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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1화

신예린의 가방이 덩그러니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신예린과 주시우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신예린의 얼굴은 여전히 옅게 붉어 있었고 막 피어난 꽃처럼 은근한 수줍음이 눈가에 맺혀 있었다.주시우는 목울대를 한 번 삼키고 낮게 물었다.“오늘 저녁은 만둣국 어때?”신예린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대답했다.“네.”그날 이후 신예린은 교환 학생에 관해 더 이상 마음을 두지 않았다.수업에 집중하고 하교 후에는 늘 주시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집에서는 주시우가 맛있는 음식을 챙겨 주었고 밤이면 종종 쥐가 나는 다리를 정성스레 주물러 주었다.날마다 반복되는 하루였지만 주시우와 뱃속 아기의 존재 덕분에 신예린의 삶은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며칠 뒤, 송지유가 들려준 소식에 의하면 교환 학생 명단이 이미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들었어? 이번에 뽑힌 여덟 명 중에 정가을도 있대. 진호석의 표정이 오늘 내내 안 좋은 걸 봐서는 아마 떨어진 것 같아.”송지유는 늘 그렇듯 새로운 소식을 들으면 제일 먼저 신예린에게 전해 주었고 이날은 자기 전에 영상통화까지 걸어왔다.신예린은 정가을의 선발 소식에 별로 놀라지 않았다.성적도 늘 자신보다 뛰어났고 공부에 대한 태도도 훨씬 더 열정적이었다. 정가을은 비록 조금 우울하고 말수가 적은 성격이었지만 대학 3년간 쌓아 올린 성적만 놓고 본다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신예린은 문득 떠올라 물었다.“근데 정가을 집 형편이 그렇게 좋지 않잖아. 해외 유학을 가면 가족들이 감당할 수 있을까?”“그건 나도 모르지. 원래부터 우리랑 잘 얘기도 안 했잖아.”송지유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생각해 보면 우리 셋이 같은 방을 쓰는데 너랑 가을이는 늘 상위권인데 나 혼자 꼴찌잖아.”신예린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너 밤마다 영상만 보지 말고 그 시간에 공부했으면 진작에 정가을처럼 됐을걸?”“으악, 나한텐 그건 불가능해. 난 뭐든 시작해도 삼일이면 끝이야.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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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2화

송지유는 정가을이 분명 마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예전 같았으면 아직 중학생이나 고등학생 시절이었다면 외로운 사람을 자신이 구해줘야 한다는 어린 마음으로 다가가 애써 위로해 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누구나 각자의 삶이 있는 법이고 정가을이 스스로 문을 닫고 싶다면 억지로 열어 줄 필요는 없었다.그건 정가을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니까.신예린과 통화를 끝낸 송지유는 영상을 조금 보다 잠들 생각이었다.그때 다른 룸메이트 한 명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도 교수님께서 나한테 답장 주셨어! 너무 늦은 밤이라 포기했는데 이렇게 바로 회답이 오네.”그 룸메이트는 내과 과목을 늘 어려워했는데 며칠 전 큰 용기를 내서 도준호 교수님의 카카오톡을 추가했다. 설마 했는데 도 교수님은 흔쾌히 받아 주었고 오늘 저녁에는 질문까지 보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도 답장이 온 것이다.송지유가 창가로 몸을 기울이며 맞장구쳤다.“도 교수님은 참 괜찮으신 분 같아. 늘 웃으면서 학생들을 대하시잖아.”그러자 다른 룸메이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수업도 깔끔하게 설명해 주고 정말 친절하시지.”잠시 후, 도 교수의 음성이 담긴 음성 메시지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이 문제는 간단합니다. 폐공기증은 기도 폐쇄로 인해 폐포 내 공기가 배출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인데... 여기서 기관지 확장제를 사용하면...”“쾅!”갑작스러운 소리에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베란다 쪽에서 세면대 대야가 바닥에 떨어졌다.그곳에 서 있던 정가을은 얼굴이 창백했고 손에서는 힘이 빠져 있었다. 정가을의 시선은 곧장 휴대폰을 들고 있는 아이에게 꽂혔다.“아까 그 목소리는... 누구야?”예상치 못한 질문에 룸메이트는 당황한 듯 대답했다.“도 교수님이야.”정가을의 얼굴빛은 더 하얗게 질렸다.“무슨 교수라고?”“도준호 교수님이야. 새로 오신 내과 교수님인데...”순간, 송지유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이름이 들려온 순간, 정가을의 얼굴에는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고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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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3화

“아기용품 보고 있었어요.”신예린이 휴대폰을 주시우 앞으로 내밀며 몸까지 바짝 기대었다.“세상에, 요즘 빅데이터는 진짜 무섭다니까요. 휴대폰만 켜면 온통 아기 용품 광고뿐이에요.”주시우는 기다렸다는 듯 팔을 뻗어 신예린의 어깨를 감싸안고 그녀의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댄 채 화면을 함께 바라보았다.“이 옷은 너무 예뻐요. 신생아 때 입히면 딱 맞겠네요. 그리고 이것도 봐요. 분홍색이라 마음에 들어요. 이 노란색 모자는 마치 도날드덕 같지 않아요? 너무 귀여워요. 이 신발은 또 어쩜 이렇게 폭신해 보이지...”신예린은 주시우의 어깨에 기댄 채 흥분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투는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작은 기쁨이 고스란히 묻어났다.주시우는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마음에 들면 다 사. 어차피 아기방에 둘 공간은 충분해.”요 며칠 두 사람은 하나하나 아기방을 꾸며 나가고 있었다. 곧 다가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설렘에 젖어 있었다.하지만 신예린은 잠시 망설이며 말했다.“근데 혹시 품질이 안 좋으면 어쩌죠? 후기 보니까 불만도 있던데요.”“품질이 별로면 반품하면 되고 아니면 주말에 직접 가서 오프라인 매장에서 사면 돼.”“그런데 우리 너무 일찍 준비하는 거 아닐까요?”“아니야. 출산이 두세 달밖에 안 남았어. 준비하는 건 결국 부모가 될 우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해. 준비하면서 느끼는 행복, 그게 소중한 거잖아. 빨리 시작할수록 행복한 시간이 길어지는 거고.”신예린은 그제야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사랑하는 사람과 만나는 약속을 잡았다면 그 약속을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이미 행복이라는 거구나.’“그럼 이번 주말에 가서 같이 사요.”“좋아.”주시우는 신예린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신예린은 얼굴을 붉히며 주시우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도 교수님.”캠퍼스 길을 걷던 도준호가 뒤에서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뒤따라오던 이는 같은 학교의 나 교수였다.“나 교수님.”도준호가 미소 지었다.“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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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4화

“정가을 학생, 집에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나정환 교수가 다가가자 정가을은 마치 귀신을 본 듯 휘청이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아이고.”정가을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정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선생이 그렇게 무섭나? 어째 귀신이라도 본 것 같네. 이따가 다시 연락해 봐야겠군.”나정환이 고개를 돌리자 뒤에 서 있던 도준호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떠 있는 게 보였다.도준호의 표정에는 소름이 돋을 만큼 오싹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도 교수님, 왜 그러십니까?”나정환의 물음에 도준호는 이내 표정을 거두며 태연하게 대답했다.“아, 아닙니다. 우리 올라가시죠.”방금의 섬뜩한 웃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언제나처럼 온화한 얼굴이 남아 있었다.나정환은 착각이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따라갔다.두 사람의 사무실은 다른 층에 있었고 헤어지려는 찰나 도준호가 그를 불러 세웠다.“나 교수님.”“네?”“방금 생각났는데 제가 아까 그 학생을 아는 것 같습니다. 1중 출신 맞죠? 예전에 진학 상담도 제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오랜만에 보니 몰라봤네요.”“그래요? 참 우연이네요.”“네. 사실 의대 진학도 제가 권한 거였는데 결국 이렇게 들어왔군요.”도준호는 티끌 하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같은 학교에서 다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 교수님, 혹시 아까 그 학생 연락처 좀 주실 수 있을까요? 해외 유학 문제라면 저도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아, 물론이죠.”나정환은 휴대폰을 꺼내며 감탄했다.“도 교수님은 역시 참 좋은 분이시네요.”“우리 같은 가난한 고향에서 살아남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잖습니까. 더구나 여자아이가 혼자 해외까지 간다니 제가 도울 수 있다면 같은 고향 사람으로서 영광이죠.”도준호의 말은 흠잡을 데 없었지만 그 눈빛 깊은 곳에는 다른 의미가 잠겨 있었다.한편, 강의동 구석에 몸을 기댄 정가을은 온몸을 떨고 있었다. 입술까지 새하얗게 질렸고 눈앞에 자꾸만 도준호의 얼굴이 겹쳤다.머릿속은 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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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5화

“왜 전화를 안 받았지? 이렇게 오랜만에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 요즘은 잘 지내고 있어?”도준호의 목소리는 다정했고 태도는 온화해 마치 따뜻한 어른 같았다.하지만 도준호가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정가을에게는 그저 지독한 위선일 뿐이었다.정가을은 온몸이 덜컥 떨리며 겨우 몸의 주도권을 되찾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다, 다가오지 마세요.”“왜 그렇게까지 놀라? 예전에는 나랑 같이 있는 걸 참 좋아했잖아.”순간, 정가을이 잊고 싶던 기억들이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의 흉측한 얼굴이 도준호의 지금 모습과 겹치자 구역질이 났고 정가을의 몸은 제멋대로 떨려 왔다.기숙사 앞에는 드문드문 학생들이 오가며 힐끗 둘을 쳐다보았다.“여기는 얘기하기가 불편하네. 이번 주말 어때? 마침 병원 당직도 없으니까 따로 자리 잡고 옛일도 얘기 나눠 보자고.”“싫어요.”정가을은 마침내 목소리를 내었지만 거칠고 갈라져 있었다.단칼에 거절당했는데도 도준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다는 듯 부드럽게 이어갔다.“곧 해외 교환 학생으로 나간다며? 축하해. 내가 늘 말했잖아. 넌 분명 큰 대학에 들어갈 거라고. 3년 전 그 여름, 내가 널 얼마나 잘 이끌어 줬는지 증명된 셈이지.”도준호가 굳이 그 여름을 입에 올린 순간, 정가을의 얼굴은 피기가 사라지고 하얗게 질렸다.“나도 일 때문에 외국을 몇 번 다녀왔어. 경험 많은 내가 널 도와주면 훨씬 수월할 거야.” 도준호의 미소에는 은근한 협박이 묻어 있었다.“그럼 주말에 보자. 시간과 장소는 내가 알려 줄 테니. 또 내 전화를 받지 않으면 곤란해질 거야. 너도 잘 알잖아. 내가 화내면 어떤지.”도준호는 떨고 있는 정가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태연히 스쳐 지나갔다.지나가던 학생 몇이 도준호를 보고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도 교수님.”도준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선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낮게 드리운 석양은 기숙사 앞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가을이가 요즘 좀 이상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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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6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입을 맞추는 건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야. 혹시 불안하다면 앞으로 내가 매일 입 맞춰 줄까?”‘그럼 얼마나 좋겠어요.’신예린은 속으로 벌써 수백 번 고개를 끄덕였지만 겉으로는 애써 체한 듯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좋아요...”하지만 신예린의 마음속은 이미 벅찬 기쁨으로 차올랐다.“가을이가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멍할 때가 많아. 원래는 너처럼 늘 도서관 아니면 기숙사에만 있었는데 어제는 수업 끝나고 들어오더니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지 뭐야. 나랑 같은 방 쓴 지 거의 3년인데 밤이 아닌 낮에 자는 건 처음 봤어.”송지유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했다.“몸이 안 좋은 건 아닐까?”신예린이 걱정스럽게 물었다.“얼굴색이 별로긴 했어. 그래도 수업은 빠지지 않고 나가더라고.”“그동안 많이 무리했으니 이제는 좀 쉬어야지.”신예린이 나직하게 말했다.“맞아. 이번 교환 학생 기회는 힘들게 얻은 거잖아. 그 정도 성실했으니 뽑힌 건 당연하지... 전혀 부럽지도 않아.”“집에서 뒷받침해 줄 수 있을까? 형편이 넉넉하지 않다고 들었는데...”“그런 딸이면 부모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내 주지 않겠어? 내가 부모라면 당연히 그럴 거야.”“그렇겠네.”두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인파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회색빛 구름이 낮게 드리운 날씨는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그리고 예감대로 토요일 새벽부터 비가 간헐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신예린은 베란다에 서서 빗줄기가 연이어 흘러내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비가 오네.”곧 주시우가 다가와 신예린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뿌연 하늘을 바라보았다.“그래도 옷 사러 가고 싶어?”“교수님은요?”“난 가고 싶지.”“그럼 저도요.”신예린의 눈빛이 단숨에 밝아졌다.아기 옷을 사러 가자고 약속한 주말이었고 단순한 빗줄기에 그 마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두 사람은 들뜬 마음으로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목적지는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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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7화

신예린은 또 다른 아기 양말을 집어 들었고 모양은 비슷했지만 색깔이 달랐다. 하나는 분홍색, 하나는 파란색이었다.“어떤 색을 골라야 할까요? 아직 아기 성별도 모르잖아요. 분홍색은 여자아이, 파란색은 남자아이 같고...”주시우는 신예린의 손에 들린 양말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네가 마음에 드는 색을 사면 돼. 여자아이라고 꼭 분홍색만 신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남자아이라고 꼭 파란색만 신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주시우의 말은 단호했지만 따뜻했다.“아이가 원하는 색을 입히면 돼. 괜히 틀을 만들 필요 없어. 아이들은 자유로워야 하니까.”순간, 신예린은 얼굴이 붉어지며 혀를 쏙 내밀었다.“제가 잘못했네요.”주시우는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잘못을 인정했으니 상으로 아이스크림 하나.”신예린은 눈을 반짝이며 기뻐 소리쳤다.“교수님 만세!”주시우 앞에서 신예린은 점점 더 마음을 놓았고 아이 같은 모습이 자연스레 드러났다.그 어떤 행동을 해도 주시우가 다 품어줄 거라는 걸 알기에 자신도 모르게 천진한 모습이 흘러나왔다.그날 두 사람은 모자부터 신발까지 꽤 많은 걸 샀다. 그러다 우연히 가족 커플룩 매장을 지나쳤는데 문 앞에 놓인 세 식구 마네킹이 같은 색 옷을 입고 있는 걸 보고 신예린의 발걸음이 멈췄다.“이거 사자.”주시우는 신예린의 손을 이끌었다.“근데 이건 아기가 서너 ㄹ살쯤 돼야 입을 수 있잖아요.”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신예린의 몸은 이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잠시 후, 커플룩이 든 쇼핑백을 들고나온 신예린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쇼핑을 마친 두 사람은 저녁까지 함께 먹었다. 신예린은 결국 아이스크림도 손에 넣었지만 주시우가 한입 크게 베어 먹으며 너무 단 건 지금 많이 먹으면 안 된다는 이유를 붙였다. 신예린은 그 말을 받아들였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사람이 주시우라면 기꺼이 내줄 수 있었으니까.저녁을 마치고 주차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차를 몰고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같은 시간, 다른 쪽 엘리베이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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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8화

“내 차에 올랐으면 그렇게 쉽게 내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정가을은 몇 번이나 문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열리지 않았기에 급히 휴대폰을 꺼내 들며 외쳤다.“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네가 감히?”도준호의 거대한 그림자가 덮치듯 다가와 정가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이 닿는 순간 정가을의 온몸은 역겨움과 두려움으로 굳어 버렸다.“누가 네 말을 믿을 것 같아? 3년 전에도 네 가족 중 누가 네 편에 서줬지?”그 한마디에 정가을의 눈동자가 순간 좁아지고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도준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고 음산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내가 널 강간했다고? 말도 안 돼. 네가 맨날 그런 치마를 입고 내 앞에서 어른거렸잖아. 넌 거부한 적도 없었고... 게다가 네가 먼저 날 유혹한 거 아니었어?”도준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처럼 박혔고 정가을의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아니야... 아니라고요.”정가을은 고개를 저으며 떨었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고 머릿속에 오래전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도 선생님은 그럴 리가 없어. 절대 그런 분 아니야.”“맞아.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대학 간 사람이잖아. 교육을 받은 분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방학 때마다 내려와서 공짜로 진료까지 해줬잖아. 그 정도면 정말 착하신 분이시지.”“정가을은 정말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년이야. 도 선생님이 대학 진학까지 도와줬는데...”“가정 형편 어려우니까 돈을 뜯어내려는 거겠지.”“내가 듣기로는 2,000만 원 달라고 했다던데.”“도 선생님이 줬대. 이런 건 따져 봐야 이길 수 없으니 조용히 덮으려고 말이야. 불쌍해서 도와줬다고 하시더라. 진짜 좋은 분이지.”순간, 코끝에 걸린 안경이 벗겨졌다.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지만 도준호의 목소리만은 또렷하게 파고들었다.“처음에는 나도 몰라봤어. 이 두꺼운 안경이 네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사실 넌 참 예쁘잖아.”도준호는 안경을 뒷좌석에 던져버리고 손끝으로 정가을의 뺨을 훑었다.“난 아직도 네가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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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9화

그날 정가을은 생각했다.‘도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시네. 나도 훗날 도 선생님 같은 의사가 된다면 아픈 동생을 고쳐줄 수 있겠지...’그러나 그 순간, 등 뒤에서 불쑥 손길이 다가와 정가을의 어깨를 짚더니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졌다.정가을의 몸이 단단히 굳었고 긴장이 온몸을 옥죄었다.“도 선생님...”“가을아, 난 널 정말 좋아해.”순식간에 도준호의 두 팔이 정가을의 허리를 휘감았고 축축한 입술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정가을은 본능적으로 잘못됐음을 깨닫고 벌떡 일어나 외쳤다.“안 돼요. 도 선생님. 이러면 절대 안 돼요.”당황한 정가을은 문 쪽으로 향했지만 도준호가 뒤에서 와락 껴안고는 침대 쪽으로 끌어냈다.정가을이 몸부림치며 소리 지르려는 순간, 도준호의 거친 손이 그녀의 입을 막았다.“조용히 해. 지금 집안에 가족들 다 있는데 네가 소리치면 사람들이 문 열고 들어와 우리가 무슨 짓 하고 있는지 다 보게 될 거야.”정가을은 침대 위에서 부들부들 떨었으나 목구멍은 막힌 듯 소리를 낼 수 없었고 혹여 사람들이 몰려와 그 장면을 보게 될지 두려워 감히 울부짖지도 못했다. 그저 눈물만 터져 나오고 있었다.그 뜨겁고 답답한 여름 오후, 방 안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정가을의 삶은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그 일이 있은 후, 같은 침대 위에서 도준호는 차례차례 정가을의 옷을 벗겨냈다.정가을이 자란 곳은 외딴 시골이었다. 세상과 단절된 듯한 그곳에서 정가을이 얻는 모든 지식은 오직 책뿐이었다. 책 속에도 배움 없는 부모의 입에서도 만약 다른 사람이 어린 정가을의 몸에 이런 짓을 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단 한 줄도 쓰여 있지 않았고 그저 도준호의 입에서 반복되는 말뿐이었다.“난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거야.”한참 후, 책방에서 우연히 본 한 권의 소설 속 주인공이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고 경찰에 신고하는 대목을 보며 정가을은 그제야 알았다.‘아, 이건 잘못된 거였구나. 나도 신고해야 했어.’그러나 도준호의 단 한 마디가 정가을을 다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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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0화

차 문이 열리자 정가을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내려섰고 차는 곧장 빠르게 달아나 버렸다.정가을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토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속을 쏟아냈는지 마치 쓸개즙까지 다 쏟아낼 듯이 구역질이 이어졌다.그때 머리 위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내려왔다.“가을아?”송지유였다.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돌아오던 길에 이런 모습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송지유는 혹시 잘못 본 건 아닐까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그 순간, 울음 자국으로 얼룩진 정가을이 고개를 들었고 옷차림마저 흐트러져 있었다.“너 괜찮아?”송지유는 다급히 가방을 뒤적이며 휴지를 꺼내 손에 쥐었고 정가을의 곁에 다가가자 온몸이 떨리는 게 분명히 느껴졌다.“병원에 갈래?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송지유가 부축하려 하자 정가을은 힘껏 팔을 뿌리쳤다.비틀거리며 교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정가을의 발걸음은 힘이 빠져 있었고 눈빛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아무도 믿을 수 없어. 다 똑같아. 겉으로는 선한 척하지만 마음 속에는 다 악마 같은 얼굴을 숨기고 있잖아.’마치 속으로 되뇌는 듯한 기운이 정가을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그 순간 떠올랐다.‘도준호 말이 맞아. 아무도 날 믿지 않아. 모두가 손에 든 칼을 내게 겨눌 뿐이야.’송지유는 더 이상 다가서지 못했고 그대로 몸이 굳은 채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려다보았다.방금 전 잠깐의 실랑이 속에서 정가을의 소매가 젖혀졌고 손끝에 닿았던 것은 깊고 옅은 칼자국 같은 흉터들이었다.주말이 지나자 송지유는 결국 이 사실을 신예린에게 털어놓았다.“가을이가 자해한 것 같아.”신예린은 그 한마디에 눈을 크게 뜨며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자해했다고?”송지유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확실해. 내가 직접 만졌어. 길고 짧은 흉터가 겹겹이 있었어. 수없이 많이...”신예린은 입술을 달싹이며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렸다.“왜... 왜 그런 걸까?”“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분명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어. 그날 밤에 가을이가...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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