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121 - Chapter 1130

1160 Chapters

제1121화

그녀는 주얼리 매장 진열대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결국 옥팔찌 한 쌍을 골랐다. 옥빛은 은은하고 결은 매끄러웠으며 손끝에 닿자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과하지 않게 단정한 것이 다정한 이혜정의 성격과 꼭 맞을 것 같았다.집에 돌아와 보니 율이는 책상에 엎드려서는 분주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색종이와 풀, 반짝이 조각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엄마, 왔어요?”율이가 고개를 들었다. 볼에 풀이 살짝 묻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들뜬 기대감으로 반짝였다.“외할머니 생신 선물 만들고 있었어요! 손으로 만드는 앨범인데 우리가 같이 놀았던 사진들을 넣었어요.”최수빈은 다가가 앨범을 들여다봤다. 사진은 한 장 한 장 가지런히 붙어져 있었다. 이혜정이 율이를 데리고 공원에 갔던 날, 할머니와 손녀가 나란히 앉아 만두를 빚던 날...어느 사진이든 따뜻한 분위기가 가득했다.그녀는 딸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외할머니가 정말 좋아하시겠다.”원래 이혜정은 북적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 생일도 크게 치르지 않겠다고 못 박고 가족끼리 조용히 밥 한 끼 먹자고만 했다.최수빈은 집에서 멀지 않은 호텔에 작은 룸을 하나 예약해두고 엄마가 좋아하는 메뉴도 미리 주문해 뒀다.생일 당일, 최수빈은 율이와 선물을 챙겨 먼저 호텔에 도착했다. 율이는 손수 만든 앨범을 두 팔로 꼭 안고 혹시라도 구겨질까 자꾸만 조심스레 살짝 만져 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송미연이 바람처럼 들어왔다. 손에는 정성스럽게 포장된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이모, 생신 축하드려요! 이거 제가 일부러 장인한테 부탁해서 만든 저당 케이크예요.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아요!”이혜정은 웃으며 케이크를 받아 들고는 송미연의 손을 잡아 자리에 앉혔다.“너는 올 때마다 꼭 이렇게 신경을 쓰더라?”뒤이어 육민성도 도착했다. 손에는 포장이 고급스러운 선물 상자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는 좋은 다기가 한 세트 들어 있었다.“아주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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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2화

이혜정은 그림을 받아 들고는 보물 다루듯 조심스레 챙겼다.“예쁘다. 외할머니가 잘 간직할게.”룸 안 분위기는 점점 더 따뜻해졌다. 이혜정은 주시후와 율이를 옆에 앉혀두고 두 아이의 학교생활과 일상을 이것저것 물었다. 육민성과 심종연이 간간이 대화를 보탰고 송미연은 이혜정과 이야기를 이어가며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받쳐줬다. 어색할 틈은 없었다.최수빈은 이혜정의 얼굴에 번진 환한 웃음을 보자 마음이 따뜻해졌다. 밖에서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지금 이 순간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있아 풍기는 온기만큼은 모든 그늘을 밀어내기에 충분했다.그녀는 찻주전자를 들어 이혜정의 잔에 차를 따랐다.“엄마, 생신 축하드려요. 늘 건강하세요.”“그래, 그래.”이혜정은 찻잔을 받아 들며 눈웃음을 지었다.“너희만 다들 무사하면, 엄마는 그걸로 됐다.”율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기가 만든 손수 앨범을 꺼내 이혜정의 앞에 내밀었다.“할머니, 이건 제 선물이에요. 우리가 같이 찍은 사진도 엄청 많 제가 쓴 축하 글도 들어 있어요!”이혜정은 앨범을 펼쳐 한 장 한 장 꼼꼼히 들여다봤다. 그러다 눈가가 서서히 젖어 들었다.“우리 율이, 정말 기특하네... 할머니가 받아본 선물 중에 제일 좋다.”룸 안의 웃음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이혜정은 여전히 앨범을 넘기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런데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최진식이 화려하게 포장된 케이크를 들고 들어온 것이었다.그는 일부러 부드러운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혜정아,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생일 축하해.”그의 등장만으로 방 안의 포근하던 공기가 단숨에 얼어붙었다.이혜정의 미소도 그대로 굳었다. 안색이 순식간에 가라앉았고 앨범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으며 목소리는 차갑게 식었다.“여기는 당신이 올 자리가 아니야. 나가.”모두가 얼어붙었다. 송미연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나서 이혜정의 앞을 막듯 섰고 경계하는 눈빛으로 최진식을 바라봤다.육민성도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최수빈의 쪽으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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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3화

최진식이 문을 쾅 닫고 나간 소리가 룸 안에 아직도 울렸다. 공기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식기가 부딪히던 작은 소리도 멎었고 아이들마저 숨소리를 죽인 채 얼굴이 잿빛으로 굳은 이혜정을 겁먹은 눈으로 바라봤다.송미연이 입술을 달싹이며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순간, 룸 문이 또다시 열렸다. 주민혁이 검은 코트를 걸친 채 문가에 서 있는 것이었다.곧게 뻗은 자세, 온몸에 늦가을 밤의 찬 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고 손에는 소박한 포장의 선물 상자가 들려 있었다. 그의 시선은 내부를 훑다가 끝내 최수빈에게 멈췄다.“어머님, 생신 축하드립니다.”낮고 차분한 목소리, 감정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오늘이 생신이라... 인사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원래도 얼굴이 굳어 있던 이혜정은 주민혁을 보는 순간, 더 차갑게 식었다. 최진식이라는 재앙을 겨우 내보냈는데 이제 또 속을 뒤집는 사람이 들이닥친 셈이었다.그래서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채, 딱딱하게 말했다.“네가 환영받을 자리 아니니까, 나가.”완전히 얼어붙은 최수빈은 젓가락을 공중에서 멈춘 채 내리지 못했다.주민혁이 이렇게, 아무 말도 없이 찾아올 거라곤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그들 사이의 약속은 어디까지나 율이를 지키기 위한 협조뿐이었지, 사적인 일은 절대 섞지 말자고 했었기에 이혜정의 생일 축하 자리에 나타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그때, 옆에 있던 주시후가 주민혁을 보자마자 눈빛이 반짝였다. 칠흑 같은 밤에 갑자기 작은 별빛이 켜진 것처럼 말이다.본능적으로 한 발 내딛으며 아이는 하마터면 ‘아빠’라고 부를 뻔했다.하지만 말이 나오기 직전에 주시후는 급히 삼켰다.아빠는 이미 엄마와 헤어졌고 다른 사람과 약혼까지 한다고 했으며 자신을 더는 원하지 않는다고, 아이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작은 몸이 움찔 뒤로 물러났고 고개가 축 처졌다. 억울함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표정이었다.심종연은 찻잔을 든 손을 잠깐 멈칫하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입가에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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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4화

심종연은 할 말이 없었다.주민혁은 선물 상자를 테이블 한쪽에 내려놓고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다만 시선이 자꾸만 율이에게로 향했다.율이는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었다. 긴 속눈썹이 눈가를 덮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이를 본 주민혁은 가슴 한쪽이 미어졌다.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조차 막막했다.이혜정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율이야, 시후야. 우리 케이크 계속 먹자. 응?”“네!”율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몰래 주민혁을 한 번 훔쳐보고는 곧바로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주시후도 따라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꾸만 주민혁 쪽을 힐끗거렸다.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잔뜩 얽혀 있었다.곧 직원이 송미연이 가져온 케이크를 밀고 들어와 촛불을 켰고 방 안 불을 껐다.따뜻한 노란 불빛이 흔들리며 사람들의 얼굴을 부드럽게 비췄다. 이혜정이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동안, 룸 안에는 조용한 생일 축하 노래가 흘렀다.주민혁은 촛불 너머로 이혜정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최수빈이 율이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정리해 주는 모습도, 심종연이 주시후에게 케이크를 차분히 잘라 주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마음이 복잡했다.그는 마치 초대받지 않은 사람처럼, 이 화기애애한 자리에 불쑥 끼어든 이방인이었다. 이곳 분위기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촛불을 끄고 나서 방안 불이 다시 켜졌다.송미연이 웃으며 케이크를 나눠주다가 일부러 주민혁에게도 한 조각을 건넸다.“주 대표님, 드세요. 저당으로 따로 만든 거예요.”주민혁은 케이크를 받아 들고 짧게 말했다.“감사합니다.”하지만 거의 손도 대지 않았다.최수빈은 송미연이 일부러 그러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특별히 챙겨준다’는 행위 자체가 여기서 주민혁은 어디까지나 남이라는 뜻이었다.자신이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주민혁도 알고 있었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불편함만 커질 뿐이었다.그래서 잠시 더 버티다 결국 자리에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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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5화

주시후는 깊게 생각하지 않은 듯 바로 율이와 약속부터 잡았다.“그럼 나중에 같이 공부하자. 연락처도 서로 교환하고.”두 아이는 연락처를 주고받고서야 아쉬운 듯 헤어졌다.심종연이 주시후를 데리고 먼저 나갔고 육민성과 송미연도 각각 인사를 하고 떠났다. 나가기 전, 육민성은 일부러 한 번 더 당부했다.“조심해서 가.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바로 전화해.”그렇게 마지막에는 최수빈, 율이, 이혜정만 남았다.최수빈이 운전석에 앉고 율이는 뒷자리에 앉았다. 하루 종일 놀았던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는 좌석에 기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숨결이 고르고 잔잔했다.차는 밤길을 조용히 미끄러지듯 달렸다. 가로등 불빛은 차창에 스치며 빠르게 지나갔다.이혜정은 뒤돌아 율이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확실히 잠들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는 운전석의 최수빈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너... 주민혁이랑 대체 무슨 사이야? 오늘 갑자기 생일 자리에 나타난 건 또 뭐야. 뭘 노리고 온 건데?”핸들을 쥔 최수빈의 손에 힘이 들어가 손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예전에 그 사람이 너한테 한 짓들... 다 잊었니?”이혜정의 목소리에는 답답함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너희 외삼촌, 이제야 겨우 몸 추스른 거 알지? 네가 또 주민혁이랑 얽힌 걸 알면 얼마나 화를 내겠어.”“엄마.”최수빈이 말을 끊었다. 피곤함이 배어 나오는 목소리였다.“좀 복잡하니까 나중에 천천히 설명할게요.”“설명?”이혜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굳게 굳은 딸의 옆얼굴을 바라봤다.“너 엄마가 키웠어. 네 속마음을 내가 모를 것 같니? 너 어릴 때부터 그 사람 좋아했잖아.”그녀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정리되겠어. 특히... 그 사람이 어쩌면 사정이 있었고, 그동안 혼자 얼마나 버티며 살았는지 알게 되면 더더욱. 지금 네 마음이 어떤지 알아. 화가 난 게 아니라 결국은 불쌍해서, 마음이 아픈 거잖아. 그런데 다시는 그 사람 앞으로 못 가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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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6화

그녀가 원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감히 못 할 뿐이었다.과거에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다. 오해받고 외면당했던 날들이 마치 흉터처럼 마음에 새겨져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만 같았다.게다가 주민혁의 우울증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처럼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자신이 이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지, 상처와 무게를 함께 안고 가는 이 사랑이 끝까지 갈 수 있을지, 도무지 확신이 없었다.최수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한참이 흐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세상 모든 이야기가 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건 아니에요. 대부분은 아쉬움을 남기고 어떤 이야기는 결말조차 없죠.”이혜정은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하고 싶은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끝내 삼키고 말았다....차는 별장 단지로 들어와 천천히 건물 아래에 멈춰 섰다.최수빈이 시동을 끄자 차 안은 고요해졌다. 들리는 건 율이의 고른 숨소리뿐이었다.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이혜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엄마, 엄마가 날 위해 그런다는 거 알아요. 그런데 감정이란 게 확실히 말해라는 한마디로 정리되는 게 아니잖아요. 나도 시간이 필요해요. 그리고... 나랑 그 사람 사이에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나부터 확실히 생각해 봐야 해요.”이혜정은 붉어진 최수빈의 눈가를 보며 더는 깊게 말하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기억해.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엄마랑 삼촌은 늘 네 편이야. 혼자서 다 짊어지려고 하지 마.”최수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서 잠든 율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아이의 옷깃을 단단히 여며 준 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갔다.집에 도착해 율이를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최수빈은 지친 몸을 소파에 내려놓았다.엄마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주민혁의 모습 역시 머릿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주민혁의 연락처를 띄웠다.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맴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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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7화

주민혁의 차는 신혼집 별장 앞에 멈춰 섰다.그는 차 문을 열고 비틀거리듯 거실로 들어갔다. 검은 코트를 벗어 던지자마자 갑자기 거센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온몸이 푹 가라앉아 마치 천 근짜리 돌덩이를 짊어진 것처럼 무거웠고 손을 들어 올릴 힘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가슴 한가운데는 말로 다 못 할 정도로 답답했다. 무언가가 목을 틀어막은 듯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버거워 호흡할 때마다 통증이 따라붙었다.그는 넥타이를 대충 잡아당기고 소파에 몸을 내던졌다. 눈을 감고 잠깐이라도 쉬어 보려 했지만 머릿속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했다.생일 축하 자리에서 보았던 장면들, 최수빈의 거리감 느껴지는 눈빛, 이혜정의 차가운 태도, 그리고 율이가 조심스레 눈치를 보던 모습까지...그 모든 게 주마등처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중증 우울증은 밤새도록 그의 감정을 더 깊은 바닥으로 끌어내렸다.어둠 속에서 고독과 절망이 파도처럼 덮쳐 와 주민혁을 잠식했고 마음속이 끝없이 황량하다는 것만 또렷하게 느껴졌다. 그 어디에도 살아 있는 것이라곤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허공만 잡힐 뿐이었다.담배는 아까 차 안에서 이미 다 피워 버렸으니 말이다.그는 짜증 섞인 손길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고 서재에 진정제를 찾으러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현관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은 강지안과 장성훈 말고는 없었다.문을 열자 예상대로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손에는 보온통이 들려 있었고 표정에는 걱정이 짙게 묻어났다.“수빈 씨 어머니 생신 축하 자리에 갔다 왔다길래, 네 상태 좀 보러 왔어.”강지안은 말하자마자 거실로 들어오더니 주민혁의 창백한 얼굴과 눈 밑의 짙은 다크서클을 훑어보고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너 지금 상태가 왜 이래? 또 제대로 못 잔 거야?”장성훈은 보온통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따뜻한 죽이 담겨 있었다.“아줌마가 위에 부담 없게 죽 좀 끓여 주셨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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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8화

장성훈이 강지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진정하라는 듯 신호를 보낸 뒤, 주민혁을 바라봤다.“저희도 대표님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요. 하지만 도망친다고 해결되는 건 없습니다. 치료는 남을 위한 게 아니라 대표님 자신을 위한 거예요. 대표님이 먼저 괜찮아져야 대표님이 지키고 싶은 사람도 제대로 지킬 수 있어요.”그러나 주민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돌려 서재로 걸어가며 차갑게 한마디만 남길 뿐이었다.“피곤해. 쉬고 싶으니까... 다들 돌아가.”강지안이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장성훈이 그녀의 팔을 붙잡아 말렸다.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마주쳤고 서로의 눈빛이 똑같이 무기력한 것을 발견했다.장성훈은 탁자 위의 보온통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말했다.“죽은 여기 두고 갈 테니까 꼭 먹어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전화하고요.”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서재는 다시 숨 막히게 고요해졌다.주민혁은 책상 앞에 앉아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마음속은 황무지처럼 텅 비어 있었다.강지안과 장성훈이 자신을 위해 그러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너무 지쳐 있었다. 지쳐서 버텨 보려는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책상에 이마를 묻고 억지로 잠들어 보려 했지만 머리는 여전히 맑았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덩굴처럼 휘감겨 올라와 숨을 막았다....최근 며칠, 최수빈은 대부분의 일을 집으로 가져와 처리했다.천공 쪽 업무만 해도 빡빡한데 율이의 공부와 안전까지 챙기려니 그녀는 거의 쉴 틈이 없었다. 매일 몇 시간 못 자면서도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냈다.그래도 최대한 밖에 나가지 않았다. 꼭 필요한 업무 미팅만 처리하고 그 외에는 집에 머물렀다. 임씨 가문이 기회를 잡을까 봐 조금이라도 틈을 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날 오후, 최수빈은 거실에서 협업 제안서를 정리하고 있었고 율이는 서재에서 진용휘와 함께 물리를 공부하고 있었다.그때 초인종이 다급하게 울려 집 안의 고요를 단숨에 깨뜨렸다.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도어캠 화면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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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9화

“수빈 씨는 이미 민혁 씨랑 끝났어요. 헛된 기대는 그만하라고요!”“충고요? 하.”최수빈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임하은 씨, 제 처지가 어떤지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괜히 걱정해 주실 필요 없고요. 오히려 저한테 시간 낭비하지 말고, 민혁 씨 마음이나 붙잡을 방법을 생각해 보세요. 억지로 붙잡는 건 오래 못 가요.”“지금 나한테 한 소리예요?”임하은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목소리도 날카로워졌다.“최수빈 씨, 적당히 해요. 분명히 경고하는데 다시 민혁 씨한테 가까이 가기만 해 봐요. 그때는 나도 가만 안 있어요. 그럼 수빈 씨랑 수빈 씨 딸, 둘 다 편하게 못 살게 만들어 줄 겁니다!”그 말에 최수빈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그녀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 임하은을 똑바로 노려봤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이 서 있었다.“임하은 씨, 말조심해요. 나랑 내 딸 일에 그쪽이 끼어들 자격 없으니까.”최수빈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에 임하은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순간 겁이 났지만 자신이 곧 약혼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억지로 허세를 세웠다.“수빈 씨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요? 버림받은 주제에. 내가 주씨 가문에 들어가면, 수빈 씨를 정리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그래요?”최수빈은 냉소를 흘리더니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확 열었다.“저도 더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네요. 지금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주세요. 다음에 또 허락도 없이 들어오면... 그때는 바로 신고할 거예요.”임하은은 최수빈의 단호한 눈빛을 보고 오늘은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챘다. 그래서 결국 독한 말만 남겼다.“두고 봐요. 어디 끝까지 가 보자고요.”말을 마친 뒤에는 씩씩거리며 돌아섰다.임하은의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지자 최수빈은 그제야 숨을 내쉬며 문을 닫았다.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에 문에 등을 기대고 관자놀이를 꾹 눌러 문질렀다.임하은의 집요함, 주민혁과 얽힌 문제들이 한데 엉켜 촘촘한 그물처럼 그녀를 조여 왔다.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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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0화

주민혁 이야기가 나오자 임하은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아빠 말이 맞아요. 민혁 씨랑 결혼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그때는 내가 당당한 주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는 건데... 누가 감히 날 무시하겠어요.”원래라면 ‘주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타이틀이 꼭 필요하진 않았다.하지만 지금의 임씨 가문은 예전 같지 않았다. 흔들린 집안의 체면과 입지를 다시 단단히 다져야 했다.그때 초인종이 울렸다.도우미가 문을 열자 주민혁이 들어왔다.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기조차 부담스러운 냉기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왔다.임하은은 주민혁을 보자 눈빛이 환해졌다. 조금 전까지 분노하던 기색은 순식간에 사라졌다.그녀는 급히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민혁 씨, 웬일이에요? 나 보러 온 거예요? 보고 싶었어요?”주민혁은 그녀의 들뜬 말투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대신 곧장 거실 한가운데로 걸어가 차갑게 임하은을 내려다봤다.“너, 수빈이 만나러 갔지?”임하은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속으로는 뜨끔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했다.“네. 그냥 한 번 얘기해 주려고요. 이제 민혁 씨한테 더는 집착하지 말고 선 좀 지키라고. 우리 곧 약혼하잖아요. 계속 그러는 건 말이 안 되죠.”“얘기?”주민혁은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는데 그 자체로 압박이 됐다.“내가 보기에는... 협박하러 간 것 같던데?”임하은의 표정이 확 굳었다.“민혁 씨, 왜 그런 말을 해요? 난 그냥 충고 좀 해준 거예요...”“충고?”주민혁이 말을 끊었다.“임하은, 잘 들어. 최수빈이랑 율이한테서 떨어져. 다시 그 사람들 건드린 게 나한테 들키면... 그때는 각오해야 할 거야”완전히 얼어붙은 임하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해졌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민혁을 바라봤다.“민혁 씨, 어떻게 나한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우리 곧 약혼하고 나중에는 결혼까지 할 사이잖아요. 그런데 최수빈 그 여자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주민혁은 그녀를 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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