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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터닝포인트: Chapter 81 - Chapter 90

100 Chapters

제81화

집으로 돌아온 임정희는 침대에 누운 채 이리저리 뒤척이며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옆에 누운 신경무는 그녀가 계속 움직이자 이불 안으로 찬 바람이 들어와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잠 안 잘 거면 예린이 방에 가서 누워 있어. 나까지 못 자게 만들지 말고.”임정희는 그 말에 벌떡 일어나 앉아서 씩씩댔다.“지금 잠이 와요? 민호가 저렇게 됐는데 잠이 오냐고요?”그러자 신경무는 짜증을 꾹 누르고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안 자면 뭐가 달라져? 나 내일 출근해야 해. 지금 집에서 돈 버는 사람이 나밖에 없고 애들 등록금 낸 지 얼마 안 돼서 남는 돈이 별로 없잖아. 게다가 좀 있으면 설날이야. 민호 수술비까지 내야 하는데 돈이 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줄 알아?”그 말에 임정희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이번에 민호 수술비가 또 얼마 들지 모르겠어요...”그렇게 투덜거리다가 그녀는 뭔가 생각난 듯 신경무를 툭 밀었다.“예린이가 대학교 들어간 뒤로 우리한테 한 번도 생활비 달란 소리를 안 했잖아요. 걔가 평소에 아르바이트도 하고 장학금도 탔으니 남는 돈이 좀 있을 거예요. 그러면 이번에 예린이도 민호 수술비를 좀 보태야 하는 거 아니에요? 가족인데 부담을 좀 나눠야죠.”신경무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내일 당신이 예린이한테 한 번 얘기해 봐. 요즘은 벌써 나가서 돈 버는 애들도 많은데 우리는 대학까지 보내주고 있잖아. 그러니까 예린이도 우리 부담을 줄여줘야지.”임정희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그런데 예린이가 요즘 좀 달라졌어요. 예전처럼 말 잘 안 들어요.”신경무는 몸을 돌리고 눈을 감은 채 말했다.“달라지면 뭐? 우리 딸인데 우리가 하란 대로 해야지.”그러자 임정희는 다른 말은 못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내일 얘기해 볼게요.”“됐어. 이제 좀 자자고. 졸려 죽겠어.”“난 민호가 걱정돼서 잠이 안 와요. 당신은 민호 아빠인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요?”하지만 신경무는 금세 코를 골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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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신민호는 어젯밤에 높은 목소리로 신예린을 부르긴 했으나 옆 침대의 환자에게 혼났다.그는 요즘 신예린의 말투와 눈빛이 괜히 기분 나쁘게 느껴졌다. 예전엔 그가 괜히 시비 걸어도 고개 푹 숙이고 말도 안 하던 신예린이었는데 말이다.“두고 봐. 이따가 엄마가 오면 다 말할 거야.”신민호는 엄포를 놓았지만 신예린은 아무 대꾸도 없이 간이침대를 정리하고 칫솔과 컵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임정희가 아침을 들고 병실에 들어왔는데 신민호가 아직 양치도 안 한 상태인 걸 보고는 곧장 화살을 신예린에게 돌렸다.“내가 너더러 동생 좀 잘 돌보라고 했는데 너 뭐 했어? 민호가 양치도 못 했다잖아. 물이라도 떠줘서 입안을 헹구게 해야지!”그러자 신민호는 옆에서 불쏘시개처럼 한마디 더했다.“엄마, 누나가 어젯밤에 나를 돌보지도 않고 먼저 돼지처럼 퍼질러 잤어요. 내가 몇 번을 불렀는데도 코 골면서 무시하더라고요.”신예린은 무덤덤하게 받아쳤다.“쟤가 가까이 오지 말래서 안 간 건데요?”“네가 성의 없었잖아. 내가 뭐 좀 가져다 달라니까 짜증 팍팍 내고!”임정희는 원래 신예린을 혼내고 싶었지만 갑자기 뭔가 생각이 난 듯 꾹 참고 대신 신민호를 다독이며 말했다.“됐어, 됐어. 이제 아침 먹자. 우리 민호 배고팠지? 엄마가 먼저 치약 짜줄 테니까 양치해.”신예린은 도시락통을 힐끗 보고 자신의 몫은 없을 거라고 짐작하고 병실을 나가려 했다.“예린아.”그런데 임정희가 그녀를 불러 세우고 도시락통을 가리켰다.“네 거도 챙겨왔어. 네가 제일 좋아하는 만둣국이야.”신예린은 살짝 놀랐지만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아침 햇살이 병실의 작은 베란다를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고 신예린은 도시락통을 들고 나가 그곳에 앉아 조용히 만둣국을 떠먹었다.만두는 임정희가 손수 빚은 것이었고 얇은 피 안에 향긋한 냉이가 가득했는데 그 익숙한 맛이 혀에 닿자 신예린은 금세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그런데 그녀가 만둣국을 다 먹기도 전에 베란다 문이 열렸고 임정희가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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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3화

임정희의 눈엔 신예린이 그냥 돈 안 주려고 핑계 대는 걸로밖에 안 보여서 그녀는 신예린의 말을 끝까지 들을 생각이 없었다.“처음부터 널 의대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 내가 그땐 마음이 약해져서 그랬지... 너 언제까지 학교 다녀야 하는지도 모르잖아. 경림이 딸은 매달 집에 돈을 보내고 있대.”임정희는 입을 꾹 다문 신예린을 보자 점점 더 짜증이 났다.“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겠어.”그러나 마침 옆 침대를 쓰는 환자의 보호자가 전화받으러 베란다에 나오는 바람에 그녀는 잔뜩 날 선 채로 병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옆 침대 환자의 보호자는 베란다에 조용히 앉아 있는 신예린을 힐끔 돌아봤는데 입술은 핏기 없이 하얗고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괜찮아, 괜찮아...’신예린은 자신을 다독였다.그녀는 며칠만 더 참고 학교로 돌아가기만 하면 가족들의 얼굴을 안 봐도 된다고 생각했다.그 이후로 임정희는 신예린을 볼 때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지만 신민호 앞에서는 한없이 다정한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신예린을 마주하면 가면을 바꾸듯 표정이 확 변했다.심지어 점심과 저녁밥도 신민호 것만 챙겨오고 신예린의 것은 없었다.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신예린은 전보다 마음이 훨씬 담담했다. 매일 쌓인 상처로 이미 어느 정도 무뎌지기도 했고 이제 그녀에게 지켜야 할 새로운 가족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마음이 든든했다.‘엄마가 밥 안 챙겨주면 어때, 나가서 사 먹으면 그만이지.’잠시 후, 신예린은 밥을 먹고 병원으로 돌아왔고 엘리베이터를 타기 직전에 옆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스쳐 지나갔다.소지훈은 몇 걸음 걸어가다 말고 문득 멈춰 섰고 고개를 돌려 막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봤다.‘방금 그 사람, 제수씨 아니야?’아까는 너무 빠르게 지나쳐서 잘 못 봤지만 분명 익숙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됐다. 신예린에게 무슨 일이 생겼으면 주시우가 먼저 그에게 연락했을 테니까 말이다.‘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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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화

...담원시에서.주시우는 숙소로 돌아와서 불을 켜고 난방을 튼 후 코트를 벗었다.내일이면 돌아가기 때문에 담원시 의대 쪽에서 저녁 식사를 제안했고 그는 술을 못 마신다고 정중히 거절했지만 분위기상 잡담은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얘기 저 얘기 한참 나누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주시우는 시계를 확인했다.‘이 시간이면 예린이는 아마 잠들었을 텐데.’그는 휴대폰을 꺼내 신예린의 SNS에 들어가 보았는데 며칠 전에 올렸던 우유 사진이 마지막 게시물이었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채팅창을 열어 메시지를 보냈다.[요즘은 우유 안 마셨어?]메시지를 보낸 뒤 잠시 기다렸지만 답장이 없자 주시우는 바로 신예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신예린은 물을 받고 병실로 돌아오고 있었고 주전자를 침대 옆에 내려놓자마자 신민호가 말했다.“물 줘.”주머니 속 휴대폰이 계속 진동했고 신예린은 컵에 물을 따라서 신민호에게 건넨 후 휴대폰을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주시우였다.그녀는 신민호를 흘깃 보고는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뒤에서 신민호가 또 짜증을 냈다.“이거 뭐야. 왜 이렇게 뜨거운 물을 줘? 나 보고 데이란 뜻이야?”하지만 신예린은 신경 쓰지 않고 병실 문을 닫아버렸고 문이 닫히자 신민호의 소리가 뚝 끊겨 조용해졌다.휴대폰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을 보고 신예린은 숨을 들이쉰 후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변함없이 차분한 주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잤어?”“아, 아니요...”신예린이 멈칫하다가 말했다.“이제 자려고요.”“우유는 마셨어?”그 한마디에 그녀는 괜히 코끝이 시큰해졌다. 주시우가 곁에 없으니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다.“네, 마셨어요.”신예린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고 주시우는 그녀의 힘 빠진 목소리를 바로 알아챘다.“무슨 일 있었어?”신예린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병원 복도 끝에서 벽에 기댄 채 바닥을 바라보며 발끝으로 벽을 툭툭 찼다.“교수님, 언제 돌아오세요?”그 짧은 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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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5화

소지훈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향했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그를 보자 웃으며 말했다.“어, 소 선생님. 아직 안 가셨어요?”“여쭤볼 게 있어서요. 저기 18번 침대의 환자 이름이 뭐예요? 그리고 옆에서 간병하는 여학생이랑 무슨 사이예요?”간호사가 빠르게 차트를 확인하더니 대답했다.“환자분의 이름은 신민호예요. 종아리뼈가 골절돼서 입원했고 평소에 환자분의 누나가 계속 돌보더라고요. 왜요? 선생님 친척이세요?”“아니요.”소지훈은 짧게 대답하고 고맙다고 인사한 뒤 바로 병동을 떠났다....한편 주시우는 신예린과 통화를 마친 후 그대로 소파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그는 신예린이 힘 빠져 있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오늘만 해도 신예린이 두 번이나 그에게 언제 돌아오냐고 물어서 그는 그녀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게 아닌지 살짝 기대됐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잠시 고민한 주시우는 항공권 예매 앱을 열어 확인해 보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고 발신자를 확인하니 소지훈이었다.“시우야, 나 방금 정형외과 회진 갔다가 누굴 봤는지 알아?”소지훈은 항상 바로 본론을 말하지 않고 뜸을 들이곤 했다.주시우는 그가 괜히 이런 말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았다. 소지훈이 본 사람은 아마 그도 아는 사람일 것이지만 두 사람의 공동 지인은 고등학교 동창들뿐이었고 지금까지 연락을 유지하는 사람은 몇 안 되기 때문에 주시우는 도무지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누군데?”“제수씨였어. 네 아내 말이야.”그 말을 듣고 주시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그런데 어떤 남자랑 같이 있었어. 정형외과 병실에서.”소지훈은 일부러 의미심장하게 말했지만 주시우가 신경 쓰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예린이 다쳤어?”“아니, 그런 건 아니야.”소지훈이 당황해서 서둘러 설명했다.“네 처남이 다리가 골절해서 입원했는데 며칠째 제수씨가 돌보고 있대.”그런데 그의 말투에 살짝 불쾌함이 섞였다.“어떻게 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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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6화

이제 보니 신예린이 주시우에게 언제 오냐고 물었던 것은 그리워서가 아니라 도움이 필요해서였다. 그건 신예린식의 ‘구조 요청’이었고 티를 내지 않아 더 마음이 아팠다....임정희는 요 며칠 내내 신예린이 돈을 안 내놓는 것 때문에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런데 신경무는 옆에서 이미 곯아떨어져서 코를 골며 아주 잘도 잤고 그 소리가 괜히 그녀의 신경을 긁었다.결국 임정희는 못 참고 벌떡 일어나 신경무의 옆구리를 퍽 치며 소리쳤다.“여보, 일어나 봐요. 예린이한테 도대체 돈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신경무는 너무 깊게 잠들었던 터라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없긴 왜 없어. 장학금도 몇 년 탔고 이번 학기 등록금도 걔가 낸 거잖아. 그 정도면 돈 있는 거지. 아르바이트는 그만뒀다는 소리는 믿지 마. 돈이 없으면 걔가 그렇게 당당할 수 있어?”그 말을 듣자 임정희는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졌고 점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딸을 키워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더니. 그년이 벌써 저 모양인데 나중에 뭘 기대하겠어요.”신경무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의대 보내지 말자고 했을 때 말 들었어야지. 예린이가 단식하니까 당신이 마음 약해져서 결국 의대 보내줬잖아. 지금 봐봐, 대학교 가고 나서 점점 정떨어지게 행동하고 있잖아.”“아니, 난 그래도 예린이가 성적은 좋으니까 그랬죠. 혹시 잘되면 나중에 민호 좀 도와주겠지 싶었다고요. 그런데 지금 완전히 딴 사람 된 거 봐요. 어휴, 진짜... 우리 옆 동 삼층집의 딸은 결혼하더니 처가 식구들 사는 집을 리모델링 해주고 친동생한테 차 두 대 뽑아줬대요.”임정희의 말투에서 부러움이 느껴졌고 신경무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됐어, 우리 집은 원래 그런 복 없어. 기대하지 말고 그냥 마음 접어.”“난 그렇게 못 해요. 내가 예린이를 어떻게 키웠는데, 걔가 돈 안 준다고 하면 끝인 줄 알아요? 어떻게든 받아내고 말 거예요.”“알겠으니까, 이제 좀 자자.”신경무는 하품하고 이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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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7화

이날 신예린은 아침부터 임정희가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왠지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임정희의 눈빛은 그녀를 꿰뚫어 보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감정이 실려 있어 도무지 읽히지 않았다.하지만 신예린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늘만 지나면 간호 생활도 끝이었고 무엇보다 밤에 주시우가 돌아온다.오전 회진 때 의사가 내일 당장 수술 가능하다고 말하자 임정희는 뼈가 다친 건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린다면서 수술 끝나면 신민호에게 제대로 몸보신시켜야 한다고 바로 집에 가서 곰탕을 끓이겠다고 했다.하지만 그러면서 신예린의 복학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애초에 그녀가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확신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시간이 흘러 해가 지고 신예린은 짐을 정리했다. 주시우가 돌아오면 공항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혹시나 병원에 있다가 못 만날까 봐 일찍 나서려던 참이었다.그때 임정희가 신예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어디 가?”신예린도 냉담하게 대답했다.“학교요. 내일 수업 있어요.”“하!”임정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소름 끼치는 말을 내뱉었다.“수업은 무슨, 남자 만나러 가는 거 아냐?”“뭐라고요?”신예린은 고개를 돌려 임정희를 똑바로 바라봤다.그 순간 임정희가 벌떡 일어났고 품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신예린의 가슴팍에 집어 던졌다. 종이는 천천히 바닥에 떨어졌고 그 위에 또렷하게 적혀 있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그것은 신예린의 임신 초기 검사 결과 보고서였고 그녀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임정희는 하루 종일 눌러두던 분노를 더는 감추지 않았고 손가락을 신예린에게 들이밀며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소리쳤다.“신예린, 네가 요즘 왜 집에 안 오나 했어. 너 우리 몰래 남자를 만나고 있었던 거야? 너 지금 몇 살인데 대학생 주제에 애까지 가졌어! 창피하지도 않아? 나랑 네 아빠가 얼마나 애를 쓰면서 널 대학교에 보냈는데.”“우린 네가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랐던 거지, 이런 결과를 보려고 공부시킨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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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8화

신예린은 마치 누군가에게 멱살을 잡혀 깊은 바닷속에 내던져진 기분이었고 숨을 쉴 새도 없이 사방에서 물이 들이닥치는 것 같았다. 차가운 물살은 그녀의 눈, 귀, 코, 입에 다 파고들었고 모든 것이 그녀를 무겁게 짓눌러 질식할 것 같았다.세상에 어느 부모가 일부러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자식을 조롱하고 깎아내리겠는가. 하지만 임정희는 그걸 해냈다. 그녀는 신예린을 바닥까지 끌어내려 발로 짓밟고 존엄도 체면도 깡그리 짓밟았다.그 절망은 신예린을 집어삼킬 듯 몰려왔고 그녀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그런데 그때 심연 속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주시우였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했던 말이 신예린의 귓가에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반항할 줄도 알아야 해.”그 말을 떠올리자 신예린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난 듯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고 갑자기 용기가 생겨 임정희의 손을 세차게 뿌리쳤다.“그래요. 전 개념도 없고 싹수도 없고 아무 남자나 만났어요! 이제 만족하세요?”신예린이 거의 울부짖듯 외쳤고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임정희는 놀라서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어릴 때부터 우리가 뭘 잘못했든 늘 먼저 욕먹는 건 저였어요. 신민호가 똑같이 잘못해도 어리다는 이유로 넘어가셨잖아요. 혹시 제가 여자라서 그러셨어요? 제가 여자라서 당연히 혼나야 하는 건가요?”“전 용돈 한 번 달라고 말 꺼내는 것도 몇 날이나 고민해야 했어요. 그런데 엄마는 민호가 신발 사달라고 하면 바로 사주고 심지어 스케이트보드를 사달라고 해도 고민 안 하셨잖아요. 제가 낡은 신발을 몇 년이나 신은 건 기억하세요?”“제가 의대 가고 싶다고 하니 엄마 아빠가 안 된다고 하셔서 제가 무릎 꿇고 빌고 단식까지 했잖아요. 민호였으면 그렇게까지 하셨을까요?”신예린의 목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말에 담긴 감정은 슬픔도 분노도 절망도 아닌, 억눌려온 한이었다.임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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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9화

신예린은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태어난 것조차 축복받지 못하는 인생이라면 세상에 존재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살아왔고 이제 이 목숨으로 그 빚을 갚아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그때 그녀의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스쳤고 임정희의 비명이 터지기도 전에 누군가가 나타나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날카로운 과도는 그 손에 상처를 냈고 피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피가 흘러내렸다.병실 안의 사람들은 그 장면을 보고 얼어붙었고 신예린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주시우와 눈이 마주쳤다.그 순간 신예린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의 얼굴을 보자 참고 있던 눈물이 마치 끊어진 진주 목걸이처럼 후두둑 쏟아졌다.“교수님...”신예린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주시우를 불렀고 깊은 상처를 입은 아이처럼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불빛을 등지고 서 있어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들려왔다.“예린아, 그 칼을 이리 줘.”신예린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몸을 떨었고 칼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그러자 주시우는 다시 한번 다정하게 말했다.“착하지. 그 칼을 이제 나 줘.”그 부드러운 말에 신예린은 결국 흐느끼며 칼을 놓았다. 그와 동시에 주시우가 빠르게 과도를 치웠고 신예린의 몸은 힘없이 휘청거렸다.그녀가 넘어지려는 순간, 주시우가 재빨리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몸을 단단히 받쳐줬다. 그의 품은 늘 그랬던 것처럼 넓고 따뜻했고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주시우의 손에 피가 번져 있는 걸 보고 신예린은 울먹이며 몸을 떨었다.“교수님 손에... 피가...”주시우는 그녀의 등을 천천히 두드리며 안심시켜 주었다.“바보야. 사람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 다른 건 다 별일 아니야.”그 말에 신예린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더 세게 울었다.방금까지만 해도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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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0화

주시우는 아무 말 없이 몸을 숙여 신예린을 가볍게 안아 올렸다. 신예린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해서 내버려두었다. 그의 품은 지금 그녀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였기 때문이다.신예린은 고개를 푹 묻었고 그의 따뜻한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마치 생명줄처럼 느껴졌다.그들이 병실을 나가려 하자 임정희가 재빨리 뛰어가서 가로막았다.“어딜 가려고! 신예린, 너 어서 솔직하게...”하지만 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주시우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고 그 눈빛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같아 그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모를 정도로 위압적으로 느껴져 임정희는 입을 다물었다.주시우는 분명히 인상이 부드러운 편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말없이 서 있으니 상대를 눌러버리는 묵직한 압도감이 느껴졌다.“어머님도 지금 상황을 잘 알고 계시겠지만 어머님께서 신경 쓰셔야 할 건 따님이 아니라 아드님입니다.”주시우는 침대에 있는 신민호를 흘긋 봤다.“아드님 수술이 끝나면 그때 따로 자리를 마련해서 얘기를 나누시죠.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죠...”그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어머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 예린이와 제가 이미 혼인신고를 마친 부부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앞으로 예린이 일은 제가 책임질 거니까 어머님은 더 이상 관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그의 목소리는 낮지만 단호했고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신예린은 주시우의 품에 안긴 채 그가 말하는 것을 듣자 심장이 뛰는 게 잘 느껴졌다. 그가 옆에 있는 지금 신예린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이제 온몸으로 그녀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다.주시우는 그녀를 안은 채 병실을 나섰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임정희는 허겁지겁 휴대폰을 꺼냈다.“여보, 큰일 났어요! 예린이가 우리 몰래 어떤 남자랑 결혼했대요...”...응급 처치실, 밝은 불빛을 빌어 보자 주시우의 손바닥에 선명한 칼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의사가 소독약을 그의 상처에 발라주자 신예린은 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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