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011 - Chapter 1020

1610 Chapters

제1011화

최수빈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두 분이 약속하신 거면 두 분끼리 다녀오세요.”임하은이 물었다.“혹시... 저 때문이라서 퇴사하신 건가요? 이제는 저랑 밥 한 끼도 같이 먹기 싫으신 거예요?”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사실 여기서 일하면 앞날이 더 훤히 트일 거잖아요. 그럼에도 꼭 퇴사를 하셔야 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혹시 일하면서 저 때문에 뭐 마음 상하신 게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솔직히 전 수빈 씨 같은 동료를 잃고 싶지 않거든요. 우리 호흡도 늘 잘 맞았잖아요.”그 말을 듣는 순간, 최수빈의 속으로 피식 냉소를 지었다.임하은의 배경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항공우주 산업계의 고위층 인사였고 그녀는 항공우주 연구원에서의 앞날이 애초에 탄탄히 보장된 사람이었다.그런데도 유독 최수빈의 앞에서만은 늘 경계심을 드러내며 주민혁에 대한 ‘주도권’을 곳곳에서 과시해 왔다.그 근거 없는 위기감이 최수빈에게는 오히려 우스꽝스럽게 느껴진 것이다.“하은 씨,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최수빈은 걸음을 멈추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차분한 눈빛으로 임하은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민혁 씨가 정말 하은 씨를 좋아하고 마음속에 하은 씨밖에 없다면, 제가 아무리 눈앞에서 알짱거린다 해도 눈에 들어올 리 없고 두 분 관계에 영향을 줄 일도 없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시는 건, 오히려 본인도 그 사람도 믿지 못한다는 뜻처럼 보여요.”임하은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바늘처럼 정확히 아픈 곳을 찌르는 최수빈의 말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사실 그녀는 확신이 없었다. 특히 주민혁이 가끔 최수빈을 바라볼 때면, 자신이 읽어낼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가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그럴 때마다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냥... 동료로서 좋게 마무리하고 싶을 뿐이에요.”임하은은 애써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저녁 일곱 시
Read more

제1012화

최수빈은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천천히 온기가 퍼지는 걸 느꼈다.육민성이 자신을 걱정해서 그런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임하은의 초대가 그리 단순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도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전화를 끊은 뒤, 최수빈은 식당 주소를 육민성에게 보내고 나서야 마음속에 남아 있던 불안함이 서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육민성이 함께라면, 혹시 모를 임하은의 날 선 말들을 혼자서 감당하지 않아도 되고 주민혁의 복잡한 시선과 홀로 마주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저녁 여섯 시 정각, 육민성은 약속한 대로 최수빈의 아파트 단지 앞에 도착해 있었다.짙은 색 정장을 입은 그는 외투 한 벌을 손에 들고 있었고 최수빈이 모습을 드러내자 곧장 다가왔다.“저녁에는 바람이 좀 불어. 이거 입어, 감기 들면 안 되잖아.”최수빈은 외투를 받아 어깨에 걸치며 미소 지었다. 마음까지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고마워요, 선배. 사실 번거롭게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전혀 안 번거로워.”육민성은 차 문을 열어 주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 위를 손으로 가려 주었다.“타. 괜히 우리 기다리게 하지 말자고.”차는 평온하게 한식당을 향해 달렸다. 차 안은 조용했고 육민성은 간간이 천공 실험실의 최근 진행 상황을 이야기하며 그녀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운전에 집중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최수빈의 마음에는 고마운 마음이 가득 찼다. 늘 필요로 때마다 그는 어김없이 곁에 나타나 주었다.식당에 도착해서 보니 주민혁과 임하은은 이미 와 있었다.육민성과 함께 들어서는 최수빈을 본 순간, 임하은의 얼굴에 걸린 미소는 눈에 띄게 옅어졌고 주민혁 역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육민성은 자연스럽게 최수빈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테이블로 다가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주 대표님, 임하은 씨. 길이 좀 막혀서 늦었습니다. 수빈이가 혼자 오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제가 같이 왔
Read more

제1013화

주민혁은 곧바로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왜 그래? 어디 안 좋아?”“족발 냄새가 너무 느끼해요... 냄새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리네요.”임하은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며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훑어보았다. 눈빛에는 응석 섞인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이 메뉴 누가 시킨 거예요? 나 임신해서 고기 냄새 못 맡는 거 몰라요?”그녀는 어릴 때부터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 늘 자신의 뜻대로 되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최수빈과 육민성의 앞에서조차 재벌가 아가씨 특유의 성격을 숨기지 않았다.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들어 직원에게 말했다.“이 요리는 치워 주세요.”“잠깐만요.”육민성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한 치의 여지도 없는 단호함이 실려 있었다.“그 요리는 수빈이가 좋아하는 음식입니다. 냄새가 싫다면 하은 씨가 자리를 조금 옮기시면 되죠. 한 사람의 입맛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불편을 감수할 필요는 없잖아요.”임하은의 얼굴에 떠 있던 억울한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안색이 싸늘해지며 육민성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노골적인 불쾌감이 스쳤다.“저 임신했어요. 임산부는 원래 배려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 정도의 이해도 없어요?”“임신은 축하할 일이죠.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을 곤란하게 할 이유는 아닙니다.”육민성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시선은 임하은에게 고정된 채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고기 냄새를 못 맡겠다면 집에서 편히 쉬는 게 맞죠. 괜히 접대 자리에 나설 필요도 없고요. 외식 자리에 나온 이상, 모두가 하은 씨의 입맛에 맞춰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이 정도는 하은 씨도 아실 텐데요.”그러다 육민성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곁에서 침묵하던 주민혁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주 대표님, 첫 아이도 아니잖아요. 그런데도 이렇게 신경을 못 쓰세요? 하은 씨가 고기 냄새를 힘들어한다는 걸 알았으면, 식당을 고를
Read more

제1014화

임하은은 입술을 꾹 깨물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민혁 씨, 괜히 더 다투지 말고 그만 해요. 내가 좀 참을게요.”육민성의 배경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더 따져 봐야 자신에게 득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주민혁이 말했다.“이 요리는 그대로 두세요. 대신 임산부가 먹을 수 있는 레몬수 한 잔 더 가져다주세요.”직원은 서둘러 대답하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룸 안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공기 속에는 묘한 어색함이 감돌았다.최수빈은 젓가락을 들어 족발 한 점을 집어 조심스럽게 베어 물었다. 익숙한 맛이 혀끝에 퍼졌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조금 전의 실랑이를 겪으며 그녀는 더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과 주민혁의 사이는 정말로 이미 끝나 버렸다는 걸.육민성은 그녀가 말없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더니 젓가락을 들어 살코기 한 점을 덜어 주었다.“천천히 먹어. 급할 필요 없어.”그렇게 송별회 자리는 끝내 침묵과 어색함 속에서 마무리됐다.식당을 나설 때, 육민성은 자연스럽게 최수빈의 손을 잡고 주민혁과 임하은에게 가볍게 고개만 끄덕인 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떠났다....육민성은 차 문을 열어 주며 차분해 보이는 최수빈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실 주민혁 씨는 아직 완전히 놓지 못했어. 그 사람의 마음은 처음부터 임하은 씨에게 가 있던 게 아니었지.”최수빈은 입꼬리를 아주 조금 올리며 손끝으로 차 문 가장자리를 가볍게 쓸었다.“그 마음이 누구를 향하든, 이제는 중요하지 않아요. 처음에 그 사람이 그런 선택을 했으니까 그 선택에 따른 결과도 본인이 감당해야죠. 감정은 한쪽만 애쓴다고 이어지는 게 아니에요. 지나간 건 그냥 지나간 거예요.”육민성은 부드럽게 웃었다.“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네.”그는 최수빈의 팔을 살짝 받쳐주며 조수석에 앉는 걸 확인한 뒤,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에 올랐다.그런데 안전벨트를 막 매려는 순간, 최수빈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Read more

제1015화

차가 단지 안으로 들어서자 육민성은 차를 세운 뒤 먼저 내려 조수석으로 돌아가 문을 열고 최수빈을 부축했다.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닿는 순간, 마음속 걱정이 한층 더 짙어졌다.아까 식당에서도 최수빈은 속이 불편하다고 했고 돌아오는 내내 좌석에 기대 눈을 감은 채 거의 말이 없었다. 얼굴빛도 집을 나설 때보다 더 창백해 보였다.“아직도 많이 불편해?”육민성은 그녀의 팔을 잡은 채 조심스럽게 물었다. 목소리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가득 묻어 있었다.“무리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병원 가자. 아직 늦지 않았어.”최수빈은 고개를 저었으나 걸음이 살짝 휘청거려 그의 팔에 몸을 더 의지했다. 목소리에는 피로가 배어 있었다.“괜찮아요. 요즘 이사 준비하고 인수인계까지 하느라 좀 무리했나 봐요. 쉬면 괜찮아질 거예요.”육민성은 반쯤 부축하듯 그녀를 데리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불빛 아래 드러난 그녀의 창백한 입술을 보자 마음속 불안함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간장 족발을 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 얘기만 꺼내도 눈빛이 반짝이곤 했는데 오늘의 최수빈은 몇 입 먹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게다가 속이 불편하다고까지 했으니 단순히 피곤해서라고 보기는 어려웠다.집 문을 열고 보니 거실의 작은 수면등이 켜져 있었다. 외출 전에 주예린을 위해 일부러 켜 두고 간 불이었다.신발을 막 벗고 있는데 침실 문이 살짝 열리며 주예린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왔다. 그리고 곧 육민성을 보자마자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다.“민성 삼촌! 아직 안 갔어요?”“오늘은 안 가고 여기서 잘 거야. 예린이랑 놀아 주려고.”육민성은 몸을 낮춰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말투는 유난히 부드러웠다.그러자 주예린은 단숨에 잠이 달아난 듯, 신이 나서 손을 휘젓더니 육민성의 손을 덥석 잡았다.“진짜요? 그럼 내일 같이 블록으로 성 쌓아줄 수 있어요?”“그럼, 당연하지.”육민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 웃고 있는 주예린을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옆에 서 있던 최수빈을 향해
Read more

제1016화

육민성이 먼저 나서서 제안해준 덕에 최수빈은 마침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안 그래도 저희 집에 하루 묵으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괜히 불편하게 느낄까 봐 망설였지만요.”최수빈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쑥스러움이 묻어 있었다.“여기 있는 게 제일 나을 거예요. 호텔보다 훨씬 편하고 내일 병원 가기도 수월하잖아요.”육민성은 부드럽게 웃었다.“남녀 간에 조심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우리 사이에는 굳이 그런 예의가 꼭 필요할까?”최수빈도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침대부터 준비할게요. 손님방에 새 이불이 있어서 꺼내오기만 하면 돼요.”“아니야, 내가 할게.”육민성은 그녀의 손목을 살짝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너 몸 안 좋잖아. 얼른 방에 가서 쉬어. 나머지는 내가 할게.”따뜻하고 마른 그의 손바닥이 손목에 닿는 순간, 최수빈은 잠시 멈칫했다가 서둘러 손을 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요.”최수빈이 안방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에야, 육민성은 손님방으로 향했다. 옷장에서 새 이불을 꺼내 능숙하게 침대를 정리하고 주방에서 끓인 물을 컵에 따라 최수빈의 침대 머리맡 쪽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소리 나지 않게 다시 손님방으로 돌아왔다.침대에 누웠지만 육민성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머릿속에서 계속 최수빈의 창백한 얼굴이 떠올라 걱정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탓이었다.결국 그는 휴대폰을 꺼내 위장 상태가 좋지 않을 때의 주의사항을 찾아보았고 다음 날 오전 병원 진료도 예약한 뒤에야 마음이 한결 놓였다.한편 안방에서는 최수빈이 침대에 기대어 협탁 위에 놓인 따뜻한 물컵을 바라보고 있었다.육민성의 세심함과 배려는 말 없이 스며드는 온기처럼 느껴졌다....다음 날 아침.최수빈이 침실 문을 여는 순간, 은은한 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주방으로 가 보니 육민성은 앞치마를 두른 채 노릇하게 부친 달걀을 접시에 담고 있었고 주예린은 식탁에 앉아 작은 숟가락을 들고 웃으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엄마, 일어
Read more

제1017화

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막 차에서 내리려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주민혁이 임하은을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었고 임하은은 아랫배가 살짝 불러온 채 임신 초기 특유의 부드러운 표정을 띠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병원 복도를 나란히 걸었는데 누가 봐도 다정해 보였다.임하은이 먼저 최수빈을 알아보고는 곧장 주민혁의 팔을 잡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일부러 걱정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수빈 씨?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병원에는 왜 오셨어요? 어디 안 좋아서 검사 받으러 오신 거예요?”최수빈과 육민성 사이를 오가는 그녀의 시선에는 탐색하는 듯한 기색이 미묘하게 스쳐 지나갔다.최수빈은 손에 힘을 주고 담담하게 대답했다.“별일은 아니고 정기 검진받으러 왔어요.”주민혁의 시선이 최수빈의 얼굴에 머물렀다. 감정을 읽기 힘든, 짙고 어두운 눈빛이었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는 묘하게 무거운 압박감이 담겨 있었다. 마치 그녀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말이다.육민성은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뒤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자연스럽게 최수빈을 자신의 뒤쪽으로 보냈다. 뒤이어 짧게 말했다.“예약 시간이 얼마 안 남아서요. 두 분과 인사 나눌 여유는 없겠네요.”말을 마치자 그는 자연스럽게 최수빈의 어깨를 감싸고 그대로 산부인과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임하은은 나란히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주민혁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충분히 또렷했다.“두 사람 꽤 다정해 보이네요. 아침부터 같이 병원에 오다니... 혹시 같이 살고 있는 거 아닐까요?”주민혁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최수빈의 뒷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따라가다 그 모습이 복도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이윽고 임하은의 말에는 답하지 않은 채 얼굴빛만 한층 가라앉은 상태로 몸을 돌렸다.“잡담은 그만하고 검사나 받으러 가자.”임하은은 그의 차가운 옆모습을 보
Read more

제1018화

“그...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진 않았어요.”최수빈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손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그녀가 당황해하는 것을 알아차린 의사는 말투를 한층 누그러뜨렸다.“괜찮아요.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이후에 CT 검사가 필요할 수도 있어서 임신 여부를 먼저 확인해야 해요. 우선 혈액 검사로 HCG 수치를 확인해 봅시다.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 수 있어요.”최수빈은 의사가 건네준 검사지를 꽉 쥔 채 멍하니 진료실을 나섰다.복도의 조명이 유난히 눈부셔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무슨 일이야? 검사 결과 나왔어?”육민성이 빠르게 다가왔다.창백한 얼굴과 초점 없는 눈빛을 본 순간, 그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곧바로 최수빈의 팔을 부드럽게 붙잡았다.“어디 불편해?”그의 걱정 어린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최수빈의 마음속에 억눌러 두었던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목소리는 끝내 흔들렸다.“민성 선배... 나, 임신했을 수도 있대요.”“임신?”육민성의 눈동자가 순간 작게 흔들렸다.예상치 못한 말에 잠시 굳어 있었지만 그는 곧 손에 힘을 주며 최수빈을 지탱했고 이내 놀란 기색을 감췄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괜찮아. 우선 피 검사부터 하자. 결과 나오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어떤 상황이든 내가 옆에 있을게.”최수빈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육민성을 바라봤다.“이제 천공에 가기로 막 결정했고 예린이도 돌봐야 하는데... 만약 정말 임신이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지금은 너무 앞서 생각하지 말자. 결과부터 보자고.”육민성은 그녀를 부축해 복도 의자에 앉힌 뒤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췄다.“혹시 정말 임신이라면, 그때는 우리가 같이 방법을 찾으면 돼. 아이를 낳을지, 다른 선택을 할지 그건 전부 네가 결정하는 거야. 난 어떤 결정이든 지지할게. 예린이한테도 천천히 이야기하면 돼. 그 애라면 분명 이해해 줄 거야.”잠시 말을 멈추더
Read more

제1019화

채혈을 마친 뒤, 최수빈은 결과를 기다리며 병원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대합실에는 사람이 가득했고 그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손에 쥔 검사지를 내려다봤다. 무의식중에 종이 가장자리를 몇 번이고 문질렀다.잠시 후 육민성이 밖에서 들어왔다. 손에는 따뜻한 우유 한 컵이 들려 있었다.“우유 좀 마시고 체력 보충해.”최수빈은 말없이 컵을 받아 몇 모금 마셨다. 따뜻한 우유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속을 달래 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채혈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아직 십여 분, 하지만 그 짧은 시간조차 끝없이 길게 느껴졌다.결과가 양성일까 봐, 모든 계획이 한순간에 어그러질까 봐 두려웠다.또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변화 앞에 서게 될까 봐 막연한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너무 긴장하지 마.”육민성은 최수빈이 굳어있는 것을 알아채고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결과가 어떻든 다 해결할 수 있어.”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 했다.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들어 보니 엘리베이터 쪽에서 주민혁이 임하은을 부축한 채 나오고 있었다. 임하은은 한 손으로 배를 감싸고 있었는데 막 산전 검진을 마친 듯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어려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오다 마침 대기 구역 근처에서 멈춰 섰다.그렇게 최수빈과 육민성을 발견한 순간, 주민혁의 걸음이 멈췄다.그의 시선이 최수빈에게 꽂혔고 이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아직 검사 결과 안 나왔어? 어디 문제라도 있는 거야?”무심코 튀어나온 걱정 어린 말투였다. 그의 시선은 오롯이 최수빈에게만 가 있었고, 바로 옆에 선 임하은의 얼굴이 굳어 가는 것은 눈치채지도 못했다.그 순간, 육민성이 최수빈의 손을 더 꽉 잡았다.그는 시선을 들어 주민혁을 바라보며 한층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주 대표님, 약혼녀 앞에서 제 여자친구를 그렇게 걱정하시는 건 좀 부적절하지 않습니까?”‘여자친구’라는 단어를 유독 또렷하게 눌러 말했다. 그
Read more

제1020화

“임하은 씨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좀 이상해. 아이 아버지라면 보일 법한 모습이 아니잖아.”최수빈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육민성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만약 자기 아이가 아니라면 임하은 씨 성격상 이렇게까지 매달릴 필요도 없고, 굳이 요란하게 약혼식까지 할 이유도 없죠. 그 여자가 원하는 건 언제나 주씨 가문 며느리라는 자리였어요. 아이는 그 지위를 굳히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요.”육민성은 코웃음을 쳤다. 말투에는 노골적인 냉소가 섞여 있었다.“그 말도 맞네. 너 예전에 주민혁 씨가 주시후한테 집착하던 거 기억나? 친자 확인까지 하고 밖에서는 그렇게 감싸더니 결과가 나오고 나서 어떻게 했더라? 친자가 아니라는 걸 알자마자 바로 선을 그었잖아. 결국 그 사람이 집착하는 건 누군가가 아니라, 자기의 것이라는 사실뿐이야.”그의 말은 차가운 물처럼 최수빈의 머리를 단번에 식혀 주었다.‘그래, 민혁 씨의 관심은 늘 조건부였지.’지금 임하은의 아이에게 보이는 태도 역시, 임하은 개인이 아니라 ‘주씨 가문의 혈통’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최수빈은 한결 담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그 사람은 언제나 자기감정만 생각해요. 자신의 우유부단함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기는지는 한 번도 고민하지 않죠.”육민성은 그녀의 손을 잡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라도 그렇게 본다니 다행이네. 앞으로는 그 사람의 태도에 휘둘리지 마. 우리의 삶은 우리가 잘살면 돼.”그때, 대합실 전광판이 켜지며 최신 검사 결과가 순서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최수빈의 심장이 갑자기 빨라졌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화면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이름과 검사 항목을 확인하는 순간 벌떡 일어섰다.육민성도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천천히. 내가 같이 가줄게.”두 사람은 빠르게 결과 수령 창구로 향했다.이내 출력된 검사지를 받아 들었는데 긴장한 탓에 최수빈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HCG 수치가 또렷하게 인쇄돼
Read more
PREV
1
...
100101102103104
...
161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