 제대로 당하더니 오히려 본처를 공격했다가 이젠 큰일 난 거죠...”사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며 수군거렸다. 강아연이 경찰 두 명에게 이끌려 병실 밖으로 나오자 하나같이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다.“경찰관님, 저 아까 진료실에서 일어난 일 다 직접 봤어요. 저 여자 하는 짓이 정말 악질이었어요. 절대 봐주면 안 돼요!”누군가 의분에 찬 듯 말하자 당시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마저 너도나도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절대 풀어 주지 마세요!”“저렇게 뻔뻔한 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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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유리창에 맺힌 가느다란 물줄기들이 차츰 한데 모여 굵은 흐름이 되어 내려왔고, 끝내 시야를 가리는 거대한 빗장막으로 변했다.성규연은 창밖으로 갈수록 거세지는 비를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음 한쪽이 갑자기 텅 빈 듯한 이상한 느낌이 올라왔다.“규연아? 뭘 그렇게 정신 놓고 봐?”봉연우가 휠체어를 움직여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그제야 성규연이 정신을 차렸다. 평온한 목소리였다.“아무것도 아니야.”“그럼 빨리 와서 술이나 마셔!”서지원이 손짓하며 이미 자리에 앉은 박경준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로마네콩티 괜찮죠?”“전 다 괜찮습니다.”박경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 끝으로 성규연을 흘끗 보더니 입을 열었다.“그러고 보니 성 대표님께서 최근 연성에서 새 프로젝트를 개발하실 예정이라고 들었어요. 저희 박하 그룹과 협력하실 생각은 없으세요?”성규연의 눈에 뭔가 깨달은 듯한 빛이 스쳤다.역시 오늘 묘지에서 만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박경준은 미리 시간을 계산해 그들과 일부러 마주친 것이었다. 목적도 이제 명확했다.다만 박경준은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곧장 협력 이야기를 꺼냈다. 겉으로는 웃으며 속으로 다른 계산을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솔직했다. 자신의 야심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성규연은 그 점만큼은 꽤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박 대표님께서 직접 제안하셨으니 검토해 보겠습니다.”“그럼 미리 좋은 협력을 기대하겠습니다.”박경준도 잔을 들어 그와 부딪친 뒤 단숨에 비웠다.“박 대표님, 시원시원하시네요!”서지원은 자신처럼 술을 단숨에 마시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났다며 몇 번이고 박경준에게 더 마시자고 권했다.그렇게 대략 2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박경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전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벌써요? 조금 더 마시죠?”서지원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오늘 비가 와서 데리러 가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늦으면 놓칠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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