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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터닝포인트: Chapter 111 - Chapter 120

151 Chapters

제111화

신예린이 결국 못 참고 입을 열었다.“그래, 고리타분한 선비 같은 사람을 대체 무슨 수로 꼬시라는 건데.”송지유가 눈을 반짝이며 바로 맞받아쳤다.“그러면 네가 기생이라도 돼봐. 옛날에 사내들 휘어잡던 기생처럼. 온갖 수단 다 써서 흔들어 봐. 고리타분한 선비라도 눈앞에서 요염하게 어슬렁거리면 무너지는 법이야.”벙찌는 신예린의 표정을 보자 송지유는 오히려 더 신이 나서 말을 이어갔다.“섹시한 잠옷 입고 교수님 앞에서 왔다 갔다 해봐. 눈빛으로 찔러대면서 말이야. 그래도 안 통하면 그냥 교수님 방에 들어가서 무섭다면서 품에 안겨버려!”신예린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혼자 심각해졌다.“근데 지금 날씨에 그런 잠옷 입으면 너무 춥지 않아?”순간 송지유는 답답해서 신예린의 이마를 딱 치며 혀를 찼다.“아이고, 답답해!”신예린은 억울하다는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자 송지유는 다시 잔뜩 열을 올리며 몰아붙였다.“내 말대로 해 봐. 조선시대 기생처럼 능수능란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교수님도 혈기 왕성한 남자야. 매일 한집에서 붙어 사는데 안 넘어가고 배기겠냐?”송지유는 그럴싸하게 떠들었지만 신예린은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지금은 공부하기도 벅찬데... 게다가 나 임신한 몸인데 괜히 불만 지펴놓고 어쩌라고.’“됐어. 그만해.”신예린은 책을 몇 권 챙겨 들더니 벌떡 일어섰다.“어디 가는데?”“도서관. 반납해야지.”신예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소지훈은 오늘 주시우의 초대로 학교 강연에 나와 신입생들을 상대로 신생아 심폐소생술과 하임리히 응급처치를 강의했다.강연을 마친 그는 굳이 주시우를 붙잡고 교정을 둘러보겠다며 겸사겸사 점심까지 얻어먹을 기세였다.마지못해 동행하던 주시우는 가는 길마다 학생들에게 둘러싸였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인사하며 다가오는 제자들의 모습에 소지훈은 감탄 반, 질투 반으로 혀를 찼다.“야, 너도 이제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잖아? 그런데도 애들한테 이렇게 인기라니, 참 대단하다.”고등학교 시절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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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화

소지훈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주시우의 싸늘한 눈빛을 느꼈다.“넌 아니야? 너도 똑같이 서른 살 넘은 아저씨잖아.”“야, 그건 다르지. 넌 곁에 어리고 예쁜 아내가 있잖아. 난 그런 거 없으니까 굳이 젊은 애들 견제할 필요도 없고.”주시우의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가 스쳤다.“한마디로 서른 넘어도 아무도 안 데려갔다는 거네? 노총각?”“야! 그건 인신공격이지!”소지훈이 발끈하며 소리쳤다.“겨우 결혼 하나 했다고 우쭐대지 마. 그래도 난 연애 경험은 있거든? 넌 어땠냐? 제수씨 아니었으면 누가 널 받아줬을 것 같아?”말은 오갔지만, 주시우의 시선은 단 한 순간도 신예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그 한 남학생이 계속 말을 걸며 신예린의 책을 들어주려 하고 있었다.순간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주시우는 더는 소지훈에게 대꾸하지 않고 신예린이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야, 어디 가는데?”멍하니 따라가던 소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어머, 진짜 질투하는 거야? 주 교수님, 골키퍼 있다는 거 확실하게 보여주셔야죠!”...신예린은 단순히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도준과 마주쳤다.“도서관 가는 거야? 같이 가자.”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건넸다.신예린은 속으로 비웃었다. 도대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대꾸할 가치도 못 느낀 신예린은 여도준을 무시한 채 앞으로 걸었다.여도준은 그녀가 품에 안은 책을 힐끗 보더니 손을 뻗었다.“내가 들어줄게.”“필요 없어.”여도준은 신예린의 차가운 모습에 잠시 망설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나 강효은이랑 헤어졌어.”신예린은 피식 웃었다.“그래서?”“그냥 너한테 말해주고 싶었어.”신예린은 그 말에 속이 울렁였다.‘내가 기다려줄 거라고 착각한 거야? 무슨 자신감으로?’그때, 여도준이 갑자기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앞으로 도서관 갈 땐 같이 가자. 예전처럼 시험공부도 같이하고...”그제야 신예린이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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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화

여도준은 주시우가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걸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다.‘의대 최연소 교수, 주시우 교수님이시잖아.’주시우는 임상과 연구에서 이미 전설처럼 회자되는 인물이었다. 얼굴만 익혀둬도 훗날 대학원 진학에 든든한 발판이 될 터였다.‘지금이 기회야. 좋은 인상을 남기자.’여도준은 머릿속에서 자기소개 멘트를 여러 번 연습하며 긴장된 채 서 있었다.마침내 주시우가 눈앞에 다가오자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큰 소리로 인사했다.“교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22학번 임상...”그러나 주시우는 그의 인사를 듣지 못한 듯 도중에 말을 잘라버렸다.“도서관 가는 거야?”주시우의 시선은 여도준이 아닌 신예린을 향해 있었다.여도준은 교수님이 신예린에게 던진 친근한 말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뭐야, 신예린이 주시우 교수님이랑 그렇게 친했어?’그는 얼떨떨하게 신예린을 바라봤고 정작 신예린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먼저 다가와서 던진 첫마디가 다짜고짜... 그것도 여도준 앞에서라니.’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어 그녀는 머뭇거리며 겨우 대답을 짜냈다.“네, 맞아요...”“나도 도서관 가던 길이었어. 같이 가자.”여도준은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신예린은 순간 혀를 깨물 뻔했다.‘이래도 되는 건가요? 교수님... 학교에선 교수님은 교수, 저는 학생이라고 못 박으셨잖아요.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학생한테 같이 도서관 가자고 하는 교수가 어디 있냐고요...’곁눈질로 본 여도준의 표정은 그야말로 경악 그 자체였다.신예린은 난감하게 웃으며 물었다“교수님, 안 바쁘세요? 제가 대신 도와드릴까요?”‘같이 가기 싫다는 건가?’주시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조금 전에 소지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내가 30대라서 창피한 건가? 그래서 저 남학생 앞에서 일부러 선 긋는 거야?’멀리서 지켜보던 소지훈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우리 주 교수님, 오늘 심기 편치 않겠네.”주시우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오늘은 널널한 편이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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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4화

“지금 지훈이가 학교에 있어.”“소지훈 교수님이요?”신예린은 눈이 동그래졌다.“어디 계세요?”‘아... 지훈이를 깜빡했네, 어디서부터 혼자 두고 왔었지?’주시우는 대답 대신 느닷없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점심 같이 먹을래?”뜻밖의 제안에 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아니에요. 절대 안 돼요.”‘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이미 숨이 막히는데, 식사까지 같이 하자니... 그러다가 교수님 동료나 제자라도 마주치면 어떡하려고... 아니, 내 멘탈로는 버틸 수 없어. 절대 안 돼.’“왜, 친구랑 약속이라도 있어?”신예린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아니에요.”너무도 단호하게 부정해 놓고 보니 스스로도 민망해져 얼굴이 달아올랐다.“약속 있는 거 아니면... 여기서 기다릴게.”주시우는 담담하게 말하며 그녀의 손에 책을 쥐여주었다.“다녀와.”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도서관 앞이었다. 출입구를 드나드는 학생들의 시선은 온통 주시우에게 쏠려 있었다.“꺄악, 주시우 교수님 맞지? 진짜 잘생겼다!”“교수님도 도서관에 오시네? 몇 시쯤 오신 거야? 앞으로 이 시간에 맞춰서 와야겠다.”“근데 앞에 있는 저 여학생 누구야? 연구실 인턴인가? 제자인가?”귓가를 스치는 수군거림에 신예린은 견디기 힘들었다. 유명인 옆에 서 있는 듯한 시선이 너무 버거웠다.“교수님, 저 갑자기 찾고 있던 책이 생각났어요. 아마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소 교수님이랑 식사하세요. 저는... 저녁에 뵐게요.”신예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책을 끌어안고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누가 봐도 거리를 두려는 태도였다.주시우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어제 일을 겪으며 신예린을 사랑하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자각했다. 조금 전 여도준과 나란히 있는 걸 봤을 땐 더 확신이 들었다.그동안은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다. 신예린은 아직 대학생이고 공부가 우선이니 천천히 다가가도 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하지만 소지훈의 말이 떠올랐다.‘캠퍼스 안에 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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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5화

신예린은 상상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졌다.‘노출 심한 슬립 원피스를 입고 교수님 앞에서 그런 짓 했다간... 교수님이 날 가벼운 여자로 보고 기겁하실 거야.’결국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포털을 켰다.[좋아하는 남자 마음 사로잡는 법]첫 번째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순진한 척 백치미를 보이면 남자의 보호 본능이 자극된다.]‘백치미? 난 이미 충분히 멍청해 보이는데... 더 멍청해지면 교수님이 혐오하실걸. 비호감 확정이지.’다음 항목을 눌렀다.[여리여리한 모습을 보인다. 짝사랑하는 남자의 가슴팍을 살짝 밀치며 연약함을 어필한다.]‘아니, 교수님 가슴팍을 언제 밀치냐고... 그런 기회는커녕 눈도 못 마주치겠는데.’그녀는 글만 본 게 아니었다. 연애 블로그 글, 유튜브 영상까지 찾아가며 온종일 하나하나 분석했다.연애 심리학 강의라도 듣는 듯 진지하게 필기까지 적어 내려가더니 ‘연애 고수’라도 된 양 착각하기 시작했다.‘좋아, 준비는 끝났어. 이제 교수님만 있으면 돼! 눈앞에 교수님만 있으면 오늘 배운 걸 완벽하게 써먹을 수 있을 거야.’그런데 그날 오후,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낯익은 검은 차였다.학교 앞에 멈춰 선 주시우의 차를 본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오호라, 제 발로 찾아오셨네? 타이밍이 이보다 완벽할 수 있나?’하지만 설레는 것도 잠시, 조수석 문을 열고 앉는 순간 모든 게 무너졌다. 온종일 외운 ‘짝사랑 공략법’은 흔적도 없이 머릿속에서 증발해 버렸다.‘큰일 났다. 뭐라도 빨리 생각해! 방금까지 다 외운 거 어디 갔어?’주시우가 옆에서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왜 그래?”“아, 아니에요!”“안전벨트 해야지?”“앗, 네네!”허둥지둥 벨트를 잡아당기려던 순간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웠다.예상치 못한 거리로 성큼 다가온 주시우의 체온이 확 밀려들었다. 은은한 우디 향이 코끝을 스치고 또렷한 이목구비가 눈앞으로 확 다가왔다. 그의 숨결까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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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6화

밤이 되자 신예린은 평소처럼 서재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고 주시우는 거실에서 새로운 요리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을 확인한 주시우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할머니?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전화하셨어요?”수화기 너머로 고원숙의 힘 있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우리 손주 잘 지냈어? 할미가 지금 어디 있는지 맞혀 봐라.”주시우는 전화기 너머로 희미하게 들리는 공항 안내 방송 소리에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공항이세요? 벌써 귀국하신 거예요?”고원숙은 얼마 전 큰 병을 이겨내고 건강을 회복한 뒤 주시우의 부모님과 함께 세계 여행에 나선 터였다. 벌써 두 달 가까이 집을 비운 상태였다.그동안 주시우가 보낸 메시지는 읽지도 않더니, SNS에는 해외에서 찍은 사진을 끊임없이 올리며 ‘인생 2막’을 시작한다며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그러다 이제야 손주 생각이 났는지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이제 슬슬 들어가야겠지? 지금 알카이도 공항이야.”건강을 되찾아서인지 말투부터가 힘이 넘쳤다.“비행시간이 길어서 시벤누에서 며칠 경유하기로 했어. 며칠 뒤면 집으로 들어가니까 걱정하지 말고...”주시우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좋으시겠네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쉬엄쉬엄 여행하세요. 괜히 또...”“너야말로 괜한 걱정을 하는구나!”고원숙이 단칼에 잘랐다.“네 아버지가 쓸데없는 소리 했구나? 할미가 이래 봬도 평생 검찰총장까지 한 사람이야. 세상 물정 모를 것 같아? 네 아버지가 먹은 밥보다 내가 뒤집어엎은 사건 기록이 더 많아! 영어도 내가 더 잘하고!”그 특유의 호통 섞인 당당함에 주시우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맞습니다. 우리 집에서 제일 유식하고 제일 멋진 분은 할머니시죠.”“흥.”주시우는 전화기 너머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짓는 할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그나저나 엄마 아빠는요?”“입국수속하러 갔다. 나는 손주랑 통화가 더 급하지.”주시우는 일부러 궁금한 척 고개를 갸웃했다.“향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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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7화

주시우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도 특유의 울림이 있어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 신예린은 특별히 영리한 학생은 아니었다.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노력 덕분이었다.수업 시간에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끝까지 파고들어 혼자 연구했고 남들보다 두세 배는 더 오랜 시간을 책상 앞에 매달렸다.예전에는 공부만 해도 벅찼지만 틈틈이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했기에, 늘 벽에 부딪히는 기분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주시우가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었고 덕분에 학업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었다.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졌지만, 신예린은 졸릴 틈도 없이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학교에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던 개념들이 주시우의 설명을 듣는 순간 놀랍게도 단번에 이해되는 듯했다.그 순간 신예린의 눈에는 주시우가 마치 한 줄기 빛처럼 비쳤다.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든든한 존재였다.“대충 이 정도야. 혹시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 있어?”주시우가 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자, 신예린은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예린아, 왜 그래?”신예린은 진심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교수님,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언제쯤 교수님처럼 될 수 있을까요?”능력 있는 사람을 향한 동경은 자연스러운 일, 더구나 신예린처럼 어린 나이의 여학생이라면 눈앞에 모든 걸 갖춘 남자가 서 있는 상황에서 마음이 요동치는 건 당연했다.주시우는 어릴 적부터 수없이 칭찬을 들으며 자라왔다. 그러나 지금처럼 순수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신예린을 마주하자,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그는 슬며시 올라가던 입꼬리를 애써 눌러 담으며 태연한 척 말했다.“넌 아직 학생이잖아. 조금만 더 배우다 보면 다 알게 돼 있어.”“아니에요. 교수님은 달라요.”‘사람은 누구도 똑같을 수 없어. 교수님이 남들보다 탁월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나이에 벌써 교수 자리에 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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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8화

신예린은 그날 밤 사실상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뒤척이고 또 뒤척여도 잠에 들 수 없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주시우의 부드러운 얼굴, 그리고 귀에 맴도는 그의 저음이었다.송지유가 했던 말 때문인지, 심지어 꿈에서는 사극에 나오는 기생처럼 어깨를 드러낸 채 주시우에게 매달려 도통 떨어지지 않는 장면까지 나왔다. 그런데 정작 주시우는 여전히 청산 도사처럼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낭자, 부디 자중하십시오.”그 말에 화들짝 깨서 벌떡 일어난 신예린은, 온몸이 후끈거려 도저히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이불을 걷고 일어나 난방을 꺼버리고 창가에 서서 한참 바람을 쐬고 나서야 달아오른 열기를 식힐 수 있었다.그렇게 뒤척이며 밤을 새우다시피 하니, 아침이 되자 두 눈 밑에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찬물로 세수하고 양치를 마친 후 정신을 좀 추스르고 방을 나섰을 때, 주시우는 아침 식사를 차리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소고기뭇국을 끓여 그릇에 덜어내고 있었다.순간, 눈앞에 서 있는 그를 보는 순간 신예린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랐다.‘교수님 같은 보수적이고 절제된 사람 두고 내가 그런 꿈을 꾸다니... 나 진짜 음란 마귀한테 잠식당한 거야?’주시우는 그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가를 짚어내며 물었다.“어젯밤에 잠 설쳤어?”‘그걸 왜 물어봐요? 머릿속에 교수님 생각만 가득한데... 잠이 오겠냐고요. 지금 당장 뇌 CT 찍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저도 궁금하네요.’신예린은 멋쩍게 고개를 숙였다.“조금 설쳤어요. 잠이 안 와서요.”신예린이 의자에 앉아 주시우가 다시 물었다.“혹시 너무 추웠던 건 아니고? 난방 틀었어?”‘추운 게 아니라 너무 더웠거든요?’“네, 난방 틀고 누웠어요.”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던 신예린은 거짓말로 둘러댔다.“괜찮아요. 오늘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그녀가 식사에 집중하자, 주시우도 더 묻지 않고 함께 수저를 들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말을 꺼냈다.“아, 맞다. 너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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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9화

“무슨 소리야, 난 교수님 집안에 관심 없어.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그건 다 교수님 거야...”“맞지. 하지만 너랑 교수님은 부부니까 교수님 재산은 곧 네 재산이 되는 거라고. 지난번에 식사 끝나고 계산하시면서 교수님이 직접 말했잖아.”송지유는 갑자기 주시우의 말투를 흉내 내며 일부러 목소리를 깔았다.“내 돈이 곧 네 돈이지.”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신예린은 저절로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게다가 제일 중요한 건 말이야.”송지유가 신나게 손가락을 세며 말했다.“넌 지금 교수님 아이까지 가졌잖아. 옛말에 ‘자식 덕에 어미가 존중받는다’는 말 몰라? 교수님이 지금까지 결혼 소식도 없었으니 얼마나 기다리셨겠어. 근데 네가 아이까지 가졌다고 하면 보물단지처럼 떠받들지 않겠어?”“...”신예린은 차갑게 흘끗 째려봤다.“그 말 교수님 앞에서도 해보지 그래?”송지유는 고개를 번쩍 들고 큰소리쳤다.“그야... 절대 못 하지.”신예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렇게 신예린의 ‘교수님 유혹 프로젝트’는 시작도 못 하고 무너졌고 이젠 시댁 식구들을 만난다는 사실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그리고 마침내 그날이 왔다. 신예린이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주시우가 전화하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네, 할머니. 저희 이제 출발할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꼭 안전운전 할게요.”신예린이 차려입고 나온 모습을 본 순간 주시우는 눈빛이 멈칫했다.하얀 주름치마와 베이지색 터틀넥, 그 위에 걸친 코트, 단정히 올려 묶은 머리에 꽂힌 작은 리본까지... 평소와 달리 한껏 신경 쓴 모습이었다.또렷하게 빛나는 이목구비와 반달 같은 눈웃음, 그리고 붉은 입술에 시선이 머무르자 주시우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주시우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신예린은 괜히 어색해져 낮게 속삭였다.“이상해요? 지유가 이게 제일 무난하다고 해서 입은 건데...”주시우는 생각을 다잡으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아니. 너무 예뻐.”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를 보며 주시우는 빙그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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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겨우 긴장을 가라앉히고 방에서 나온 신예린은 더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주시우는 그녀의 귀 끝이 붉어진 걸 보고는 아까 일을 굳이 꺼내지 않았다.‘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잖아, 장난치고 싶지만 참자.’신예린은 워낙 부끄러움이 많아 자칫 더 다그치면 정말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두 사람은 집을 나서 차에 올랐다.신예린은 시댁에 인사드리러 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무슨 선물을 드려야 할까’로 머리를 싸맸다.그녀는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시할머니 고원숙에게는 니트 모자, 시어머니에게는 캐시미어 머플러, 시아버지에게는 고급 원두를 정성껏 준비해 두었다.주시우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신예린이 이미 모든 걸 준비하고 난 뒤였다.주시우는 곤란한 듯 웃었지만 뭐라 하는 대신 고맙다고 하면서 다정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차가 달리는 동안 신예린은 긴장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그 모습을 눈치챈 주시우가 물었다.“춥니?”“아니에요.”고개를 저은 신예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좀... 긴장돼요.”“그럴 때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는 게 좋아.”“네?”“사실은 그분들이 너보다 더 긴장했을 수도 있거든.”신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말이 돼요?”주시우는 웃음을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생각해 봐. 내가 이 나이 먹도록 결혼을 안 했었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속 탔겠어. 다들 내가 평생 일에만 파묻혀서 혼자 늙어갈지 걱정했거든. 그런데 갑자기 결혼하고 이렇게 예쁜 아내를 데리고 온다니 얼마나 감회가 새롭겠어. 만에 하나 실수라도 해서 며느리가 마음을 닫아버리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을 거야. 처음 보는 자리에서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며느리가 이혼하자고 나설지도 모르잖아.”“교수님... 웃기려고 한 말이죠...”신예린은 주시우가 진지한 얼굴로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자 꾹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주시우는 그녀의 웃음소리를 듣고는 입꼬리를 살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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