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의 모든 챕터: 챕터 1111 - 챕터 1120

1160 챕터

제1111화

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머릿속에 뒤엉킨 생각들을 억눌렀다. 그녀는 주민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지친 기색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뭐 알고 있으면 그냥 말해요. 빙빙 돌리거나 애매하게 떠보지 말고. 민혁 씨 속마음 맞히고 있을 기력도 없고 시간 낭비하고 싶지도 않아요.”그동안 최수빈은 한 번도 주민혁을 제대로 읽어낸 적이 없었다. 그는 어느 때는 차갑게 선을 긋다가도 어느 때는 불쑥 나타나 걱정하는 척했고, 지금도 말끝마다 의미심장한 기색을 보여 그녀의 의심만 더 키우고 있었다.주민혁은 피로와 경계가 섞인 그녀의 눈빛을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나를 믿어줄 수 있다면 나도 다 말해줄게.”이 한마디에 최수빈은 하고 싶던 말이 목에 걸려 그대로 막혀 버렸다. 미간을 바짝 찌푸린 그녀의 속에서는 분노와 무력감이 동시에 치밀어 올랐다. 말을 꺼낸 건 그였으면서 정작 ‘믿음’을 조건으로 내거는 게 얄미웠다.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진실을 확인하지 못하면 뒤따라오는 기척과 이유 없는 위험은 앞으로도 계속 그녀와 율이를 놓아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최수빈이 짧게 말했다.“좋아요. 그럼 말해요.”주민혁은 손목시계를 한 번 확인했다. 밤은 이미 깊었고 복도에 달린 센서등이 어둠 속에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그는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제안했다.“여기서 말하긴 좀 그래. 올라가서 이야기해도 될까? 설명해야 할 게 좀 있어서... 천천히 말해야 해.”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최수빈은 잠깐 망설였다. 그를 들인다는 건, 자신과 율이의 새집, 겨우 만들어낸 안정된 공간 안으로 그를 끌어들이는 일이었다.하지만 율이를 떠올리자, 그리고 아직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을 떠올리자 결국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신 최수빈은 마지막이라고 단단히 못을 박아 놓았다.“이번이 마지막이에요. 내가 민혁 씨를 믿는 건. 오늘 하는 민혁 씨의 말이 거짓이거나, 그냥 핑계 대고 들러붙으려는 거라면... 우린 앞으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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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2화

가슴속 불안이 점점 커져가 최수빈은 더 캐물었다.주민혁의 눈빛이 한층 어두워졌다.“임씨 가문에서 내가 자신들을 캐고 있다는 걸 눈치챘어. 그래서 나를 경계하기 시작한 거지. 아마 너랑 내가 아직도 얽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너한테 겁을 줘서... 내가 조사를 접게 만들려고. 너희 집 창문이 열려 있었던 일도, 주차장에서 누가 따라붙던 일도 임씨 가문 쪽 사람이 했을 가능성이 커.”최수빈의 심장박동이 순식간에 빨라졌다. 그녀는 주민혁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거짓말의 흔적이라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는 굳이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이유가 없었다.“그럼 왜 진작 말 안 했어요?”주민혁이 담담히 되받아쳤다.“너, 나한테 이혼 얘기 꺼낸 뒤로 나랑 제대로 대화하려고 하지 않았잖아.”거실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최수빈은 짙게 어둠이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보며 머릿속이 엉망으로 엉켜가는 걸 느꼈다. 주민혁의 말은 마치 자물쇠를 푸는 열쇠처럼, 그녀의 안에 쌓여 있던 의문을 하나씩 열어젖혔다.그리고 동시에 깨닫게 했다. 자신과 율이가 이미 위험한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왔다는 걸.최수빈은 숨을 고르고 주민혁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이건 결국 그녀와 율이의 문제였다.주민혁의 눈빛이 이내 어두워졌다.“예전에 박하린 건이랑, 이것저것... 난 너한테 설명한 적 있어.”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스승님의 일은 내 마음속에 계속 걸려 있었고. 박하린이랑 주시후를 방패로 세운 것도 너랑 율이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주시후는... 송지훈의 아들이 아니야. 박하린이 다른 사람과 낳은 아이인 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 애를 어릴 때부터 키웠으니 성품이 어떤지도 잘 알고 있겠지. 네가 믿든 말든, 그 애는 속이 깊고 계산이 빠른 애야. 제대로 키워보려고도 했지만 안 되더라.”“일부러 너를 다치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 다만... 예전에는 네가 우리 형을 좋아한다고 계속 믿었고, 그래서 너랑 율이가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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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3화

어떤 상황에서든, 주민혁은 늘 자기 기준에서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쪽으로 결정했다.그는 최수빈을 사랑했지만 함께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둘이 무사하기만 하면 됐지, 감정보다 중요한 건 늘 두 사람의 안전이었다.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평온하게 살아가는 것이었다.주민혁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최수빈이 신중하게 판단하길 바라는 듯했다....다음 날 아침.최수빈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재생되는 영상마냥, 전날 밤 주민혁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알람 소리가 울리고서야 최수빈은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켰다. 거실로 나오자마자 초인종이 울렸다.문을 열어보니 주민혁이 서 있었다. 손에는 아침 식사 봉투 두 개가 들려 있었고 봉투에는 그녀가 고등학교 때 가장 좋아하던 만둣집 로고가 선명했다.“아직 따뜻해.”그가 봉투를 내밀었다.“먹고 나면 내가 제노 테크까지 데려다줄게. 보여줄 게 있어.”최수빈은 그가 든 봉투를 멍하니 몇 초 바라보다가 결국 받아 들었다.그러고는 부엌으로 들어가 우유를 데우며 냄비 위로 몽글몽글 올라오는 거품을 바라봤다. 마음이 복잡했다.주민혁은 늘 그녀가 약해지는 지점을 정확히 건드렸다가도, 그녀가 가까워지려 하면 한발 먼저 밀어냈다.두 사람은 말없이 아침밥을 먹은 뒤, 차를 타고 제노 테크로 향했다.사무실은 텅 비어 있었다. 주민혁이 미리 연락해 둔 듯, 자료를 전달하러 온 려운만 책상 옆에 서서 두꺼운 서류 뭉치를 품에 안고 있었다.최수빈을 보자 려운은 예의 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류를 내려놓았다.“대표님, 요청하신 자료는 전부 여기 있습니다.”주민혁은 서류를 받아 들고 말했다.“수고했어. 이제 들어가.”려운은 짧게 대답하고 나가면서 일부러 최수빈을 한 번 힐끗 바라보고 문을 닫았다.그렇게 사무실에는 둘만 남았다.주민혁은 책상 위에 자료를 펼쳐 한 장씩 최수빈 앞으로 밀어놓았다. 맨 위에는 오래되어 누렇게 바랜 사진 한 장이 있었다.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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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4화

“오늘 이렇게 부른 건 네가 꼭 알아야 할 게 있어서야. 너는 한 번도 혼자가 아니었어. 누군가가 계속 뒤에서 널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까... 더 조심해야 해.”최수빈은 책상 위에 쌓인 두툼한 자료를 내려다봤다. 손끝으로 빽빽한 글자들을 훑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그제야 알 것 같았다. 왜 육민성이 늘 ‘사람을 쉽게 믿지 말라’고 했는지, 그는 이미 이런 일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최수빈이 고개를 들었다.“이게 진짜라는 걸... 내가 어떻게 믿어요? 민혁 씨가 꾸며낸 게 아니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냐고요.”그녀는 겁이 났다. 다시 속는 게 두려웠고 눈앞의 ‘진실’이 사실은 또 다른 함정일까 봐 더 두려웠다.주민혁은 경계하는 그녀의 눈빛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서랍을 열어 USB 하나를 꺼내 컴퓨터에 꽂았다.“여기에 CCTV 영상이랑, 그때 관련자들 인터뷰 기록이 들어 있어. 네가 직접 봐. 그래도 못 믿겠으면 육 대표님이나 송미연 씨한테 확인해 봐. 그 사람들이 검증해줘도 돼.”모니터에서는 영상이 차례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학교 정문 근처, 회사 건물 아래에서 누군가가 오래 서성이던 장면들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최수빈은 화면을 바라보며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씩 풀리는 걸 느꼈다. 조작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디테일이 너무 생생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사무실은 다시 조용해졌다.최수빈은 자료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주민혁을 바라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어쩌면 과거의 모든 일이, 자신이 알고 있던 것처럼 단순하지만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주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밖으로는 차들이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지금 네가 나를 쉽게 못 믿는 거 알아. 괜찮아. 기다릴게. 하지만 약속해. 앞으로 어디를 가든 안전부터 챙기겠다고. 밤길 혼자 다니지 말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최수빈은 대답하는 대신 손에 든 자료만 더 세게 움켜쥐었다.주민혁은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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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5화

최수빈은 책상 위에 펼쳐진 자료를 바라봤다. 손끝이 종이 위로 내려앉을 듯 말 듯, 끝내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맴돌았다.모르는 게 아니었다.그가 하는 말이 뭘 뜻하는지, 최수빈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그녀는 주민혁을 바라보다가, 또 입을 열려다 말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서 말이다.주민혁의 말뜻은 결국 하나였다. 서로 사랑했지만 끝내 엇갈려 버린 두 사람이라는 것.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주위의 공기마저 어딘가 어색하고 기묘해졌다.그는 지금도 계속 뭔가를 해 주고 있는데 최수빈은 어떤 말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마치 답이 없는 문제처럼 느껴졌다.그녀는 다시 주민혁을 바라봤다. 입술이 살짝 움직였지만 결국 하고픈 말은 목구멍으로 삼켜졌다.‘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켜준 것, 날 노리던 사람들을 파헤친 것, 그 모든 걸...’하지만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오히려 남 같아지는 느낌이 들었다.‘그만하라고 해야 하나, 필요 없다고 선을 그어야 하나.’그러나 주민혁은 이미 너무 많은 걸 해 버렸다. 자료는 여기 있고 영상도 선명했다. 때문에 최수빈은 이제 와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마주 앉아 있었지만 둘 다 말이 없었다. 꺼내지 못한 말들이 목에 걸린 채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었다.최수빈은 알았다. 지금 주민혁이 하고 있는 일들에는 분명 늦은 보상 같은 의미가 섞여 있다는 걸.하지만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건, 되돌릴 수 없는 오해와 상처였다. 잘못했다는 한마디로 지워질 것들이 아니었다.최수빈의 망설이는 기색을 읽은 듯, 주민혁은 조금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시선은 굳게 긴장한 그녀의 옆얼굴에 머물렀고 목소리는 한없이 조심스러웠다.“내가 하는 일 때문에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당장 대답을 내놓을 필요도 없고. 난 그냥 진실을 알려주고 싶었어. 네가 더 조심했으면 했고, 한 번만이라도 나를 믿어줬으면 한 거야.”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자 답답하던 가슴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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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6화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야. 너희가 무사하기만 하면 돼. 그 외의 건... 욕심내지 않을게.”자신의 목숨이든, 병세든, 그런 건 그다음 문제였다.최수빈도 지금 주민혁이 하는 말은 아마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었다. 오해받고, 외면당하고, 차갑게 밀려났던 시간은 지켜주겠다는 한마디로 말끔히 지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최수빈은 더 말을 잇는 대신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주민혁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위험들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서류들을 바라보며 최수빈은 확신했다. 이 순간부터, 주민혁과의 관계는 다시 복잡해지고 말 거라고....제노 테크를 나선 뒤, 최수빈은 차 안에서 조금 전의 대화를 계속 되새겼다. 오해와 보호, 그리고 과거 일들에 대한 고백들...모든 것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지금 당장에는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천공으로 돌아와 사무실에 들어섰지만 문서에는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한참을 맴돌아도 글자 하나 찍히지 않았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살며시 열리며 육민성이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들어오더니 컵을 그녀의 손 가까이에 내려놓았다.“돌아오자마자 멍하니 있던데, 무슨 일 있었어? 답답하면 나한테 얘기해도 돼.”최수빈은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담긴 그의 눈빛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이내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피로가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아니요, 별일 아니에요. 그냥... 아직 정리가 안 된 게 좀 있어서요. 생각 정리되면 그때 말할게요.”육민성은 캐묻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다 받아주겠다는 듯 말했다.“그래. 급할 거 없어. 하지만 기억해. 무슨 일이든 혼자 버티려고 하지 마. 필요하면 언제든 전화해.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꼭 받을 테니까.”최수빈은 그를 바라보다가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러고는 인생에서 가장 버거웠던 순간들을 떠올렸다.이혼 후 율이를 혼자 키우며 버텼던 시간, 회사가 위기에 몰려 파산 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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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7화

“네, 집에서 기다릴게요.”전화를 끊고 막 빌딩을 나서자마자 송미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저녁 약속 없으니까 너희 집 가서 저녁 좀 얻어먹을게. 율이도 보고!]최수빈은 메시지를 보며 잠깐 망설였다.송미연은 요즘 그녀와 주민혁 사이에 얽힌 일에 대해 아직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둘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괜히 쓸데없는 오해만 더 커질 게 뻔했다.잠시 생각한 끝에 최수빈은 주민혁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친구가 저녁 먹으러 잠깐 들른대요. 30분만 늦게 와요.]곧바로 답장이 왔다.[알겠어.]군더더기 하나 없는, 짧은 한마디였다.집에 돌아온 최수빈은 율이의 숙제를 같이 마무리하고 간단히 몇 가지 반찬을 했다.막 음식을 식탁에 올려놓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송미연이 과일 한 봉지를 들고 들어오더니 신발을 제대로 갈아 신기도 전에 큰 소리로 말했다.“와, 나 냄새 맡고 바로 달려왔어! 우리 셰프님, 실력이 또 늘었네?”율이는 달려가 송미연의 다리에 안기며 귀여운 목소리로 불렀다.“미연 이모!”거실은 순식간에 북적였다.세 사람은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그러다 송미연은 최수빈이 자꾸 멍을 때리고 반찬을 집는 손도 자꾸 딴 데 가 있는 걸 보다 못해 결국 입을 열었다.“수빈아, 너 요즘 대체 왜 그래? 계속 딴생각만 하잖아. 무슨 일 숨기고 있는 거야? 우리 사이에 비밀도 있어?”최수빈은 젓가락질을 멈춘 채 송미연의 걱정 어린 눈빛을 바라봤다. 죄책감이 스쳐 지나가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조용히 말했다.“별일은 아니야. 그냥... 요즘 계속 율이의 안전이 신경 쓰여서 마음이 좀 불안해.”“안전?”송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웃으며 최수빈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야, 걱정하지 마. 여기 보안이 얼마나 빡센데. 24시간 경비 순찰 돌고 장성훈이 사람도 따로 붙여서 은근히 봐주고 있잖아. 게다가 너한텐 나도 있지. 너 같은 신분의 사람이면 주변에서 보호해주는 사람도 많을 텐데 무슨 일이 생기겠어? 괜히 혼자 겁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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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8화

주민혁은 성적표를 받아 들고 점수를 훑어보더니 자신도 모르게 옅게 웃었다.“율이 성적 좋네. 시내에 있는 사립학교 한 군데는 내가 이미 알아봤어. 보안도 괜찮고 교육 수준도 좋아. 여기서도 가깝고. 다음 주에 율이 데리고 한번 가보면 돼.”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옆얼굴을 드러낸 주민혁을 바라보자 마음이 묘하게 뒤섞였다.주민혁은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히 말을 이어갔다.“사실 율이는 머리가 좋아. 지금처럼 애매한 상황이면 차라리 잠시 휴학시키고 개인 교사를 집으로 부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 율이 수준이면 중학교 과정은 이미 다 끝냈다고 봐도 돼.”순간 말문이 막힌 최수빈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주민혁을 올려다보았다.“그걸... 어떻게 알아요?”주민혁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어릴 때부터 학습 속도가 빨랐어. 늘 시후보다 잘했고. 그런데 성격이 워낙 순해서... 항상 시후한테 맞춰줬지. 시험 볼 때도 일부러 몇 점은 남겨서 시후가 1등 하게 해줬어.”그 한마디가, 오래 막아 두었던 감정의 댐을 단번에 열어젖혔다.눈가가 순식간에 따끔해지고 시큰거렸다. 그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억울함과 딸이 말없이 뒤로 물러서던 순간들까지 주민혁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최수빈은 늘 생각했다. 주민혁의 눈에는 일과, 그가 말하는 ‘진실’밖에 없다고. 자신과 율이의 사소한 일상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을 거라고.그런데 이제서야 알 것 같았다. 그는 다 보고 있었으나 단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주민혁이 정말 냉정한 사람이었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그저 최수빈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착각한 채 그 핑계로 밀어냈고, 그러면서도 그림자처럼 뒤에서 지켜온 거였다.최수빈은 문득 웃음이 났다.‘운명이라는 게 정말 사람을 잘도 갖고 노네. 분명히 서로를 아끼는데도 끝없는 오해 때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을 비켜 가게 만들다니...’주민혁의 눈빛은 짙고 깊었다. 검은 눈동자 속에는 누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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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19화

최수빈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슴속에서 출렁이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자 그녀는 시선을 들어 주민혁을 바라보았다.“솔직히... 지금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는 건 좀 맞지 않아요.”오해도 겪었고 위험도 지나왔고 서로 속내까지 꺼내놓은 지금, 그녀의 마음은 이미 예전과 달라져 있었다.지금 가장 중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안전, 그리고 임씨 가문의 음모였다.주민혁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눈 밑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웠다.“다른 방법이 없어. 너랑 율이를 확실히 지켜야 해. 휴학이 지금으로서는 제일 안전한 선택이야. 애한테 미안하긴 하지만.”최수빈은 부은 듯 뻐근한 미간을 손으로 꾹 눌렀다. 손끝에는 은근한 통증이 전해졌다. 며칠째 신경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흔적이었다.그녀는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지금 무엇이 더 중요한지, 무엇을 먼저 챙겨야 하는지 정도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최수빈은 주민혁을 마주 보며 또박또박 말했다.“협조할게요. 율이의 휴학이든,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든... 그 부분은 민혁 씨가 말한 대로 따를게요.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협조일 뿐이에요. 우리 사이에 다른 일은 없어요.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거고 난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그 말은 보이지 않는 선처럼 두 사람 사이에 또렷하게 그어졌다.이 경계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걸 최수빈은 알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율이를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어른들의 감정과 앙금에 더는 끌어들이면 안 됐다.주민혁의 목젖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눈빛이 잠시 깊어지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담담해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알겠어. 너랑 율이만 안전하면, 다른 건 다 중요하지 않아. 그럼 당분간 율이는 집에 있게 하자. 최고 수준의 개인 과외 선생님을 집으로 부를 거고 일상이랑 식사, 안전에 대해서는 믿을 만한 사람을 붙여서 맡길게. 공부는 안 밀리게 하고 안전은 확실히 챙기자.”“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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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0화

“율아, 엄마가 너랑 상의할 게 하나 있어.”최수빈은 딸을 소파에 앉히고 손을 잡은 채 목소리를 유난히 부드럽게 낮췄다.율이는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두고 진지하게 엄마를 바라봤다.“무슨 얘기 하려고요?”“요즘 밖이 좀 위험하대. 그래서 엄마가... 너 잠깐 학교 안 보내고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서 수업받으면 어떨까 싶어서. 너는 어떻게 생각해?”최수빈은 신중히 단어를 고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가 불안해할까 봐, 최대한 걱정하는 티가 나지 않게 하면서 말이다.그런데 율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살짝 갸웃하더니 되물었다.“그게 엄마한테 많이 중요한 일이에요? 엄마가 그러길 바란다면 그렇게 할게요.”최수빈은 가슴이 따뜻해지면서도, 동시에 미어졌다. 그녀는 율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엄마는 그냥 네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마지막 결정은 네 마음을 보고 정할 거고. 이건 네 공부랑 일상에 관한 일이잖아. 엄마가 다 정해 버리면 안 돼.”율이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고 몇 초간 생각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눈빛이 또래답지 않게 차분하고 단호해 보였다.“엄마는 어른이니까, 나보다 더 잘 생각할 수 있잖아요. 엄마가 집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나도 좋아요.”딸의 맑은 눈을 바라보자 최수빈은 마음이 복잡해졌다.율이는 원래도 영리했다. 어린 나이인데도 사람 마음을 기가 막히게 읽었고 엄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채면 먼저 그쪽으로 맞춰줬다.그렇게 너무 일찍 어른스러워진 모습이 최수빈을 더 아프게 했다.“바보야. 엄마 때문에 너까지 참을 필요 없어.”최수빈은 율이를 끌어안고는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집에 있기 싫고 학교 가서 친구들이랑 지내고 싶다면 엄마가 어떻게든 널 지킬 방법을 찾을게. 억지로 맞추지 마.”율이는 엄마 품에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최수빈의 등을 토닥여주었는데 꼭 어른이 달래주는 듯한 손길이었다.“엄마, 나 억지로 맞추는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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