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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1화

신예린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괜찮아, 괜찮아. 아무리 큰 회사를 운영한다고 해도 결국 사람 사는 거 거기서 거기잖아. 겁먹을 필요 없어.’그녀는 주시우의 손을 꼭 잡고 차에서 내렸다. 멀찍이 떨어져 있음에도 온 시선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묵직하고 부담스러운 시선이었다.“교수님...”뭔가 말하려다 망설이는 신예린에게 주시우가 가볍게 눈썹을 모았다.“가족들 앞에서는 호칭을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네?”신예린은 멍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주시우의 입가에 장난기가 어렸다.“시우 씨, 아니면... 여보?”심장이 쿵 내려앉았다.‘내가 어떻게 교수님 이름을 불러... 하지만 여보라는 호칭도...’그런 호칭은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려서 도저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그때 저택 쪽에서 발소리가 다가왔고 신예린은 생각을 정리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머리카락이 희끗했지만 기품이 살아 있는 노부인이 제일 먼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우아하고 당당한 모습에 아우라가 빛났다.그 뒤로는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남자는 온화하고 여유 있는 풍모, 여자는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인상이었다.세 사람 모두 예상했던 위압적인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조금 안도하려는 찰나, 맨 앞의 노부인이 팔을 뻗어 신예린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두 눈이 별처럼 빛났다.“아이고, 네가 내 귀한 손주며느리 예린이구나? 아이고, 드디어 만났네! 이놈의 자식이 결혼했으면 진작 말이라도 하지 그랬어!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여행만 다니느라 이제야 얼굴을 보게 됐잖아. 예린아, 할머니 탓하지 말아라.”그녀는 신예린의 얼굴을 위아래로 살피더니 감탄을 쏟아냈다.“아이고, 사진보다 훨씬 예쁘다. 어쩜 이렇게 뽀얗고 곱냐. 보기만 해도 마음에 쏙 든다.”“어머니, 처음 뵙는 자리인데 너무 들뜨셨어요.”주혁재가 나서며 만류했고 곁에 있던 김수희도 미소 지으며 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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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넓디넓은 거실로 들어서자 신예린은 다시 한번 눈이 휘둥그레졌다.바닥은 새하얀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으로 매끈하게 이어져 있었고 천장에는 이탈리아산 샹들리에가 별빛처럼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주백색 불빛이 정교하게 조각된 벽면에 드리우자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학의 그림자가 일렁였다.고원숙은 신예린의 손을 잡아 소파에 앉히더니 미리 올려둔 상자를 하나씩 풀어헤쳤다.“이건 여행 중에 산 어린 왕자 장식품, 이건 유럽 기념주화, 이건 에덴 근위대 모자, 귀여워서 그냥 사봤어. 이건 초콜릿이야. 정말 맛있더라. 이건 노르트에서 산 향수, 그리고 이건 로사벨라 스텔라파크에서 가져온 열쇠고리...”눈 깜짝할 사이, 신예린의 눈앞에는 온갖 선물이 수북이 쌓였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중얼거렸다.“이, 이걸 전부 다 주시는 거예요?”옆에 앉아 있던 김수희가 웃으며 거들었다.“그래, 어머님이 손주며느리 생각만 하시느라 여행 가는 곳마다 꼭 선물을 고르셨거든.”신예린은 충격을 받으며 무심코 주시우를 바라봤다.그러자 주시우가 차분히 말했다.“할머니가 주시는 거니까 고맙게 받으면 돼.”신예린은 더는 사양할 수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정말 감사합니다, 할머니...”고원숙은 눈웃음을 지으며 신예린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별로 비싼 것도 아니야. 그냥 기념품 같은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도 돼. 마음에 든다면 말이야.”신예린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었다.“어우, 당연히 마음에 들죠. 너무 좋아요.”사실 그녀가 놀란 건 선물의 가격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의 정성 때문이었다.어디를 가든 자기 생각을 해줬다는 사실과 일부러 부담스럽지 않게 고른 선물들이라는 점이 마음을 울렸다.친구가 여행 갔다 와서 선물 챙겨오는 그런 감동 이상이었다. 중요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듯한 마음에 가슴이 살짝 뜨거워졌다.그때 주시우가 입을 열었다.“예린이도 선물 준비했어요.”순간 정신이 번쩍 든 신예린이 부랴부랴 말을 이었다.“맞아요! 제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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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주시우는 어색한 기색을 보이며 코끝을 슬쩍 만졌다.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지, 신예린은 새삼 낯설고도 재미있어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주시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주시우의 눈가에 은은한 웃음이 번지자 신예린은 얼굴이 달아올라 급히 시선을 돌려버렸다.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고원숙의 입가에도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어머나, 우리 손주 부부 정말 사이가 좋네? 아주 풋풋해!’고원숙은 예전부터 늘 잔소리를 달고 살았다.주시우가 외국에만 있다 돌아올 때면 혹여 외국인 며느리라도 데려올지 걱정했고 막상 혼자 덜렁 들어오면 ‘짝은 언제 데려올 거냐’ 하고 닦달했다.그런데 불과 며칠 뒤, 가족 단톡방에 혼인관계증명서 사진이 올라오자, 그 바람이 그렇게 빨리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저녁 시간이 되자 김수희가 먼저 움직였다.신예린이 매운 음식을 못 먹는다는 걸 미리 알고는 전부 담백한 요리로 식탁을 차려냈다.신예린과 주시우는 식탁에 나란히 앉았다. 주시우는 그녀가 혹시 긴장할까 싶어 틈틈이 반찬을 집어 챙겨주었다.그때 주혁재가 무심한 듯 물었다.“예린아, 너랑 시우가 결혼한 지도 꽤 됐는데... 아직 네 부모님 댁에는 인사도 못 갔구나. 우리도 시간 맞춰서 뵙는 게 어떻겠니?”그 한마디에 신예린은 젓가락을 들던 손이 덜컥 굳어버렸다.주시우가 그녀를 흘끗 보고는 곧장 말을 받았다.“예린이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해서요. 그 일은 차차 말씀드리죠.”그는 신예린이 차마 꺼내기 힘든 아픔을 담담하게 덮어주었다.주씨 가문의 사람들은 눈치가 빠른 이들이었다. 대략 짐작이 간 듯 김수희가 재빨리 말을 보탰다.“괜찮아. 그건 두 사람 결정에 따를게.”고원숙은 신예린을 바라보는 눈길에 짙은 연민을 담았다.‘아이고, 우리 손주며느리... 이렇게 사랑스러운 애가 혹시 어린 시절부터 홀대라도 받은 건 아닌가? 우리 집에서 태어났다면 귀하게만 자랐을 텐데.’그녀는 이내 손수 접시에 닭 다리 하나를 덜어주며 말했다.“예린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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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저녁 식사 후, 신예린은 고원숙 곁에 앉아 한참 이야기를 들었다.고원숙은 이번 여행에서 겪은 재미난 일들을 늘어놓으며 앞으로 방학이 되면 주시우더러 손주며느리를 데리고 꼭 여행을 다녀오라며 성화였다.그렇게 밤은 깊어졌고 고원숙은 일찍 쉬는 편이라 아홉 시쯤 방으로 들어가 씻고 누웠다.그 뒤로 신예린은 주시우를 따라 2층 끝 방으로 올라갔다.방문이 열리자, 정갈하게 정리된 큰 방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정리된 방 가운데 놓인 침대에는 커플용으로 보이는 잠옷 두 벌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먼저 씻을래?”주시우의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웠다.신예린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귀까지 붉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시선이 벌겋게 달아오른 목과 귀를 스치자, 주시우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불러.”“네...”신예린은 떨리는 마음으로 욕실에 들어가 씻었다.따뜻한 잠옷을 걸치고 나오니, 방은 조용했고 주시우는 없었다.그녀는 조심스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기다렸다.‘옛날 혼례 날 신부가 방 안에서 신랑을 기다리던 모습이 이랬을까.’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인기척이 없자, 목이 바싹 타들어 갔다.신예린은 물을 마시려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섰다.그 시각, 1층 거실 소파에는 주시우와 김수희가 마주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작은 박스에 반지가 들어 있었다. 심플면서도 정교한 꽃무늬가 둘려 있고 링 위에는 아홉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반짝였다.“네가 부탁한 반지야. 내가 드샹스에서 직접 챙겨왔어. Anne 디자이너 가게까지 가서 고른 거야. 네가 화려한 건 싫어하는 거 알고 심플한 디자인으로 골랐어. 마음에 들지?”Anne은 드샹스의 대표 디자이너로, 그녀의 작품은 언제나 심플하면서도 기품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주시우는 이번 여행에서 드샹스 매장에 들른다면 꼭 사 오라고 미리 부탁해 둔 터였다.주시우는 몸을 기울여 반지를 들어 올렸다. 불빛에 반짝이는 모양을 보며 머릿속으로 신예린의 손가락에 끼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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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어? 그럼...’신예린은 불현듯 무언가 떠올리고는 본능적으로 주시우를 바라봤다.‘설마 교수님 가족분들은 내가 임신한 걸 아직 모르시는 거야?’주시우는 그녀의 눈빛을 곧장 읽어내고는 헛기침했다.“엄마, 제가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깜빡했네요.”“응?”김수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시우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예린이 임신했어요.”“뭐, 뭐라고?”몇백억짜리 계약을 체결할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김수희가 이번에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계단에 서 있던 신예린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당장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잠잠하던 주씨 가문 본가 대저택은 다시 떠들썩해졌다.평소 일찍 잠자리에 드는 고원숙은 손주며느리의 임신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소식에 가족들은 다시 거실로 모여들었다.신예린은 주시우 옆에 바짝 앉아 고개를 숙였고 주시우는 태연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그 당당한 모습이 오히려 신예린을 더 긴장하게 했다.‘나도 저렇게 당당하고 싶다...’“이런 중요한 일을 왜 진작 말 안 했니? 우리 아무 준비도 못 했잖아.”김수희가 단호히 아들을 노려봤다.“오늘 저녁 식사를 차릴 때도 임산부가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고려를 못 했잖아.”“그건 제가 챙겼습니다.”주시우는 너무도 태연하게 대꾸했다.“너도 이제 어른이야. 교수까지 된 애가 어쩌자고 이렇게 경솔하니?”이번에는 주혁재까지 가세했다.“이렇게 큰일을 가족한테 숨기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일부러 숨긴 게 아니라 세 분 돌아오시면 얼굴 뵙고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여행 중에 괜히 신경 쓰시지 않게 하려고요.”“그런 줄도 모르고 예린이가 아직 어리다 싶어 괜히 조심하라고 잔소리까지 했으니...”신예린의 고개는 점점 더 숙어들이었다.‘제가 먼저 교수님께 달려들어 아이를 가지게 됐고... 그래서 결혼까지 하게 됐어요.’차마 사실대로 고백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연세 많은 할머니가 충격이라도 받으실까 두려웠다.주시우 역시 잠자코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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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주시우가 샤워를 마치고 방에서 나오니 신예린은 이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신예린은 옆자리를 넉넉하게 비워둔 채 눈을 감고 평온하게 잠든 듯 보였다.하지만 주시우는 곧 알아챘다.‘누가 이렇게 긴장한 표정으로 잠들 수 있겠어...’주시우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띤 채 천천히 침대로 다가갔다.침대가 살짝 꺼지는 순간, 신예린의 호흡이 딱 멈췄다.주시우는 침대에 올라서 이불을 들추고 몸을 눕혔다.‘내 옆에 누운 거야?’두 사람이 나란히 같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신예린은 차분한 얼굴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긴장으로 온몸이 굳었고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며칠 전 배운 기술들을 떠올리려 했으나 막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방 안은 고요했고 옆자리에 누운 주시우는 숨소리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견디다 못해 신예린은 살짝 눈을 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눈앞에는 주시우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듯한 얼굴에 날카롭고도 고운 이목구비는 마치 조각 같았다.그 순간 신예린의 심장은 튀어나올 듯 빨리 뛰었다.이토록 완벽한 남자가 지금 자기 옆에 누워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꿈꾸는 것만 같았다.그때 눈을 감고 있던 주시우가 불쑥 눈을 떴다.예상치 못하게 시선이 마주친 순간, 신예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지금 날 훔쳐보고 있었어?”낮게 깔린 주시우의 목소리가 귀를 스치자 신예린은 얼굴이 달아오르며 허둥지둥 변명했다.“아, 아니에요...”그러자 주시우는 낮게 웃었다.“다 들켰는데도 부정하는 걸 좀 봐.”주시우가 몸을 살짝 일으키자 헐렁한 잠옷의 깃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신예린의 눈에 들어온 건 도드라진 목젖과 선명한 쇄골이었다.순간, 신예린은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함이 몰려왔고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얼굴이 활활 달아오른 채 신예린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교, 교수님, 저...”그 말에 주시우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교수님?”주시우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갈색빛 눈동자가 반짝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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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신예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잘 자요.”그러자 방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머리맡의 작은 스탠드 조명이 은은히 빛을 뿜고 있었고 긴장으로 굳어 있던 신예린의 마음도 서서히 풀어지자 이내 졸음이 몰려왔다.하지만 신예린 옆에 누운 주시우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금 전 그녀가 연거푸 내뱉은 여보라는 말은 아직도 가슴 속에 열기를 남기고 있었다.이번에 굳이 주씨 가문 본가에서 하룻밤을 보내겠다고 한 건 사실 주시우의 작은 욕심이었다. 신예린이 과연 같은 방을 쓰는 걸 거부하지는 않을지 확인하고 싶었다.그때 옆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고 신예린은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곤히 잠든 모양이었다. 주시우가 무슨 짓을 할 거라 의심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주시우는 몸을 조금씩 신예린의 쪽으로 움직였다. 마침 신예린이 몸을 돌려 자더니 자연스럽게 주시우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그 순간 주시우는 몸이 단단히 굳었다. 부드러운 향기와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 와서 도저히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곧 주시우는 천천히 긴장을 풀고 커다란 손으로 신예린의 허리를 감싸안았다.신예린은 무의식중에 따뜻한 온기를 찾아 주시우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그러자 희미한 불빛 속에서 주시우의 입가가 가볍게 올라갔다.그렇게 한밤이 고요히 흘러갔다.아침이 밝았을 때 신예린은 눈을 떴다. 낯선 방 천장이 눈에 들어오자 순간 멍해졌지만 곧 자신이 어디 있는지 떠올랐다. 방 안에는 자신 혼자뿐이었다.“어?”급히 시계를 보니 어느덧 아홉 시 가까이 되어 있었다.“세상에... 시집에 와서 첫날부터 이렇게 늦잠을 자다니...”신예린은 속으로 울고 싶어졌다.‘주 교수님은 왜 날 깨우지도 않은 거야...’평생 가장 빠른 속도로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하지만 거대한 저택은 햇살만 가득 비출 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설마... 나 혼자 두고 가버린 건 아니겠지?’불안해진 신예린은 앞마당에서 들려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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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조금 전만 해도 고원숙에게는 놀리지 말라더니 정작 주시우 자신이 먼저 신예린을 놀리고 있었다.신예린은 어디서 난 용기인지 손가락으로 주시우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주시우는 아래로 시선을 떨구며 수줍게 붉어진 신예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뒤편에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 장미와 어우러진 모습은 더욱 눈부셨다.주시우는 목젖을 한번 삼키더니 허리를 숙여 활짝 핀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신예린의 귀 옆에 꽂아 주었다.차가운 꽃잎이 스친 순간, 신예린은 화들짝 놀랐다.“선물이야.”주시우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속삭였다.“꽃은 아름다운 여자 곁에 있어야 제격이지.”신예린의 심장은 그 순간 멎을 듯 요동쳤다.뒤에서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고원숙은 속으로 혀를 찼다.‘시우도 참, 내가 애지중지 키운 꽃으로 아내를 꼬시는구나. 꽃을 핑계 삼아 혀도 잘도 굴리네. 잘하네... 정말.’아침 식사를 마친 뒤 신예린도 꽃밭 가꾸기에 합류했다. 고원숙은 신이 나서 하나하나 꽃의 이름과 특징을 알려주었고 그중에는 신예린이 들어보지도 못한 값비싼 종류도 많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떤 꽃은 가격이 신예린의 한 달 월급과 맞먹을 정도였다.주시우가 귀에 꽂아 준 장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곱게 피어난 꽃잎은 신예린의 얼굴빛과 어울려 더욱 화사했고 코끝에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았다.옆에서 설명을 귀담아듣는 신예린을 보며 주시우는 손에 들고 있던 물 호스를 건넸다.“예린아, 한번 해볼래?”주시우의 그런 모습에 고원숙은 또 눈을 굴렸다.‘수십, 수백만 원짜리 꽃들을 내가 애지중지 길러놨더니 이 녀석은 그걸 가지고 연애질이나 하네.’신예린이 막 손을 뻗으려는 순간, 주시우는 장난스레 고개를 기울이며 호스의 방향을 신예린한테 돌렸다.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려는 찰나, 신예린은 비명을 지르며 본능적으로 주시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작은 두 손이 주시우의 팔을 꽉 움켜쥐고 온몸이 그의 가슴에 기댔다.물방울이 흩날리자 주시우의 눈가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번졌고 눈치 빠른 고원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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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주시우는 평생 여자를 데리고 쇼핑하러 다녀본 적이 없었으니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사실 알 길이 없었다.주시우도 몇 년 후 부메랑처럼 이런 말이 자기에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때야 비로소 아버지가 왜 그런 투정을 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터였다.옆에서 이 대화를 듣던 신예린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그렇게 가족들과의 이야기는 정리되었고 따뜻한 배웅 속에 신예린과 주시우는 주씨 가문 본가를 나섰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 사뭇 달랐고 신예린은 무의식적으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낮은 목소리였지만 주시우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어왔다.흥얼거린 건 아이들이 부르기 좋아하는 동요였다.주시우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그렇게 좋아?”신예린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네.”단순히 주시우의 가족들이 자신을 인정해 준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시우의 가족이 주시우처럼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기쁘고 안도감을 줬다.주시우는 한 손으로 핸들을 잡으며 느긋하게 말했다.“네가 좋으면 됐어.”집에 도착한 뒤, 신예린이 책을 읽으러 서재로 들어가려는데 주시우가 불렀다.“잠깐만.”돌아보니 주시우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고 신예린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박힌 한 쌍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디자인에 은빛 위로 잔잔한 빛이 흘렀다.“워낙 갑작스럽게 결혼해서 이런 걸 준비할 겨를이 없었어. 그래서 이번엔 아예 엄마가 드샹스에서 가져오게 했어.”주시우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부드러웠다.신예린은 순간 숨이 막히듯 목소리가 갈라졌다.“저... 지금은... 차마 이런 걸 끼고 다닐 용기가 없어요.”“알아. 끼지 않아도 돼. 하지만 없는 건 안 되지.”주시우는 상자에서 반지를 꺼내 그녀를 바라봤다.“한번 껴볼래?”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신예린이 손을 내밀자 주시우가 먼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차갑고 단단한 손끝이 닿는 순간, 신예린은 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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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다음 날 아침 식탁에 앉았을 때, 신예린은 주시우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발견했다.사람들의 시선이 언제나 주시우에게 쏠려 있는데 하필 그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져 있으니 아마 오래 지나지 않아 학교 전체에 소문이 퍼질 게 뻔했다.바로 그게 신예린이 감히 반지를 끼지 못한 이유였다.예상대로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옆자리에서 낮은 목소리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세상에... 주 교수님이 약지에 반지를 끼셨대.”“뭐라고? 진짜야?”“전에는 없었잖아? 그럼... 결혼하신 거야?”“주말 사이에 유부남이 되신 거야? 말도 안 돼.”“아니야. 절대 아니야. 주 교수님은 아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분이야. 난 안 믿어.”“믿든 말든... 만약 정말 결혼하셨으면?”“그럼 사모님은 누굴까? 분명 주 교수님만큼 뛰어난 사람이겠지.”그 모든 대화가 한마디도 빠짐없이 신예린의 귀에 들어왔고 신예린은 괜히 코끝을 만지며 눈을 피했다.‘주 교수님의 아내가 바로 옆에서 너희들의 수다를 몰래 듣고 있는데...’결국 주시우가 결혼했다는 소문은 온 학교에 삽시간에 퍼졌다.그중에서도 유독 아는 게 많은 사람은 바로 학생처 담당자인 한영빈은 속으로 우쭐거렸다.동료들이 도대체 주 교수님의 아내가 누구일지 수군거릴 때마다 한영빈은 신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마음껏 추측들 해봐라. 누구도 맞힐 수 없을 걸... 아마 상상도 못 할 테지.’비밀을 혼자 간직한다는 건 정말이지 달콤하면서도 묘한 기분이었다.도서관이든 복도든 신예린이 가는 곳마다 학생들은 주시우의 결혼설로 떠들썩했다.하필이면 오후 첫 수업은 주시우의 강의였다.늘 주시우의 수업을 가장 열정적으로 듣던 송지유는 오늘도 가장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다. 잘생겨서만이 아니라 신예린과 주시우가 부부라는 사실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은근한 기류를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오늘은 특히 더 구경꾼처럼 몰려든 학생들로 대형 강의실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신예린은 배를 가리듯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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