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051 - Chapter 1060

1160 Chapters

제1051화

주민혁은 별장으로 차를 몰았다. 그곳은 한때 그와 최수빈이 함께 살았던, 결혼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집이었다.복도에 달린 센서등 몇 개가 고장 나 어둑한 빛만 남아 있었고 그는 그 희미한 조명 속에서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문을 여는 순간, 은은한 치자꽃 향이 공기 속으로 번졌다.최수빈이 가장 좋아하던 향이었다. 이혼한 뒤로도 그는 집 안의 디퓨저를 한 번도 바꾸지 않았다.거실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TV 장식장 위에는 네 식구가 함께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최수빈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고 주시후는 주민혁의 품에 안긴 채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되도록 웃고 있었다.율이는 최수빈의 손을 잡고 옆에 서 있었다.그건 예전에 최수빈이 꼭 찍자고 고집하던 가족사진이었다.주민혁은 고개를 숙인 채 그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해외에서 걸려온 전화, 바로 남이준이었다.전화를 받자 휴대폰 너머로 남이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민혁아, 너 새 회사 차리고 07 전투기 프로젝트도 재가동한다며? 와, 이렇게 큰일을 벌이면서 어떻게 나한테 미리 한마디도 안 할 수가 있냐?”남이준은 그의 과거를 아는 몇 안 되는 친구였다. 이후 해외로 나가 회사를 키우는 탓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연락만큼은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다.주민혁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담담하게 말했다.“이제 막 결정된 일이라 아직 말할 틈이 없었어.”“네 성격은 여전하네. 무슨 일이든 다 혼자 짊어지고 가려고 하고.”남이준이 한숨을 내쉬었다.“천공이랑 협력한다는 얘기도 들었어. 수빈 씨도 천공에 있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대체?”주민혁은 말이 없었다.그가 대답하지 않자 남이준은 더 캐묻지 않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민혁아, 비록 내가 해외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들리는 얘기들은 있어. 너, 수빈 씨 좋아하잖아. 가까이 다가가자니 수빈 씨를 주씨 가문의 분쟁에 휘말리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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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2화

...응급실의 형광등은 눈이 부실 만큼 새하얬다.육민성은 최수빈을 부축해 긴 의자에 앉혔다. 그녀의 얼굴은 벽보다도 창백했고 이마에 흘러내린 잔머리는 식은땀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차 안에서 갑자기 극심한 복통이 찾아왔다. 최수빈은 뒷좌석에서 몸을 웅크린 채 식은땀을 쏟아냈고 육민성은 한순간도 지체하지 못한 채 신호를 무시하며 병원으로 달려왔다.“의사 선생님, 지금 이 사람 임신 상태거든요? 이전부터 중절수술을 고민하던 상황이었는데 오늘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요. 빨리 좀 봐주세요.”육민성은 당직 의사를 붙잡다시피 했다.의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최수빈을 진료 침대에 눕히게 한 뒤 간단한 검사를 진행했고 검사지를 들고 돌아와 단호하게 말했다.“임신 초기 복통에 이전에 입덧이 심했던 이력도 있네요. 몸 상태가 원래 좋지 않은 편이라 지금 중절수술을 하면 일반적인 경우보다 위험 부담이 큽니다.”잠시 말을 멈춘 그는 최수빈을 바라봤다.“정말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확실히 마음먹은 건가요? 마음을 바꾸신다면 바로 안정 치료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최수빈은 병상에 누운 채 천장의 형광등을 멍하니 바라봤다. 전등에서 나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귀 옆을 기어 다니는 벌레들처럼 느껴졌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녀는 사포에 긁힌 듯 쉰 목소리로 말했다.“확실해요. 낳지 않을 거예요.”가볍게 흘러나온 말이지만 심장 위로는 무거운 돌덩이가 떨어진 듯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수없이 많은 밤을 그렇게 고민하며 보냈다.아이를 낳으면 혼자서 두 아이를 키워야 하고 사람들의 시선도 감당해야 하며 언젠가 아이가 아버지를 묻는 순간과도 마주해야 한다.그렇다고 정말 포기하려 하면 배 위에 손을 얹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끈이 마음을 옥죄어 왔다.의사는 더 이상 설득하지 않고 돌아서며 처방을 내렸다.“우선 이 약부터 드세요. 반 시간 정도 경과를 지켜보고 이상이 없으면 내일 수술을 진행하겠습니다.”육민성은 약과 미지근한 물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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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3화

병원에서 돌아온 뒤, 최수빈은 거의 쓰러지듯 잠들었지만 밤새 깊이 잠들지 못했다.꿈속은 자잘한 장면들이 뒤섞여 흘러갔다.어떤 때는 율이가 그녀의 다리를 꼭 붙잡고 ‘엄마, 동생을 왜 남겨두지 않았어?’ 하고 묻고, 어떤 때는 수술대 위의 눈부신 조명 아래에서 숨이 막힐 듯한 느낌이 들었다.또 어떤 순간에는 멀찍이 서 있는 주민혁이 복잡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끝내 다가오지 않았다.새벽녘 눈을 떴을 때, 베개는 흠뻑 젖어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가 무언가에 막힌 듯 답답해 숨이 막힐 것 같았다.간단히 씻고 나온 최수빈은 병력 수첩을 챙겨 집을 나섰다.오늘은 마지막으로 몸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검사 수치에 문제가 없으면 수술은 은산시 병원에서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굳이 다른 지역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병원 복도에는 소독약 냄새가 진하게 퍼져 있었다.최수빈은 막 출력한 검사지를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수치를 훑어보며 빠른 걸음으로 진료실 쪽으로 향했다.그런데 복도 모퉁이를 도는 순간, 갑자기 단단한 가슴팍과 부딪혔다.손에 들고 있던 검사지는 ‘촤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흩어졌다.“죄송합니다.”반사적으로 사과한 최수빈은 몸을 숙여 검사지를 주우려 했다. 하지만 종이를 집는 순간 손끝이 그대로 멈췄다.바닥에 떨어진 검사표 맨 위에는 인공임신중절수술 전 검사라는 문구가 또렷이 찍혀 있었다.곧이어 고개를 든 그녀는 깊고 어두운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주민혁이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검은 정장을 입은 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있었고 미간에는 피로가 짙게 배어 있었다. 병실에서 막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 입원 중인 임하은을 보고 오는 길일 터였다.그는 고개를 숙여 흩어진 검사지를 바라보다가 티 나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허리를 굽혔다.“내가 할게요.”최수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치 무언가에 데인 것처럼, 그녀는 급히 손을 움직여 검사지를 하나씩 집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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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4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전략을 조정해서 우선 심 대표님 쪽을 대응해야 할까요?”려운이 물었다.“그럴 필요 없어.”주민혁은 고개를 저었다.“07 전투기 프로젝트는 우리 쪽 핵심 경쟁력이야. 심종연이 따라오려 해도 쉽지 않을 거야. 돌아가서 준비해. 오늘 오후에 임원 회의 열어서 대응 방안 논의하자. 그리고 정부 협력 쪽은 접촉 속도를 더 끌어올려. 심종연이 틈을 파고들지 못하게.”“알겠습니다.”려운이 짧게 답하고 돌아섰다.주민혁은 병원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은 여느 때처럼 단호했지만 최수빈이 사라졌던 복도 끝을 지나칠 때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무의식적으로 그쪽을 바라봤으나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공기 속에는 소독약 냄새만 남아 있었다.가슴 한쪽이 문득 비어 버린 듯 옥죄어 왔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점점 짙어졌다.“대표님, 차 준비됐습니다.”출입구 쪽에서 려운의 목소리가 들렸다.주민혁은 시선을 거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복잡한 감정을 눌러 담은 뒤, 문 쪽으로 걸어갔다.그렇게 차는 병원을 빠져나와 제노 테크 본사 방향으로 달려갔다....그 무렵, 최수빈은 검사지를 들고 의사 진료실에 들어가 있었다.의사는 검사 결과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수치상으로는 모두 정상입니다. 수술 진행해도 문제없겠네요. 언제로 잡으시겠어요?”의자에 앉아 있던 최수빈은 무의식적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망설였다.그러다 이내 고개를 들어 쉰 목소리로 말했다.“모레로 할게요.”의사는 수술 동의서를 작성하며 안내했다.의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술 동의서를 작성했다.“수술 전날부터는 금식하시고, 당일 아침 공복 상태로 오세요. 수술 후에는 충분히 쉬셔야 하고 한 달 정도는 격한 활동이나 찬물 접촉은 피하셔야 합니다.”“네, 알겠습니다.”최수빈은 서류를 받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섰다.병원 정문을 나와 길가의 나무 그늘 아래에 멈춰 선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어머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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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5화

“엄마, 엄마가 걱정하는 거 알아요.”최수빈은 목소리를 한결 누그러뜨렸다.“그래도 이미 결정했어요. 이 아이는 낳을 수 없다고요. 지금 내 삶은 안정돼 있어요. 율이도 있고 천공도 있고... 이 아이 때문에 지금의 일상을 흔들고 싶지 않고 무엇보다 율이가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아요.”이혜정은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서야 결국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알겠어. 모레 아침 일찍 갈게. 너도 몸조리 잘하고 수술 전에는 너무 기름진 거 먹지 말고 푹 쉬어.”“네, 알겠어요. 고마워요, 엄마.”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며 최수빈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녀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방금 이혜정에게 임하은의 임신 이야기를 꺼냈던 순간이 떠오르며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임하은 역시 주민혁의 아이를 품고 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 또한 그의 피를 물려받았다.가끔 역사는 이렇게 놀라울 만큼 닮은 모습으로 반복된다.지난 생에서 최수빈과 주민혁의 결혼 생활에는 박하린이라는 여자가 끼어들었었다. 박하린 역시 아이를 가졌었다.이번 생에서는 모든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다고 믿었는데 또다시 임신했고, 동시에 임하은 역시 그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만약 이번에도 주민혁과의 인연을 붙잡으려 한다면, 임하은의 아이는 과거 박하린의 아이처럼 되는 건 아닐까.그녀는 또다시 같은 길을 되풀이하며 끝없는 다툼과 고통 속으로 빠져드는 건 아닐까.박하린의 아들, 주시후의 얼굴이 떠올랐다.아마도 운명이란 끝내지 못한 질문을 계속해서 반복해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이 다른 답을 내놓을 때까지 말이다.지난 생에서 최수빈은 물러섰고 타협했다. 하지만 그 결과 그녀의 몸과 마음에는 상처만 남았다.최수빈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손에 쥔 휴대폰을 꽉 움켜쥐자 가슴속이 시려왔다.인공임신중절 수술 동의서를 내려다본 순간 눈물이 조용히 떨어졌다.시야가 흐려져 종이에 적힌 글자들이 번져 보였다.눈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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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6화

“지금 팀 안에서 이런 시스템 구조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너야. 혹시 맡아줄 수 있어? 체력적으로 무리라면 다른 사람 배치할게.”최수빈은 서류 위에 적힌 상주 엔지니어라는 글자에 손끝을 얹은 채 몇 초간 말이 없었다.제노 테크에 상주한다는 건 주민혁과 빈번하게 마주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애써 피해왔던 일이었다.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천공이 07 전투기 프로젝트의 협력 기회를 얻은 것 자체가 쉽지 않았고 이 모듈은 이후 사업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냉정하게 보자면 이 일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그녀였다.“할게요.”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육민성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다만 일주일 뒤에 들어가고 싶어요. 수술 끝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다음에 상주하겠습니다.”“문제없어.”육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그동안은 제노 테크에 들러서 환경부터 익히고 그쪽 팀이랑 1차로 업무 인수인계만 해둬. 초반 진행은 내가 계속 챙길게.”...오후에 열린 온라인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최수빈은 시스템 로직을 짚어가며 몇 가지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고 논리는 명확했다. 제노 테크 쪽 기술 책임자조차도 ‘역시 수빈 씨, 역시 전문가’라며 감탄을 숨기지 못했다.회의를 마친 뒤, 그녀는 짐을 챙겨 곧장 제노 테크로 향했다....제노 테크의 사무 공간은 분주했다. 흰 가운을 입은 엔지니어들이 여기저기서 기술 방안을 두고 토론 중이었고 벽에는 07 전투기의 설계 스케치가 걸려 있었다. 공간 전체에 긴장감과 고조된 열기가 감돌았다.최수빈이 로비에 들어서자 프런트 직원이 그녀를 총괄 사무 구역으로 안내했다.“수빈 씨, 지금 주 대표님은 회의 중이셔서요. 먼저 입사 절차를 진행하고 업무 공간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려운이 빠르게 다가오며 사원증과 출입 카드를 건넸다.최수빈은 그를 따라 사무실을 지나갔다. 지나가는 동안 여러 엔지니어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천공의 최수빈이 07 전투기 프로젝트를 맡아 제노 테크와 협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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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7화

회의를 막 마친 그는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단단한 팔뚝 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미간에는 아직 회의에서의 긴장감이 가시지 않은 듯한 표정이 남아 있었다.최수빈의 창백한 얼굴과 불편함을 억누르는 듯한 모습을 본 순간, 그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책상 위에 놓인 디저트 접시로 향했다.“입에 안 맞아?”그가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였고 감정은 읽히지 않았다.“일단 조금이라도 먹어. 직원 식당 음식은 아직 좀 기다려야 해.”최수빈은 그를 보지 않은 채 고개만 젓더니 책상 위에 있던 미지근한 물을 들어 한 모금 더 마셨다.“괜찮아요. 배 안 고파요.”낮은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러다 아랫배 쪽에서 은근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직 감기가 완전히 낫지 않아서일지도 몰랐다.요즘 너무 바삐 보낸 탓에 그녀는 많이 지쳐 있었다. 제대로 쉬어본 기억이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돌아치고 있는 것이었다.주민혁의 시선이 몇 초간 최수빈의 얼굴에 머물렀다. 눈 밑에 내려앉은 피로와 창백한 입술을 본 그는 티 나지 않을 만큼 미간을 찌푸렸다.아침에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일, 흩어져 있던 검사 결과지들이 떠오르자 이유 없이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려 비서, 식당 가서 수빈이가 먹을 수 있는 담백한 죽 하나 가져와.”“알겠습니다, 대표님.”그렇게 려운이 자리를 떠나고 사무실에는 최수빈과 주민혁 둘만 남았다. 공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최대한 주민혁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최수빈은 의자에 기대어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창밖을 바라봤다.그럼에도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를 살피듯, 그리고 그녀로서는 읽어내기 힘든 어떤 감정이 섞여 있어 몸이 괜히 불편해졌다.“몸이 안 좋으면 좀 쉬어. 업무 연계는 급한 거 아니야.”주민혁이 먼저 침묵을 깼다.순간 몸이 굳은 최수빈은 되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 대표님. 하지만 괜찮아요. 일에는 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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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8화

최수빈은 말을 이어갔다.“이제 할머니도 돌아가셨고 우리 사이도 정리됐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그렇게 마음에 담아두고 미워할 필요 없잖아요.”주민혁의 시선은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금방이라도 넘칠 듯한 감정이 숨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최수빈.”최수빈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남자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끝내 입을 다물었다. 사실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최수빈은 다 알고 있으니 말이다.박하린에 대한 일은 이미 그가 설명했고 그녀 역시 진실을 알고 있었다.오해는 풀렸지만 결국 함께하지 못한 건 최수빈이 아니라 주민혁의 선택 때문이었다.“미안해.”주민혁은 이 말만 남긴 채 등을 돌려 나갔다.최수빈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래로 늘어진 손은 어느새 꽉 쥐어져 있었다.바로 앞에 있는 사람인데도 어쩐지 하늘 끝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그들은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였고 끝내 닿을 수 없는 두 개의 평행선이었다....오후, 모든 업무를 마무리한 뒤였다.최수빈이 책상 위의 서류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작스러운 복통이 몰려왔다.보이지 않는 손이 아랫배를 세차게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아래로 쏟아지는 듯한 통증에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고 그녀는 참지 못하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수빈 씨, 왜 그러세요?”옆에 있던 엔지니어가 가장 먼저 이상을 알아차리고 다가왔다.“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요? 어디 많이 안 좋으세요?”최수빈은 통증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 옷깃을 적셨다.곧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누군가는 휴지를 건넸고 누군가는 려운을 부르러 가려 했다.그때, 사무실에서 나온 주민혁이 바닥에 웅크린 최수빈을 보았다.바로 표정이 굳으며 그는 빠르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야? 어디가 아파?”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최수빈은 몸을 비틀어 피했다.“괜찮아요... 구급차를...”이를 악문 채 겨우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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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59화

주민혁은 아무 말 없이 최수빈을 내려다보더니 그녀의 거부하는 눈빛을 외면한 채, 몸을 숙여 그대로 들어 올렸다.예상치 못한 행동에 최수빈은 반사적으로 그의 양복 깃을 움켜쥐었다. 아랫배를 짓누르는 듯한 통증이 순간 더 세게 몰려와 숨을 들이켰다. 이제 버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그녀는 그의 팔에 실린 힘을 느꼈고 가까이에서 희미하게 퍼지는 시더우드 향을 맡았다.예전에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향수였다. 그런데 그 향이 지금은 오히려 마음을 더 어지럽혔다.“내려놔요... 구급차만 부르면 돼요. 임하은 씨한테 가요...”이를 악문 채 최수빈은 겨우 속삭였다.하지만 주민혁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그녀를 안은 채 엘리베이터로 곧장 걸어가는 것이었다.주변의 엔지니어들과 직원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말을 붙이지 못했다.주민혁의 이런 표정은 처음인지라 주변 공기마저 숨 막힐 듯 무거웠다.엘리베이터 안,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의 숨소리만 얽히고 있었다.최수빈은 그의 품에 기댄 채 통증에 몸을 떨었다. 식은땀이 그의 셔츠 앞섶을 적셨다.고개를 돌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했지만 귓가에는 그의 안정된 심장 박동이 또렷이 들려왔다. 그 소리가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그는 임하은 곁으로 가야 하는 사람 아닌가.임하은 역시 아이를 잃을 위기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최수빈을 붙들고 있는 걸까.차는 이미 건물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려운은 주민혁이 최수빈을 안고 나오자 곧바로 뒷좌석 문을 열었다.주민혁은 몸을 숙여 최수빈을 뒷좌석에 눕히듯 앉힌 뒤, 자신도 따라 올라탔다.“대학 병원으로. 최대한 빨리.”차가 도로를 질주하자 창밖 풍경이 빠르게 밀려났다.최수빈은 뒷좌석에 몸을 웅크린 채 아랫배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통증에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주민혁은 말없이 휴지를 꺼내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조심스레 닦아냈다.가벼운 동작은 필요 이상으로 신중해 보였다.그리고 이러한 행동에 최수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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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0화

반 시간쯤 지나 검사 결과가 나왔다.의사는 검사지를 들고 주민혁 앞으로 다가왔다. 표정이 다소 무거웠다.“환자 보호자분이시죠? 임신 상태였습니다만, 현재는 완전 유산 소견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태아는 살릴 수 없어요.”주민혁의 몸이 순간 굳어버렸다.“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임신이라고요?”그제야 모든 게 한꺼번에 이어졌다.최근 들어 유난히 안 좋아 보이던 최수빈의 얼굴빛, 사무실에서의 헛구역질, 아침 병원에서 그가 흘끗 봤던 검사지를 다급히 숨기던 모습까지...그녀가 임신 중이었으나 주민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네. 정황상 이전부터 입덧 증상이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거기에 이번 외부 자극이나 과로가 겹치면서 유산으로 이어진 것 같고요.”의사는 그를 한 번 훑어보며 말을 이어갔다.“남편이시라면서요. 어떻게 아내가 임신한 것도 모르십니까? 아내분이 임신했는데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이런 상황이 생겼습니다. 얼른 가보세요. 지금 심리 상태가 많이 불안할 겁니다.”‘남편’이라는 단어가 주민혁의 가슴을 정면으로 찔렀다.그는 변명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병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병실 안.최수빈은 침대 머리에 기대앉아 있었다.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시선은 허공처럼 천장을 향해 멍하니 떠 있었다.아랫배의 통증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가슴 안쪽은 오히려 점점 더 아파왔다.의사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태아는 살릴 수 없습니다.’이미 이 아이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었음에도 그 결과가 현실이 되는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통째로 비워진 것처럼 숨이 막혔다.그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주민혁이 들어왔다.그는 병상 옆에 서서 멍하니 앉아 있는 최수빈을 내려다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 병실 안에는 기계 소리만 규칙적으로 작게 울렸다.한참 뒤, 최수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눈빛에는 옅은 조소가 담겨 있었다.“왜 왔어요? 임하은 씨 쪽은 안 가도 돼요? 그쪽도 아이 못 지킨다면서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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