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터닝포인트 / Chapter 131 - Chapter 140

All Chapters of 터닝포인트: Chapter 131 - Chapter 140

151 Chapters

제131화

신예린은 옷 속에 숨겨 둔 반지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목걸이에 걸어 아침부터 목에 차고 있었는데 그 작은 금속의 감촉이 닿을 때마다 달콤한 기운이 다시금 피어올랐다. 겨울이라 두툼한 옷 속에 감춰져 있어 들킬 염려도 없었다.시간은 흘러 수업이 끝나고 주시우는 PPT를 닫으며 언제나처럼 말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수업 후에 질문하세요.”그런데 그 순간, 교실 앞줄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몇몇 학생들이 서로 등을 떠밀다 못해 결국 한 학생이 용기를 내어 일어섰다.“주, 주 교수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주시우는 가볍게 눈을 들어 학생을 바라보았다.“말해보세요.”학생은 얼굴이 긴장으로 굳은 채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시선을 그의 손가락으로 옮겼다.“교수님, 혹시... 결혼하신 겁니까?”순간, 대형 강의실 안이 술렁였고 누구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질문을 누군가 던진 것이다.모두가 숨을 죽이며 대답을 기다렸다.‘설마... 아닐 거야. 교수님이 갑자기 반지를 낀 건 그냥 요즘 유행하는 액세서리겠지.’학생들의 눈빛은 간절하게 주시우가 아니라고 대답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그 순간, 신예린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질문이 나오자마자 주시우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에게 꽂힌 것을 느꼈고 정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설마... 여기서 우리 관계를 인정하려는 건 아니겠지?’교실은 고요했고 학생들은 숨소리마저 멈춘 듯했다.주시우의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듯 신예린은 책상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늘 그렇듯 주시우는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도 여전히 신예린을 귀신같이 찾아냈다.주시우의 입술이 천천히 말려 올라갔고 질문한 학생을 향해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궁금해요?”그러자 교실 안 수십 명이 일제히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앞줄에 앉은 송지유는 두 눈이 반짝였다.‘그래... 드디어 올 게 왔군! 교수님이 드디어 공식 발표하시려는 거야. 예린이가 사모님이라는 사실이 이제 모두에게 알려지는 거야!’심장이 쿵쿵 뛰며 송지유는 머릿속으로 신예린
Read more

제132화

주시우가 교실을 나와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마주 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약리학을 맡고 있는 유민수 교수였다. 쉰을 훌쩍 넘긴 나이에 정수리 앞머리는 이미 훤히 벗겨졌지만 유민수는 포기하지 못한 듯 언제나 작은 빗을 들고 다니며 틈만 나면 몇 가닥 남은 머리칼을 이리저리 빗어 넘겼다.“오, 주 교수님. 이제 수업 막 끝났나 보군요.”유민수는 반갑게 웃으며 다가오자 주시우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네. 유 교수님.”“이제 연구실로 돌아가시는 길인가요?”“네.”“주 교수님은 참 부지런하시네요. 부임하신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다른 교수들이나 학생들한테 평판이 아주 좋더군요.”“그저 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오히려 유 교수님의 성실함이 제가 본받아야 할 부분이죠.”형식적인 덕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젊고 촉망받는 동료에게 칭찬을 들으니 유민수의 마음은 은근히 들떠 있었다. 입꼬리를 잔뜩 올린 유민수의 시선은 곧 주시우의 왼손으로 향했고 반지는 은빛이 반짝였다.오늘 사실 유민수는 임무를 가지고 나왔다. 교수실에서 다들 주시우의 결혼 여부가 궁금했지만 누구도 직접 물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결국 나이가 제일 많은 유민수가 이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았다. 유민수는 겉으로는 마지못한 척했지만 사실은 그도 역시 속이 근질거렸다.유민수의 딸이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은근히 주시우와 인연을 맺어보려는 기대도 품고 있었는데 만약 이미 결혼한 거라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셈이었다.유민수는 슬며시 헛기침하고는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주 교수님, 남의 사생활에 참견하는 것 같아 좀 송구스럽습니다만 나이 들수록 괜히 궁금한 게 많아져서요... 사실은 꼭 한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말씀하시죠.”주시우는 여전히 예의 바른 목소리였고 유민수는 고개를 숙여 주시우의 반지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저... 혹시 결혼하신 겁니까?”주시우는 손끝으로 반지를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네.”그 순간 유민수는 마음속에서 무
Read more

제133화

신예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기억 못 할 리가 있겠어요. 맨날 같이 다니고 게다가 제 뱃속에는 주 교수님의 아이까지 있는데...’하지만 주시우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내저었다.“잘 모르겠네요.”‘쳇, 연기 능력 하나는... 누가 교수님을 따라가겠어요.’신예린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억지로 표정을 감췄다.유민수는 자신이 두 사람 사이의 알 수 없는 기류에 휘말린 줄도 모른 채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이 학생은 꽤 괜찮습니다. 제가 몇 달 동안 수업을 했는데 질문을 던지면 늘 막힘없이 대답하더군요. 얼마 전 지식 경시대회에서도 1등 했을걸요? 앞으로 병원에 이런 인재가 있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뜻밖의 칭찬에 신예린은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옆에서 들려온 주시우의 말이었다.“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유민수는 어리둥절하게 주시우를 바라보았다.‘뭐라는 거야? 내가 칭찬해 줘서 고맙다고? 분명 신예림 학생을 두고 한 말이었는데... 주 교수님은 왜 본인 일처럼 당연히 받아들이는 거지?’신예린 역시 깜짝 놀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참, 교수님도... 일부러 티 내고 싶은 건가?’잠시 후 주시우는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아, 제 말은요. 이 학생이 유 교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뭐야? 이 어설픈 핑게는 누가 믿겠어...’누가 들어도 억지스러운 핑계였지만 그 말이 주시우의 입에서 나오니 이상하게 또 고개가 끄덕여지는 분위기가 되었다.신예린은 황급히 몸을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감사합니다. 유 교수님.”“그래, 그래. 다음에는 나를 보면 귀신 본 것처럼 피하지 말고 당당하게 다녀. 주 교수님이 네 쪽을 한번 보지 않았으면 난 끝까지 예린 학생이 있는 줄도 몰랐을 거야. 난 그냥 질문 자주 하는 편이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야.”신예린은 속으로 반박했다.‘그게 더 무섭겠지요...’신예린은 곁눈질로 주시우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유민수에게 들킨 게 결국 주시우 때문이었다는 사
Read more

제134화

신예린이 막 불을 끄고 이불을 당겨 덮으려던 순간,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신예린은 고개를 들었다.신예린이 서둘러 불을 다시 켜고 문을 열자 베개를 품에 안은 주시우가 문 앞에 서 있었다.“교수님?”당황스런 표정으로 서 있는 신예린 앞에서 주시우는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방 보일러가 고장 났어. 오늘 밤은 여기서 지내도 될까?”“네?”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멍해진 신예린은 눈만 크게 떴고 주시우는 여전히 담담했다.“나이 들면 추위를 더 타는 법이잖아.”‘난 아직 어리니까 추워도 괜찮은데...’신예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우왕좌왕하다가 얼떨결에 몸을 비켜섰다.‘주 교수님이... 나랑 같이 자겠다고?’신예린은 순간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방 안으로 들어선 주시우가 멈춰서더니 신예린을 돌아보았다.“혹시 불편해? 네가 불편하다면 그냥 돌아갈게. 좀 추워도 버티면 되니까.”은근히 물러서는 듯한 말투가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었다.“아, 아니에요!”신예린은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속삭였다.“괜찮아요.”‘결국 이 집도 주시우의 집인데 내가 뭐라 할 수도 없잖아.’“그럼 잘까?”부드러운 불빛이 주시우의 얼굴선을 감싸며 신비로울 만큼 또렷한 그림자를 만들었다.그러자 신예린의 뺨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네...”두 사람은 나란히 침대에 누웠지만 신예린의 마음은 좀처럼 차분해지지 않았다.지난번 본가에서의 하룻밤과 달리 이번에는 주시우가 직접 먼저 제안한 자리였다.물론 보일러 고장이 원인이었지만 말이다.“네 자리 너무 좁진 않아?”침대 가장자리에 바싹 붙어 있던 신예린은 조용히 대답했다.“괜찮아요.”사실 신예린은 자신도 답답했다. 마음은 주시우와 가까이 가고 싶으면서도 감히 다가가지 못하는 이 모순적인 심리는 그녀를 힘들게 했다.주시우의 앞에서 경솔한 행동을 했다가 시험 때 큰코다칠까 싶어 더 움츠러들었다.그때, 이불 속에서 무언가 스쳤고 따뜻한 손끝이 살짝 신예린의 손가락에 닿았다.“이건...
Read more

제135화

신예린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주 교수님이... 날 안은 채로 자겠다는 거야?’이건 너무 은밀하고도 아찔한 상황이었다.주시우는 신예린의 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는 걸 느낀 듯 거의 귀에 닿을 만큼 가까이 속삭였다.“아까처럼 또 떨어질까 봐 그래. 혹시... 이런 게 불편해?”너무도 그럴듯한 핑계였지만 신예린은 그대로 잡혀 버렸다.“아니요. 불편하지 않아요.”어둠 속에서 주시우의 입가가 미묘하게 올라갔다.“잘 자.”주시우의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는 듣는 순간 심장을 파고들었다.신예린은 얼떨결에 대답했다.“네. 잘 자요.”‘아... 세상에... 주 교수님이 날 안고 자고 있다니...’신예린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자기 심장 뛰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릴 만큼 긴장감에 휩싸였다.‘진정하자... 진정... 그냥 잠만 자는 거잖아. 이미 같이 누운 적도 있었고 그때도 괜찮았잖아. 이번에도 별거 아닐 거야.’애써 마음을 다잡던 신예린은 결국 서서히 밀려드는 졸음을 버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곧 옆에서 신예린의 잔잔한 숨결이 고르게 이어지자 그제야 눈을 감고 있던 주시우는 조용히 눈을 뜨며 신예린을 바라보았다.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사실 주시우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다.신예린의 체온과 향기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스며들면서 주시우의 코끝을 간질였다.주시우는 지난번 본가에서 신예린과 한 침대에 누웠을 때를 떠올렸다.주시우는 예전에 괜히 젠틀한 척 방을 따로 쓰자고 했던 걸 후회했고 그런 잘못된 선택 때문에 지금은 억지로 핑계를 만들어야 겨우 신예린의 곁에 있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신예린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얼마 전 허리에 둘렀던 주시우의 팔을 조심스레 치워내기도 했다.하지만 주시우는 개의치 않았다.‘괜찮아. 날 거부만 하지 않으면 돼. 익숙해지는 건... 며칠이면 충분하겠지.’주시우는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신예린의 허리에 올리고 턱끝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스치며 만족스레 눈을 감았다.‘보일러는... 일단
Read more

제136화

“에취!”식당 안에서 송지유가 크게 재채기했다.“왜 그래? 감기 걸린 거 아니야?”맞은편에 앉아 있던 신예린이 걱정스레 물었다.지금은 한창 식사 시간이라 넓고 환한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붐볐고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에 시끌벅적했고 빈자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송지유는 간질간질한 코를 문지르며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기숙사 보일러가 고장 나서 요즘 계속 추웠거든. 아마 그래서 감기에 걸린 것 같아.”그러면서도 송지유는 슬쩍 몸을 멀리하며 말했다.“너는 나랑 너무 붙어 다니지 마. 넌 임산부잖아. 감기 옮으면 안 돼.”‘아니... 요즘 보일러는 왜 이렇게 잘 고장 나는 거야.’신예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신고는 안 했어?”“했지. 학교에서는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고... 며칠째야. 그래서 원래는 소윤이랑 새로 들어온 룸메이트랑 돈을 모아 외부 수리기사 불러볼까 했는데 소윤한테 얘기 꺼내니까 자긴 필요 없다고 하는 거야. 진짜 화가 나서 죽을 뻔했어. 고장 나기 전에는 누구보다 잘 쓰더니 말이야.”“그럼 새 룸메이트는 뭐래?”“걔도 정소윤의 성격을 못 견디겠대. 결국 우리 둘이 버티다 버티다 안 돼서 사감실에 다시 말했어. 그래서 오늘 기사님 오기로 했어. 어차피 추운 걸 어쩌겠어... 그냥 둘이서라도 비용을 나눠야지. 보일러 있는 줄 알고 두꺼운 이불도 안 챙겨왔는데 말이야.”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잘했어. 괜히 참다가 더 고생하지 말고... 감기가 심해지기 전에 약도 좀 먹어.”“응. 이따 사러 갈 거야.”그때 문득 신예린 머릿속에 뭔가 스쳤다.“잠깐. 기사님은 언제 불렀어?”“어젯밤에 불렀지.”“그럼 언제 와?”“오늘 바로 온대. 나 수업 있어서 새 룸메이트가 대신 숙사에 남아 있기로 했어.”“어제 불렀는데 오늘 바로 와?”“응. 왜?”송지유가 의아하게 되묻자 신예린은 작게 중얼거렸다.“그럼... 주 교수님 댁은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거지?”“뭐라고?”“아니야.”신예린은 얼른 말을 돌렸다.“혹시 그 기
Read more

제137화

멀리서 들려오던 두 사람의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또렷해졌다.“도준아, 네가 어떻게 아이가 네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난 너 말고는 다른 남자랑 그런 적 없단 말이야.”강효은의 목소리는 울음에 젖어 떨리고 있었다.여도준은 짜증 섞인 얼굴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낮게 내뱉었다.“내가 언제 내 자식 아니라고 했어?”“그럼 방금 태도는 뭐야? 내가 사실을 말했을 때부터 넌 줄곧 피하려고만 했잖아.”“누가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 게다가 우리 이미 헤어진 사이인데...”“좋아. 결국 책임질 생각 없다는 거네? 내가 이 일 학교에 알린다 해도 괜찮아?”“잠깐만. 제발... 효은아, 진정 좀 해봐.”학교에 알린다는 말에 여도준은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내가 어떻게 진정할 수 있겠어! 지금 어떤 상황인데...”강효은의 눈은 금세 붉어져 있었고 여도준은 애원하듯 말했다.“우리는 아직 학생이잖아. 이 아이는 가질 수 없어.”“네가 그때 날 건드릴 때는 우리가 학생이라는 사실 잊었어? 여도준, 이제야 네 진짜 얼굴을 알겠어. 넌 정말 무책임한 쓰레기야. 난 모두한테 네가 어떤 놈인지 알게 해줄 거야.”그 말에 여도준의 얼굴빛이 순간 새하얘졌다.“하지 마. 다 내 잘못이야. 우리가 안 헤지면 되잖아. 평생 같이 있자. 하지만 제발 약속해 줘. 이 아이는 정말 안 돼. 학교에 들키면 우리 앞길은 끝장이야. 알지? 효은아, 우리 같이 병원 가자... 응?”두 사람의 모습은 점점 멀어졌고 언성이 높던 대화도 차츰 희미해졌다.큰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신예린은 그제야 몸을 움직였다.방금 대화만 들어도 강효은이 여도준의 아이를 가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도준은 그 책임을 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예전 같았으면 충격적인 일이라며 크게 흔들렸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의 신예린은 자기 뱃속 아이를 떠올렸다. 대학 교수의 아이를 품고 있는 자신에 비하면 여도준의 무책임함 따위는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신예린은 본능적으로 배에 손을 얹
Read more

제138화

“교수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신예린은 눈앞의 주시우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조명 아래서 마주한 주시우의 시선은 어딘가 은근히 흐릿해 보였고 신예린은 그 눈빛에 담긴 의미를 다 헤아리기도 전에 주시우가 입을 열었다.“내 생각에는 이 방의 보일러는 고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아.”주시우가 말하면서 주름진 소매를 가볍게 걷어 올리자 매끈한 손목이 드러났고 흰빛 도는 손가락은 방금까지 신예린이 쥐고 있던 리모컨을 자연스럽게 움켜쥐었다.그 말에 멍해진 신예린은 눈을 깜빡였다.“방마다 따로 보일러를 켜면 전기세만 늘어. 곧 아이가 태어나면 돈 들어갈 데가 많을 텐데 차라리 그 돈을 아껴서 아이에게 쓰는 게 낫지 않겠어?”주시우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시선은 담담하면서도 묘하게 진심이 묻어났다.“네 생각은 어때?”“저, 저는... 당연히 괜찮아요.”신예린은 간신히 말했지만 속으로는 많이 혼란스러웠다.‘집을 사면서 6,000만 원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내놓던 교수님이... 겨우 전기세를 아끼겠다고 이런 말을 한다니.’“그럼 가자.”주시우는 리모컨을 내려놓고는 신예린의 손을 잡아 방 밖으로 걸어 나갔고 뒤돌아 문을 꼭 닫았다.“...”문이 닫히는 순간, 신예린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자신도 믿기 힘든 일이라 그냥 착각일 거라고 넘겼다.신예린이 멍하니 서 있는 사이에 주시우는 그녀를 서재 앞까지 데려왔다.주시우는 가볍게 손으로 신예린의 머리칼을 쓸어내리며 말했다.“들어가서 책 봐. 이따가 따뜻한 우유 데워 줄게.”“네...”신예린은 얼떨결에 대답하고는 서재로 들어갔고 몇 걸음 가다 다시 고개를 돌리며 조심스레 불렀다.“교수님.”주시우는 순간 움찔하며 혹시 들켰나 하는 마음에 숨을 고르듯 신예린을 바라봤다.그러나 신예린은 단순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주말에 지유랑 쇼핑 하러 가기로 했어요.”“그래? 어디로 가는데? 내가 태워 줄까?”“아니요. 그냥 택시 타고 가도 돼요.”“알았어.”주시우는 더는 말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Read more

제139화

신예린은 미소를 머금은 채 주시우가 내민 따뜻한 우유를 받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입술을 살짝 적신 신예린은 컵을 들어 몇 모금 마셨다. 그러면서도 몰래 주시우를 훔쳐보다가 시선이 마주쳤지만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았다.눈빛 속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주시우 역시 말을 아끼며 깊고 뜨거운 시선으로 신예린을 바라봤다. 눈매 끝에는 알 수 없는 다정함이 어려 있었고 짧은 순간 두 사람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히 시선을 맞췄다.결국 먼저 눈길을 피한 건 신예린이었다.짙은 기류가 둘 사이를 감돌며 공기마저 아득하게 달콤해졌다.신예린은 컵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다시 우유를 한 모금 삼켰고 그럼에도 입가에 맺힌 미소는 좀처럼 감춰지지 않았다.어느덧 주말이 되었다.신예린은 택시에서 내려 송지유와 만나기로 한 쇼핑몰 앞으로 향했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는 송지유 이름이 떴다.“예린아, 나 도착했어. 지금 남문 쪽이야. 너는?”“나도 막 내렸어.”“널 봤어. 내가 보여? 이쪽이야!”고개를 든 신예린은 손을 흔드는 송지유를 발견했고 전화를 끊고 그녀에게 걸음을 옮겼다.송지유는 곧장 다가와 신예린의 팔을 끼며 반가운 얼굴을 내비쳤다.“우리 진짜 오랜만에 같이 쇼핑하는 것 같아. 너는 맨날 공부 아니면 아르바이트였잖아.”신예린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어쩔 수 없지. 돈 벌어야 하니까.”“근데 이제는 필요 없잖아? 주 교수님이 있잖아.”송지유의 농담에 신예린은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난 지금까지 교수님한테 받은 걸 다 적어두고 있어. 언젠가 벌어서 꼭 갚을 거야.”“에이, 너희 부부 사이에 뭘 그렇게 따져?”“앞일은 아무도 모르잖아. 교수님이 이렇게 많이 도와주신 것만으로도 고맙고... 그래서 더더욱 기록해 두는 게 맞는 것 같아.”송지유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넌 참... 가끔 보면 너무 고지식하다니까.”그러나 신예린은 대답 대신 은근한 미소를 지었고 그 표정
Read more

제140화

신예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주 교수님은 그런 분 아니야.”“아니야, 예린아. 넌 남자를 몰라. 아무리 신사라도 결국은 사람이잖아. 그러니 욕망이 없을 순 없지. 아니, 그렇지 않으면 네 뱃속 아기는 어디서 왔겠어? 그날 밤도 너와 몸과 마음을 나눴던 거잖아.”“...”신예린은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며 맞받아칠 말을 잃었다.벌써 몇 달이 지난 일이건만 주시우를 처음 만난 그날 밤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랐다.그때의 주시우는 지금처럼 차분하고 고요한 남자가 아니었다.거친 숨결에 낮게 잠긴 목소리, 그리고 거칠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손길까지 생각해 보니 지금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게다가 그날 밤 이후에 솔직히 한 번쯤은 다시 주 교수님과... 자고 싶다는 생각 안 해봤어?”“야!”송지유의 말은 결정타였다. 신예린은 얼굴을 감싸 쥐듯 두 손으로 송지유의 입을 틀어막았다.“그만해! 제발 그만하라고. 들어가서 빨리 쇼핑이나 하자.”입이 막혀버린 송지유는 말할 수 없었고 대신 눈을 껌뻑이며 알겠다는 신호만 보냈다.신예린이 손을 풀자 송지유는 다시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웃으며 속삭였다.“얼굴이 새빨갛네. 내 말 듣고 뜨끔했지? 혹시 교수님 생각하면서 몰래 상상한 적 있는 거 아냐?”“그만 안 해? 계속할 거면 나 그냥 집에 가버릴 거야. 너 혼자 쇼핑해!”신예린은 다시 송지유의 입을 틀어막고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송지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웃음 속에는 여전히 장난기가 가득했다.신예린은 애써 못 본 척했다.두 사람은 매장을 하나하나 둘러보기 시작했고 신발만 사려던 송지유는 옷까지 몇 벌 더 고르며 신나게 쇼핑을 즐겼다.곧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예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이 당연했다.점심 무렵이 되자 두 사람은 식당을 찾아 들어갔고 손에는 이미 쇼핑백이 여러 개 들려 있었다.“너 힘들지 않아? 혹시 몸이 무겁거나 피곤하면 말해. 그냥 집에 가도 돼.”송지유가 걱정스레 물었다.“아직은 괜찮아.”신예린은 잔잔히 대답했
Read more
PREV
1
...
11121314151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