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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터닝포인트: Chapter 291 - Chapter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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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1화

신예린은 마음이 달콤하게 차올라 당장이라도 케이크를 먹어 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문득 주시우가 떠나기 전 남긴 당부가 생각나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머리를 먼저 말렸다.머리를 다 말리고 거실로 나오자 식탁 위에 두었던 휴대폰이 눈에 들어왔다. 신예린은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자리에 앉아 케이크를 한 숟가락 퍼 넣었다. 그때 아르덴에 있는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이혼 생각은 정리됐어?]신예린은 화면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뭐야? 네가 이혼할 거면서 왜 나한테 물어봐?]에비가 곧장 답장을 보냈다.[흑흑... 나 혼자서는 결정을 못 내리겠단 말이야.]에비는 신예린과 비슷한 시기에 아르덴으로 유학하러 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학교 외국인 학생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그러나 3~4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의 정은 이미 식어 있었고 에비는 귀국을 원했지만 남편은 자기 나라에 남기를 고집했다. 그래서 에비는 갈라설 마음은 굳혔지만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너희는 미래 계획이 완전히 다르잖아. 서로 맞춰줄 수 없다면 결국 이혼은 피할 수 없을 거야.]신예린이 단호히 답했다.[레오는 전혀 날 이해하지 못해. 난 돌아가야 앞길이 더 열린다고 생각하는데 레오는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아.]에비가 답장을 이어왔다.[그럴 수도 있지. 여긴 레오의 고향이니까. 네가 돌아가는 걸 고집하는 것처럼 말이야.][휴...][그래도 네 남편은 정말 좋아. 네가 어떤 결정을 해도 묵묵히 지켜주잖아. 혼자서 5년이나 버텼잖아.]메시지를 본 신예린의 입술이 가만히 휘어졌다.[맞아. 내 남편은 좋은 사람이야.][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보고 싶어. 우리 대단한 교수님을 말이야!][그래.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지금 뭐 해?]에비의 물음에 신예린은 케이크 사진을 찍어 보냈다.[와, 맛있어 보인다.][응. 남편이 사 온 거야.][아이고. 지금 네가 으쓱거리는 표정이 눈에 선하네.]신예린은 장난스레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였다.[이혼은 오래 붙잡아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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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2화

주시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벽에 걸린 흰 가운을 걸쳐 입었다. 그리고 손호명이 건네준 마스크를 받아 쓰며 물었다.“어디서 문제가 생긴 거죠?”“현미경으로 확인해 보니 약물을 투여한 일부 실험동물의 종양 세포가 여전히 살아 있었어요. 어느 단계에서 오류가 생겼는지 아직 확실치 않아 전 과정을 다시 점검해야 합니다.”어느 한 부분이라도 문제를 단정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확인해야 한다는 뜻이었으니 당분간 밤을 지새울 게 뻔했다.“제가 직접 보겠습니다.”주시우가 짧게 대답하며 현미경 앞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주머니 속 휴대폰이 가볍게 진동했다.아마 신예린일 거라 짐작하며 휴대폰을 꺼내 보니 몇 초 전 보낸 메시지를 지운 흔적이 남아 있었다.주시우는 곧장 답장을 보냈다.[뭘 보낸 거야?]잠시 뒤 신예린의 답이 도착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잘못 보낸 거예요. 당신은 어서 일 보세요.]급한 상황임을 알기에 주시우는 더 묻지 않고 짧게 답했다.[알았어.]그렇게 시간은 훌쩍 흘러 몇 시간째 작업이 이어졌고 피곤함이 몰려온 손호명이 하품을 참지 못하며 다가왔다.“주 교수님, 이제 조금 쉬시죠. 내일 강의도 있으시잖아요.”주시우는 전자 현미경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자 벽시계 바늘은 이미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그래야겠군요.”주시우는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덧붙였다.“학생들과 교수님들은 다 들어가 쉬세요. 결과가 당장 나올 일은 없어요.”“교수님은요? 집에 가시겠어요?”“이 시간에 무슨 집으로 가겠어요. 그냥 여기서 대충 자면 됩니다.”“그러시죠. 아이도 없으니 어딜 자든 상관없으시겠네요.”주시우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손호명은 학생들을 기숙사로 돌려보냈고 곧 실험실은 고요해졌다.남겨진 주시우는 서둘러 자료를 정리한 뒤 옆에 놓인 작은 소파에 몸을 눕혔다. 혼자 누우면 딱 맞는 크기의 좁은 소파였다.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직원 숙소가 있었지만 주시우는 늘 다른 동료에게 양보해 왔다. 아이가 있을 때는 어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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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3화

다음 날 아침, 손호명이 실험실 문을 열자 주시우가 여전히 현미경 앞에 앉아 있었고 옆에는 컴퓨터에 입력된 데이터가 가득 쌓여 있었다.낯선 소리에 고개를 든 주시우의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손호명은 놀라움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주 교수님, 밤새 한숨도 못 주무신 겁니까?”“잠이 안 와서요.”밤을 새운 탓인지 주시우는 목소리가 잠겨 있었고 시계를 흘끗 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곧 수업 시간이네요. 아침이나 좀 먹고 오겠습니다. 어젯밤 데이터는 전부 공유 파일에 올려놨으니 거기서 이어서 확인하세요.”손호명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주시우는 간단히 양치와 세수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복도에서 임혜린과 마주쳤다.“주 교수님, 어젯밤 실험실에 문제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큰일은 아니죠?”임혜린이 걱정스레 물었다.“다시 전 과정을 확인해야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겁니다. 다만 일이 좀 많아졌죠.”주시우의 지친 기색을 살피던 임혜린이 다시 물었다.“설마 밤새 안 주무신 거예요?”주시우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네... 임 교수님, 곧 수업이 있어서 먼저 아침을 먹으러 가야겠습니다.”그러자 임혜린은 서둘러 손에 들고 있던 봉지를 내밀었다.“아직 드시지도 못했죠? 제가 아침에 직접 부친 만두예요. 맛 좀 보세요.”때마침 캠퍼스는 수업 준비로 분주했고 두 사람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시선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잘생기고 능력 있는 주시우, 그리고 단아하면서도 재능 있는 임혜린, 두 사람의 모습은 충분히 화제가 될 만했다.학생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가 돌곤 했다.게다가 주시우가 과거 제자와 결혼했다는 소문은 여전히 돌고 있었고 지난 5년 동안 주시우의 아내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어떤 이들은 유학 중이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이미 갈라섰다고도 했다.무명지의 반지가 사실은 아이를 위한 위로일 뿐이라는 얘기까지 나돌았다.그런 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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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4화

[내가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알지? 네가 요 며칠 바쁜 것 같아서 일부러 연락 안 했어.][야!][예린아, 왜 그래? 아직도 바빠서 손가락 움직일 시간도 없어? 주 교수님은 여전히 정정하시네...][지유야, 사실은... 나 이 며칠 내내 혼자 빈집 지켰어.][뭐라고?][내가 돌아온 첫날부터 실험실에 문제가 생겨서 교수님은 아직 집에 못 들어왔어.][지금 나는 딱 억울함이 가득한 아내가 된 기분이야.][예린아, 그게 정말 알맞은 표현이네.][주 교수님은 무려 5년을 혼자 버텼어. 예린아, 넌 고작 며칠 가지고 뭘 그래. 교수님은 원망이 많은 남편이 된 적도 없는데.][근데 있잖아... 교수님이 왠지 나를 피하는 것 같아.][널 왜 피하겠어?][잘 모르겠어. 그냥... 느낌이 그래.][예린아, 그러면 넌 어떻게 할 거야?]신예린은 이미 현관에서 신발을 신으며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였다.[어떻게 하긴... 직접 학교로 찾아가야지.][욕구불만에 억울함에 들끓는 아내라니... 주 교수님께서 무사하시길 빌어야겠네.]실험실 안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드디어 해결됐어!”“역시 주 교수님이야. 지난 데이터에서 발견된 이상 패턴을 근거로 문제를 찾아냈으니 원래라면 일주일은 걸릴 걸 사흘 만에 끝냈네요.”한 학생이 죄책감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제 잘못이에요. 제 부주의 때문에 모두가 이렇게 고생했어요.”다른 학생이 곧장 받아쳤다.“우리야 괜찮지만 주 교수님 보세요. 며칠째 실험실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하셨잖아요. 가장 고생한 사람은 교수님이죠.”그 학생은 급히 주시우 앞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주 교수님, 죄송합니다.”며칠째 이어진 밤샘 탓인지 주시우의 얼굴은 피곤함에 젖어 있었고 목소리에도 무게가 실렸다.“앞으로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루는 건 생명과 직결된 연구예요. 실수 하나가 큰 비극을 부를 수 있어요. 이번처럼 일찍 발견되면 다행이지만 임상 단계에서 문제가 터졌다면 돌이킬 수 없었을 겁니다.”학생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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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5화

어쩌면 하늘도 알 것이다. 주시우가 그 질문을 꺼낼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말이다.신예린의 입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생겼다는 대답이 나오면 그다음에 준비한 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 버릴 터였다.만약 정말 그렇다면 주시우는 기꺼이 신예린을 놓아줄 수 있을까.정작 주시우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다행히도 신예린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없어요.”그 순간 주시우의 이마에 얽혀 있던 주름이 풀리며 미묘한 안도의 기운이 스쳤다.다른 사람을 좋아한 게 아니라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주시우는 땀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꼭 움켜쥔 채 다시 물었다.“그러면... 우리 앞날에 대해 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신예린은 뜻밖의 질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학창 시절 문제를 풀어주던 때가 아니면 늘 온화하고 여유로운 얼굴이던 주시우가 이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일은 드물었다.‘혹시 며칠 동안 자신을 일부러 피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을까. 나랑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내며 마음이 식은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정리하려는 걸까?’신예린은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주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우리 사이에는 분명히 5년이라는 공백이 있어. 네가 필요할 때 내가 곁에 없었다는 것도 알고 시간이 모든 걸 흐리게 한다는 것도 잘 알아.”주시우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떨림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 게 아니라면... 우리도 한때는 사랑했던 사이잖아. 그 공백을 내가 메울 수 있게 해 줄래? 다시 한번... 날 좋아해 줄 수 없겠니?”주시우의 진심 어린 호소였다.언제나 완벽하고 당당한 주시우가 지금은 마치 땅바닥까지 몸을 낮춘 듯했다. 그 순간, 신예린의 가슴이 크게 요동쳤고 눈가가 순식간에 뜨겁게 젖어 들었다.신예린은 조심스레 물었다.“당신... 설마 제 친구가 보낸 메시지를 본 거죠?”주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미안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그런 일까지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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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6화

“당신을 이렇게까지 그리워했는데 제가 어떻게 이혼을 입에 올릴 수 있겠어요.”끝내 신예린은 목소리가 떨리며 말이 막혔다.신예린의 그 한마디는 주시우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들었다.알고 보니 수년간 그리움에 시달린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신예린이 서둘러 돌아온 것도 이혼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만나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에 며칠 동안 마음을 짓누르던 매듭이 단숨에 풀려나갔다.주시우의 가슴은 벅찬 감동과 환희로 가득 찼다.멀리 서 있던 신예린은 눈가를 훔치며 작게 투덜댔다.“이 며칠 동안 저를 피하는 것 같아서... 저는 당신이 날 반기지 않는 줄 알았어요. 심지어 저를 안아주지도...”말이 끝나기도 전에 따뜻한 품이 신예린을 세차게 끌어안았고 오랜만에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예린아, 네가 돌아와서... 난 정말 기뻐.”주시우의 억눌린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신예린의 가슴이 순간 녹아내렸고 입가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번졌다.다섯 해 만에 두 사람은 다시 서로를 안았다.주시우는 도무지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을 꾹 눌러 담으며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나도...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그 말에 신예린은 입꼬리를 감추지 못한 채 장난스레 눈을 빛냈다.“역시 그럴 줄 알았어요.”행복이 온몸을 물들이자 귀국의 설렘이 다시 살아났다.오해를 풀고 나니 신예린의 마음은 환히 밝아졌다.그러나 달콤한 공기마저 깨뜨리는 소리가 불쑥 터져 나왔다.“꼬르륵...”가까이 붙어 있던 두 사람은 동시에 그 소리를 들었고 신예린의 볼은 금세 발갛게 달아올랐다.주시우가 웃음을 터뜨렸다.“배고프구나?”신예린은 황급히 억울한 척 목소리를 높였다.“당신이 며칠 동안 저를 외면하니까 너무 서운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단 말이에요.”“미안해. 내가 널 소홀히 했어.”진심으로 사과하는 주시우에 신예린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거짓말이에요. 사실 점심은 배불리 먹었어요. 그냥... 요즘 몸을 많이 써서 그런가 봐요.”주시우는 부드럽게 물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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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7화

손호명은 4년 전에 부임했기에 신예린에 대해서는 이름만 얼핏 알고 있을 뿐이었다. 당시 주시우와 얽힌 이야기들이 학교 안에 오래도록 떠돌았지만 정작 신예린이 어떤 얼굴인지조차 손호명은 알지 못했다.그동안 주시우와 함께 지내며 일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봐 왔지만 주시우는 여태껏 어떤 여자와도 가깝게 지내는 장면은 본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내 눈이 잘못된 걸까?’분명히 주시우는 낯선 여인과 나란히 걸으며 마치 떨어지기라도 할까 싶을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었다.순식간에 계단에는 고개를 내민 학생들로 빼곡해졌다.“손 교수님, 설마 주 교수님이... 바람 피우시는 거 아니에요?”누군가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물었다.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학생들 눈앞에서 주시우의 당당한 이미지는 조금 작아진 듯 보였다.“헛소리하지 마.”손호명이 단호하게 꾸짖었지만 시선은 주시우가 사라져 간 방향에 그대로 꽂혀 있었다.“내 짐작에는... 조금 전에 본 사람이 바로 너희들이 이름만 듣던 사모님일 거야.”학생들은 입을 떡 벌린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아니, 분명히 사모님은 유학 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맞아요. 주 교수님께서는 사모님이 돌아온다는 얘기는 한 번도 안 했는데...”“게다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랑 같이 밤새 실험하셨잖아요.”그때 한 학생이 조심스레 말했다.“저... 저 사실 들은 얘기가 있는데요. 사모님이 남편이랑 아이까지 버리고 외국에서 안 돌아온다고...”순간 주위에서 날카로운 시선들이 사방에서 쏟아졌고 학생은 곧바로 어깨를 움츠리며 변명했다.“저, 저도 그냥 들은 말이에요. 제가 한 소리는 아니고...”학생은 더는 눈총을 못 견디고 결국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손호명이 흥미롭다는 듯 입을 열었다.“어떻게 하겠다는 건가요?”학생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방금 본 여인이 정말 사모님인지 아닌지 내기하는 거야. 진 사람은 일주일 동안 실험실 청소하기. 어때?”“좋아요. 콜!”곧 누군가가 작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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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8화

예전에는 몇 번이나 혼쭐이 난 덕에 손 씻는 습관만큼은 얌전히 지키곤 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무려 5년 만에 주시우가 해 준 밥을 다시 먹는다는 설렘과 흥분 때문에 신예린은 예전의 버릇이 또다시 나타나고 말았다. 마침 주시우도 역시 신예린을 잡아내던 예전 버릇을 고스란히 드러냈다.순간 눈빛이 마주쳤고 신예린의 손이 수도꼭지 위에서 멈췄다.짧은 정적 끝에 신예린이 머쓱하게 말했다.“그럼... 제가 한 번 더 씻을까요?”주시우의 눈가에 웃음기가 번졌다.“네 생각에는?”신예린은 이번에 단호하게 대답했다.“네. 다시 씻을게요.”이번에는 제대로 비누를 묻혀 구석구석 문질렀다. 거의 ‘7단계 손 씻기’를 따라 하듯 꼼꼼했고 주시우도 더는 말없이 지켜만 봤다.그제야 신예린은 문득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제는 예전의 어린 자신이 아닌데 왜 여전히 주시우 앞에서는 저렇게 눈치를 보게 되는 걸까.부엌으로 돌아오니 이미 볶음밥 두 접시가 식탁에 올려져 있었다. 접시 크기는 같았는데 신예린 앞에 놓인 건 마치 작은 산처럼 수북했다.‘내가 배고플 거라고 생각했구나...’주시우가 늘 그렇듯 신예린한테 넉넉히 담아주었다.하지만 지금 신예린은 웬만하면 소 한 마리도 먹을 기세였기에 괜히 토를 달지 않고 곧장 숟가락을 들었다.쌀알은 촉촉하게 부드럽고 새우는 탱탱하게 씹혔으며 완두는 향긋했다. 입안 가득 퍼지는 맛에 신예린의 눈가가 순간 뜨거워졌다.‘이 맛...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해외에서도 한식점은 많았고 주시우가 해 주던 메뉴들을 종종 시켜 먹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흉내일 뿐 결코 같은 맛이 아니었다. 결국 신예린은 자신이 원했던 건 음식이 아니라 주시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맛있어?”주시우가 부드럽게 물었고 시선은 줄곧 신예린에게 머물러 있었다.“맛있어요.”신예린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가 곧 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주시우의 입매가 살짝 올라가며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맛있으면 많이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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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9화

몇 년이나 떨어져 지내다 다시 마음을 확인한 첫날 밤, 같은 침대에 누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신예린은 주시우가 끝까지 태연하게 버틸 리 없다고 굳게 믿었다.그래서 잠옷을 고를 때도 특별히 마음을 썼다.해외에서 친구가 귀국 선물이라며 건넨 그야말로 대담한 디자인의 잠옷이었다.샤워를 마치고 거울 앞에 섰을 때, 신예린은 자신도 놀랄 만큼 얼굴이 빨개졌다.보랏빛의 가느다란 끈으로 된 슬립 원피스였다.은근히 몸매가 드러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감춰졌고 치맛단은 겨우 엉덩이를 가릴 정도였다.마치 반쯤만 가린 비밀스러운 악기처럼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옷이었다.처음 입어 보는 옷이라 신예린은 부끄러움에 온몸이 달아올랐다.‘주 교수님이 이걸 보고도 정말 아무렇지 않을까?’혹시라도 품위가 없다며 쫓아낼 것 같은 불안이 스쳤지만 신예린은 곧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감히 그랬다간 당장 집을 나가버릴 거야. 오늘은 무조건 내가 먼저 덮칠 거야.’단단히 결심한 신예린은 욕실을 나서기 전에 준비해 둔 향수를 은은히 뿌렸다.가볍게 퍼지는 향기가 방 안을 감돌았다.‘이 정도면 아무리 연륜 있는 남자라도 못 버틸걸.’신예린이 용기를 다잡고 문을 열었을 때, 몸에 붙은 얇은 옷감 덕에 시원하다 못해 오싹할 정도였다.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면 이 설레는 작전은 두꺼운 내복과 외투를 벗는 데만 한참 걸렸을지도 모른다.‘아니야. 지금은 잡생각 말고 바로 집중해야지.’거실 불빛은 꺼져 있었고 서재도 조용했다.신예린은 살금살금 침실 문 앞으로 다가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회심의 늑대처럼 속으로 웃었다.‘주시우, 내가 왔어...’문을 열며 매혹적인 포즈까지 지어 보였지만 예상했던 감탄도 뜨거운 반응도 없었다.방 안은 고요했고 오직 신예린의 모습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이었다.고개를 돌려 침대 쪽을 보니 주시우는 그대로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잠든 건가?”순간 신예린은 허탈함과 분노가 몰려왔다.‘이런 황금 같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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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0화

두 사람은 이미 수없이 입을 맞췄던 사이였기에 신예린은 주시우의 입술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신예린의 머릿속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남이 잘 자고 있을 때 슬쩍 입 맞추는 건 변태지... 도둑이야.’‘뭐 어때? 내 남편인데. 남편 몰래 뽀뽀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 오히려 부부 사이의 재미라고!’결국 악마의 속삭임이 이겼고 신예린은 살짝 몸을 기울여 빠르게 주시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흘깃 살폈지만 주시우는 반응이 없을 정도로 깊이 잠든 모양이었다.용기를 얻은 신예린은 연달아 몇 번이나 입술을 스쳤다. 마지막에는 살짝 오래 머물렀는데 그 순간 주시우의 속눈썹이 가볍게 떨린 것 같았다.도둑질하다 들킨 듯 심장이 쿵 내려앉아 신예린은 서둘러 몸을 뗐지만 곧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내가 뭐가 두려워서 물러서는 거지? 설령 깬다고 해도 그때야말로 제대로 이어가면 되는 거잖아.’아쉽게도 주시우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고 편안한 얼굴에는 오직 깊은 꿈의 여운만이 비쳤다.신예린은 장난스럽게 속삭였다.“오늘 못한 일은 이자로 계산할게요. 내일은 원금까지 꼭 받아낼 거예요.”그 말에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고 결국 자연스레 주시우 곁으로 몸을 파고들어 주시우의 팔을 끌어다 허리에 두르게 했다.“잘 자요.”신예린은 주시우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눈을 감았다.고요한 방 안, 긴 세월을 돌아 다시 만난 두 사람은 그렇게 나란히 서로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주시우는 일찍 눈을 떴다.전날 저녁, 신예린이 씻고 나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곯아떨어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날이 밝아져 있었다.몸을 움직이려다 팔 위에 머리 하나가 얹혀 있는 걸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곤히 잠든 신예린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팔을 베개 삼아 몸을 기댄 채 꼭 끌어안고 자는 모습이었다.예전에도 둘은 이런 자세로 함께 잠들었지만 임신 중이던 신예린은 오래 버티지 못해서 편한 대로 자세를 바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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