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다시 태어난 구공주, 그녀의 당찬 인생: Chapter 891 - Chapter 900

940 Chapters

제891화

이경의 물음이 떨어진 뒤, 봉구경은 오래도록 입을 열지 않았다. 촛불이 조용히 타들어 가는 사이 향 한 대를 태울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어 이경을 바라보았다.“나, 이제 정말 버티기 힘든데. 우선 침부터 놔 주면 안 되겠어?”“내가 사혈에 침을 찌를지도 모르잖아?”이경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봉구경은 겁먹기는커녕 희미하게 웃었다.“너도 그 여자랑 똑같아. 말은 차갑고 매정하게 해도, 마음은 누구보다 여리지.”“그런 말로 내 비위 맞추지 마. 당신이 정말 엄마를 배신했다면, 천 번 만 번 죽여도 모자라.”“난 배신하지 않았어.”봉구경은 이경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말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이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 봉구경은 엄마를 배신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녀의 직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경은 늘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그런데 어째서 모두가 봉구경을 배신자라고 하는 걸까?“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어?”두 사람은 이경과 남성의 관계를 분명하게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경은 봉구경이 이미 알고 있다고 느꼈다. 자신이 남성의 딸이라는 사실을.어쩌면 오래전 남진 황궁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날 봉구경은 흠안전에 불을 질렀다. 이경은 그가 다시 자신을 찾아올 줄 알았지만,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를 찾아갔던 것이다.엄마를 많이 좋아했던 걸까.“왜 다들 당신이 엄마를 배신했다고 믿는 거야?”“난 배신하지 않았어.”봉구경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그럼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모른다고 하면 믿겠어?”이경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마주 보았다.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끝내 대답은 하지 않았다.침묵을 깬 것은 봉구경의 기침이었다. 그가 두어 번 몸을 떨며 기침하자, 입가에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지금까지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다.심맥 주위에 침을 놓아 뭉친 피를 풀어 주어야 했다. 더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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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2화

방 안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너무도 고요해서, 희미한 숨소리마저 크게 들릴 것 같았다.얼마나 지났을까. 봉구경이 기침을 하자 그제야 이경도 생각에서 깨어났다.“이미 알고 있다면, 내가 당신보다 아랫사람이라는 것도 알겠네.”아랫사람. 봉구경과 엄마는 같은 세대라는 뜻이었다.봉구경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누르며 다시 작게 기침했다.“그냥 어린애라고 생각해. 당신한테 흑심 품을 여자들이랑은 다르니까.”이경은 침상 곁으로 가 약상자를 머리맡에 내려놓고 필요한 것들을 꺼냈다.“누워. 당신 얼굴이 아무리 잘났어도 욕심 안 낼게.”봉구경의 외모가 보기 드물 만큼 빼어난 것은 사실이었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은 얼핏 보면 스무 살 남짓한 청년 같았다. 하지만 그는 엄마가 사랑했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을 두고 농담 이상의 마음을 품을 리 없었다. 이경에게 봉구경은 그저 어른이었다.봉구경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몇 걸음 떼기도 전에 몸이 휘청거렸다. 침상 앞에서는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무릎을 꿇을 뻔했다.이경이 얼른 그를 붙잡았다. 손가락을 그의 손목에 얹자 몹시 약한 맥이 잡혔다. 지금까지 정신을 잃지 않고 버틴 것만도 용했다.봉구경을 침상에 눕힌 뒤, 이경은 침을 놓으려고 그의 옷깃에 손을 댔다. 그러자 봉구경이 곧바로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거부하는 뜻이 눈빛에 선명했다.“내가 신선인 줄 알아? 옷을 풀지 않으면 어떻게 침을 놓으라고?”“안 풀어.”봉구경은 밀려오는 어지럼증을 억지로 견디며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는 쉰 데다 희미했지만, 뜻만은 완강했다.이경의 마음이 묘해졌다. 엄마를 생각해서 이러는 걸까? 엄마의 딸 앞에서도 몸을 보이기 싫을 만큼?그가 엄마를 향해 품은 마음은 진심인 듯했다. 그렇다면 그때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도 오해였을까.“알았어. 안 풀게. 흥분하지 마. 또 피가 나잖아.”이경은 곁에 놓인 수건으로 그의 입가를 닦았다. 수건에 금세 붉은 자국이 번졌다.그녀는 옷 위로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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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3화

봉구경이 눈을 떴을 때는 자정이 훌쩍 지나 있었다.정신이 들자마자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살펴보니 몸에 걸친 옷이 바뀌어 있었다.그 모습에 봉구경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지만, 곧 힘이 절반 넘게 빠져나간 듯한 느낌에 멈칫했다. 진기를 끌어올리려 해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그 맹랑한 계집애가 약을 쓴 것이다.“놀라지 마. 당신 몸은 안 봤어. 옷은 남도윤이 갈아입혔거든.”이경은 옆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남원을 습격해 소란을 일으킨 사람이 봉구경이라는 걸 안 뒤로는 내내 조이던 마음도 풀린 참이었다. 책장을 넘기는 손길마저 느긋했다.“남도윤은 내 호위야. 남자니까 안심해.”그제야 봉구경은 꽉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폈다.“왜 약을 썼냐고 묻고 싶겠지?”이경이 책에서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당신은 엄마쪽 사람들과 싸웠어. 그럼 지금은 내 적이나 마찬가지야. 아무 대비도 없이 곁에 둘 수는 없잖아.”“날 그들에게 넘길 생각이야?”봉구경의 목소리에는 화난 기색이 없었다.이경은 고개를 저었다.“넘겨주면 살아남기 힘들걸. 금근영이 날린 그 일격에는 가진 힘이 전부 실려 있었어. 내 생각엔 무공은 당신이 더 강해. 하지만 당신은 그 여자를 경계하면서도 끝까지 봐줬지. 그 여자는 남원에 침입해 자기 주인을 해칠지도 모르는 사람을 살려 둘 생각이 없었고.”이경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살폈다.“그래서 더 강한 당신이 오히려 더 크게 다친 거야. 맞지?”봉구경은 대답하지 않고 침상 머리맡에 몸을 기댔다. 온몸에 힘이 빠져 있었다. 완전히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약 때문에 진기를 쓸 수 없었다. 당분간은 무공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이경이 영리하다는 사실은 진작 알았다. 남성을 닮아 누구보다 영리했다. 그래도 직접 그녀의 수완을 겪으니 새삼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말했잖아. 난 네 어머니에게 적의가 없어. 배신한 적도 없고.”“하지만 지금은 엄마의 적이야.”그러니 잠시 그의 무공을 막아 둔 것도 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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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4화

이경은 봉구경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입가에는 여느 때처럼 태평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만 그가 볼 수 없는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봉구경에게 침을 놓기 시작할 때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었다. 줄곧 입술 끝에 맴돌았지만, 대답을 들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난 엄마 딸이야. 경보든 이경이든, 이 몸도 이 안의 영혼도 모두 엄마 딸이라고.”이경은 숨을 천천히 고르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오늘 날씨를 묻는 것처럼 말하고 싶었지만, 손바닥에 다시 찬 땀이 배어 나왔다.“그러니까 내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해 줘. 지금 어디 있어? 아니… 살아 있기는 해?”봉구경의 낯빛이 눈에 띄게 변했다. 조금 전 피를 토했을 때보다 더 창백했다.“알고 있지? 내 아버지가 누군지.”억지로 지어 보이던 웃음마저 이경의 얼굴에서 사라졌다. 봉구경은 분명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떠올린 것은 이경에게 말하기 어려운 기억인 듯했다.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의 딸을 낳았다면 어떤 기분일까. 겪어 보지 않아도 그가 왜 괴로워하는지 짐작은 갔다. 그래도 이경은 이미 태어나 살아 있었다. 지난 일을 모른 채로 남겨 둘 수는 없었다.21세기에 살 때도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 이곳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빠’라는 말은 너무 낯설어서 입에 붙지조차 않았다. 그래서일까. 한 번도 알지 못한 그 사람이 도리어 자꾸 마음에 걸렸다.알고 싶었다. 이번만큼은 반드시.“내 아버지, 살아 있지?”이경이 다급히 봉구경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평소라면 여자가 몸에 손대는 것조차 꺼렸을 그가 이번에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눈은 이경을 향해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오래전의 어느 날로 돌아간 듯했다.“어디 있는데? 봉구경, 말해 줘.”대답은 없었다. 이경은 옷깃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고서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가까스로 손끝의 긴장을 풀고,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남성의 부군이었던 사람은… 지금 어디 있어?”“그자는 아니야! 그럴 자격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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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5화

봉구경은 끝내 이경의 친아버지가 어디 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나중에는 술을 몇 병 달라고 했다. 이경은 취하기만 하면 입을 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봉구경은 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아버지에 관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아버지.‘아빠’든 ‘아버지’든, 이경에게는 낯선 말이었다. 21세기에도 아버지는 없었고, 이곳에 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그는 어떤 사람일까. 정말 엄마를 사랑했을까.다른 사람 앞에서는 얼마든지 아버지를 두둔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 남으니 자신이 무엇을 믿고 그렇게 말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살아 있다면 왜 엄마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한때라도 엄마를 사랑하기는 했을까.봉구경은 침상에 누운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경은 하는 수 없이 긴 의자에 몸을 기댔다.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어릴 적 자신을 홀로 돌보던 엄마의 모습이 또렷해졌다.가느다란 어깨에 얼마나 많은 것을 짊어지고 있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어린 이경에게 엄마는 언제나 강한 사람이었다. 엄마만 곁에 있으면 어떤 비바람도 자신에게 닿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그런데 아버지도 곁에 있었다면 어땠을까.생각은 끝을 맺지 못했다. 이경은 긴 의자에 기댄 채 어느새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칠조의 날카로운 외침이 그녀를 깨웠다.“공주마마! 어서 나와 보세요! 빨리요!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래요!”이경은 비틀거리며 문가로 나왔다. 아직 눈꺼풀이 무거웠다. 뒤를 돌아보니 봉구경은 밤새 마신 술 탓인지 침상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무슨 일인데?”이경은 문틀에 서서 미간을 문질렀다. 잠을 설친 탓에 아직도 정신이 몽롱했다.그런데 칠조는 대답할 생각도 않고 그녀의 어깨너머로 방 안을 기웃거렸다.“공주마마, 방 안에…”침상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았다.“뒷마당에서 미남 하나 데려왔어. 왜, 부러워?”이경은 하품을 하며 칠조를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고는 뒤돌아 문을 닫았다.칠조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무연처럼 잘생긴 남자를 곁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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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6화

돈이지! 당연히 돈을 보러 가야지! 황금 10만 냥! 아침 식사는, 매일 있는 건데 뭐가 대수라고? 황금 10만 냥을 어떻게 보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수레 여러 대로 밀고 들어와야 되는 거 아니야? 대청을 가득 채우게 되는 거 아니야? 사방이 금빛으로 반짝이는 거 아니야?" 그 말을 들은 칠조는, 자신이 방금 왜 비명을 지른 건지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그녀는 이경의 손을 잡아끌고는, 매우 조급한 말투로 말했다. "엄청 많아! 정말 많아! 난생처음으로 황금 10만 냥을 직접 봤어!" "무려 마차 네 대로 끌고 왔는데, 상자는 십여 개나 있더라고. 엄청 무거워 보여! 나로서는 한 상자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 보여!" "한 상자가 적어도 300킬로그램, 600근이 넘는데 네가 옮길 수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지!" "맞아, 절대 옮길 수 없어. 얼른 가서 봐봐. 그리고 이제 나한테도 좀 나눠줘. 한 상자면 충분해. 평생 먹고살 수 있어! 하하하!" "얼른 가봐야겠네. 한 상자만 들고 오면 평생 먹고살 수 있다니까! 호호호!" "…" 식판을 들고 그들 뒤를 따라오던 무연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칠조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 이렇게나 많은 황금을 본 적이 없으니 잔뜩 흥분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경은 엄연히 공주이다. 비록 이렇게나 많은 황금을 본 적은 없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비단옷과 진수성찬을 누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황금이, 뭐가 그리 신기하다고? 그 와중에 웃음 가득한 이경의 얼굴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괴이하고 무서웠다. 그는 공주의 곁에 오랫동안 있었지만, 한 번도 그녀의 유치한 면을 본 적이 없었다. 뜻밖에도 이경은 돈 보면 눈이 뒤집히는 작은 구두쇠일 줄이야. 이내 이경은 대청에 들어섰고, 돈을 마주하자마자 그녀는 눈이 뒤집히는 정도로 아니라 아예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쓰러질 뻔했다. 황금 10만 냥이, 이렇게나 반짝이는 거였다니. 이른 아침인데도, 대청 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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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7화

윤세현이 이경을 찾기 시작한 건, 당연히 여화행의 뜻이었다. 사실 그는 오늘 아침 식사를 가지고 나타났다. 여전히 거만하고 차가운 모습이긴 하지만, 적어도 티를 내지는 않았다. 만약 이경이 정말로 황성으로 향하여 스승을 구할 사람을 데려올 수만 있다면, 그는 그동안 이경의 방자함을 참을 의향이 있었다. 그런데 이 건방진 여자의 욕심이 하늘을 찌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공자님, 성주의 침대 위에 웬 남자가 누워 있더군요." 청매는 방문을 밀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누운 남자는 여전히 달콤한 잠에 빠져 있었고, 보아하니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 이경의 침실이다. 역시 색녀가 따로 없네. 이렇게나 문란하게 살면서 기어코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다니. 순간 윤세현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이내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청도와 홍매는 순간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그들은 공자를 호시탐탐 노리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새 성주가, 공자와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건, 당연히 두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일이었다. "공자님, 그럼 이 아침 식사는…" 홍매와 청도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는, 다시 윤세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버려." 윤세현은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내심 기뻐 난 홍매는 급히 쟁반을 땅에 던졌다. 두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공자의 발걸음을 따라 자리를 떠나려 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들은 회랑 끝에서 돌아오는 이경을 마주하게 됐다. "나한테 아침 식사를 주려는 거 아니었어? 왜 두 손이 텅 빈 거야?" 이경은 앞쪽 회랑을 바라보았다. 회랑 위에는, 그들이 버린 음식이 있었다. 바닥은 엉망이었다. 청도와 홍매를 보니, 두 사람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청도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주님의 방에 웬 남자가 있더군요. 그렇게 바쁘실 줄 몰랐는데, 더 이상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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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8화

화가 난 청도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녀는 확실히 이경의 상대가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가 아는 공자라면, 아무런 이유 없이 웬 여자를 때릴 사람도 아니었다. 이경이 먼저 공자한테 손을 대지 않는 한. 청도는 화가 났지만 그저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사람을 너무 업신여기네!" "내가 언제 너를 업신여겼는데? 여긴 서북쪽 면이고 내 영역이라는 걸 잊지 마. 네가 뛰어들어와 나한테 손가락질하며 욕했는데, 내가 너를 혼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이경은 다시금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윤세현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미 매우 가까워졌다. 청도와 홍매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들이 가장 못 참는 건 바로 다른 여자가 공자한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이경이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도 전에, 청도가 달려들어 그녀를 밀어냈다. "우리 공자님한테서 떨어져!" 그러자 무연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청도가 밀어내는 순간, 그는 긴소매를 휘날리며 장풍을 날렸다. 그는 아무 말 없었지만, 태도 하나는 매우 명확했다. 절대 공주님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됐다. 이 상황에 윤세현과 이경, 당사자 두 사람만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이 그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무연의 장풍은 청도를 손쉽게 밀어냈다. 하지만 청도의 장풍에 이경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오늘 마침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어지러운 머리칼이 흩날리자, 작디작은 그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맑아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그 모습에, 윤세현은 저도 모르게 다소 긴장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심장이 순간적으로 꽉 조여지는 듯했다. 그 순간,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가 손을 들어 올린 순간, 이경은 단 번에 그를 밀어냈다. "날 만지지 마!" 그녀는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순간 윤세현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조차 자신이 방금 무엇을 하려 한 건지 알지 못했다. 순간 그는 자신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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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9화

이내 윤세현은 자리를 떠났다. 누가 봐도 그는 지금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칠조는 다소 불안 해났다. "내가 방금 너무 심하게 때린 건가…"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억울한 기분도 들었다. "그런데 당신이 나더라 때리라고 한 거잖아. 세자가 나를 탓하면 안 되지." 방금 전 공주를 바라보던 세자의 그 눈빛은, 혐오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 살기 어린 그 눈빛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나는 칠조는 괜히 이경이 걱정됐다. 그나저나 공주는 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인거지? 심지어 싱글벙글 웃고 있는데? 이경은 뜻밖에도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였고, 누구를 탓할 생각도 없었다. 도리여 그녀는 칠조의 어깨를 토닥이며 웃었다. "잘했어, 아주 잘했어." 이경은 단지 눈짓을 했을 뿐인데, 칠조는 마치 그녀와 마음이 통한 듯 순식간에 달려 나가, 이경의 그 어떠한 지시도 들을 필요 없이, 단번에 청도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 정도 호흡은 쉽게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다. 이경은, 역시 어린 계집애를 곁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뻔뻔하게 누군가를 냅다 때릴 수 있는 일은, 무연과 연지라면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여자를 괴롭히는 것에 있어서는 더더욱. "정말로… 전혀 슬프지 않아?" 칠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경의 표정을 살폈다. 아무리 봐도 실의에 빠진 모습은 아니었다. 입가에 띤 그 미소는, 정말로 눈에 거슬렸다. "세자가 많이 화난 것 같아. 당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혐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칠조는 차마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그가 나를 다르게 봐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세자가 나를 싫어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하지만…" "걱정 마. 그 녀석은, 네가 잘 보이려 할수록 오히려 더 싫어해. 세자는 낯선 여자가 자신한테 먼저 다가오는 걸 싫어한다는 거, 너도 알잖아?" 여유로이 하품을 하던 이경은, 그제야 자신이 아직 무연의 품에 기대어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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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0화

"내 방 안에 남자가 있긴 해. 엄청 잘생겼어." 이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당당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너희 세자도 나를 버렸는데, 내가 굳이 그를 위해 선을 지켜야 하는 거야?" 그 말에 순간 민망해진 칠조는 급히 나서서 말했다. "먼저 들어가서 조반을 준비하고 있을게." 사실 조반은 무연이 이경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고, 칠조는 그저 전달하러 온 것뿐이었다. 이내 문을 들어가 보니, 침대 위에는 과연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비록 반쪽 얼굴만 보였지만, 그 반쪽 얼굴만 보아도 사람의 넋을 잃게 할 정도로 잘생긴 모습이었다. 다행히 지금 칠조의 마음속에는, 온통 목연뿐이라, 침대 위의 남자가 아무리 잘생겼더라도, 그녀의 마음속에 들어올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일편단심 그 자체이니까. 청지와 문정수는 이경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보였다. 구공주의 입에서 이렇게 황당하고 무서운 말을 들게 될 줄은 정말로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구공주와 세자의 정은 금처럼 굳건하여, 이번 생에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사이일 줄 알았는데, 세자가 지금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도, 모두 구공주를 위한 것인데 구공주는 어찌 이렇게 차가울 수가 있는 건지. 다급한 성격의 문정수는 결국 참지 못했다. "공주 마마, 저희 세자님은 마마를 위해 성문을 지키다 중상을 입고 쓰러져 놈들한테 끌려가게 된 겁니다!" "나리께서는 지금 기억을 잃어 차가운 태도를 보이긴 하시지만, 이 모든 것 모두 마마를 위한 것이라고요!" "그런데 마마께서는 나리를 치료할 방법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오히려…" 그는 다시금 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 남자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 실루엣은 똑똑히 보아낼 수 있었다. 이경이 정말로 외딴 남자와 잠자리를 가지게 된 거라 확신하게 됐다. 문정수는 벌컥 화가 난 나머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마, 이러시면 안 되죠! 양심이 있습니까?" 이경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였다. "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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