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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Chapters

제221화

“말도 마. 다 박경준 그 개자식 때문이야!”정도희가 짜증스럽게 욕설을 내뱉었다.“걔 엄마가 결혼하라잖아. 난 이참에 깨끗하게 끝내려고 했는데, 죽어도 싫대! 그것도 모자라 내 새 작품까지 엎어 버렸어. 진짜 개자식이라니까!”강아연은 잠시 멈칫했다.박경준은 전에 병원에 정도희와 함께 왔던 남자였다.그때 정도희를 감싸던 모습을 보고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빨리 결혼할 줄은 몰랐다.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었다. 연성의 박씨 가문은 경성의 성씨 가문처럼 한창 세력이 강한 명문가였다. 집안끼리 급을 맞춰 혼인으로 기반을 다지는 건 흔한 일이었다.그래도 강아연이 신경 쓰이는 건 정도희의 마음뿐이었다.‘도희는 괜찮을까?’정도희도 강아연의 걱정을 느낀 듯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걱정하지 마. 아연아, 내가 누구야? 연예계 톱스타 정도희야. 얼굴 되지, 몸매 되지, 나 좋다는 남자는 여기서 프랑스까지 줄을 설걸? 나한테 남자는 그냥 책 한 권이야. 침대 머리맡 책장에 책이 한가득한데, 마음에 안 들면 버리면 그만이지. 굳이 자리 차지하게 둘 필요 없어.”시원시원하고 거침없는 말투였다. 강아연은 그런 정도희가 부러웠다.강아연에게는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생각이 많고 내성적이었던 강아연은 정도희를 처음 본 순간부터 작은 태양처럼 밝은 성격에 끌렸다.강아연도 정도희처럼 미련 없이 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6년 전 그 일 이후, 한 번 잘못 내디딘 발걸음이 계속 잘못된 길로 이어졌다.소중한 게 너무 많았고, 그만큼 약점도 많아졌다. 성규연은 그 약점들을 모조리 움켜쥐고 있었다. 그래서 강아연은 번번이 발목을 잡혀 빠져나갈 수 없었다.눈을 내리깐 강아연은 표정이 어두워졌다.정도희와 몇 마디 더 나눈 뒤, 정도희가 일이 있다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강아연은 화면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불을 끄고 잘 생각이었다.그런데 다음 순간, 방문이 열리더니 금테 안경을 쓴 성규연이 들어왔다. 이제 막 일을 끝낸 모양이었다.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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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화

성규연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다음 날 이른 아침, 성규연은 묘한 꿈에서 깨어났다.꿈속에서 강아연은 피곤하지 않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다리 옆에 앉아 책을 펼쳐 들고 말했다.“규연 씨는 일해요. 전 옆에 있어 줄게요.”성규연은 리클라이너에 앉아 자료를 보고 있었다. 손을 늘어뜨리면 손끝이 딱 강아연의 얼굴에 닿았다.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희고 매끈한 얼굴이었다. 얼굴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살짝 벌어진 옷깃 아래로 드러난 풍만한 곡선도 눈에 들어왔다.그리고 예상대로, 성규연은 전혀 참지 못했다. 아니, 참을 생각조차 없었다. 손끝이 강아연의 뺨을 스치고 아래로 내려가 옷깃 안으로 파고들자 매끄럽고 부드러운 피부가 손끝에 닿았다...성규연이 천천히 눈을 떴다. 눈빛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무심코 옆자리를 더듬던 그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몸이 손에 닿자 강아연을 품으로 끌어당겼다.잠결의 강아연은 따뜻한 체온이 닿자 몸을 돌려 무의식적으로 그쪽에 몸을 비볐다.성규연의 몸이 순간 굳었다. 강아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홀린 듯 손을 뻗어 뺨을 쓸었다. 마치 자기 소유의 귀한 물건을 어루만지듯 손길이 부드러웠다.강아연이 늘 이렇게 얌전하고 순한 고양이처럼 자기 곁에만 있어 준다면, 조금 전 꿈처럼 살아도 꽤 괜찮을 것 같았다.성규연에게는 다른 생각이 많은 아내가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하는 아내면 됐다. 그것뿐이었다.그러다 흩어졌던 정신이 돌아왔을 때, 성규연은 강아연이 언제 깼는지 모르게 맑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이른 아침의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서늘한 눈빛이었다.강아연의 뺨을 쓸던 성규연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거뒀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지만,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공기가 순간 굳어 버린 듯했다.잠시 뒤 강아연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대에서 일어났다.“어디 가?”성규연이 물었다.강아연은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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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3화

큰 체격의 성규연이 강아연을 완전히 가렸다.성규연은 앞에 선 강아연을 내려다봤다. 분명 노출 하나 없는 잠옷인데도 이상하게 욕망이 쉽게 끓어올랐다.성규연은 손을 뻗어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넓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감쌌다. 뼈가 도드라질 만큼 가늘어진 감촉에 손이 잠시 멈췄다.‘살이 빠졌네...’연성에 있을 때 겨우 붙었던 살이 경성으로 돌아오고 성씨 가문에 들어온 뒤 다시 빠진 듯했다.성규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도 깨닫지 못한 안쓰러움이 눈빛에 스쳤다.강아연이 그의 손을 눌러 막으며 담담하게 말했다.“지금 안 나가면 늦어요. 프리스 씨는 지각하는 사업 파트너를 싫어해요.”“남에 대해서는 참 잘도 아네.”성규연이 차갑게 비웃었다. 말끝에 희미한 질투가 묻어 있었다.“진 비서가 준 조사 자료를 외워 둔 것뿐이에요.”강아연이 다려 놓은 옷을 건넸다.“갈아입어요.”성규연은 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강아연 앞에서 그대로 잠옷을 벗었다.평소 꾸준히 운동하는 만큼 몸은 늘 좋았다.키가 크고 몸이 다부졌지만 과하게 근육질은 아니었다. 넓은 등, 군살 없는 허리,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까지 어느 한 곳 느슨한 데가 없었다. 강렬한 남성미가 온몸에서 풍겼고, 평소 그에게서 나는 차갑고 절제된 시더우드 향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강아연은 고개를 돌려 보지 않았다.성규연은 강아연의 귓불이 옅게 붉어지는 걸 보고 입꼬리를 당겼다.“오래 산 부부 사이인데 뭘 부끄러워해? 안 본 것도 아니잖아.”기분이 제법 좋아 보였다.강아연이 부끄러워한다는 건 아직 자기 몸에 끌린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그 정도 자신감은 있었다.하지만 강아연은 그 말을 듣자 다시 시선을 돌려 그의 몸을 거리낌 없이 훑었다. 그리고 웃는 듯 마는 듯 말했다.“그러게요. 오래 봐서 질렸어요. 이제는 눈에 거슬려서 보기 싫을 정도로.”성규연의 좋던 기분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끼었다....진 비서는 성규연에게서 흘러나오는 음산한 기운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강아연에게 귀띔했다.“사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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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4화

남들이 보기에는 서로 귀엣말을 나누는 다정한 부부 그 자체였다.그 모습은 프리스의 시선을 끌었다. 프리스는 아내와 함께 다가와 영어로 감탄했다.“성 대표님과 사모님 사이가 이렇게 좋을 줄은 몰랐습니다.”성규연도 영어로 웃으며 답했다.“두 분이 십 년 넘게 쌓아 온 사이에 비하면 아직 멀었습니다.”프리스 부부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눈빛에 애정이 가득했다.“성 대표님, 사모님. 한잔하시죠.”프리스가 샴페인 잔을 들었다.직원이 강아연에게도 술을 건넸지만, 강아연이 손을 뻗기도 전에 성규연이 자연스럽게 그 잔까지 받아 들었다.“죄송하지만 제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술을 마시면 안 됩니다. 이 잔은 제가 대신 마시죠.”성규연은 두 잔을 연달아 단숨에 비웠다.그 행동에 프리스는 단번에 호감을 보였다.“역시 훌륭한 남편이시군요! 이쪽으로 가시죠. 미래 그룹 브랜드 입점 건도 같이 이야기해 보시죠.”성규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강아연에게 부드럽게 말했다.“프리스 씨와 업무 이야기를 좀 해야 해. 당신은 올리비아 씨와 얘기하고 있어.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네.”강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리비아가 프리스의 옷매무새를 다정하게 정리해 주는 걸 보고 강아연도 센스 있게 성규연의 옷깃을 바로잡아 줬다.성규연은 강아연이 먼저 챙겨 주는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바라던 아내의 모습과 똑 닮아 있었다. 온화하고 다정하고, 눈과 마음에는 오직 자신만 담고 있는 아내.순간 잔뜩 흐려 있던 기분이 다시 맑아진 성규연은 몸을 숙여 강아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다녀올게.”프리스도 아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두 사람은 누가 봐도 금실 좋은 부부처럼 보였다.강아연은 멀어지는 성규연을 바라보며 입가의 미소가 조금 옅어졌다. 그래도 올리비아 앞에서는 끝까지 연기해야 했다.강아연은 올리비아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영어로 인사했다.“프리스 부인...”“그렇게 부르지 말아요. 난 그 호칭 싫어요.”뜻밖에도 올리비아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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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5화

강아연의 눈에 놀라움이 스쳤다.프리스와 올리비아는 사람들 앞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해서 완벽하게 사랑하는 부부로만 보였다.누가 두 사람이 몇 년째 별거 중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그래도 둘 다 이혼할 생각은 없어요.”올리비아가 설명했다.“회사는 우리 둘의 공동 재산이고, 처음부터 우리 러브스토리를 앞세워 홍보한 덕분에 이만큼 성장한 거거든요. 아들도 하나, 딸도 하나 있고요. 가족끼리 너무 깊게 얽혀 있어서 누구도 먼저 떠나겠다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거죠.”“그런데...”강아연이 의아해했다.“그렇다면 왜 별거를 하세요?”“그 인간한테 진절머리가 나서요!”올리비아는 드디어 속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듯 흥분해서 휴대폰을 꺼내며 불평을 쏟아냈다.“세상에 SNS 계정이 이렇게 많은 남자는 처음 봤어요. 급한 일이 있어도 그 인간 계정 일곱 개에 같은 메시지를 다 보내야 한다니까요! 정말 짜증 나 죽겠어요!”강아연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그 일곱 계정을 한 단체 채팅방에 넣어 보는 건 어때요?”물론 강아연은 두 사람이 별거하는 이유가 계정이 일곱 개나 있다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게다가 밖에 여자까지 있어요!”올리비아가 분통을 터뜨렸다.“자기 남편을 다른 여자랑 나눠 갖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요?”강아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프리스에게 밖에 여자가 있다면, 성규연 역시 심소연과 애매한 관계를 이어 가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하지만 큰 차이는 있었다. 적어도 프리스와 올리비아는 처음에는 서로 사랑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세간의 화제를 모았고, 함께 창업한 회사가 성장해 상장하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그렇다면 그 사랑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었던 셈이었다.그래서 두 사람은 관계가 이미 깨졌는데도 계속 대중 앞에 함께 모습을 드러내며 금실 좋은 부부를 연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서로 얻는 게 있으니 말이다.그렇다면 자신은?강아연과 성규연 사이에 존재했던 감정이라곤 한때 강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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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6화

“그때 둘이 같은 들것에 실려서 병원으로 들어갔어요. 그 장면이 얼마나 난리였는지 몰라요!”당시를 떠올린 올리비아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지만 파티장에 다른 손님들이 있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얌전한 척했다.“참. 오늘 들은 이야기는...”“걱정하지 마세요. 비밀로 할게요.”강아연이 살짝 웃었다.올리비아도 만족스럽게 웃으며 진심으로 말했다.“강아연 씨랑 이야기하니까 정말 즐거워요.”“저도요.”올리비아는 더 환하게 웃으며 명함을 꺼내 강아연에게 건넸다.“이렇게 말이 잘 통하니 앞으로도 자주 연락했으면 좋겠어요.”“좋아요.”강아연이 명함을 받았다.이야기가 얼추 끝나자 올리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리스 쪽을 바라보던 그녀가 혀를 차며 말했다.“그래도 강아연 씨가 나보다 운이 좋네요. 적어도 남편 얼굴은 잘생겼잖아요. 우리 남편은 젊을 때나 좀 볼 만했지, 나이 드니까 영 아니더라고요. 한창때가 너무 짧았어요!”강아연은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올리비아가 다시 말했다.“그런데 강아연 씨의 남편이 강아연 씨를 보는 눈은 영 마음이 없는 사람 같지 않던데요?”“눈빛도 연기할 수 있잖아요.”강아연이 차분하게 말했다.“그럼 강아연 씨의 연기가 나보다 훨씬 낫네요. 진짜 같던데.”올리비아가 웃었다. 마침 성규연과 프리스가 이야기를 끝내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이자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저렇게 잘생긴 남편을 정말 이제 안 좋아해요?”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작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낮출 생각도 없는 듯했다. 프랑스어로 말하고 있었으니 여기서 강아연 말고는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강아연도 그렇게 생각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프랑스어로 답했다.“네. 이제 안 좋아해요. 하나도 안 좋아해요!”마침 기회가 생긴 김에 그동안 눌러 왔던 감정을 털어내듯, 강아연은 잔잔하게 웃으면서도 입으로는 불만을 쏟아냈다.“제가 매일 저 사람 상대하느라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진짜 지긋지긋해요.”올리비아도 웃으며 강아연의 어깨를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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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7화

그 한마디에 강아연의 동공이 순간 수축했다.성규연은 프랑스어를 알아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말할 수도 있었다.그렇다면 강아연과 올리비아가 나눈 이야기를 전부 들었고, 전부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어쩐지 그때 표정이 그렇게 안 좋더라니...’성규연은 강아연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정교하게 빚은 듯한 얼굴과 자신의 입맞춤으로 붉고 촉촉해진 입술이 지금은 오히려 화를 더 치밀게 했다.그 말들이 바로 저 입에서 나왔다.강아연은 자신을 더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사랑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이제는 좋아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지긋지긋하다고 했다.그런데 어떻게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강아연, 네가 날 안 좋아한다고 한 거, 진심이야?”성규연의 깊은 눈빛이 가라앉으며, 당장이라도 폭풍이 몰아칠 것 같은 압박감이 번졌다.사실 파티장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로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전에 마정현 앞에서 자신에게 모욕당했을 때, 피 한 방울 없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던 강아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억지로 참았다. 사람들 앞에서 또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성규연이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신경 쓴 적은 없었다.그래도 강아연이 ‘안 좋아한다’고 말할 때 보였던 그 후련하고 홀가분한 태도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마치 드디어 마음속에서 성규연을 완전히 지워 버리고,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성규연은 미칠 것 같았다. 이렇게 복잡한 감정은 자기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그래서 강아연을 붙잡고 어떻게든 입으로 직접 답을 듣고 싶었다.설령 적당히 거짓말을 둘러대더라도 진심 아니었다는 한마디만 해 준다면 자신을 설득해서라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 그렇게 의심이 많은 자신인데도 말이다.하지만 강아연은 고개를 들어 성규연을 바라보다 조용히 숨을 내쉬고 낮게 말했다.“네. 이제 안 좋아해요.”소리는 부드러웠고 악을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한마디는 거대한 망치처럼 성규연의 가슴을 내리쳤다.“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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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화

하지만 강아연은 그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기대마저 산산이 부숴 버렸다.“남편이 힘들어할 때 조금 도와주는 것도 아내로서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전 그걸 감정하고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말투도 표정도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그날 밤 성규연의 허벅지 위에 앉아 그를 도와주며 얼굴을 붉혔던 강아연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마치 분명하게 선을 긋듯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사랑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저 성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역할에 맞춰 필요한 일을 해 주고 있을 뿐이며, 성규연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고 한다.쾅!성규연의 주먹이 차창을 세게 내리쳤다. 강아연의 어깨가 움찔하며 눈이 커졌다.“대표님! 사모님!”별장 안에 있던 집사와 장미진이 차 안의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왔다. 하지만 차 안의 광경을 보자 두 사람 모두 그대로 굳었다.성규연의 손은 깨진 유리 조각에 찢겨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친 손으로 강아연의 가느다란 목을 붙잡고 억지로 입을 맞추고 있었다.강아연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저항했지만 성규연은 오히려 벌을 주듯 입술을 깨물었다. 힘을 풀기는커녕 더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강아연의 몸을 자신의 뼛속에라도 녹여 넣으려는 사람처럼...다친 손에서 계속 흐른 피가 강아연의 흰 피부에 묻어나, 마치 눈 위에 핀 붉은 매화 같았다.강아연은 거의 숨을 쉬지 못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힘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고,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다.성규연은 원래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차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집사와 장미진을 보자 눈빛이 갑자기 싸늘해졌다.그 날카로운 시선에 집사와 장미진은 화들짝 놀라 얼른 등을 돌리고 감히 다시 안을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그래도 두 사람이 나타난 덕분에 모든 걸 부숴 버리고 싶을 만큼 날뛰던 성규연의 충동은 끊겼다.참 다행하였다.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이 얼마나 더 통제력을 잃고 무슨 짓을 했을지, 성규연 자신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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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화

“아니에요.”강아연은 곧바로 손을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차에서 내렸다.순간 몸이 휘청하자 장미진이 재빨리 부축했다.“사모님, 조심하세요.”강아연은 장미진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사모님, 저녁은 뭐로 준비해 드릴까요?”이연미가 물었다.“됐어요.”강아연은 입맛이 없었다.“대표님이 꼭 챙겨 드리라고 하셔서요. 조금이라도 드세요.”이연미는 난처해했다. 성규연이 화가 났을 때의 분위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었다.강아연도 일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싶지는 않았다.“그냥 죽 한 그릇만 끓여 줘요.”“네.”이연미가 바로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강아연의 목에 묻은 피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무언가 묻고 싶은 표정이었다.강아연도 그 시선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씻었다.안방에는 성규연이 있어 들어가지 않고 손님방으로 가며 장미진에게 깨끗한 옷 한 벌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씻고 나온 강아연은 화장대 앞에 앉아 스킨케어 제품을 발랐다.“엄마...”그때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리자 문 앞에 성준서가 서 있었다. 강아연은 아직 준서와 어떻게 지내야 할지 몰랐지만, 아이의 눈에 조심스러운 기대가 담겨 있는 걸 보고 먼저 물었다.“준서야, 승마 수업 끝나고 왔어?”“네!”성준서의 눈이 환해졌다. 그는 오늘 수업에서 있었던 일을 신나게 보고했다.“선생님이 오늘 제가 제일 잘했대요! 그런데 새로 들어온 여자애가 있는데, 걔는 이틀 만에 우리가 일주일 동안 배운 걸 다 배웠어요...”“그렇게 잘해?”강아연은 조금 놀랐다. 그런데 자신이 다른 아이를 칭찬하자 성준서의 눈에 살짝 풀이 죽은 기색이 보였다. 강아연이 웃으며 덧붙였다.“준서도 잘했어.”그 말을 듣자 성준서의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졌다.“엄마, 연미 누나가 죽이 다 됐대요. 내려가서 먹어요.”강아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났다.성준서가 먼저 다가와 강아연의 손을 잡았다.강아연은 잠깐 굳었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오므라들었다.성준서는 강아연을 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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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0화

그래서 이제는 더 바라지 않았다. 지금 이 정도 관계만 유지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성준서는 강아연의 속마음을 몰랐다. 그저 엄마 옆에 꼭 붙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엄마, 오늘 저랑 같이 자면 안 돼요? 엄마가 저랑 같이 안 잔 지 너무 오래됐어요.”강아연은 잠시 멈칫했다.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두 눈을 보니 거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안방으로 돌아가 성규연을 마주하는 것보다는 성준서와 있는 편이 나았다.“진짜요? 너무 좋아요!”성준서는 신이 나서 폴짝 뛰더니 곧바로 동화책을 들고 와 강아연과 함께 봤다.강아연은 침대에 기대앉아 예전처럼 준서에게 이야기를 읽어 줬다. 성준서는 작은 몸을 강아연의 품에 기대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엄마가 다시 이야기를 읽어 줘서 너무 좋았다.‘내가 계속 착하게 굴면 엄마도 예전처럼 나를 가장 사랑해 주는 엄마로 돌아오는 걸까?’그렇게 생각한 성준서는 강아연의 팔을 꼭 끌어안고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너무 좋아요. 전 엄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영원히 안 떨어질래요!”강아연의 고요한 눈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성준서가 태어나 지금까지 이런 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강아연은 눈을 내리깔고 자신을 조금 닮은 앳된 얼굴을 바라봤다.이 아이는 이 세상에서 자신과 피로 이어진 사람, 자기 아들이었다.며칠 전, 아픈 몸을 이끌고도 강아연의 앞에서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하던 준서의 모습이 떠올랐다.‘어른도 실수하는데 왜 계속 어린아이의 잘못만 붙잡고 있어야 할까? 내가 성규연에게 당한 일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다고 해서, 그 화를 아이에게 풀고 있는 건 아닐까?’그렇다면 너무 불공평하고 비겁한 일이었다.강아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음이 복잡했다.한참 뒤, 강아연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낮게 불렀다.“준서야...”하지만 돌아온 건 잔잔한 숨소리뿐이었다.성준서는 강아연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작고 말랑한 몸이 하얀 찹쌀떡 같아 괜히 한 번 볼을 꼬집어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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