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의 모든 챕터: 챕터 1081 - 챕터 1090

1160 챕터

제1081화

“네가 먼저 엄마 필요 없다고 했잖아. 그래서 엄마도 너 보고 싶지 않대.”예전에 있었던 일들이 아직도 율이의 머릿속에 또렷이 남아 있었다.그때 주시후는 입만 열면 엄마가 계모라며, 자기에게 잘해주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었다.주시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눈가도 금세 촉촉해진 채로 코를 훌쩍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알아... 예전에는 잘못 선택했던 거야. 그때는 내가 눈이 멀었어.”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을 내밀어 율이의 손을 잡으려 했다.하지만 율이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그 손을 피했다.“율아, 너 내 동생이잖아. 우리 같이 자라왔고 지금은 둘 다 1학년이야. 내가 하는 말... 정말 못 믿겠어?”율이는 고개를 들었다. 동그란 눈에는 진지한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안 믿어. 그리고 난 엄마가 속상해할 일은 안 할 거야.”율이는 입술을 깨물더니 말을 이어갔다.“아빠도 널 안 받아줬잖아. 그런데 왜 엄마가 널 다시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 너 전에 엄마가 새엄마라서 너한테 못되게 군다고 계속 말했잖아. 그런데 지금 다시 찾아왔다고?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요즘 네 형편이 별로라서 후회가 된 거 아니야?”그리고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덧붙였다.“그리고 말이야, 종연 아저씨도 돈 많잖아. 그 집에서 너한테 잘해주지 않아? 아빠가 그러던데, 종연 아저씨는 큰 별장도 갖고 있고 거기에 수영장도 있고 예쁜 옷도 엄청 많다던데? 너 원래 그런 거 제일 좋아했잖아.”주시후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이내 하얗게 질렸고 다시 푸르스름하게 변했다.아이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결국 바닥에 뚝 떨어지며 작은 물 자국을 남겼다.“넌 왜 항상 사람을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해!”울먹이며 말을 마친 주시후는 몸을 돌려 그대로 달려갔다. 작은 몸이 금세 학교 길 끝으로 사라졌다.책가방에 달린 곰 인형 키링이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 마치 주시후의 억울함을 대신 말해주는 것처럼 보였다.그 자리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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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2화

다음 날 방과 후, 율이는 책가방을 멘 채 가벼운 발걸음으로 학교 근처의 스포츠용품점으로 향했다.주머니 속에는 작은 돼지저금통이 묵직하게 들어 있었고 현금은 반듯하게 접어 맨 아래에 눌러 넣어 두었다.엄마가 운동회에 쓸 운동복과 운동화를 사라고 준, 어젯밤에도 세 번이나 다시 세어 보고서야 안심하고 챙겨 둔 돈이었다.가게 앞에 도착한 율이는 걸음을 멈추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하지만 손끝에 닿은 건 텅 빈 천주머니뿐이었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율이는 급히 책가방을 내려 바닥에 두고 안쪽 주머니를 하나하나 뒤지기 시작했다.필통, 숙제 공책, 그림책...모든 물건이 그대로 있었으나 그 돈만 보이지 않았다.아이는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리더니 눈가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아침에 집 나설 때 분명히 가방 바깥 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어떻게 사라질 수가 있지? 길에서 떨어뜨린 걸까, 아니면 누가 가져간 걸까?’율이는 가게 앞에 서서 발만 동동 구르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엄마의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엄마 요즘 엄청 바쁘잖아. 일부러 현금까지 쥐여 주면서 직접 가서 사보라고 했는데 그 돈을 잃어버렸으니... 엄마가 화내시지 않을까?’“너 왜 그래?”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율이가 돌아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시후가 손에 아이스크림 하나를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어제 오후에 그렇게 서로 안 좋게 헤어지고 나서는 다시 말도 못 섞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주시후가 다가오는 걸 보자 율이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주시후는 곁으로 다가오더니 눈가가 빨갛게 부어 있는 율이의 모습과 뒤집혀서 엉망이 된 책가방을 보고 대충 상황을 짐작한 듯 조용히 물었다.“돈 잃어버렸어?”율이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저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꾹 참을 뿐이었다.주시후는 잠시 침묵하다가 율이의 손을 잡고 가게 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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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3화

최수빈이 회사에서 막 돌아와 외투를 벗어 현관 옷걸이에 걸자마자 현관 쪽에서 경쾌한 발소리가 들려왔다.“엄마!”율이는 폴짝폴짝 뛰어와 최수빈의 품에 안겼다. 작은 얼굴에는 흥분한 기색이 가득했다.“엄마, 내가 새로 산 옷 좀 봐요.”그녀는 최수빈에게서 떨어져 한 바퀴 돌아 보였다. 오늘 막 산 옷이었다.“예쁘네.”최수빈은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손끝에 닿는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하루 종일 쌓였던 피로가 절반쯤 사라지는 듯했다.“혼자 가서 산 거야?”율이의 얼굴에서 미소가 살짝 흐려졌고 눈빛도 어딘가 흔들렸다.아이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그게... 시후랑 같이 가서 샀어요.”말을 마친 율이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더 숙이더니 발끝으로 바닥을 슬쩍 문질렀다. 사실 며칠 동안 계속 마음이 복잡했었다.최수빈은 주시후 이야기를 거의 꺼내지 않았다.지난번 공원에서 주시후를 우연히 만났을 때도 최수빈은 예의상 고개만 살짝 끄덕였을 뿐, 말투도 담담했었다.율이 역시 주시후가 박하린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또 최수빈과 주민혁, 그리고 그 박하린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그래서 혹시 최수빈이 주시후를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됐던 것이다.자기가 주시후와 같이 놀았다는 사실, 게다가 옷값까지 주시후가 대신 내줬다는 걸 알게 되면 최수빈이 화내지 않을까 두려웠다.최수빈은 그런 아이의 표정을 다 보고 있었다. 아이의 마음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법이었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망설임과 불안해 보이는 기색이 그녀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이내 최수빈은 율이의 손을 잡고 소파로 가서 함께 앉았다.“율이야, 혹시 무슨 걱정 있는 거야? 엄마한테 말해 볼래?”부드러운 목소리였으나 율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다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았다.엄마의 눈빛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짜증 내는 듯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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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4화

최수빈은 율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했다.“너에게는 친구를 사귈 자유가 있어. 시후라도 마찬가지야. 너희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랐잖아. 당연히 같이 놀아도 되는 사이야. 엄마는 네가 즐겁게 지내기만 하면 돼. 그 애랑 함께 있어서 즐겁다면 괜히 숨기거나 피할 필요 없어. 그냥 당당하게 지내면 돼.”율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얼굴에도 다시 환한 웃음이 번졌다.“정말요? 그럼 앞으로 시후랑 자주 놀아도 돼요?”“물론이지.”최수빈이 고개를 끄덕였다.“다만 다음에 같이 나갈 때는 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엄마한테 전화해.”“알겠어요!”율이는 환한 목소리로 외치며 최수빈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리고 그녀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엄마가 최고예요.”품 안의 아이를 꼭 안아주자 최수빈의 마음은 한없이 부드러워졌다.어른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감정이 아이에게까지 번져서는 안 된다.율이는 스스로 친구를 고를 권리가 있고, 걱정 없이 뛰어놀 수 있는 어린 시절을 누릴 권리도 있다.생각해 보면 자신은 과거의 감정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아이의 마음을 미처 살피지 못했는지도 몰랐다.그날 밤, 최수빈은 율이를 씻기고 난 뒤 아이가 침대 위에서 새 원피스를 입은 채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다음 날 아침, 율이는 책가방을 메고 최수빈이 준 돈을 꼭 쥔 채 신나게 학교로 향했다.집을 나서기 전에는 일부러 최수빈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엄마, 오늘은 꼭 시후한테 돈 돌려주고 고맙다고 말할 거예요!”최수빈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조심해서 가.”...제노 테크 프로젝트팀 사무실.최수빈은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임하은을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했다.“3번 모듈 인터페이스 파라미터는 지난주에 조정됐습니다. 코너 그룹 쪽 시스템과 연동할 때 호환성 문제를 특히 확인해야 해요. 테스트 기록은 공유 드라이브에 올려 두었고 파일 이름에 긴급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임하은은 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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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5화

사무실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방금 전까지 최수빈을 둘러싸고 인사를 나누던 사람들이 어느새 디저트 카트 앞으로 몰려가 하나씩 집어 들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하은 씨, 감사합니다! 이렇게까지 챙겨 주시다니요!”“이 디저트 예전부터 먹어 보고 싶었는데 늘 예약을 못 했거든요. 하은 씨 정말 대단하시네요!”누군가는 돌아서서 최수빈에게 말했다.“수빈 씨, 마음 놓고 가셔도 되겠어요. 하은 씨가 계시니까 프로젝트는 문제없이 굴러갈 겁니다.”최수빈은 그 자리에 서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고작 한정판 애프터눈 티 몇 세트에 이렇게 태도가 바뀌다니, 직장이라는 곳의 인심이란 게 참 솔직해서 오히려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그녀는 더 머물지 않고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로비 입구에 서 있는 주민혁이 눈에 들어왔다.짙은 회색 정장 차림의 그는 손에 종이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최수빈이 나오는 것을 보자 주민혁은 곧바로 다가와 그 봉투를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기력 보충에 좋은 한약이야.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달여 먹여. 수술도 막 끝났으니, 당분간은 푹 쉬는 게 좋아.”최수빈의 시선이 종이봉투 위에 잠시 머물렀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받는 대신,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하은 씨 것 사면서 한 팩 더 산 거예요? 그걸 나한테 베푸는 척 주는 건가요?”임하은 역시 유산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이 시간에 주민혁이 여기에 나타난 걸 보면 아마 임하은을 보러 온 게 분명했다.봉투를 내밀고 있던 주민혁의 손이 잠시 멈칫하더니 미묘하게 눈썹이 찌푸려졌다.“최수빈.”그는 설명하려 했다.이건 한의사에게 따로 처방을 받아 온 약이고 수술 후 기력이 떨어졌을 때 먹는 약이라고, 임하은과는 아무 상관없는 거라고.하지만 최수빈은 주민혁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조롱이 어린 눈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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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6화

최수빈은 육민성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육민성은 기술 공유 조항이 적힌 문서를 손끝으로 짚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코너 그룹이 핵심 알고리즘 최적화에 참여하겠다고 했어. 이 부분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해. 천공의 기반이 되는 기술을 넘겨줄 수는 없잖아.”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막 보충 설명을 하려던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율이’라는 이름이 깜빡이고 있었다.전화를 받자마자 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시후가 우리 맛있는 거 사 준대요. 빨리 와요. 지난번에 갔던 그 키즈 레스토랑이에요.”“엄마 지금 일하는 중인데 시후랑 착하게 먼저 먹고 있으면 안 될까?”애써 다정한 목소리를 했지만 최수빈의 마음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요 며칠 코너 그룹과의 협력 문제를 맞추느라 율이와 보내는 시간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안 돼요. 시후가 꼭 엄마 기다려야 한대요.”율이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리고... 시후가 엄마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요.”그 모습을 지켜보던 육민성이 웃으며 그녀의 팔을 가볍게 밀었다.“가 봐. 여기 남은 내용은 내가 다시 한번 정리해 볼게.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아이들이 더 급하잖아.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최수빈은 고맙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더니 서류를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났다.“고마워요, 선배. 내일 커피는 제가 살게요.”...그렇게 키즈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였다.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율이와 주시후가 눈에 들어왔다. 두 아이는 머리를 맞댄 채 무언가를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테이블 옆에는 낯익은 사람이 함께 앉아 있었다. 심종연이었다.연한 회색 캐주얼 셔츠를 입은 그는 메뉴판을 들고 두 아이에게 무엇을 먹고 싶은지 차분히 물어보는 중이었다.“엄마!”율이는 최수빈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달려왔다. 그러고는 다리에 와락 매달리며 말했다.“엄마 드디어 오셨네요! 시후가 엄마한테 깜짝 선물 준대요.”최수빈은 몸을 낮춰 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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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7화

최수빈은 심종연과 가끔씩 몇 마디를 주고받았고 대화 주제도 대부분 아이들에 관한 것이었다.창밖의 밤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그들은 레스토랑 입구를 스쳐 지나간 한 사람의 그림자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바로 진승우였다.그는 방금 고객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가려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최수빈 일행을 발견한 것이었다.진승우의 시선이 최수빈과 심종연 사이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이어 마주 앉아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두 아이까지 살펴보더니 잠시 멈칫했다.곧 그는 휴대폰을 꺼내 조용히 사진을 한 장 찍었다. 그러고는 주민혁에게 사진을 보내며 이러한 문자를 덧붙였다.[형, 누군지 한번 봐봐요. 수빈 씨가 심 대표님이랑 애 둘 데리고 밥 먹고 있는데, 완전 가족 같은 분위기예요.][전에는 육 대표님 그 사람이 남친이라 하지 않았어요? 여기저기 다 작업을 걸었네요. 그때 형이 빨리 이혼한 게 다행이었어요. 안 그랬으면 못 볼 꼴 봤을지도 모를 테니까.]메시지를 보낸 뒤 진승우는 휴대폰을 넣고 그대로 돌아섰다.그 시각, 주민혁은 막 길고 지루한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참이었다.진승우가 보낸 메시지와 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커피잔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뜨거운 커피가 손등 위로 쏟아졌지만 그는 전혀 느끼지 못한 듯했다.사진 속에는 최수빈이 주시후에게 반찬을 집어 주며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그녀의 옆에는 심종연이 앉아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두 아이가 앉아 해맑게 웃고 있었다.누가 봐도 한 가족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따뜻하고 평화로운, 그래서 더 눈에 거슬리는 풍경이었다.주민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휴대폰을 꽉 움켜쥐니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진승우의 말이 마치 바늘처럼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물론 진승우가 늘 남의 일을 부풀리고 이간질하기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주민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슴속에서 치솟는 감정을 억지로 눌러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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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8화

열댓 쌍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를 향했다. 회의실 공기는 숨이 막힐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회의실 테이블 위에는 시스템 오류 보고서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적힌 ‘손실 예상’이라는 붉은 글자가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이 문제는 단순한 시스템 오류가 아니었다.몇십억 원에 달하는 하드웨어 비용이 걸려 있을 뿐 아니라 정부 부처와의 시스템 연동 일정까지 늦어질 수 있었다. 시간 손실까지 따지면 피해 규모는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다.테이블 상석 옆에 앉아 있던 임하은은 최수빈이 들어오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시울을 붉힌 채 말했다.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수빈 씨, 왜 이제 왔어요? 인수인계할 때 3번 모듈 파라미터는 실시간 보정이 필요하다는 말, 한 번도 한 적 없잖아요. 지금 시스템이 완전히 멈춰서 코너 그룹 데이터베이스랑 연동도 안 되고 있어요.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말끝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겉보기에는 무척이나 억울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최수빈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미묘하게 도발하는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주변 엔지니어들은 서로 눈치를 살폈다.몇몇은 임하은을 동정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듯했다.하지만 최수빈은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대신 회의실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노트북을 열더니 인수인계 메일을 띄워 대형 스크린에 그대로 투사했다.“하은 씨, 제가 아무 말도 안 했다고요? 이 메일 보세요. 세 번째 항목에 인터페이스 파라미터는 매시간 실시간 보정이 필요하다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보정 공식이랑 테스트 사례까지 첨부했고요. 중요한 부분이라 붉은 글씨로 굵게 표시까지 해 놨습니다.”그녀는 마우스를 움직여 첨부 파일 속 테스트 기록을 띄웠다.“이건 인수인계 사흘 전 테스트 데이터예요. 보정할 때마다 파라미터 기록을 전부 저장해 두었습니다. 문서를 제대로 봤다면 모를 수가 없어요.”스크린 위에 뜬 데이터와 설명은 누구나 한눈에 알아볼 만큼 명확했다.임하은은 순식간에 안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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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9화

집에 돌아왔을 때, 최수빈은 가슴 한가운데에 거대한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다.그래서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벽을 짚고 한참을 서 있었다. 겨우 몸을 추스른 뒤에야 간신히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낮보다 아랫배의 묵직한 통증도 훨씬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신경을 잡아당기듯 밀려오는 통증에 이마에는 식은땀이 촘촘히 맺혔다. 신발을 벗을 힘조차 없었던 그녀는 지친 몸을 겨우 끌고 거실 소파까지 가서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휴대폰을 꺼내 육민성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화면이 겹쳐 보이고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눈꺼풀도 납덩이를 단 것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잠깐만... 잠깐만 쉬자...’최수빈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 다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밖이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졌는데 거실에는 불도 켜지지 않은 상태였다.의식은 점점 흐릿해졌다.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과 아랫배의 통증도 서서히 짙은 졸음에 묻혀 갔다.그렇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깊이 잠들어 버렸다.다시 눈을 떴을 때, 귀에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율이의 맑은 목소리가 울렸다.“엄마! 나 학교 다녀왔어요!”최수빈은 순간 눈을 번쩍 떴다.하지만 눈앞은 온통 어둡게 흔들렸고 머리는 납을 가득 채운 것처럼 무거웠다.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엄마! 왜 여기서 자고 있어요?”율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그리고 최수빈의 손을 잡는 순간 아이가 깜짝 놀라 외쳤다.“엄마! 손이 왜 이렇게 뜨거워요? 엄마 열나는 거예요?”율이는 급히 최수빈의 이마를 만졌다. 손끝에 전해지는 뜨거운 온도에 아이의 얼굴이 이내 굳어지며 눈가도 금세 붉어졌다.“엄마, 병원 가요! 내가 일으켜 줄게요!”작은 몸으로 온 힘을 다해 최수빈을 일으키려 했지만 아이의 힘으로는 성인의 몸을 지탱할 수 없었다.최수빈의 몸은 겨우 조금 들렸다가 곧 다시 소파 위로 힘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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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90화

몸이 흔들리자 최수빈은 잠시 정신을 차렸다. 희미하게 눈을 떠보니 시야에 심종연의 옆얼굴이 들어왔다.턱선이 단단히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초조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심 대표님...”코가 막힌 듯, 최수빈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고 희미했다.심종연은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깼어요? 조금만 참아요. 곧 병원 도착합니다.”최수빈은 바로 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저...”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심종연이 먼저 가로채며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런 상황에서까지 굳이 저랑 거리를 두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수빈 씨는 율이의 엄마이고 또 시후가 아끼는 이모잖아요. 제가 도와주는 건 당연한 겁니다.”최수빈은 고개를 살짝 돌려 엘리베이터 밖으로 보이는 밤 풍경을 바라봤다.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엘리베이터는 곧 1층에 도착했다. 심종연은 최수빈을 안은 채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했다.차에 도착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최수빈을 조수석에 앉히더니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의 위에 덮어 주었다.“춥지 않아요? 조금만 더 참아요. 곧 병원 도착할 겁니다.”최수빈은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의자에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차가 출발하자 심종연이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넸다.“물 조금 마셔요. 수분 보충해야 합니다.”최수빈은 컵을 받아 조심스럽게 한 모금씩 마셨다. 따뜻한 물이 목을 따라 내려가면서 건조했던 목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그녀는 살짝 눈을 떠 운전에 집중하고 있는 심종연의 옆모습을 바라봤다.어쩌면 자신을 이렇게까지 단단히 닫아 둘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호의를 무조건 밀어낼 필요도 없을 수 있었다.차는 곧 병원에 도착했고 심종연은 다시 최수빈을 안아 든 채 곧장 응급실로 향했다.의사의 진단 결과는 수술 후 회복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과로와 감정적 스트레스가 겹치며 급성 염증이 발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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