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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터닝포인트: Chapter 221 - Chapter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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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1화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해도 장례식 날 주시우를 마주한 순간, 신예린은 세상이 달라져 버린 듯한 아득한 기분에 휩싸였다.주시우는 한층 더 야위었고 검은 색 옷차림에 파묻힌 얼굴은 지쳐 있었고 깊은 눈동자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이 고여 있었다.고원숙은 검찰청에서 사십여 년을 몸담으며 존경을 받아 온 사람이었다. 찾아온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고 주시우는 모두를 정중히 맞으며 슬픔을 감추려 애썼다. 담담한 얼굴에 절제된 태도는 오히려 더욱 가슴을 아프게 했다.멀찍이서 바라본 신예린은 또렷이 자신의 세계와 주시우의 세계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자신은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지만 주시우는 슬픔마저 억누르며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었다.주시우의 시선이 신예린에게 머물렀고 이윽고 한마디가 흘러나왔다.“살이 빠졌네.”신예린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정작 더 수척해진 건 주시우였다. 눈 밑은 짙게 꺼졌고 면도조차 하지 못해서 수염이 자라 있었다.“저... 잘 먹고 잘 지냈어요. 아마 제가 먹은 걸 아기가 다 가져갔을 거예요.”주시우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아기는 잘 있어?”“네. 아기는 착하게 잘 있어요.”“너는?”신예린은 목이 메며 대답했다.“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주시우는 손을 들어 신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부모님은 안에 계셔. 먼저 들어가 있어. 나도 곧 들어갈게. 힘들면 조금 쉬어. 무리하지 말고.”신예린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러나 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 다시 고개를 돌려 주시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주시우는 벌써 다음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영정 앞에 들어서자 주혁재와 김수희가 조문객을 맞고 있었다. 수일 동안 애써 마음을 다잡은 듯 차분하게 손님을 맞이했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붉었다.관 속의 고원숙은 단정히 차려입은 채 고요히 누워 있었고 신예린은 수없이 다짐했음에도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예린아.”김수희가 다가와 신예린의 손을 꼭 잡았다.“어머님은 늘 자유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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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2화

그 순간 신예린의 가슴은 칼에 베인 듯 저렸다.신예린은 참지 못하고 주시우를 끌어안자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뭐라고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죽음 앞에서는 모든 말이 공허하게만 느껴졌다.주시우는 턱을 신예린의 어깨에 기댄 채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할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늘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했어. 누구나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난다고... 담담히 받아들여야 한다고.”주시우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지만 신예린이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나약함이 묻어 있었다.“그런데...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겠어. 우리 가족인데.”그 말에 신예린의 심장이 세게 죄어 왔다.“예린아.”주시우가 신예린을 부르자 그녀는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저 여기 있어요.”“내가... 잘못한 걸까? 수술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할머니가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었을까.”그제야 신예린은 그때 했던 선택이 줄곧 주시우를 괴롭혀 왔다는 걸 깨달았다.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죽음으로 내몬 장본인이라고 믿고 있었다.“아니에요.”신예린은 눈물을 삼키며 단호히 말했다.“그땐 어떤 선택을 했어도 결과는 같았을 거예요. 그 상황에서 결정을 내린 건 오히려 누구보다 용기 있고 단호한 거예요.”신예린은 목소리를 떨면서도 끝까지 힘을 주면서 말했다.“당신이 말했잖아요. 할머니는 평생 앞만 보고 걸어온 분이라고. 당신은 할머니가 원하셨을 길을 대신 선택해 준 거예요. 할머니는 당신을 누구보다 사랑했어요. 그런 할머니가 어떻게 당신을 원망하겠어요. 그러니 제발 자책하지 말아요.”신예린은 심장이 쿵쿵 뛰었지만 그 말만큼은 꼭 전해야 했다.잠시 정적이 흘렀고 주시우의 숨결만 신예린의 마음에 닿았다.“그래.”낮게 울린 주시우의 대답에 신예린은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두 사람은 한동안 거실에서 서로를 꼭 안은 채 있었다.주위는 적막했고 신예린은 그제야 주시우의 호흡이 조금은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어릴 적 부모님은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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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3화

그제야 주시우는 신예린을 소파에 둔 채 자신도 밤새 함께 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내가 왜 이랬지...’주시우는 자신을 책망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금세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근육은 풀린 듯 힘이 없었고 한 걸음 떼는 것조차 버거웠다.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신예린을 안아 침실로 옮겼다. 이불을 곱게 덮어 준 뒤 한참 동안 신예린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주시우는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그러나 갑작스레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듯 어지럼증이 밀려왔고 벽을 붙잡아 가까스로 몸을 지탱했다. 한참을 숨 고른 뒤 약통을 꺼내 체온계를 집어 들었다.아침이 밝았을 때, 신예린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분명 소파에 자고 있던 나를 옮긴 건 교수님이겠지.’그렇게 생각하며 방을 나서자 거실은 텅 비어 있었다.‘학교에 간 걸까? 언제나처럼 교수님은 자기 몸은 뒷전으로 하고 할 출근하러 나갔겠지.’신예린은 침대를 정리하려다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평소 열려 있던 작은방 문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다.조심스레 문을 열자 그 안에 주시우가 누워 있었다. 얼굴은 불그레했지만 혈색이 아니라 열 때문이었다.굳게 찡그린 이마에 축 늘어진 기운...눈앞에 드러난 건 분명 환자 같은 주시우의 모습이었다.신예린은 다급히 주시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너무 뜨거워...”신예린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서둘러 몸을 흔들며 주시우를 불렀다.“주 교수님, 주 교수님!”천천히 눈을 뜬 주시우의 시야에 신예린의 걱정 가득한 얼굴이 들어왔다.“당신... 열이 많이 나요.”“알아.”주시우는 목구멍이 화끈거려 말조차 쉽지 않았고 물을 삼키듯 간신히 말을 이었다.“약 먹고 자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심해진 것 같네.”신예린은 눈물을 꾹 참으며 말했다.“지금 당장 병원 가요.”주시우를 부축하려 하자 그는 신예린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끝까지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예린아, 병원은... 가고 싶지 않아.”말없이 눈을 마주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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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4화

신예린은 옷장을 열어 잠옷 한 벌을 꺼내 들었고 침대 위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주시우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속삭였다.“주... 주 교수님, 제가 옷 갈아입혀 드릴게요.”하지만 대답은 없었고 신예린은 이미 주시우가 묵인했다고 여겼다.이불을 젖히고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시선은 애써 다른 데 두고 손끝으로만 단추를 풀었다. 다 풀고 난 뒤에도 어떻게 벗겨야 할지 난감했다.잠시 망설이다가 주시우를 부축해 상체를 세우고, 자기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부가 목덜미에 닿자 심장이 철렁했지만, 서둘러 젖은 옷을 벗겨내고 마른 옷을 입혔다.그 짧은 순간에도 땀이 흐를 만큼 긴장한 신예린은 숨을 고르며 허리를 짚었다. 하지만 눈길은 곧 주시우의 하의로 향했다.‘괜찮아, 난 의사가 될 사람이잖아. 이런 건 앞으로도 겪어야 해. 게다가 지금 교수님은 의식도 없는 상태야...’신예린은 자신을 다독이며 손을 뻗었다. 떨리는 손끝으로 바지를 벗기고 속옷까지 내렸지만 시선은 끝내 침대 시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 속옷을 입히고 시선을 들었을 때, 주시우의 어슴푸레 뜬 눈과 마주쳤다.순간, 들키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른 듯 얼굴이 활활 달아올랐고 변명이라도 하려는데 이윽고 그의 눈꺼풀이 다시 감겼다.‘정신이 없는 거겠지...’한참을 지켜본 뒤에야 안도한 신예린은 급히 주시우의 바지를 다시 올려 입혔다. 모든 걸 마치고 나니 온몸에 땀이 배어 있었다.침대 위에 누운 주시우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언제나 강해 보였던 주시우가 이렇게 연약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할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쌓아온 긴장이 결국 주시우를 무너뜨린 것이다.신예린은 한숨을 내쉬며 젖은 옷을 세탁기에 넣고 부엌으로 가 죽을 끓였다. 뜨겁던 죽을 식혀 그릇에 담아 방으로 들어가니 주시우는 눈을 뜨고 있었다.“깼네요.”신예린은 반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조금 나아졌어요?”“조금은...”주시우는 여전히 쉰 목소리였고 신예린은 곁으로 다가가 그릇을 들어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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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5화

그제야 주시우의 눈가에 오래간만에 웃음이 번졌다.마스크로 반쯤 가려져 있었지만 눈매가 살짝 휘어지며 드러난 미소는 희미했으나 분명했다.“이럴 땐 오히려 네가 나보다 더 잘 아는 것 같아.”주시우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사실 신예린이 주시우보다 통찰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주시우는 사랑하는 이를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평정을 잃고 있었을 뿐이다.주시우는 몸을 일으켜 앉으려 했고 신예린은 황급히 죽을 내려놓고 다가가 부축했다. 몸을 바로 세운 순간, 주시우의 시선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에 닿았다.그러자 주시우는 무심코 말했다.“그게... 진짜였구나.”“네?”신예린은 얼떨떨하게 되물었다.“꿈속에서 네가 내 옷을 갈아입히는 걸 본 것 같았어.”신예린의 얼굴이 단번에 붉어졌다. 말도 더듬거렸다.“교수님이... 땀을 너무 많이 흘리셔서요. 젖은 옷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갈아입히려 했어요. 저, 저 사실은 물어봤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그냥 그런 줄 알고...”신예린은 속으로 덧붙였다.‘정신이 없으셔서 대답을 못 하신 거겠지.’주시우의 시선이 잠시 복잡하게 스쳤고 신예린은 더욱 얼굴이 뜨거워져 급히 해명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 아무것도 못 봤어요.”그러자 돌아온 주시우의 말은 불시에 신예린의 귀불까지 달아오르게 했다.“남편인데... 본다고 죄 되는 것도 아니잖아.”신예린은 순간 무언가를 놓쳐버린 듯 멍해졌다.곱씹어 보니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자기 남편인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여자가 본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게다가 설령 자신이 보았다 해도 주시우는 알 리도 없었는데 말이다.혼자 속으로 아쉬움에 고개를 떨구던 찰나, 주시우의 낮고 미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뱃속에 아기도 있는데 날 간호하느라 얼마나 힘들었어. 미안해...”신예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교수님도 늘 저를 챙겨주셨잖아요. 이번에는 제가 교수님을 보살펴 주는 게 당연해요. 게다가 우리는 부부잖아요. 부부라면 서로 돌보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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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6화

죽을 한 그릇 다 비운 뒤 신예린은 다시 체온계를 꺼내 주시우의 체온을 쟀다.38.1도였다.아직은 높았지만 어제보다는 훨씬 나았다. 신예린은 주시우를 눕히며 다정히 말했다.“이제 조금 쉬세요. 푹 쉬어야 빨리 나아요.”이불을 고이 덮어 주고 주시우의 곁에 앉은 신예린은 마스크 위로 드러난 눈매만이 온전히 보였다. 불룩하게 솟은 배가 옷 너머로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그 순간, 신예린이 작게 비명을 내질렀다.“어머나!”주시우가 놀라 눈을 떴다.“왜 그래?”신예린은 얼른 주시우의 손을 자기 배 위로 가져다 댔다. 둥근 배가 간헐적으로 불룩하게 움직였다.주시우의 굳었던 미간이 풀리며 시선이 따뜻해졌다.“아기가 아빠한테 인사하는 거예요.”신예린은 일부러 아이 흉내를 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아빠, 얼른 나아야 해요.”주시우의 손바닥에 전해지는 미세한 움직임, 그리고 눈앞에서 웃고 있는 신예린, 순간 그의 마음은 포근해지는 느낌이 들었다.이튿날에야 주시우의 체온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주시우는 하루 종일 방에서 요양하다가 드디어 섣달그믐 날이 되자 신예린과 함께 큰 짐들을 챙겨서 주씨 가문 본가로 향했다.고원숙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안은 들뜬 분위기 대신 담담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래도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저녁상을 차리는 것으로 새해를 맞으려 했다.“넌 왜 아픈 것도 숨기고 그래? 예린이가 임신부인데 얼마나 힘들었겠어.”주시우의 열병 소식을 들은 김수희는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주시우는 더 말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신예린이 서둘러 나섰다.“저 괜찮아요. 체온만 재주면 되는 일이었어요.”그러자 김수희는 눈을 굴리며 말했다.“당연히 넌 네 남편 편을 들겠지.”신예린은 얼굴이 발그레해졌고 고개를 돌려 주시우를 바라봤다. 주시우도 입가에 미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분위기가 더 무거워지기 전에 주혁재가 나섰다.“이제 됐어. 다 지난 일이니 더는 탓하지 말게. 괜히 애들까지 위축되겠어.”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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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7화

신예린은 칭찬을 받자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무엇보다 새로운 아이디어라기 보다는 사실 자신이 전에 우연히 본 영상에서 얻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저도 그냥 우연히 영상에서 본 거예요.”신예린이 머쓱하게 변명하듯 말했다.김수희는 곧장 방문 쪽을 향해 큰 소리로 불렀다.“여보, 차 좀 그만 마시고 나와서 꽃 좀 주워요.”그러자 거실 안쪽에서 주혁재의 대답이 들려왔다.“알았어. 알았어. 꽃은 또 왜 주우라는 거야?”“예린이가 그러는데 어머님이 가꾸신 꽃을 그냥 버리기 아깝대요. 잘 말려서 액자에 넣어두면 예쁘기도 하고 어머님 정성도 담길 거라잖아요.”“그거 참 좋은 생각이네. 예린이는 참 기특하구나.”작은 일 하나에도 칭찬이 쏟아지니 신예린은 부끄럽기도 하고 기분이 좋아서 입가가 스스로 말려 올라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주시우가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며 말했다.“기특하구나.”주시우가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로 말하자 신예린은 일부러 화난 척 발끝으로 그의 다리를 살짝 툭 찼다. 주시우는 피하지 않고 그저 신예린의 장난을 받아주었다.곧 주혁재와 김수희도 함께 꽃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가정부가 작은 바구니 두 개를 가져오자 주혁재는 꽃을 주웠고 김수희가 그것을 담았다.신예린은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슬픔을 오래 붙들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지혜였다. 떠난 이를 그리워하되 남은 삶은 희망하게 이어가야 했다.그 생각이 들자 신예린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그 순간, 주시우가 떨어진 꽃 한 송이를 집어 신예린의 귀에 꽂아 주었다.이 장면은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도 할머니 앞에서 주시우가 이렇게 신예린에게 꽃을 꽂아 준 적이 있었다.신예린은 잠시 꽃을 귀에 꽂고 있다가 바구니에 넣으려 했지만 주시우가 손길로 막았다.“그대로 둬.”주시우의 목소리는 낮고도 다정했다.“액자 안에 있는 것보다 할머니는 아마 손주며느리 귀에 있는 걸 더 좋아하실 거야.”신예린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기울여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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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화

설 연휴가 끝나자마자 방학도 금세 지나가 버렸고 어느새 또다시 개강일이 다가왔다. 그때 신예린은 송지유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예린아, 이번 방학에 전주시로 갔는데 진짜 너무 좋았어. 나 거기 완전히 반했잖아. 내가 묵었던 숙소에도 다른 사람들이 장기 체류 중인데 벌써 몇 달째라더라. 그렇게 사는 거 보면 너무 부러워. 나도 언제쯤 돈 걱정 없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송지유는 겨우 시험을 턱걸이로 통과해서 부모님 허락을 얻어 설 연휴에 여행을 갔다가 일주일만 있다가 올 계획이었는데 정작 가서는 마음을 못 접고 개강 직전에서야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돌아온 것이었다.신예린은 웃으며 말했다.“일단 너도 취직하면 얼마든지 가능하잖아.”“흥, 넌 지금 날 속이는 거지? 의사가 되어봤자 밥벌이밖에 더 되겠어? 게다가 바빠 죽을 텐데 언제 여행을 다닐 시간이 있겠어. 그런데 무슨 자유야.”학교로 돌아오는 선배들이 실습 얘기를 할 때마다 송지유는 얼굴이 반쯤 망가져 있었고 고생담을 듣다 보니 송지유는 오히려 장래에 대한 기대감보다 두려움이 더 커져만 갔다.“아, 맞다. 예린아, 나 이번에 여행하면서 여행 블로거 한 명을 알게 됐는데 얘기를 들어 보니까 꽤 괜찮더라? 나도 그거 해볼지 생각 중이야.”신예린은 단호하게 말렸다.“넌 그냥 먼저 학업부터 마쳐. 그래도 진짜 해보고 싶으면 요즘 유행하는 주말 특공대처럼 시간을 내서 다녀오면 되잖아. 근데 아예 전공을 버리고 그걸 직업 삼겠다고 하면... 너희 부모님이 가만있을까?”그 말에 송지유는 등골이 오싹해졌고 그러다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맞아. 일단 주말 특공대처럼 해보는 건 괜찮겠네.”“그래, 그게 딱 좋을 거야.”신예린이 맞장구치자 송지유는 갑자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아참, 내가 선물도 사 왔지.”“무슨 선물?”신예린이 호기심을 보였다.송지유는 씩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비밀이야. 개강하면 보여줄게.”“알았어.”두 사람은 한참을 이런저런 얘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하품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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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9화

“내가 약속했으니 지키지 않을 리 없지.”주시우의 낮고 온화한 목소리에 신예린의 마음은 따스함으로 채워졌다.‘늘 나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일 줄이야.’“근데 교수님, 성적 발표 전에 미리 준비해 두신 거잖아요. 제가 해부학 성적 기준에 통과한 걸 어떻게 미리 아셨어요?”신예린의 물음에 주시우는 마치 왜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네가 잊었구나. 내가 무슨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인지.”그제야 신예린은 이마를 탁 치며 민망하게 웃었고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다. 주시우가 바로 해부학 교수였고 성적 발표가 나자마자 가장 먼저 아는 사람 역시 그였다.“열어봐도 돼요?”“물론이지.”주시우의 시선이 머무는 가운데 신예린은 조심스레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순간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이건...”상자 안에 놓여 있던 건 의외의 선물, 반짝이는 청진기였다.주시우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의사가 된다면 반드시 자기만의 청진기를 가져야 해. 네가 훗날 이 선물을 받을 때의 의미를 잊지 않았으면 해서 준비했어.”주시우의 길고 검은 속눈썹 아래 깊은 눈동자가 무겁게 빛났다.“To cure sometimes, to relieve often, to comfort always.”‘가끔은 치료하고, 자주 도와주며, 언제나 위로하라.’백 년 전 한 미국 의사의 묘비에 새겨진 이 말은 지금도 의사들이 지켜야 할 기본이자 양심이었다.신예린의 심장은 마치 강하게 두드려진 듯 요동쳤다.주시우는 단순히 전공 지식을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라 살아가는 태도와 가치관을 세우게 해 주는 사람이었고 어떻게 좋은 의사가 되어야 하는지를 삶으로 보여 주는 사람이었다.신예린은 눈썹을 떨며 결국 주시우를 힘껏 끌어안았다.“꼭 그렇게 할게요.”주시우는 품에 안긴 채 울림처럼 전해지는 신예린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었다.개강 첫날, 신예린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침을 챙겨 먹고 준비를 마쳤다. 책가방을 메고 거실을 나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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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0화

학생들은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주시우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겨우 방학 동안 치유됐던 상처가 이 장면을 보고 다시 찢어진 기분이야.”“주시우 교수님은 내 거야. 돌려줘!”“대체 저 여자가 무슨 복이 있다고 교수님 같은 분과 결혼을 한 거지?”“겨울방학 내내 뭔가 달라 보인다고 했더니... 아, 이제 보니 남편으로서의 분위기가 더 진해진 거였네.”“저거 봐, 심지어 가방까지 들어 주잖아. 완전 아버지 같은 남편이네. 차마 못 본 척하려고 했는데 이런 건 또 괜히 설레게 된다니까.”신예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온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직감했다. 등골이 오싹해져서 얼른 주시우의 손을 뿌리며 그의 어깨에 걸린 가방을 빼앗으려 했다.“제가 들게요.”“아니야. 내가 교실까지 데려다줄게.”주시우가 차 문을 닫으며 담담히 말했다.“아, 아뇨! 괜찮아요.”신예린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너무 많은 사람이 보고 있잖아요.”그제야 주시우도 주변의 시선이 쏠려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신예린의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며 생각이 잠시 스쳤다.부부 사이임은 분명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동시에 교수와 제자이기도 했다. 세상은 늘 이런 관계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자신은 지위와 명성으로 웬만한 비난을 피할 수 있지만 결국 그 화살은 힘없는 신예린에게 향할 것이다.신예린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학업이었다. 불필요한 소란에 휘말리지 않게 지켜주는 것이 옳았다.“알았어.”주시우는 가방을 건네며 부드럽게 당부했다.“조심해.”“네.”신예린은 얼른 받아 메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주시우는 멀어지는 신예린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시간이 조금만 더 빨리 흘러가면 좋겠어.’복도를 걷는 내내 신예린은 수많은 시선에 시달렸다. 방학 전의 기억이 되살아나듯 속삭임이 곳곳에서 이어졌고 무엇보다 불룩하게 나온 배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임신한 채로 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드물었으니 사람들은 곧바로 신예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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