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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터닝포인트: Chapter 211 - Chapter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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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1화

신예린은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고 아마 바로 잠든 듯 고요했다.어느새 저녁이 되어 창밖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거실은 어둑했고 소파 위에는 한 사람이 조용히 누워 있었으며 부엌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프라이팬이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신예린은 배가 고파 눈을 떴다.하지만 너무 피곤해 몸을 일으킬 힘조차 없었고 무거운 눈꺼풀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그때 부엌문이 열리더니 발소리가 다가왔다.“예린아.”주시우가 다정하게 부르면서 소파에 다가와 신예린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신예린은 반쯤 깬 목소리로 낮게 대답했다.“네...”“밥 먹자. 먹고 나서 다시 자면 되잖아?”주시우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따뜻했다.아직 정신이 흐릿해서인지 아니면 주시우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러워서인지 신예린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손을 허공에 내밀었다.“일어나기 싫어요... 안아줘서 데려가요.”말이 떨어지자마자 주시우가 몸을 숙여 신예린의 팔과 다리를 감싸안았다.순간 몸이 붕 떠오르자 신예린은 잠기가 확 달아나고 눈이 번쩍 뜨였다.거실 불은 꺼져 있었고 부엌에서 흘러나온 불빛만이 주시우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따뜻한 빛 속에 드러난 주시우의 곧은 얼굴은 마치 은은하게 빛을 머금은 듯했다.“저... 저를 내려놔요! 저 무거워요.”신예린은 주시우의 팔을 꽉 붙잡았고 떨어질까 봐 겁이 났다.“하나도 안 무거워.”주시우의 목소리는 가볍고 단단했다.“아내랑 아이도 못 안으면 내가 무슨 남자겠어.”그 말에 신예린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다행히도 거실과 식탁은 금세 닿을 거리였다.주시우는 신예린을 조심스레 의자에 앉히고 발끝으로 의자를 당겨 바짝 붙여 주었다.“여기서 잠깐 기다려. 금방 음식을 가져올게.”신예린은 잠결에 밥상까지 안겨 온 자신이 어색해 얼굴을 두 손으로 비볐다.정신을 좀 차리고 동시에 달아오른 열기를 조금이나마 식히고 싶었다.잠시 후 주시우가 음식을 꺼내 왔다.최근 신예린이 유독 좋아하는 음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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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2화

신예린은 거리낌 없이 젓가락을 들어 생선을 입에 넣었다.“시험은 어땠어?”주시우가 무심히 묻자 신예린은 금세 얼굴이 굳더니 투덜거렸다.“그런 걸 좀 묻지 말면 안 돼요?”“응?”주시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신예린은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맨날 교수님이랑 마주 앉아 있는 것도 엄청 부담스러운데 시험 얘기까지 하면 아직도 방학이 안 온 기분이잖아요.”“...”주시우는 살짝 미간을 올렸다.“나랑 맨날 같이 있는 게 부담돼?”“그렇잖아요. 누가 선생님이랑 하루 종일 같이 있고 싶겠어요.”말이 떨어지자 신예린은 스스로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고 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다.건너편의 주시우가 비웃는 듯 말없이 시선을 던졌다.“나랑 같이 있는 게 싫다는 거야?”주시우의 눈빛은 묘하게 서늘했고 신예린은 다급히 손을 저었다.“아니에요. 아니에요! 선생님이랑 같이 있다는 말이었어요.”머릿속은 혼란스러운데 말은 저도 모르게 나가 버렸다.“당신은 선생님이 아니라... 남편이잖아요.”말을 내뱉고 혀를 깨물 뻔했다.‘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너무 창피해!’뜻밖에도 주시우의 굳었던 눈매가 금세 풀렸다.‘효과 있네?’살아남으려는 본능이 발동한 신예린은 잽싸게 덧붙였다.“저는 남편이랑 매일 붙어 있는 게 제일 좋아요.”말을 끝내자마자 주시우의 입가에 선명한 미소가 번졌다.‘세상에... 이 사람은 너무 쉽게 넘어가잖아.’신예린은 얼굴을 숙이고 밥을 먹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이상하게 여긴 주시우가 물었다.“뭐가 그렇게 웃겨?”신예린은 대답할 엄두도 못 내고 화제를 바꿨다.“예전에 해부학 시험에서 학점 A 넘으면 상 준다고 했잖아요. 그 상은 뭐예요?”주시우의 눈빛이 깊어졌다.“알고 싶어?”신예린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간절하게 바라봤다.“네.”“성적 나오면 알려 줄게.”“...”‘물어본 내가 바보지.’신예린이 볼을 불룩하게 부풀리고는 장난스럽게 주시우를 향해 얼굴을 찡그리자 주시우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밥을 다 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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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3화

“저...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신예린은 얼떨결에 손을 들어 변명했지만 사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존재만으로 주시우의 집중을 흔들기에 충분했다.주시우는 결국 노트북을 덮고 전원을 껐다.신예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벌써 끝난 거예요? 분명히 10분 걸린다고 했잖아요.”“아내가 심심하다는데 내가 속도를 안 낼 수 있나.”주시우가 농담 섞인 목소리로 대꾸하며 노트북을 옆에 내려두었다.“말해 봐. 어떻게 놀아주면 될까?”순간 신예린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듯 달콤해졌다.신예린은 눈빛을 반짝이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저... 영화 같이 보고 싶어요.”그런데 신예린이 말하는 영화 보기란 집에서 TV로 보는 거였다.심지어 어떤 영화를 보고 싶은지조차 정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채널만 넘기다가 주시우를 돌아봤다.“당신은 뭐 보고 싶어요?”주시우는 리모컨을 건네받으며 담담히 말했다.“뭘 보느냐보다 누구랑 보느냐가 더 중요하지.”주시우는 평점이 높은 코미디 영화를 하나 틀었고 신예린은 벌떡 일어나더니 식탁 쪽으로 걸어갔다.“어디 가?”“불 꺼야죠.”순간 거실은 깜깜해지고 오직 TV 화면의 빛만이 두 사람을 비췄다.신예린은 방긋 웃으며 소파로 돌아왔다. 다섯 달 차의 몸이었지만 아직은 가볍게 움직일 수 있었다.“이래야 진짜 영화관 온 것 같잖아요.”그리고 신난 듯 속삭였다.“우리 둘이 전세 낸 거예요.”아이처럼 해맑은 목소리에 주시우는 저절로 입꼬리를 올리며 신예린 쪽으로 몸을 더 가까이했다.영화 속 웃긴 장면들이 나올 때마다 신예린은 웃음을 터뜨렸고 주시우의 눈은 종종 신예린의 얼굴을 향했다.웃으며 반달처럼 휘어진 눈매, 입가에 맺히는 환한 미소가 화면보다 더 눈길을 끌었다.주시우는 자연스럽게 기지개를 켜는 척하며 팔을 뻗었다.곧 주시우의 팔은 소파 등받이를 따라 내려와 신예린의 어깨에 살며시 얹혔다.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신예린은 몸을 조금 긴장시키더니 이내 고개를 묻으며 주시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그러자 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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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4화

신예린이 눈을 뜨자 까만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아른거렸고 눈가에는 옅은 홍조가 번져 있었다.고운 목덜미 위로는 뚜렷한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모두 주시우가 남긴 흔적이었다.주시우는 자신을 탓하며 낮게 중얼거렸다.“미안해. 난...”그러나 말끝을 잇기도 전에 가느다란 손이 주시우의 손가락을 살며시 걸어왔다.그 부드러운 감촉에 주시우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품에 안긴 신예린은 입술을 깨물며 눈가에 물기를 머금은 채 수줍게 속삭였다.“의사 선생님이 괜찮다고 했어요.”신예린의 목소리는 모기 울음소리처럼 희미했기에 주시우는 듣지 못했다.“뭐라고?”얼굴이 금세 시뻘겋게 달아오른 신예린은 벼랑 끝에 선 것처럼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말했다.“저번에 검진 갔을 때 물어봤어요. 아기가 안정돼 있으니까... 부부관계는 괜찮다고 하셨어요.”예전 같았으면 입 밖에 낼 수도 없던 말이었다.신예린은 말하고 나서는 차마 주시우의 표정을 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순간 주시우의 눈빛이 깊게 흔들렸다.알고 보니 그날 신예린이 혼자 따로 의사에게 물어본 게 바로 이 일이었다.그동안 자신이 괜히 찬물만 뒤집어쓰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주시우는 다시 몸을 숙여 신예린의 입술을 덮었다.숨결이 스치며 입맞춤이 이어지는 가운데 낮게 속삭였다.“괜찮아. 예린아, 네 몸이 제일 중요해. 아기 낳고 나서 하자. 응?”달콤한 입맞춤에 취하던 신예린은 순간 실망이 스쳤지만 곧 그의 따뜻한 애정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그날 밤 두 사람은 유난히 오래도록 입을 맞췄다.TV 속 영화는 시작 부분만 남겨둔 채 뒷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힘이 빠진 신예린은 소파에 늘어졌고 주시우는 결국 또다시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러 욕실로 향했다.밤이 깊어 함께 자리에 누운 두 사람은 서로의 체온에 더 밀착돼 있었다.주시우가 흔들릴 때마다 드러나는 거친 숨과 깊은 눈빛 속에 감춰지지 못한 열기, 이 모든 것은 오직 신예린만이 본 모습이었다.신예린의 심장은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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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5화

‘누가 자기 집 식구 상대로 이런 계략을 꾸미겠어.’신예린은 툭 하고 주시우를 가볍게 쳤다.주시우는 피하지도 않고 눈가에 웃음을 띠었다.다음 날, 주시우는 곧장 집에 전화를 걸어 설 준비 이야기를 꺼냈다.주시우와 신예린이 함께 돌아온다는 소식에 온 가족은 크게 반가워했다.휴대폰 너머에서 할머니 고원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예린아, 꼭 일찍 와야 한다. 몇 시쯤 도착하는지 미리 알려 줘야 내가 준비하지.”곁에서 듣던 주시우가 웃으며 통역하듯 거들었다.“지난번처럼 갑자기 들이닥쳐서 할머니가 몰래 밀크티 드시다 걸리면 안 된다는 뜻이야.”고원숙은 곧바로 호통을 쳤다.“네가 내 손자가 맞기는 하냐!”“그건 아버지랑 어머니께 물어보셔야죠.”그러자 주혁재와 김수희가 나란히 나서서 주시후한테 핀잔을 줬다.“결혼하더니 갈수록 장난이 심해지네.”신예린은 옆에서 웃음을 터뜨렸다.평소 좀처럼 보기 힘든 주시우의 구박당하는 모습이 새삼 재미있었다.주시우는 신예린이 웃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손을 뻗어 허리를 간질였다.신예린은 간지럼을 못 이기고 황급히 항복했다.“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하지만 고원숙은 그걸 다르게 알아들었다.“주시우, 너 또 예린이 괴롭히는 거냐!”황급히 해명하려 애썼다.“아니에요. 할머니, 전혀 그런 게 아니라...”“변명은 필요 없다. 네 나이에 이렇게 좋은 아내를 얻은 것도 감사할 일인데 제대로 아껴 주지 못하면 올해 네 세뱃돈은 반으로 줄일 거야.”“할머니, 그건 좀...”주시우가 말을 잇기도 전에 고원숙의 어조는 어느새 달라졌다.“예린아, 혹시라도 힘든 일 있으면 꼭 나한테 말해. 내가 대신 쟤를 혼내 줄 테니까.”든든한 후원자가 생긴 신예린은 당당히 목소리를 높였다.“네. 할머니!”그리고 주시우를 향해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주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다시 손을 뻗어 간질였다.신예린은 간신히 몸을 피하며 고자질하듯 말했다.“할머니, 또 괴롭혀요!”“좋아. 주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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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6화

영화 시작까지는 아직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대기 구역에는 의자가 하나뿐이어서 주시우는 신예린을 앉히고 자신은 옆에 서서 팝콘을 집어 신예린의 입에 슬쩍 넣어 주었다.달콤한 맛이 입안에 퍼지자 신예린의 마음까지도 달콤해졌다.주변엔 연인들이 가득했고 장난을 치며 다정하게 붙어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예전 같았으면 신예린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봤을 텐데 이제는 자신도 그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 같아 괜히 뿌듯했다.처음 주시우와 함께 있었을 때는 손 한번 잡는 것도 망설였지만 지금은 자연스레 주시우의 어깨에 기대고 그가 건네는 팝콘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먹고 있었다.‘정말 행복해.’신예린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그때 옆자리에서 작은 수군거림이 들려왔다.“저 사람... 주 교수님 맞지 않아?”“헉, 진짜네!”“옆에 있는 분이 부인이야? 와, 교수님은 아내랑 영화 보러도 다니시네.”“늘 학문만 파고들 줄 알았는데 의외야. 되게 인간적이야.”“게다가 아내한테 팝콘까지 먹여 주네. 완전 달콤하네.”“아, 저 팝콘이 되고 싶어.”“난 저 콜라.”“난... 뱃속에 있는 아기.”“...”‘야, 그건 좀 선 넘은 거 아니야?’신예린은 얼굴이 화끈거려 당장이라도 자리를 뜨고 싶었다.주시우가 다시 팝콘을 건네자 신예린은 손을 뻗으며 말했다.“저, 제가 직접 먹을게요.”“왜?”“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요...”주시우는 옆을 힐끗 돌아봤다.방금 떠들던 학생들이 주시우의 시선에 움찔하며 허둥지둥 자리를 피했다.주시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봐. 이제 아무도 안 보잖아.”신예린의 입엔 또다시 팝콘이 들어왔다.영화는 두 시간이 가까웠고 중간에 신예린의 휴대폰이 울렸다. 송지유였다.[너 지금 주 교수님이랑 영화 보지?][뭐야, 네가 내 방에 카메라라도 달아놨냐?][뭔 소리야, 학교 게시판에 올라왔어. 주 교수님이 너한테 팝콘 먹여 주는 사진! 애들 다 부러워 죽는 중.][예전 같았으면 얘들은 눈빛으로라도 널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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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아, 어떻게 그런 일이...”충격이 신예린의 온몸을 덮쳤고 곧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주시우는 더 설명하지 않고 곧장 말했다.“나 지금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중이야. 바로 병원으로 같이 가자.”“네. 저도 금방 내려갈게요.”신예린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예린아.”주시우의 목소리는 무겁지만 또박또박 담담했다.“내가 도착하려면 아직 몇 분 걸려. 옷은 따뜻하게 입고 주머니에 사탕도 조금 챙겨. 절대 서두르지도 말고 뛰지도 말고 네 안전부터 챙겨.”신예린은 울음을 삼키며 간신히 대답했다.“알겠어요.”전화를 끊고 서둘러 외투를 걸친 뒤 현관으로 향하다가 문득 주시우의 당부가 떠올라 발길을 돌렸다.간식 상자에서 사탕을 한 움큼 쥐어 주머니에 넣고는 급히 신발을 신었다.덜덜 떨리는 신예린의 손끝이 마음의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괜찮을 거야. 반드시 괜찮을 거야. 할머니는 복 많은 분이니까 분명히 잘 이겨내실 거야.’자신을 달래 보았지만 사랑스러웠던 할머니가 병원에 누워 있다는 사실만으로 신예린은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잠시 후 주시우의 차가 도착했고 신예린은 서둘러 차에 올랐다.주시우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억눌러 두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할머니가...”주시우는 묵묵히 손수건을 꺼내 신예린의 눈가를 닦아주며 짧게 말했다.“일단 병원으로 가자.”주시후는 신예린한테 괜찮을 거라는 흔한 위로의 말도 끝내 하지 못했다.그러자 더 큰 불안이 신예린의 가슴을 죄어 왔다.차 안은 숨 막히게 조용했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신예린은 차가 완전히 멈추기도 전에 문을 열고 달려 나갔다.그 순간 신예린의 손목이 잡혔다.“예린아.”이런 상황 속에서도 주시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다.“아직 정확한 건 몰라. 네 몸은 아기를 품고 있잖아. 아무리 급해도 뛰지 마. 혹시라도...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넌 네 몸을 먼저 지켜야 해.”한순간 드러난 주시우의 흔들림에 신예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순간 신예린은 눈물이 왈칵 차올랐지만 주시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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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8화

“뇌탈출, 동공 산대, 심정지라니...”전문 용어가 잇따라 들려오는 순간, 신예린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평소라면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자랑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 사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위험이라는 뜻으로 다가왔다.주시우 역시 모를 리 없었다.굳게 다문 턱선 아래, 주시우의 눈빛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간신히 목을 울리며 내뱉은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수술은요?”주시우 자신조차 이런 질문이 허망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곧장 의사의 대답이 이어졌다.“연세도 많으시고 기저 질환도 있어서 수술한다고 해도 성공 확률이 높지 않습니다.”주혁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수술해도 안 되고 안 해도 안 된다니... 다른 방법은 전혀 없는 겁니까? 어머니가 죽는 걸 이렇게 두고만 보란 말입니까?”죽는다는 말이 나오자 모두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억눌러 오던 김수희의 눈가에 결국 눈물이 차올랐다.신예린은 조심스레 다가가 김수희의 손을 꼭 잡았다.김수희는 잠시 눈길을 주더니 떨리는 손으로 신예린의 손등을 가만히 두드렸다.“보존 치료로 경과를 보거나 아니면 수술에 걸어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수술은 위험이 너무 크지요. 수술대에서 못 내려올 가능성이 높습니다.”주혁재의 목소리가 격해졌다.“그게 무슨 선택입니까. 살길이 없다는 소리잖습니까.”늘 상가를 좌우하던 주혁재였지만 모친의 생사가 걸린 순간에는 전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주시우의 입술은 얇게 일자로 다물려 있었다.안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은 요란했지만 주시우는 그 속에서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만 또렷하게 들리는 듯했다.목울대가 거칠게 오르내렸지만 주시우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수술하세요.”허스키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울렸다.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주시우에게로 향했다.차가운 조명이 얼굴을 비추자 주시우는 핏기조차 사라진 듯했다.주혁재가 놀라움에 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시우야, 의사 말 못 들었어? 수술하다가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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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9화

시간은 끝없이 늘어져 모두가 앉았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무거운 마음을 감당했고 누구 하나 대화를 이어갈 힘조차 없었다.신예린은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수술실 앞 의자에 조심스레 앉았다.주시우는 신예린의 입술이 바짝 말라 있고 울음에 부어오른 눈가를 보고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뭐라도 좀 사다 줄까?”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먹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도무지 목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주시우는 잠시 신예린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물었다.“내가 사탕 챙기라 했던 건... 가지고 왔어?”신예린은 주머니를 더듬어 사탕 몇 알을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주시우는 하나를 집어 포장을 벗긴 뒤 신예린의 입술 앞으로 가져갔다.“수술은 오래 걸릴 거야. 억지로 먹긴 힘들지. 대신 저혈당 오면 안 되니까 이거라도 먹어.”주시우는 이미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해 둔 듯 사소한 것까지 챙기고 있었다.“내 말 들어. 꼭 먹어.”잠긴 목소리에 담긴 다정함이 신예린의 가슴을 울렸다.신예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입을 열어 사탕을 받았다.달콤한 맛이 입안을 채웠지만 마음속 쓰라림을 덮어 주진 못했다.잠시 후 신예린은 조심스레 사탕 하나를 벗겨 주시우의 손에 쥐여 주면서 애써 웃지도 못한 채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주시우는 짧게 숨을 고르고는 결국 사탕을 입에 넣었다.주시우가 사탕을 삼키는 걸 확인한 순간, 신예린의 찡그린 눈썹이 조금이나마 풀렸다.주시우는 남은 사탕을 부모에게 내밀었으나 두 사람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우리는 괜찮으니까 예린이 좀 잘 챙겨줘.”주혁재와 김수희조차 벅찬 상황이겠지만 그들은 다섯 달 된 아기를 가진 예린의 고단함을 더 걱정했다.다시 자리에 앉은 주시우는 신예린을 살며시 끌어당겼다.“피곤하면 눈 좀 붙여.”“안 졸려요.”신예린은 힘주어 대답했지만 눈꺼풀은 무겁게 내려앉았다.어느덧 새벽 세 시를 넘었고 고원숙이 수술실에 들어간 지 여섯 시간이 지나 있었다.신예린은 주시우의 어깨에 기대 반쯤 눈을 감았다.몸은 지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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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0화

주혁재 부부의 얼굴에는 피로가 깊게 내려앉아 있었고 마치 하룻밤 사이에 몇 년은 늙은 듯했다.주시우는 운전기사에게 부모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 드리라 일렀다. 차가 떠난 뒤 돌아선 주시우의 시선 끝에 신예린이 서 있었다.외투를 여미고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 신예린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고 토끼처럼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주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슬픔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주시우가 천천히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예린아.”잠시 숨을 고른 뒤, 차분히 말을 이었다.“아버지, 어머니도 연세가 있으시고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별세가 큰 충격일 거야. 내가 장례 준비를 맡아야 해서 앞으로 며칠은 정신이 없을 거야. 그래서 네 곁을 잘 지켜주지 못할 수도 있어. 네가 스스로...”“괜찮아요.”신예린이 단호히 말을 끊었다.“저 혼자서도 잘 챙길 수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주시우의 눈 밑에 드리운 그늘을 본 순간 신예린의 목이 메어 왔다.“당신도... 당신도 스스로 잘 챙겨야 해요.”주시우는 대답 대신 조용히 손을 들어 신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그 뒤로 며칠 동안 신예린은 주시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집에 홀로 남아 잠이 오지 않아도 억지로 눕고 입맛이 없어도 억지로 끼니를 챙겼다.주시우에게 약속했던 자신을 잘 돌보겠다는 그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신예린은 주시우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불 꺼진 방에 홀로 누우면 눈물은 참지 못하고 흘러내렸다.어릴 적 이미 돌아가신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는 기억조차 희미했고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는 왕래가 드물어 정이 깊지 않았다.반면 고원숙은 짧게 만난 사이에도 다정하고 따스했다. 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으로 신예린을 귀한 손주며느리라 불러 주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진심으로 신예린을 아껴 주던 분이었다.그런 할머니가 너무나 갑작스럽게 떠나 버린 것이다.이제 다시는 몰래 밀크티를 즐기던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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