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터닝포인트 / Chapter 281 - Chapter 290

All Chapters of 터닝포인트: Chapter 281 - Chapter 290

461 Chapters

제281화

신예린은 지금껏 들어본 말 중 가장 아름다운 표현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눈가가 금세 젖어 들었지만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그날 밤, 주시우는 신예린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들었다. 머리맡의 조명이 은은히 빛을 내고 있었지만 주시우는 좀처럼 눈을 감지 못한 채 눈앞의 신예린만 바라보고 있었다. 출산 후 많은 생각에 사로잡힌 탓인지 며칠 사이 체중이 부쩍 줄어 턱선은 또렷해졌고 오뚝한 콧날 아래 긴 속눈썹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신예린이 몸을 옆으로 돌리며 눈을 뜨자 두 사람의 시선이 그대로 맞닿았다. 주시우의 시선은 먹빛처럼 짙고 깊어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왜 그래요?”신예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예린아.”주시우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난 널 정말 사랑해. 알지?”왠지 모르게 가슴이 눌린 듯 답답해진 신예린은 얼굴을 주시우의 가슴팍에 파묻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알아요.”주시우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그저 신예린을 끌어안았고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끝내 내뱉지 못한 말이 남아 있었다.‘미안해. 네 인생을 내 마음대로 결정해 버려서.’산후조리원에 머무는 동안에도 신예린과 주시우는 매일 아기를 보러 갔다.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는 작은 아기는 날이 갈수록 건강해졌다.어느 날, 아기가 공중에 작은 팔을 흔들며 마치 손을 흔드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신예린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작은 몸에서 삶의 기적이 빛나고 있었다.반 달이 지나자 드디어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이제 아기는 퇴원해도 됩니다.”소아과 의사 소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제가 괜히 소아과 최고의 명의라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죠. 혹시 실패라도 했다면 제 명성이 땅에 떨어졌을 겁니다.”신예린은 눈물이 차올라 고개를 끄덕였다.“정말 감사해요.”“당연히 제 아이처럼 신경 써야죠. 그렇게까지 감사할 필요 없어요.”그 말에 신예린은 눈을 크게 떴다.‘언제부터 지훈 씨의 아이가 된 거지?’그러자 주시우가 곧장 소지훈한테 날카로운 눈
Read more

제282화

“마침 이런 기회가 생겼어요.”주시우의 시선은 어둡고 먼 곳을 향해 있었다.“그럼 아기는 어떻게 할 거야?”주혁재의 목소리가 따라왔다.“학교에 1년간 휴직을 신청했어요. 아이가 조금 더 자라면 그때는 다른 사람 도움을 받을 겁니다.”“하지만 너 혼자서...”“우리나라 가정 중에서 아버지가 사실상 없는 존재처럼 지내는 경우가 거의 80%는 돼요. 어머니가 아이를 키워내는데... 어머니가 할 수 있다면 아버지도 할 수 있죠.”“물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있는 게 제일 좋지 않겠니.”주혁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건 사랑을 얼마나 받느냐에 달려 있어요. 저는 아이한테 사랑을 충분히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예린이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잖아요.”“하지만...”주혁재가 다시 말하려 했으나 곁에 있던 김수희가 끊었다.“보내요. 저는 예린이의 선택을 지지할 거예요.”“여보, 왜 이렇게 마음이 바뀐 거야?”김수희는 주혁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또렷한 목소리로 덧붙였다.“예린이의 인생도 인생이야. 아직 젊은데 엄마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앞길을 포기하면 안 되지. 너희 할머니도 늘 말했잖아. 여자는 자기 일을 가져야 하고 꼭대기에 올라가야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고.”“감사합니다. 어머니.”주시우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아기 돌보는 건 우리도 할 수 있어. 어쨌든 예린에게 이런 좋은 기회가 왔으니 무조건 응원해야지.”“아이는 제가 책임질 겁니다. 제 아이니까 제 곁에서 함께 자라게 하고 싶습니다.”주혁재는 두 사람이 이미 결정을 내렸음을 알아차리고 더는 반대하지 못한 채 긴 한숨만 내쉬었다.전화를 끊은 뒤, 주시우는 한참 동안 발코니에 서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그러다 몸을 돌리자 발걸음이 굳었다.거실 한가운데 잠옷 차림의 신예린이 눈물을 흘리며 주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희미한 불빛이 신예린의 윤곽을 감싸고 있었고 눈가에 고인 눈물은 마치 부서진 보석 같았다.“당신... 이제 날 원하지 않
Read more

제283화

5년 후.비행기 한 대가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공항 도착 게이트 앞은 가족이나 친구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볐다.그때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신예린의 얼굴에는 더 이상 어린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칼은 단정한 단발로 변해 있었다. 가녀린 체구에 고운 얼굴빛, 맑은 눈매는 가을 물처럼 투명했다. 걸음걸이조차도 한결 여유롭고 단정해 보였다.신예린은 한 손에는 여행 가방을 끌고 다른 손에는 휴대폰을 귀에 댄 채 걷고 있었다.“예린아, 너 귀국하는 거 남편이랑 아기한테도 말 안 했다고?”전화기 너머로 송지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신예린은 입술을 살짝 굽히며 미소 지었다.“응, 나 먼저 들어왔어.”졸업식은 보름 뒤였지만 기다릴 수가 없어 서류를 마무리하자마자 곧장 비행기에 올랐다.“그럼 나야말로 네 귀국 사실을 제일 먼저 아는 사람이네?”송지유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맞아, 네가 첫 번째야.”“어머, 너무 큰 영광이네. 이렇게 멋진 신 박사님이 제일 먼저 생각해 준다니. 하필 내가 지금 외지 촬영이라 같이 못 있는 게 아쉽네. 아니었으면 당장 공항으로 달려갔을 텐데. 우리 도대체 얼마나 못 본 거야. 오늘 밤에는 꼭 껴안고 자야겠다.”“안 돼.”신예린은 단호하게 잘랐다.“뭐라고?”송지유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고 곧 신예린이 덧붙였다.“오늘 밤은 내 남편이랑 아기를 안아야지.”“어머나 세상에.”송지유는 닭살 돋는 표정이 그대로 전해질 만큼 과장된 반응을 했다.“신예린, 너 정말 달라졌네. 예전에는 얼마나 점잖고 절제된 애였는데 이런 닭살 멘트를 다 한다니. 역시 해외 나가더니 완전히 탈바꿈했어. 좋아. 네 체력은 충만하다 치자. 근데 주 교수님은 이제 나이가 좀 있는데... 과연 굶주린 널 버텨낼 수 있을까?”신예린은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누가 나이가 많다는 거야?”송지유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아니야. 내가 잘못 말
Read more

제284화

송지유가 건네는 말들은 전부 스스럼없고 솔직했다. 몇 년간 자주 연락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의 정은 여전히 대학 시절처럼 따뜻했다.“아휴, 난 그냥 광대일 뿐이지 뭐. 됐어. 됐어. 그냥 다른 말 해. 민망해 죽겠어.”송지유가 민망한 듯 중얼거렸고 곧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예린아, 나 지금 촬영지에서 관광 홍보 영상 찍는 중이라 더는 못 떠들겠어. 이따 다시 연락할게.”“응. 그러면 먼저 일해. 나도 이제 집으로 갈 거야.”신예린이 대답하자 송지유가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또 끼어들었다.“너랑 주 교수님이 그렇게 오래 못 봤잖아. 혹시 집에 들어가자마자 불꽃이 튀는 거 아니야? 상상만 해도 짜릿하네.”신예린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그만 좀 해. 쓸데없는 소리 집어치워.”“아이고 결혼을 몇 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이렇게 순진해? 주 교수님은 얼마나 힘들었겠냐.”그러더니 송지유는 욕먹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어쨌든 난 일하러 갈게. 예린아, 환영해. 고생 많았어.”뚝 하고 전화가 끊기자 신예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신예린은 택시를 잡아 기사 도움으로 짐을 싣고 차에 올랐다.“아가씨, 외국에 오래 계셨던 모양이네. 짐이 묵직하구먼.”“네. 유학 마치고 막 돌아왔어요. 아, 근데 전 이제 아가씨는 아니에요. 스물여섯이에요.”택시 운전기사는 감탄을 터뜨렸다.“에구, 전혀 그렇게 안 보여. 내가 국제선에서 손님 태운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요즘은 유학 마치고 돌아오는 젊은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 잘했어. 아무리 해외가 좋다 해도 우리나라만 한 데가 없지. 우리 나라에서도 다들 아가씨 같은 젊은이들이 필요하고.”신예린은 미소를 머금은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차창 밖으로 건물들이 쏜살같이 스쳐 지나갔다.‘그래. 아무래도 이곳이 최고지. 여기에 내 아이가 있고... 교수님도 있으니까.’신예린은 주시우를 곧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고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주 교수님.”“주 교수님.”캠퍼스 한복판을 긴 그림
Read more

제285화

주시우는 관자놀이를 눌렀다.“이번 여름 캠프는 아윤이가 단련도 되고 용기도 기르고 시야도 넓힐 기회야. 아윤이도 벌써 다섯 살이잖아.”소지훈은 화가 치밀어 목소리를 높였다.“다섯 살이지 오십 살이 아니잖아. 너 정말 매정하다. 아윤이 불쌍해서 어떡해. 친아빠는 이렇게 무심하고... 역시 아윤이를 제일 아끼는 건 내가 맞아. 안 되겠다. 나 병원에 휴가 내고 마운시에 가서 아윤이 데려올 거야.”“우리 엄마가 이미 따라갔어.”“뭐?”소지훈은 말을 잇지 못했다.“엄마도 너처럼 걱정돼서 자원봉사자로 신청했어. 같이 갔어.”소지훈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역시 할머니가 최고네.”“선생님도 있고 위험할 일은 없어. 아이가 넘어지고 다치는 건 흔한 일이야. 아윤이는 애지중지 키운 아이가 아니야. 아윤이도 이번 활동을 엄청나게 기대하고 갔어.”“그게 다 네가 독립심이니 자립심이니 계속 주입했기 때문이잖아. 아내를 보낸 것도 모자라서 이젠 아이까지 멀리 보내 버렸네.”순간 주시우는 대답을 멈췄다.소지훈이 다시 물었다.“솔직히 말해 봐. 예린이가 떠난 지 벌써 5년이야. 너 불안하지 않아?”“뭐가 불안하다는 거야?”“외국에서 눌러앉아 안 돌아올까 봐 말이지. 거기서 학부에다 대학원까지 다니고 있잖아. 금발에 눈 파란 잘생긴 남자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다들 젊고 얼굴도 너 못지않아. 결정적으로 걔들은 여자한테 잘해. 너 같은 고지식한 사람보다 훨씬 재밌을 거라고. 예린이가 혹시라도 그쪽한테 한눈팔면 남편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릴걸?”소지훈의 잔소리가 꼬리를 물자 주시우는 이마를 찌푸리며 짧게 잘랐다.“난 예린이를 믿어.”“어휴, 마흔이 다 된 사람이 어디서 그렇게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나오는 거야.”주시우는 더 대꾸할 마음이 없어졌다. 막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뒤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주 교수님.”돌아보니 한 여자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스피커 너머로 그 목소리를 들은 소지훈이 민첩하게 반응했다.“설마...
Read more

제286화

택시 기사가 내뱉은 말은 나름 철학적이었지만 신예린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에 요란하게 지나간 구급차들만 맴돌았다.“기사님, 여기서 사고 난 지점까지 얼마나 남았나요?”운전기사는 왜 그런 걸 묻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줄여 보여주었다.“한 1킬로 정도 남았네요.”신예린은 시간을 대충 계산하더니 결심을 굳혔다.“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트렁크 좀 열어주세요. 짐 좀 꺼낼게요.”“네?”기사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아가씨, 급한 건 알지만 여기서 내리면 위험해요.”“저 앞에 혹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봐야겠어요.”그 말에 기사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뜨렸다.“아가씨가 뭘 도울 수 있다고 그래요.”신예린은 단호하게 눈을 마주했다.“저 의사예요.”그 순간 기사의 눈빛이 달라졌고 뜨겁게 뭔가가 치밀어 오르는 듯한 기세였다.신예린은 말을 마치고 휴대폰으로 조수석 뒤편에 붙은 QR코드를 스캔해 곧장 4만 원을 보냈다.“요금은 송금했어요. 더 드린 부분은 기사님께 불편 끼쳐드린 거니까 받아주세요. 문 열어주세요.”그러자 기사도 마음을 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아가씨, 그러면 시름 놓고 가세요. 짐은 제가 목적지까지 꼭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어떻게든 직접 손에 전해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뜻밖의 말에 신예린은 놀란 눈길을 보냈다. 기사도 마치 맹세하듯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저는 약속을 무조건 지키는 사람입니다.”신예린은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연락처를 남기고는 차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기사는 신예린이 사고 현장 쪽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그래. 우리나라에는 이런 젊은이가 꼭 필요하지.’사고 현장은 생각보다 훨씬 참혹했다. 몇몇 차량은 앞뒤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찌그러져 있었고 검푸른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끊어지는 신음이 공기를 갈랐다.질서를 유지하던 교통경찰이 뛰어온 신예린을 발견하고는 매섭게 소리쳤다.“여긴 위험합니다. 왜 뛰어드는 겁니까!”
Read more

제287화

사고는 주시우 눈앞에서 벌어졌다. 그는 가장 먼저 경찰에 신고했고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차에서 내려 부상자들을 살폈다. 구조대가 도착한 뒤에도 주시우는 계속 곁에서 도우며 환자들을 옮겼다.그때였다.“간호사!”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리자 주시우의 심장이 철렁하며 소리를 따라갔고 시야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신예린이었다.신예린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얼굴에 단단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머리는 급히 귀 뒤로 묶어 올렸지만 삐져나온 머리카락 몇 올이 귀 옆에 흘러내리고 있었다.신예린은 눈앞의 환자에게 몰두해 있었다. 무균 장갑을 재빨리 착용하고 소독한 흉부 위치를 정확히 잡은 뒤,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환자의 가슴에 주사기를 단호하게 찔러 넣었다. 활대를 뽑자 생리식염수가 담긴 주사기 속에서 기포가 뽀글거리며 흘러나왔다.처음부터 끝까지 신예린의 동작은 깔끔하고 단호했으며 물 흐르듯 이어졌다.주시우는 언젠가 신예린이 의사가 된 모습을 떠올린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눈앞에서 목숨을 살려내는 현장을 보니 가슴이 묘하게 울렸다.더 이상 예전처럼 두려움에 쉽게 눈물이 맺히던 소녀가 아니었다.주시우는 신예린이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보았다.그 순간 안도와 벅참이 한꺼번에 밀려와 지난 5년간의 그리움이 모두 보상받는 듯했다.환자는 몇 차례 급하게 숨을 몰아쉰 뒤, 이내 호흡이 안정되고 얼굴빛도 회복되었다.신예린은 긴 숨을 내쉬며 간호사에게 당부했다.“지금은 응급조치라 임시일 뿐이에요. 환자는 긴장성 기흉입니다. 병원으로 옮겨 흉강천자 수술을 진행해야 합니다.”간호사는 눈앞에서 본 능숙한 솜씨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환자를 들것으로 옮겼다.신예린은 몸을 일으켜 다른 환자에게 가려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그 순간, 깊고도 낯익은 시선과 마주쳤다.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불과 몇 미터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은 주시우를 크게 바꾸지 않았다. 또렷한 이목구비와 단단한 몸매,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눈빛,
Read more

제288화

구급차 안, 간호사가 다급히 대답하며 움직였다. 비록 신예린과 처음 호흡을 맞추는 것이었지만 두 사람은 손발이 잘 맞는 듯 척척 환자를 돌보았다.사이렌을 울리며 달리던 구급차 안에서 신예린은 창밖을 흘낏 올려다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주시우가 길게 뻗은 몸을 굽혀 다른 부상자를 돕는 모습이 스쳤다.오랜만의 재회였지만 감정에 젖을 겨를은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건 오직 시간과의 싸움이자 생명과의 싸움뿐이었다.태성 병원.연쇄 추돌 사고 소식을 접한 병원은 곧바로 비상 체제를 가동했다. 각 부서에서 인력이 긴급히 차출돼 응급실로 몰려들었고 병원 안은 환자들로 북적이며 혼란스러웠다.“복강에 출혈이 있네요. 다행히 미리 수액을 확보해 출혈성 쇼크를 어느 정도 막아냈습니다. 만약 병원 도착 후에야 조치했더라면 상황은 훨씬 심각했을 겁니다.”흰 가운을 걸친 의사가 초음파 기계를 들고 환자의 배에 탐촉자를 대며 진단을 내렸다.“아까 현장에서 어떤 여자 의사 선생님이 처리했어요. 긴장성 기흉도 직접 잡아냈습니다.”곁에서 지켜본 간호사는 조금 전의 장면이 떠오르는지 목소리에 흥분이 묻어났다.“정말 대단했어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결단을 내리더군요. 자신감 넘치는 눈빛에서 확신이 느껴졌습니다.”긴박한 순간에 침착하게 판단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건, 단순히 배운 실력이 아니라 굳건한 정신력의 증거였고 진짜 전문가다운 모습이었다.“우리 병원 의사예요?”의사가 놀란 듯 물었다.“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어디 갔죠?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간호사는 사방을 둘러봤지만 이미 신예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신예린은 어느새 병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손에 묻은 피는 씻어냈지만 옷에 남은 핏자국은 지워지지 않았다. 다행히 어둑해진 저녁빛이 주변을 가려주고 있었다.휴대폰을 켜자 주시우가 한 시간 전쯤 보낸 메시지가 떠 있었다.[현장은 정리됐어. 난 교육청 회의가 있어서 지금 가는 중이야. 중요한 회의라 아마 일곱 시쯤 끝날 거야. 네가
Read more

제289화

“주 교수님.”회의가 끝나자 주시우가 노트북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옆에서 누군가가 불렀다.이번 회의는 다음 학기에 교육청에서 학교에 요구하는 사항을 주제로 열렸고 참석자는 각 대학의 교수진과 관리층이었다. 이런 회의는 한 학기에 서너 번은 열리니 자연스레 얼굴을 트게 되었다. 더구나 주시우는 명성이 자자했기에 다른 학교 교수들도 대부분 그를 알고 있었다.“오시는 길에 사고가 났다던데... 괜찮으세요?”한 교수가 걱정스레 물었다.“전 괜찮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 교수님.”“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아까 회의 내내 어딘가 마음이 딴 데 있는 것 같아서 몸이 안 좋은 줄 알았습니다.”오 교수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오랜만에 만났는데 오늘 저녁은 우리끼리라도 식사 한번 같이 하시죠?”“죄송합니다. 오늘은 일이 좀 있어서요.”주시우는 곧장 거절했다.“그럼 다음에 뵙죠.”그들은 함께 주차장으로 내려가 각자 차를 타고 흩어졌다.밤이 깊어지고 거리 양옆의 네온사인이 반짝이며 도시를 은하수처럼 수놓았다. 주시우는 평온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았지만 발밑의 가속 페달은 점점 깊게 밟혔다.한 디저트 가게 앞을 지나던 순간, 문득 무언가가 떠올라 차를 세웠다. 잠시 뒤, 조수석에는 작은 케이크 상자가 놓였다.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 거실 바닥에는 커다란 여행 가방이 펼쳐져 있었고 옷가지와 상자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으며 욕실에서는 물소리가 흘러나왔다.하루 종일 어딘가 꿈결 같던 감각이 그제야 현실로 다가왔다.‘정말... 돌아왔구나.’주시우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케이크 상자를 식탁 위에 올려두고는 고개를 숙여 여행 가방 속 옷을 하나하나 꺼내 옷장에 걸었다. 텅 비어 있던 옷장은 단숨에 채워졌다. 손끝으로 옷감의 결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주시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다시 거실로 나와 남은 물건들을 꺼내 정갈하게 정리하던 순간,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신예린의 휴대폰이었다.주시우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고
Read more

제290화

신예린은 유학 시절 석사 과정을 이어가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남편과 아이와 함께할 시간을 모두 희생해야 했기에 한순간도 대충할 수 없었고 전심을 다해 학업에 매달렸다. 그렇게 지난 1~2년 동안은 주시우와 연락조차 거의 하지 못했다.지금의 두 사람은 가장 잘 아는 듯하면서도 낯설기만 한, 가장 익숙한 이방인 같았다.더구나 주시우는 자신이 돌아온 사실 앞에서도 의외로 담담해 보였다.신예린은 손끝을 꼭 움켜쥐며 먼저 입을 열었다.“당신은 나한테 할 말 없어요?”주시우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고 한참 뒤에야 차분히 대답했다.“언제 돌아온 거야? 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오늘 막 도착했어요. 당신이랑 아윤이한테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하지만 주시우는 아까 보았던 그 낯선 메시지가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것이 놀라움일지 두려움일지 알 수 없었다.“아윤이는? 혹시 부모님 댁에 있어요?”신예린이 묻자 주시우가 고개를 저었다.“네가 이렇게 일찍 돌아올 줄 몰라서... 여름 방학 캠프에 신청해 뒀어. 마운시에 한 달 과정이야.”“혼자 간 거예요?”신예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아니야. 어머니가 같이 가셨어. 걱정하지 마.”그제야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지만 금세 아쉬움이 밀려왔다.“난 이번에 오자마자 아윤이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내가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데리고 오시게 할까?”“아니에요. 이런 기회 흔치 않은데 그냥 두세요. 한 달 금방 지나가겠죠.”다시 적막이 방 안에 내려앉았고 신예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말을 꺼냈다.“당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말해야겠네요.”주시우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으면서 입술이 살짝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드르륵.”휴대폰 진동이 울리며 신예린의 말이 끊겼다.“미안해. 잠깐만.”주시우는 전화를 받았고 짧은 대화 끝에 얼굴이 굳어졌다.“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주시우는 전화를 끊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설명했다.“실험실에서 신약 표적 연구를 하고
Read more
PREV
1
...
2728293031
...
47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