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061 - Chapter 1070

1160 Chapters

제1061화

벽에 기대 서 있던 주민혁을 본 육민성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차갑게 식은 눈빛을 한 채 그는 말없이 병실 쪽으로 곧장 향했다.주민혁은 그 자리에 굳어 선 채 육민성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이렇게 빨리, 다급하게 달려왔다고? 설마 정말 육민성의 아이인 건가?’약혼한 사이였으니 임신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주민혁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육민성이 왔으므로 최수빈은 이제 그녀를 돌봐줄 누군가가 생겼기에 자신은 떠나는 게 맞았다.그는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무거운 것이 마치 솜 위를 밟는 듯 힘이 빠져 있었다.병실 안으로 들어선 육민성은 침대 곁에 다가섰다. 창백한 얼굴과 퉁퉁 부은 눈을 한 최수빈을 보는 순간,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그는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피부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무슨 일이야? 수술은 모레로 잡혔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유산을 해?”침대 머리에 기대 있던 최수빈이 힘없이 입을 열었다.“선배...”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몸이 너무 지쳐 더 말을 잇지 못했다.그때 병실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송미연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침대 위의 최수빈을 보자마자 그녀는 재빨리 다가가 손을 꼭 잡았다.“수빈아,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최수빈은 고개를 저었다.“아이... 아이가 없어졌어...”송미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그녀는 번쩍 고개를 돌려 육민성을 노려봤다. 눈에 불꽃 같은 분노가 번졌다.“주민혁이 한 짓이지? 역시 고운 마음을 품었을 리가 없지! 처음부터 그 사람 아니었으면 네가 그렇게까지 힘들 일도 없었고, 이제는 아이까지 잃게 만들었잖아. 내가 절대 가만 안 둬!”당장이라도 주민혁을 찾아가 따지겠다는 듯 몸을 일으키려 하자 육민성이 서둘러 붙잡았다.“흥분하지 마요. 아직 상황이 정확히 뭔지 모르잖아요. 먼저 수빈이한테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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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2화

“요즘 심 대표님은 새 회사 세워서 제노 테크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고 주기훈 선생님도 계속 07 전투기 프로젝트를 노리고 있잖아. 이런 비열한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망치려 들 가능성도 충분해.”최수빈의 마음에도 의심이 스며들더니 최근에 벌어진 일들이 하나둘 떠올랐다.약혼식에서의 사고, 임명규에 대한 조사, 심종연의 신설 회사, 주기훈과 심종연의 잦은 접촉, 그리고 지금 그녀와 임하은이 동시에 아이를 잃은 일까지...‘이 모든 게 정말 우연일까?’마치 누군가가 뒤에서 판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누가 꾸민 짓이든, 난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송미연이 차갑게 말했다.육민성도 고개를 끄덕였다.“최근 제노 테크나 천공과 접촉한 사람들부터 전부 조사해 볼게. 특히 심종연이랑 주기훈 그분 쪽 동향을 중점적으로.”육민성은 더 말을 잇지 않도록 손짓으로 제지했다. 그러자 송미연이 그의 눈짓을 받아들였다.최수빈의 눈 밑 붉은 기가 눈꼬리까지 번져 있었고 창백한 입술에는 혈색이 전혀 없었다. 이미 체력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송미연은 뜻을 알아차리고 속에서 끓어오르던 분노를 억눌렀다. 목소리도 한층 부드러워졌다.“됐다, 이런 답답한 얘기는 그만하자. 넌 푹 쉬어. 우리가 여기서 같이 있어 줄게.”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으로 꽉 조여 있던 신경이 풀리자 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육민성은 그녀 위에 덮인 얇은 이불을 다시 정리해 주었고 송미연은 이마에 맺힌 땀에 젖은 잔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었다.두 사람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병실 안에는 규칙적으로 울리는 기계 소리와 점점 고르게 변해 가는 그녀의 숨소리만이 남았다.하지만 그날 최수빈의 잠은 깊지 않았다. 꿈속에는 흐릿한 장면들이 계속해서 이어졌기 때문이었다.어느 순간에는 율이가 작은 손을 내밀며 안아 달라고 했다.“엄마, 나 동생 갖고 싶어요.”또 어떤 순간에는 수술대 위를 비추는 눈부신 조명과 함께 먼 듯하면서도, 또렷한 의사의 목소리가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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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3화

최수빈은 눈가가 화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율이가 나 찾으면... 엄마가 중요한 일 하느라 잠깐 바쁘다고 말해 줘요. 일 끝나면, 율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 사 주겠다고도요.”“그래. 너도 몸 잘 챙기고 너무 무리하지 말아.”이혜정은 끝내 더 묻지 않았다.“율이는 걱정하지 마. 내가 잘 돌볼게. 일 마무리되면 얼른 돌아와.”“네... 고마워요, 엄마.”전화를 끊은 최수빈은 휴대폰을 꼭 쥔 채 결국 참아 왔던 눈물을 흘렸다.유산 사실을 이혜정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연세도 있고 몸도 약한데 이 소식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무엇보다 마음이 아파 자책할 어머니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깼어? 몸은 좀 어때?”문가에서 육민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보온병 하나를 들고 서둘러 들어왔다.최수빈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그냥 좀 피곤해서요.”육민성은 보온병을 침대 옆 탁자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은은한 죽 향이 퍼졌다.“집에 있는 도우미분한테 끓여달라 한 거야. 좁쌀죽에 대추도 조금 넣었어. 수술 막 끝났으니까 자극 없는 걸로 몸부터 추슬러야 해.”그는 그릇에 죽을 담아 내밀었다.“자, 뜨거울 때 먹어.”최수빈은 그릇을 받아 천천히, 한 숟갈씩 떠먹었다.잘 퍼진 좁쌀죽에 대추의 단맛이 어우러져 목을 타고 내려가며 속을 데웠다. 몸도, 마음도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육민성을 바라봤다. 눈빛에 고마움이 가득했다.“선배, 늘 이렇게 챙겨줘서 고마워요.”“나한테까지 그런 말 할 필요 없어.”육민성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지금은 너 쉬는 게 제일 중요해. 다른 일은 나랑 미연 씨가 알아서 할게. 아, 미연 씨는 과일 사러 갔어. 곧 올 거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실 문이 열렸다.송미연이 큼직한 과일 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며 환하게 웃었다.“우리 수빈이 깼어? 봐, 네가 좋아하는 것들만 골라 왔어. 다 오늘 들어온 거라 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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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4화

“괜찮아.”“안 피곤할 리가 없잖아요. 눈 다 충혈됐어요.”최수빈은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며 옆에서 사과를 깎고 있는 송미연을 바라봤다.“미연아, 너도 매일 이렇게 오지 않아도 돼. 나 정말 괜찮아.”송미연은 깎아 둔 사과를 먹기 좋게 잘라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조금 있다가 갈 거야. 대표님이랑 이미 얘기해 놨어. 번갈아 가면서 너 보기로 했어. 대표님은 낮에는 회사 일 보고 밤에 와서 자고. 나는 낮에 여기 있다가 밤에는 집에 가서 쉬고. 서로 무리 안 되게 하자는 거지.”최수빈이 뭐라도 더 말하려 하자 송미연이 말을 잘랐다.“그만 고집부려. 지금은 몸부터 추스르는 게 제일 중요해. 다 나으면, 원하는 대로 보답해도 돼.”두 사람의 단호한 눈빛을 보며 최수빈은 결국 더는 거절하지 못했다. 대신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그 후 며칠 동안 주민혁은 다시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가끔 려운에게서 전해 들리는 소식도 전부 07 전투기 프로젝트 진행 상황뿐이었다.마치 그날 응급실에서 보였던, 당황스럽고 죄책감을 느끼는 듯하던 그의 모습이 전부 자신의 착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밤이 깊어졌다.송미연은 집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고 육민성은 병실 안 보호자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최수빈은 침대 머리에 기대어 창밖으로 비치는 달빛을 바라봤다.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아랫배의 통증도 많이 가라앉았다. 다만 가끔씩 묵직한 통증이 스쳐 지나가며 그녀가 한 생명을 잃었다는 사실을 조용히 상기시켰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최수빈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그러다 한밤중, 미세한 소리에 그녀가 문득 잠에서 깼다. 몽롱한 시야 속에서 병실 문가에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키가 크고 검은 외투를 입은 어떤 사람이 문틀에 기대 서 있었다. 등을 보인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은 마치 침묵 속의 조각상 같았다.최수빈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누군지 확인하려 애써 눈을 크게 뜨려 했다.그런데 그 순간, 오래전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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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5화

다음 날 아침.송미연이 아침을 들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최수빈은 침대 머리에 기대 천공연구원의 프로젝트 자료를 넘겨보고 있었다.몸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마음 한켠에는 계속 일이 걸려 있었다.특히 07 전투기 프로젝트의 시스템 연동은 일정도 촉박하고 부담도 큰 작업이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었다.“아침부터 벌써 일 보고 있어?”송미연은 침대 옆 탁자에 아침밥을 내려놓더니 최수빈 손에 들린 서류를 슬쩍 빼앗았다.“의사 선생님도 말했잖아. 지금 제일 중요한 건 휴식이라고. 일은 우리한테 맡겨.”최수빈은 난처한 듯 웃었다.“알긴 아는데... 프로젝트가 너무 급해서. 선배 혼자 다 맡기에는 버거울 거야. 오늘 주말이잖아. 원래 쉬어도 되는 날인데 회사 가서 일 처리한다니까 마음이 좀 그래.”송미연은 포장을 뜯어 죽 한 그릇을 꺼내 최수빈의 앞에 놓았다.“걱정 마. 육 대표님이랑 얘기해 봤는데, 충분히 감당할 수 있대. 게다가 나도 오늘 딱히 바쁜 일 없거든. 이따가 천공 가서 같이 도와줄 거니까 너는 여기서 얌전히 쉬기만 해.”죽을 받아 들긴 했지만 최수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나 이제 거의 괜찮으니까 퇴원 수속 좀 도와줘. 집에 가서 쉬어도 똑같잖아.”“그건 안 돼.”송미연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의사 선생님 말로는 최소 일주일은 입원해서 경과 봐야 한대. 이제 겨우 사흘 지났는데, 무슨 퇴원이야. 정말 돌아가고 싶으면 몸 완전히 회복된 다음에 얘기해. 일 걱정은 진짜 하지 마. 직원들한테도 말 다 해놨고 며칠은 내가 천공에 있으면서 네 몫까지 챙길게. 문제 생길 일 없어.”최수빈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병실 문이 갑자기 열리며 주민혁이 들어왔다.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그는 과일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 제대로 쉬지 못한 게 분명해 보였다.“잘 쉬어. 몸부터 추슬러야지.”주민혁은 과일 바구니를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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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6화

“그럼 더 방해하지 않을게.”주민혁은 돌아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들어올 때보다 발걸음이 훨씬 무거워 보였다.문 앞에 이르러 잠시 멈춘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몸 잘 챙겨. 일은 내가 맡을게. 프로젝트 일정에는 차질 없게 할 거야.”그 말을 남기고 문을 열어 곧장 나가버렸다. 병실 안에는 잠시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닫힌 문 쪽을 바라봤다. 마음이 뒤엉켜 쉽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송미연은 병실 문을 나서는 주민혁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속에서 불이 치솟았다.그래서 최수빈에게 ‘잠깐 나갔다 올게’라고 짧게 말한 뒤, 가방을 집어 들고 서둘러 병실을 나섰다.병원 복도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그녀는 앞쪽을 훑어보다가 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키 큰 남자의 뒷모습을 금세 찾아냈다. 그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주 대표님, 잠깐만요!”송미연은 빠르게 다가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손을 뻗어 열림 버튼을 눌렀다.그러자 주민혁이 돌아섰다. 분노에 찬 송미연을 보면서도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일이죠?”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고 두 사람은 좁은 공간 안에 마주 서게 됐다. 공기가 단숨에 팽팽해졌다.송미연은 팔짱을 낀 채 날 선 시선으로 그를 노려봤다.“주 대표님은 한가하신가 보네요. 임하은 씨는 안 돌보고 여기까지 우리 수빈이 위로하러 오셨어요?”주민혁은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선 채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제노 테크 대표고 07 전투기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자인 건 알겠어요. 하지만 지금 수빈이는 환자예요. 안정이 필요하다고요.”송미연은 숨을 한 번 고르며 격해진 감정을 눌렀지만 말끝은 여전히 날카로웠다.“마음이 없다면 괜히 눈앞에 어른거리지 마세요. 괜히 사람 힘들게 하지 말라고요. 지금 수빈은 그런 거 다시 감당할 여유 없어요.”주민혁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검은 눈동자에서는 좀처럼 감정이 읽히지 않았다.“미연 씨 생각은 그래요?”“그럼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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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7화

가슴 안쪽이 묘하게 답답해져 송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뒤, 층수 버튼을 눌렀다.최수빈의 병실에서는 그녀가 노트북을 끌어안은 채 업무를 보고 있었다.주민혁이 07 전투기 프로젝트의 시스템 연동 작업을 맡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매일 아침이면 려운이 보내온 프로젝트 자료가 어김없이 그녀의 메일함에 도착했다.주민혁의 처리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코드 구조와 모듈 설계 안에는 천공의 핵심 기술이 너무 많이 얽혀 있었고 그걸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좀처럼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였다.“또 자료 보고 있어?”막 데운 곰탕을 들고 들어온 송미연이 컴퓨터 화면을 살짝 눌렀다.“의사 선생님이 전자기기 좀 줄이라고 했잖아. 눈이 못 버틴다니까. 주민혁이 맡아서 한다며. 너도 이제 좀 쉬면 안 돼?”최수빈은 뻐근해진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노트북을 닫고 숟가락으로 국을 한 입 떴다.“일은 잘하고 있어. 다만 천공 내부 시스템이랑 맞물리는 몇몇 인터페이스는 내가 직접 수치만 확인하려고.”잠시 말을 멈춘 뒤,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협업 프로젝트잖아. 천공 쪽에서 발목 잡히는 일은 없어야지.”송미연은 그녀가 애써 괜찮은 척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한편 제노 테크 사무실에서는 주민혁이 컴퓨터 화면 속 시스템 구조도를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옆에 서 있던 려운이 조심스럽게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대표님, 방금 천공 쪽에서 온 추가 설명입니다. 3번 모듈 인터페이스 파라미터인데, 몇 가지 수치를 조정하셨습니다. 호환성이 더 좋아진다고요.”주민혁은 서류를 받아 들고 빼곡하게 적힌 표시들에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종이 가장자리를 문지르는 손끝이 잠시 멈췄다.단정한 필체, 정확한 지적, 사소한 논리 틈까지 짚어낸 메모들...예전 그녀가 일하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이 조정안대로 수정해.”주민혁이 말했다.“그리고 최신 진행 상황도 같이 전달해줘. 괜히 걱정하지 않게.”“네.”려운이 돌아서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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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8화

그녀의 말투는 차갑지도, 그렇다고 상처받은 기색도 없었다.마치 임하은의 말이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담담했다.하지만 바로 그 담담함이 바늘처럼 임하은의 자존심을 찔렀다.그녀는 최수빈이 화를 내거나, 변명하거나, 심지어 말다툼이라도 벌이길 기대했다.그런데 돌아온 건 무심할 만큼 차분한 반응이었다. 그 순간, 임하은은 괜히 혼자 소란을 피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순진한 척하지 마요!”한층 높아진 임하은의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환자 몇 명이 고개를 돌렸다.“내가 수빈 씨의 속을 모를 것 같아요? 나랑 민혁 씨가 틀어지길 바랐잖아요. 우리 아이가 없어지길 기다렸다가 그 틈에 끼어들 생각이었잖아요!”최수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뜨개바늘을 정리했다. 말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임하은 씨, 나랑 민혁 씨는 이생에 다시 엮일 일 없어요. 그러니 나를 상대로 상상 속의 경쟁 구도도 만들지 마요. 그럴 필요 없으니까.”잠시 숨을 고른 뒤, 들뜬 임하은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난 지금 몸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요. 율이 돌보고 천공 일 제대로 마무리하는 것만 해도 충분하다고요. 하은 씨랑 민혁 씨의 문제는 나랑 상관없어요. 솔직히, 거기까지 신경 쓸 여력도 없고...”그렇게 최수빈이 말을 마치고 돌아서려는 순간, 임하은이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멈춰요! 말 똑바로 해요! 상관없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애초에 수빈 씨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나랑 민혁 씨는 진작 결혼했어요. 지금도 또 판을 흔들고 있잖아요. 대체 무슨 생각인데요?”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힘을 주어 빼냈다.“임하은 씨, 진정해요. 우린 이미 이혼했고 끝난 관계예요. 정말로 민혁 씨가 중요하다면, 나한테 화풀이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랑 얘기해요.”이 말을 끝으로 더는 돌아보지 않고 입원동 쪽으로 걸어갔다.임하은은 알고 있었다. 최수빈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그런데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최수빈을 걱정하는 주민혁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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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69화

“부서진 물건은 전부 원가로 배상해. 다른 환자들한테 피해 가지 않게, 그건 네가 처리해.”전화를 끊은 주민혁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려운은 지시에 따라 임하은의 병실로 향했다.바닥에 흩어진 잔해와, 침대에 앉아 울고 있는 임하은을 보자 그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임하은 씨, 파손된 물품은 원가 기준으로 배상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대표님 말씀으로는, 약혼을 파기하시겠다면 그에 대해 별다른 이견은 없다고 하셨습니다.”“배상... 약혼 파기?”임하은은 눈이 퉁퉁 부은 채 고개를 들었다. 려운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믿기 힘들다는 기색이 가득했다.“그 사람이 나한테 이렇게까지 한다고요? 아이를 잃었는데, 걱정은커녕 약혼을 파기한다고요?”려운은 그 자리에 선 채 감정 하나 섞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임하은 씨, 주 대표님은 요즘 프로젝트 일정이 굉장히 빡빡합니다. 부담도 크고요. 그 점은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배상 건은 회사 규정입니다. 저는 지시대로 전달드리는 것뿐이에요.”“이해?”임하은의 감정은 더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내가 왜 그 사람을 이해해야 하죠?”그녀는 책상 위에 있던 파일철을 집어 들어 려운을 향해 내던졌다.“나가요! 당장 나가요! 그쪽들 얼굴 하나도 보고 싶지 않으니까 다 꺼지라고요!”려운이 몸을 틀어 피하자 파일철은 벽에 부딪혀 내용물이 바닥에 흩어졌다.그는 잠시 임하은의 광기 어린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병실을 나섰다.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정말 끝에 다다른 듯했다....일주일 뒤, 최수빈은 드디어 퇴원할 수 있게 됐다.육민성은 이른 아침부터 병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손에는 두툼한 외투 한 벌이 들려 있었다.“몸은 어때? 불편한 데는 없어?”그는 최수빈의 짐을 받아 들며 물었다. 목소리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묻어났다.“괜찮아요. 많이 좋아졌어요.”최수빈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건네준 외투를 걸쳤다.“며칠 동안 계속 챙겨줘서 고마워요. 미연이도 그렇고, 다들 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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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70화

“제가 책임질게요.”최수빈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임하은을 똑바로 바라봤다.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제 일은 제가 책임집니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희는 이만 가겠습니다.”말을 마치자, 최수빈은 육민성의 손을 잡고 그대로 차에 오르려 했다.임하은이 뭔가 더 말하려는 순간, 주민혁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제지했다. 그러자 임하은은 이를 악물었다.최수빈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임하은의 속에서는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래서 주민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불만을 쏟아냈다.“민혁 씨, 왜 아까 내 편 안 들어줬어요? 아직도 그 사람 생각하는 거예요?”주민혁의 시선이 천천히 임하은에게로 옮겨졌다.“임하은. 우리 사이에 감정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해?”그 짧은 한마디에 임하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주민혁은 더 말하지 않고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그 한마디는 얼음처럼 차가워 임하은의 모든 가식적인 모습을 단숨에 베어냈다.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와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은 허공에서 굳어버렸고 얼굴에 걸려 있던 여유와 도발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당혹감과, 숨길 수 없는 불안뿐이었다.주민혁이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선을 그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무 직설적인 질문에 반박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았다.주민혁은 임하은을 다시 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차 쪽으로 향했다.반면, 임하은은 다리에 힘이 풀려 거의 서 있기도 힘들었다. 옆에 세워진 차 문을 붙잡고서야 겨우 몸을 지탱할 수 있었다.임명규는 아직 병원에서 감시를 당하는 중이었고 그 일로 임씨 가문은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었다.자금줄이 막히며 몇몇 회사 프로젝트는 중단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다.어제만 해도 그녀의 어머니는 휴대폰 너머에서 울먹이며 말했다.“하은아, 지금 임씨 가문은 주민혁 없으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사람 꼭 붙잡아야 한다. 괜히 감정 상하게 하지 말고.”그 말들이 돌덩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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