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터닝포인트 / Chapter 11 - Chapter 20

All Chapters of 터닝포인트: Chapter 11 - Chapter 20

100 Chapters

제11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신예린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안에서 주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방 안에는 주시우 말고도 다른 교수 한 분이 함께 있었다.“교수님, 안녕하세요.”신예린은 급히 인사했다.그 교수는 신예린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시우에게 말했다.“학생이 찾아왔네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진행하죠.”그는 그렇게 말한 뒤 자리를 떠났다.사무실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게 됐다.“우선 앉아.”주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을 가리켰다.“괜찮아요... 신청서만 받아 가려고요.”신예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앉았다가 가. 요즘 얼굴도 잘 못 봤는데.”주시우는 그 말을 마치고 찻잔 쪽으로 가더니 지난번처럼 캡슐 밀크티 한 상자를 꺼내 포장을 뜯었다.그 모습을 보고 난 신예린은 조용히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곧 방 안에는 달콤한 밀크티 향이 퍼졌다.주시우는 정성스레 탄 밀크티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뜨거우니까 조심해.”“고마워요.”신예린은 조심스럽게 찻잔을 받아서 들었다.신예린은 단 음식을 유난히 좋아했다. 묘하게도 달콤한 맛은 언제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힘이 있었다.조심스레 밀크티 한 모금 마신 순간, 마주 앉은 주시우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괜히 민망해졌다.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어색하게 눈을 피했다.평소 그와 문자를 주고받을 때는 편하게 웃고 농담도 던졌는데, 막상 이렇게 직접 마주 앉으니 ‘교수’라는 그의 직위 때문인지 괜히 긴장되어 몸까지 굳는 느낌이었다.그런 그녀의 어색함을 눈치챘는지, 주시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요즘 컨디션은 어때?”신예린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찻잔을 꼭 붙잡았다.“아기는?”주시우의 시선이 그녀의 아랫배로 자연스레 내려갔다.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신예린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괜찮은 것 같아요.”그건 진심이었다.검진 결과만 아니었다면 자신이
Read more

제12화

한영빈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최연소 교수 주시우가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상대가 그의 학생이라는 건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연예인 열애설보다 훨씬 더 놀라운 뉴스였다.‘말도 안 돼... 주시우 교수가 결혼했다고? 그런 얘긴 한 번도 못 들었는데? 게다가 상대가 우리 학교 재학생이라고? 설마 내가 처음으로 이 소식을 알게 된 건가?’주시우가 재출력된 신청서에 깔끔하게 사인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영빈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감사합니다.”서명을 마친 주시우가 젠틀한 동작으로 서류를 건네자, 한영빈은 멍하니 바라보다가 황급히 받아서 들었다.“교수님, 예린 학생의 기숙사 퇴사 신청은 빠르게 승인 처리하겠습니다. 바로 생활관 쪽에도 전달해 둘게요.”“수고 많으십니다.”주시우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아, 아닙니다!”손사래를 치며 허둥지둥 대답한 한영빈은 두 사람이 사무실을 나서려 하자 안절부절못하다가 뭔가 떠오른 듯 다급히 휴대폰을 찾았다.‘이 특급 뉴스를 단톡방에 올릴까 말까... 이건 진짜 대박인데!’“한영빈 담당자님?”바로 그때, 주시우의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휴대폰을 들고 있던 한영빈은 깜짝 놀라 펄쩍 뛰듯 돌아섰다.“교, 교수님... 말씀하세요.”주시우는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아직은 공개할 생각 없습니다. 혹시라도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당분간은 비밀로 부탁드릴게요.”그 순간, 한영빈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갑자기 뜨겁게 느껴졌다.주시우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눈빛만큼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웠다.마치 중대한 사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한영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두 분이 직접 밝히기 전까진... 전 무덤까지 가져갑니다.”그의 눈빛은 마치 조직에 충성 맹세라도 하는 듯 진지했고, 주시우는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이해해 주셔
Read more

제13화

방금 그 말 한마디에 주시우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멀어져가는 신예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싱긋 웃으며 돌아섰다....“뭐라고? 기숙사에서 나갈 거라고?”신예린이 기숙사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퇴사 신청을 하고 오는 길이라고 얘기를 꺼내자, 예상대로 송지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그녀는 신예린의 손을 덥석 붙잡고 물었다.“왜 나가는데? 어디로 가는데? 집에 다시 들어가는 거야? 아니, 그 집에 뭐 하러 가! 예린아, 너까지 나가면 난 어쩌라고? 우리 같이 늙어가자고 했잖아! 이렇게 갑자기 배신하는 거야? 날 여기 혼자 두고 정소윤이랑 맞짱 뜨라고? 나보고 죽으라는 거야 뭐야...”결국 송지유는 신예린을 와락 끌어안고 눈물 콧물 범벅이 됐다.그 모습을 지켜보던 신예린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굳혔다.‘이쯤 되면 솔직히 말해야겠어. 어차피 오래 숨길 수도 없는 일이었어. 나중에 알게 되면 지유가 충격받아서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모르니...’“지유야... 나 사실 너한테 말 못 한 비밀이 있어. 좀 놀랄 수도 있는데... 마음의 준비 좀 해.”“뭔데?”갑작스레 진지해진 신예린의 표정에 송지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신예린은 입술을 꾹 다물고 숨을 깊게 들이켠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사실 결혼했어.”“...”송지유의 눈이 그야말로 휘둥그레졌다.“결혼? 너 남자친구도 없잖아. 누구랑 결혼했다는 거야? 예린아, 지금 장난치는 거지?”“장난 아니야. 진짜 결혼했어.”신예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그 진지한 눈빛에 말문이 막힌 송지유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냈다.“누구랑? 이름은? 나이는? 잘생겼어? 학생이야? 직장인이야? 설마 유학파? 아니 잠깐, 예린아... 너 지금 헛소리하는 거 아니지?”정신없이 캐묻는 송지유 때문에 신예린은 눈을 감으며 폭탄 같은 말을 내뱉었다.“나... 주 교수님이랑 결혼했어!”송지유는 잠깐 멍하니 있다가,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안도한 표정을 지
Read more

제14화

연달아 날아든 폭탄선언에 송지유는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그대로 의자에 푹 쓰러졌다.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손으로는 코밑 인중을 꾹꾹 눌러댔다.“살려줘... 나 지금 인공 호흡 필요해. 심폐소생술이라도 해, 빨리!”결국 신예린은 천천히 요점을 정리해 가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려줬다.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송지유는 바닥을 치며 탄식했다.“그날 교수님을 만난 게 왜 하필 너였냐고! 왜 내가 아니었냐고!”신예린은 이게 과연 행운인지 불행인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처음에는 단순한 실수라고 생각했지만 임신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줄만 알았다.그나마 위안이 된 건 그 상대가 주시우였다는 사실이었다.“그래도 교수님은 책임지셨네. 딴 놈이었으면 진작 튀었을걸? 무조건 지우라고 했겠지.”송지유는 예상외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말은 신예린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정통으로 찔렀다.‘순간의 욕망에 따르는 책임까지 지는 사람은 많지 않으니까...’“그런 거면... 이제 교수님이랑 같이 사는 거야?”송지유가 슬쩍 다가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거 완전... 선 결혼 후 연애? 웹소설에서만 보던 플롯인데?”신예린은 얼굴이 붉어지며 그녀를 툭 밀쳤다.“교수님은... 그냥 나한테 책임을 진 것뿐이야.”‘교수님이 결혼을 선택한 건 사랑 때문이 아니라, 책임감 때문이야... 괜한 착각은 하지 말자.’두 사람 사이의 나이 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그래서 신예린은 자기 같은 애송이가 그의 눈에 들 리 없다고 믿었다.어딘가 무심하면서도 조심스럽고, 늘 ‘어린애 챙기듯’ 선을 긋는 주시우의 행동이 그녀에게는 책임감으로만 와닿았다.‘만약 언젠가... 교수님이 후회하게 되어 이 결혼을 끝내자고 말한다면... 나도 받아들여야겠지...’그런 생각을 꿀꺽 삼키고 있던 찰나 송지유가 또 한마디를 던졌다.“아니야, 책임이고 뭐고 간에 그런 남자랑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인생 로
Read more

제15화

송지유는 주시우가 돌아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야, 지금이야! 연습했던 자기소개 꺼내! 이름, 전공, 학번까지 다 외웠잖아! 교수님한테 제대로 얼굴 박아두자고!’하지만 막상 진짜 주시우가 눈앞에 서 있는 걸 보니, 그의‘교수 포스’에 눌린 송지유는 자기 이름 석 자조차 떠올리지 못했다.정말 수업 시간에 갑자기 지목당했을 때처럼, 방금까지 줄줄 외웠던 말들이 머릿속에서 싹 날아가 버렸다.그 모습을 본 신예린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쯧, 나보다 더 얼었네. 난 최소한 교수님 앞에서 말은 똑바로 할 수 있거든?’신예린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주시우 앞에만 서면 혀가 꼬이고 호흡까지 가빠졌던 것을 감쪽같이 잊은 듯, 여유롭게 송지유를 소개했다.“교수님, 제 룸메이트 송지유예요. 저희 결혼한 거... 말했어요.”“지유 학생, 반가워요. 주시우입니다. 짐 들어줘서 고마워요.”주시우는 딱딱하지도 가볍지도 않게 환한 미소로 인사했다.송지유는 기절 직전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아...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죠... 감사합니다, 아, 아니... 별말씀을...”그 우왕좌왕하는 모습에 신예린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꾹 다물었다.“그럼 이제 갈까?”주시우가 예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기에 그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신예린의 귓가를 스치듯 흘렀다.그 말투는 마치 오래 함께한 사람 사이에서만 나올 법한 자연스러움이 묻어 있었다.신예린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한 채, 나지막이 대답했다.“네...”송지유는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두 사람이 함께 차에 타는 모습까지 보니 진짜 영화 한 장면을 눈앞에서 본 것처럼 잠시 현실감을 잃었다.‘세상에, 예린이가 저렇게 완벽한 남자의 아내가 된 거야?’송지유는 속으로 절규했다.‘나도 그냥 그 술집에 하루 종일 죽치고 있으면 교수님 닮은 사람이라도 건질 수 있지 않을까?’...차에 탄 뒤, 신예린은 잔뜩 긴장한 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Read more

제16화

심장이 터질 듯 뛰자, 신예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하지만 입술에 닿은 건 그의 입술이 아닌 살짝 스치고 지나간 손끝이었다.그 순간 밀려든 감정이 아쉬움인지 민망함인지, 너무 미묘해 스스로도 헷갈릴 정도였다.그때 주시우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눈빛에 짓궂은 기색을 띠더니 손을 내밀며 말했다.“그렇게 맛있어? 디저트로 남겨두려고?”그의 손끝에는 방금 신예린의 입가에서 닦아낸 옥수수수프가 살짝 묻어 있었다.‘설마 이걸 입에 묻힌 채로 쭉 온 거야? 어쩐지 날 이상하게 보더라...’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신예린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한 나머지 주시우의 손을 덥석 붙잡고 입가에 가져가더니 그의 손끝을 낼름 핥아버렸다.그러고 나서 눈이 휘둥그레진 주시우를 마주하자, 그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아차 싶었다.온몸이 다 화끈거렸고 너무도 창피해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신예린은 얼굴을 들 엄두도 못 내고 본능적으로 차 문을 열어 최대 속도로 도망치듯 내려버렸다.조수석 문이 닫히는 소리만 남긴 채, 그녀는 차에서 사라졌다.정신을 차린 주시우는 창밖을 바라봤다.신예린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허둥지둥 무작정 걷고 있었다.그녀의 입술이 스쳤던 손끝이 이상하게 따뜻했다.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감각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주시우가 차에서 내리는 순간, 조금 전 전속력으로 도망쳤던 신예린이 다시 돌아왔다.지난번엔 거의 끌려오다시피 왔던 터라 집이 어느 방향인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신예린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그의 옆에 섰다.그리고 주시우가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려 하자 머뭇거리며 말했다.“제가 들게요...”“괜찮아. 내가 들게.”그는 양손 무겁게 짐을 들고 앞장서서 걸었다.“우리 집은 단지 안쪽 왼쪽으로부터 두 번째 동, 1002호. 다음에는 기억해야 해.”“네...”신예린은 짧게 대답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을 때 양손 가득 짐을 들고
Read more

제17화

신예린의 짐은 많지 않았다.책이나 학용품은 아직 기숙사에 그대로 두고 나중에 천천히 옮기기로 했다.우선 옷들을 옷장에 정리하고 스킨, 로션을 직접 고른 화장대 위에 하나하나 가지런히 올려뒀다.처음으로 스스로 고른 가구였기에 그 화장대를 볼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주시우가 준비해 준 방은 지금껏 써왔던 공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넓고 따뜻했다.‘처음으로...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 생긴 거구나.’아직은 조금 어색했고 이 모든 게 꿈만 같았다.신씨 가문에 있을 때, 그녀는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을 써야 했다.1.5미터 남짓한 침대 하나, 작은 책상, 늘 삐걱거리던 낡은 옷장 하나가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늘 조심조심 아껴 써야 했다.그리고 ‘이 정도면 감사해야지’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자랐다.반면 신민호의 방은 달랐다.큼직한 원목 옷장에 신예린의 책상보다 두 배 큰 널찍한 책상, 그 위에는 정체도 모를 취미용 장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주시우가 마련해준 이 공간에서는 그녀가 원했던 것들이 비로소 하나씩 채워지고 있었다.새로 생긴 방이 너무 좋았던 그녀는 새하얀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보송보송한 이불이 온몸을 폭 감싸고, 햇살 냄새가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신나서 배시시 웃으며 이리저리 구르던 찰나에 들려온 노크에 신예린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그러고 보니 문은 처음부터 열려 있었고 그 틈 사이로 주시우가 팔짱을 낀 채 기대어 서 있었다.그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맴돌았다.신예린은 민망함에 후다닥 이불을 정리하며 더듬거렸다.“보... 보고 계셨던 거예요?”주시우는 말 대신 슬며시 웃었다.“저녁 뭐 먹고 싶어?”“저요? 아무거나 괜찮아요!”신예린은 얼굴이 화끈거려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아침에 등갈비 사놨어. 감자 넣고 갈비찜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아?”“좋아요! 진짜 좋아요.”무슨 메뉴든 상관없었다. 뭐라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준비가 돼 있었다.“매
Read more

제18화

곧 주방에서 음식이 익는 소리가 들려왔다.신예린은 참지 못하고 문앞에 서서 안을 살폈다.앞치마를 두르고 소매를 걷어붙인 주시우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요리하고 있었다.넓은 어깨, 단단한 팔뚝, 부드럽게 움직이는 손끝까지, 그 모습은 마치 잡지 화보에서 막 걸어 나온 사람 같았다.금세 주방은 고소하고 따뜻한 냄새로 가득 찼고 신예린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속으로 생각했다.‘저런 사람이 남편이면 부러울 필요가 없는 인생이겠다...’주시우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믿기 어려울 만큼 완벽했다.신예린은 그런 사람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신예린이 집에 들어오기로 하자 주시우는 미리 집을 말끔히 정리해 놓았다.생활용품은 빠짐없이 준비돼 있었고 침구는 새것으로 교체됐으며 꽃병엔 갓 꽂은 생화가 놓여 있었다.심지어 날카로운 가구 모서리마다 충격 방지 패드까지 붙여져 있었다.그 모든 배려는 아무 말 없이 준비돼 있었지만, 신예린은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모든 게 자신을 위한 것임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누군가로부터 이렇게 세심하게 대접받는 건 처음이었다.이 모든 게 아이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리는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배고프지?”주시우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신예린은 고개를 들었다.그는 완성된 음식을 들고 거실로 나오고 있었다.“제가 도울게요.”신예린이 얼른 손을 내밀었지만, 주시우는 그녀의 손을 슬쩍 피해 가며 말했다.“뜨거워. 내가 할게.”그녀가 안절부절못하며 눈치를 보자, 주시우는 웃으며 수저만 꺼내달라고 부탁했다.신예린은 재빨리 ‘네!’하고 대답한 뒤 부엌으로 향했다.곧 식탁 위엔 저녁상이 정갈하게 차려졌다.매콤한 돼지갈비찜, 새콤달콤한 토마토 샐러드, 그리고 소박한 나물 반찬까지,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한 상이었다.“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주시우가 밥그릇을 건네며 말했다.“먹어보고 짜거나 싱거우면 말해줘. 다
Read more

제19화

“갑자기 왜 우유예요?”문틈 사이로 신예린이 머리만 쏙 내밀었다.세수를 막 끝낸 듯한 맨얼굴엔 물기가 아직 가시지 않았고 뽀얀 볼 위엔 의아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머리 위로 삐죽 튀어나온 잔머리 한 올까지 더해지니 어쩐지 오늘따라 유난히 귀여워 보였다.주시우는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어린애들은 자기 전에 우유 마셔야 키 큰다잖아.”그러자 신예린은 입술을 살짝 내밀며 반박했다.“저 어린애 아니거든요. 오히려 어른들이 더 마셔야 해요. 특히 교수님 같은 분들이요.”그 말을 내뱉자마자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뒤늦게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입을 꾹 다물더니 눈을 피했다.주시우의 눈빛이 희미하게 달라졌다.“교수님 같은 어른? 나 같은 어른은 어떤 어른인데?”‘연세가 많을수록 칼슘이 필요하니까요...’그 생각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기에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잊어주세요!”그 말과 동시에 그녀는 그의 손에서 우유를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감사합니다! 잘 자요, 교수님!”그러고는 문을 쾅 닫고 도망치듯 방 안으로 숨어버렸다.문 앞에 덩그러니 남겨진 주시우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스물아홉이면 아저씨로 보일 수도 있지... 예린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나는 대학교도 졸업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나도 나이 좀 먹었네’...따뜻한 우유를 마신 뒤, 신예린은 커다란 침대에 폭 안겨 누웠다.이렇게 넓은 침대는 처음이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해도 바닥에 떨어질 걱정이 없었다.그녀는 세상 모르게 푹 잠들었고, 다음 날 눈을 간신히 뜨고 휴대폰을 확인한 순간 화들짝 놀랐다.‘오전 열한 시? 교수님과 함께 살게 된 첫날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푹 자다니... 어떡해...’신예린은 벌떡 일어나 서둘러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방문을 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방에서 책 읽고 있었다고 하면.
Read more

제20화

신예린의 눈동자가 순간 커졌다. 혀까지 꼬여 겨우 입을 열었다.“교... 교수님...”전화기 너머 송지유는 상황도 모르고 들떠서 말을 이어갔다.“예린아, 내가 하는 말 듣고 있는 거 맞아? 행동으로 옮겨야지! 미래의 행복은 너한테 달려 있다고!”‘제발 그만 좀 해... 이러다간 행복은커녕, 내일 아침 해도 못 볼 판이야...’신예린은 이대로 땅속으로 꺼지고 싶었다.그녀는 황급히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을 낚아채더니 단호하게 통화를 종료했다.송지유의 폭주도 그제야 멈췄고 집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신예린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숨도 못 쉬겠다는 느낌이었다.그녀는 문 앞에 서 있는 주시우를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교... 교수님... 일찍 들어오셨네요...”주시우의 짙은 눈동자가 신예린에게 향했다.아까 전화기 너머로 들은 말도 말이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신예린의 표정이 더 흥미로웠다. 그녀는 휴대폰을 꼭 들고 안절부절못했다.테이블 위에는 아직 먹다 만 만두 몇 개가 남아 있었다.주시우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지금 일어난 거야?”“네...”‘지금 상황에서 늦잠 좀 잔 게 뭐가 대수야...’“어젯밤엔 잘 잤어?”“네...”‘방금 그 통화만 없었으면 완벽했을 텐데...’“오늘 점심은 생선찜 어때? 오는 길에 통통하게 살 오른 생선 하나 사 왔거든.”신예린은 그제야 그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발견했다.“좋아요.”신예린은 ‘좋아요’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지금 이 위기를 무사히 넘길 수만 있다면 뭐든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주시우가 실내화를 마저 갈아신고 거실로 들어오자, 신예린은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그의 입꼬리에 아주 옅은 웃음이 어렸다.“여자끼리 그런 얘기 좀 할 수도 있지. 너무 민망해할 필요 없어.”그 주제 자체도 민망했지만, 진짜 민망했던 건 당사자한테 들켰다는 거였다.신예린은 괜히 입꼬리만 씁쓸하게 올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교수님, 이 일은 그냥 넘어가 주시
Read more
PREV
123456
...
10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