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341 - Chapter 1350

1406 Chapters

제1341화

최수빈이 하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왜 그래요?”주민혁은 대답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피부가 맞닿은 자리에서 미세한 전류라도 흐르는 듯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힘으로 그녀의 손목을 감쌌다. 아프진 않았지만, 쉽게 놓아주지 않겠다는 집요한 기색만큼은 선명했다.그의 시선은 묵직하게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길게 내려온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속에 있는 감정은 좀처럼 읽혀지지 않았다.차 안 공기가 느리게 가라앉으며 숨소리마저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해졌다.저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최수빈은 손을 빼지 않은 채 가볍게 눈썹만 치켜올렸다.“대체 뭐 하자는 거예요?”그제야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게 잠긴 목소리에서는 밤공기 같은 부드러운 기색이 느껴졌다.“별거 아니야.”그의 엄지가 그녀의 손목 안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그냥... 이렇게 너 바라보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아주 작은 목소리였다.최수빈은 시선을 돌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번졌다.“나한테 잘하겠다 했잖아요.”“응.”주민혁이 짧게 대답하며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하지만 손바닥의 온기는 피부에 그대로 새겨진 듯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얼마 후 그는 먼저 차 문을 열고 내린 뒤, 최수빈의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며 손을 내밀었다.“내려와.”그러나 최수빈은 주민혁의 손을 잡지 않고 직접 차 문을 밀고 나와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곧장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주민혁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이내 트렁크에서 짐을 꺼내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신혼집은 정말 주민혁의 말 그대로였다. 예전 그대로,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커튼은 그녀가 직접 골랐던 베이지빛 린넨 커튼 그대로였고 자잘한 자스민 자수가 바람에 따라 은은하게 흔들렸다.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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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2화

다음 날 아침.동이 틀 무렵, 최수빈은 눈을 떴다.간단히 씻고 게스트룸에서 나오자 주방 쪽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겨왔다.향을 따라 걸어가 보니 주민혁이 앞치마를 두른 채 주방에 서서 느긋하게 달걀 프라이를 굽고 있었다.편한 홈웨어 차림에 소매를 걷어 올린 모습, 훤히 드러난 팔뚝은 시선을 끌 만큼 매끈했다.“일어났어?”발소리를 들은 주민혁이 뒤돌아보며 웃었다.“씻었으면 와서 밥 먹어. 다 네가 좋아하는 거로 했어.”식탁 위에는 노릇하게 구워진 달걀부침과 따뜻한 우유, 그리고 최수빈이 좋아하던 만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최수빈은 자리에 앉아 젓가락으로 만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익숙한 맛이 혀끝에 퍼지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어때?”주민혁이 은근 기대를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괜찮네요.”최수빈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지만 어느새 하나를 더 집고 있었다.주민혁은 그런 그녀를 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조용히 음식을 먹는 모습조차 사랑스럽다는 듯 눈빛이 한층 부드러워졌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주민혁은 최수빈을 천공연구원까지 데려다줬다.차가 회사 건물 앞에 멈추자 최수빈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 했다. 그런데 그때 주민혁이 입을 열었다.“저녁에 데리러 올게.”최수빈이 잠시 멈칫하며 돌아봤다.“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말 들어. 저녁에 약속이 있는데 어차피 이 근처를 지나가거든.”최수빈은 잠시 고집스러운 주민혁의 눈빛을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차 문을 열고 천공연구원 건물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달라졌다.가볍게 숨을 고른 뒤 등을 곧게 피더니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자신의 사무실로 향했다.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비서가 서류 뭉치를 들고 따라 들어왔다.“요청하신 해외 협력사 자료입니다. 그리고 오늘 오후 유럽 쪽 화상회의 일정도 정리해뒀습니다.”최수빈은 서류를 받아 들고 고개를 끄덕였다“책상 위에 두세요. 조금 이따 볼게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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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3화

“그러면 다행이고.”육민성은 최수빈을 바라보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네 능력은 믿어. 하지만 이번 건은 워낙 중요한 일이니까 절대 방심하면 안 돼.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최수빈은 괜히 마음 한켠이 따뜻해져 작게 웃었다.“걱정 마요. 나도 다 생각하고 있으니까.”육민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아래쪽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행렬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뒤돌아봤다.“그리고 주 대표님이랑 지금처럼 지내는 거, 보기 좋다.”“뭐가 좋다는 거예요. 그냥 평범한... 이웃이에요.”육민성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이웃.”그는 더 이상 놀리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일이나 잘해. 괜히 개인감정 때문에 판단 흐려지지 말고.”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육민성이 나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해외 협력사 자료를 집어 들었다.천공연구원은 자신과 육민성을 비롯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함께 키워온 결과물이었다.때문에 절대 누군가가 이 회사를 망치게 둘 생각은 없었다....해가 저물 무렵.천공연구원 건물 앞 도로에 하나둘 가로등 불빛이 켜졌다.최수빈은 마지막 해외 협력사 대표들까지 배웅한 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익숙한 검은 세단 한 대를 발견했다.운전기사가 공손하게 문을 열며 말했다.“수빈 씨, 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차 안에서는 은은한 술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거기에 주민혁 특유의 시더우드 향이 섞여 묘하게 사람 마음을 흔들었다. 과하지 않은데도 자꾸 신경 쓰이는 향이었다.최수빈이 자리에 앉자 주민혁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술기운 때문인지 평소보다 눈빛이 느슨하게 풀려 있었다.날카롭던 분위기도 한층 부드러워졌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게 잠겨 있었다.“끝났어?”“네.”최수빈은 짧게 답하며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경을 바라봤다.“얼마나 마셨어요?”“접대 자리였어. 많이는 안 마셨고.”주민혁은 그녀 옆얼굴을 가만히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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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4화

그건 최상급 화전옥 팔찌로 표면에는 덩굴 연꽃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며칠 전 경매장에서 최수빈이 유난히 눈길을 오래 두었던 바로 그 팔찌였다.“마음에 들어?”주민혁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기대가 섞여 있었다.“그날 네가 한참 보고 있길래.”최수빈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손끝이 차가운 옥 팔찌에 닿았는데 이상하게도 따스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마음속까지 번졌다.고개를 들어 주민혁을 바라보니 남자의 눈에는 웃음기와 함께, 아주 희미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돈 낭비예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최수빈은 결국 팔찌를 손목에 끼웠다.크기는 미리 맞춘 듯 딱 맞았다.주민혁은 옥 팔찌가 그녀의 가늘고 흰 손목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더욱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너한테 쓰는 건 낭비가 아니야.”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거실로 들어갔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재잘재잘 아이들의 대화 소리가 두 사람을 감쌌다.시후와 율이는 카펫 위에 엎드려 블록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두 사람이 돌아온 걸 보자마자 아이들은 손에 들고 있던 장난감을 내려놓고 달려왔다.“아빠! 엄마!”율이는 작은 포탄처럼 최수빈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자랑하듯 고개를 들었다.“저 오늘 시후랑 성 만들었어요!”주시후도 뒤따라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손에는 아직 블록 하나를 꼭 쥐고 있었다.“엄마, 보세요.”“정말 잘 만들었네.”최수빈은 한없이 다정한 눈빛을 한 채, 허리를 숙여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는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그는 율이를 안아 올리고, 다른 손으로는 주시후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뜨렸다.거실 안에는 따뜻하고 포근한 기운이 가득했다.그때, 다급한 휴대폰 벨소리가 평온한 분위기를 깨뜨리는 탓에 주민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율이를 내려놓고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자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말이 빠른 것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최수빈은 주민혁의 얼굴빛이 조금씩 굳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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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5화

그날, 육민성은 주민혁을 따로 불러냈다.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한 육민성은 창가 쪽 조용한 별실을 잡아두었다.은은한 단향과 함께 다호 안에서는 보이차가 보글보글 끓고 있어 짙은 차 향이 방 안 가득 퍼져 있었다.문이 열리자 차가우면서도 맑은 기운을 풍기는 주민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정장 재킷을 벗고 잘 다려진 흰 셔츠만 입은 채였다. 소매는 팔뚝까지 걷어 올려져 있어 손목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앉아요.”육민성은 턱짓으로 맞은편 의자를 가리키더니 티스푼으로 찻잔 속 찻잎을 느긋하게 건드리며 말했다.“방금 동남아 쪽에서 소식이 왔어요. 심종연 뒤에 있는 해외 세력이 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더군요.”자리에 앉아 따뜻한 찻잔에 손끝을 올린 순간, 주민혁의 눈매는 차갑게 가라앉았다.“뭐 알아낸 거 있어요? 천공을 노린 거예요, 아니면 주씨 가문을 노린 거예요?”“둘 다요.”육민성은 암호화된 파일 하나를 그의 앞으로 밀어주고, 이어 차를 한 잔 따라주었다.붉고 맑은 차물이 잔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며 뜨거운 김이 천천히 피어올랐다.“그 사람들은 천공의 해외 협력사와 접촉하려 하고 있어요. 특히 유럽 쪽 공급업체 몇 곳을 노리는 중이죠. 공급망 쪽에서 손을 써서 핵심 기술을 빼내려는 것 같아요. 그리고 국정원 쪽에서 몇 가지 메시지를 가로챘는데, 누군가 주씨 가문 저택을 은밀히 조사하고 있어요. 할아버님을 통해 빈틈을 찾으려는 모양입니다.”주민혁은 파일을 집어 들고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빽빽한 글자들을 읽어갈수록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허점을 찌를 줄은 아는군요.”“그 사람들은 약점을 노리고 있어요. 어르신이 산속에서 지내는 탓에 바깥일을 잘 모른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그런 사람일수록 빈틈을 만들기 쉽다고 판단한 거예요.”육민성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손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곧 맑고 낮은 소리가 조용한 별실 안에 퍼졌다.“주 대표님 쪽은 어때요? 국정원 사람들이랑 연결은 잘 됐어요? 저택 주변에 경계는 깔아뒀고요?”“이미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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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6화

육민성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했다.“심종연이 어떤 사람인지, 우리 다 잘 알잖아요. 해외 세력이 국내에 심어둔 체스판 위의 말 같은 사람이었고 손에 피를 얼마나 묻혔는지, 국가 이익에 해가 되는 짓을 얼마나 했는지는 굳이 내가 말 안 해도 알 거예요.”그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더니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민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주시후는 시한폭탄입니다. 지금이야 아직 어리니까 원한이나 이해관계를 모르겠죠. 하지만 나중에 커서 진실을 알게 되면요? 자기 친엄마를 무너뜨린 사람이 주 대표님이라는 걸 알게 되고 자기는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대표님과 수빈이, 율이가 화목한 한 가족처럼 지내는 걸 보게 되면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세 사람이 자기 가정을 망가뜨린 원수라고 여기지 않을까요? 그 원망 때문에 해외 세력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은 없을까요?”육민성의 질문은 정곡을 찔렀다.“우리는 제삼자예요. 그 아이한테 아무 감정도 없으니 오히려 더 냉정하게 볼 수 있어요. 그 아이를 곁에 두는 건, 집 안에 지뢰 하나를 묻어두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 지뢰가 언제, 어떻게 터질지는 아무도 몰라요.”주민혁은 찻잔을 내려놓더니 손끝으로 잔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었다. 잔에 남은 온기가 손끝을 타고 번졌다.그렇게 그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잠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알아요.”담담한 세글자, 하지만 그 말에 육민성은 오히려 미간을 찌푸렸다.그가 몸을 더 앞으로 기울였다.“안다고요? 알면서도 집에 두겠다고요? 주 대표님, 대표님은 감정에 휘둘리는 분이 아니었잖아요. 이 안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뻔히 알면서 왜 굳이 그런 모험을 해요?”“수빈이는 마음이 약해요.”주민혁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그 아이, 수빈이가 직접 5, 6년을 키운 아이예요. 말도 못 하던 아기 때부터 걸음마를 떼는 아이가 될 때까지, 수빈이는 그 아이한테 마음을 많이 쏟았어요. 정이 안 들 수가 없죠. 심씨 가문은 몰락했고 심종연은 감옥에 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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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7화

“그런데 나중에 애들이 더 크고, 정까지 깊어지면 어떡할 거예요? 그때 정말 무슨 일이라도 터지면, 율이는 어떻게 하라고요? 그 아이는 쉽게 끊어낼 성격이 아닙니다.”이 말은 주민혁의 가장 약한 부분을 정확히 찔렀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머릿속에는 율이와 주시후가 마당에서 나비를 쫓아다니던 모습이 떠오르더니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도 귓가에 맴돌았다.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처럼 선명하고 해맑은 웃음이었다.“...알아요.”주민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율이는 어릴 때부터 시후를 좋아했어요. 예전엔 내가 일부러 둘이 최대한 안 엮이게 했죠. 그땐 늘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박하린의 아이가 주씨 가문 아이랑 너무 가까워져선 안 된다고. 괜히 약점 잡힐 수도 있고... 율이가 다칠까 봐 겁났어요.”그는 눈을 떴다.“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너무 극단적이었던 것 같아요. 율이는 자기 생각이 분명한 아이예요. 사람 보는 기준도 자기 나름대로 있고. 시후랑 같이 있는 게 싫었다면 애초에 저렇게 가까워지지도 않았을 거예요. 억지로 마음에도 없는 사람 옆에 붙어 있을 애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시후라는 아이에 대해서도 아직 아무도 몰라요. 정말 잘못된 길로 가면, 그땐 내가 직접 내보낼 겁니다.”육민성은 그런 주민혁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찻잔을 들어 주민혁의 찻잔과 가볍게 부딪쳤다.맑은소리가 조용한 별실 안에 울렸다.“알고 있으면 됐어요. 나랑 미연 씨도 결국 세 사람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까요.”육민성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특히 수빈이, 겨우 그 지옥 같은 일들에서 빠져나왔는데 더 상처받는 건 보고 싶지 않아요. 시후가 철이 들면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누가 옆에서 이상한 소리를 불어넣으면 결국 제일 힘든 건 수빈이가 될 거예요.”“알아요.”주민혁이 낮게 답했다.“고마워요. 그런데 시후 얘기는 앞으로 수빈이 앞에서 하지 말아줘요. 걔 원래 생각 많고 예민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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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8화

주민혁의 허리는 여전히 꼿꼿했고 눈빛은 날카로웠다. 나이가 들었다고 기세가 꺾인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화선지 위에는 힘 있는 필체로 ‘고요함 속에서 멀리 내다본다’는 뜻의 한문이 적혀 있었다.먹물이 아직 마르지 않아 은은한 묵향이 퍼지고 있었다.“할아버지.”주민혁은 다가가 공손히 부른 뒤, 두 손을 내린 채 옆에 섰다.주성철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여전히 서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붓끝이 화선지를 스칠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한참 뒤에야 그는 붓을 내려놓고 화선지를 들어 올려 찬찬히 글씨를 살피고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세월의 무게가 실린 목소리였지만 기운만큼은 여전히 단호했다.“밖이 아주 시끄럽다더구나.”주성철이 무슨 일에 대해 묻고 있는지 알았기에 주민혁의 마음은 무겁게 내려앉았다.그는 앞으로 다가가 주성철의 손에 있던 화선지를 받아 들고 웃으며 말했다.“다들 확인도 안 된 말만 떠드는 겁니다. 그런 소문에 신경 쓰지 마세요. 주씨 가문도 괜찮고 천공에도 문제없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내가 노망난 줄 알아?”주성철은 붓을 내려놓고 그를 올려다봤다. 시선이 주민혁의 마음속을 꿰뚫듯 날카로웠다.“아무 근거도 없는 말이면 그렇게까지 퍼졌겠어? 산속에 들어와 산다고 해서 내가 바깥일에 대해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더니 마당에 가득한 꽃과 나무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안에는 안타까워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예전에 네가 최수빈과 이혼하네 마네 할 때, 그런 부부 사이의 자잘한 일에는 굳이 참견하지 않았지. 젊은 사람 일은 젊은 사람들끼리 알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 언젠가는 화해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니?”주성철이 몸을 돌려 주민혁을 바라봤다.“너는 남극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고 네 아비는 구금됐고 주씨 가문의 사업은 흔들리고 있다. 바깥에서는 우리 주씨 가문에서 매국노가 나왔다느니, 불효자가 나왔다느니 하며 떠들어대고 있어.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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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9화

서재 안 공기는 숨 막힐 만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화선지 위로 번진 먹물 자국은 지금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깊은 균열 같았다.주민혁은 시선을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손등 위로 핏줄이 희미하게 도드라졌고 손끝은 무의식적으로 바지선을 천천히 쓸어내리고 있었다.하지만 끝내 더는 변명하지 않았다.주성철의 희끗한 눈썹은 깊게 구겨져 있었다.붓대를 쥔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고 당장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그런데 그때, 서재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도지석이 모습을 드러냈다.몸에 딱 맞춘 고급 정장에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넘긴 모습이었다.입가에는 보기 좋은 미소를 걸치고 있었지만 눈빛은 이미 방 안 분위기를 빠르게 훑고 있었다. 팽팽하게 얼어붙은 공기를 단번에 읽어낸 눈치였다.곧 그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오며 능청스럽게 말했다.“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멀리서도 목소리가 들리던데, 누가 또 할아버지를 화나게 했습니까?”겉보기엔 분위기를 풀려는 말 같았지만 속은 뻔히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태도였다.심지어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난 듯한 기색까지 비쳤다.주민혁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도지석, 주나연의 남편.도씨 가문의 회사는 원래 이름도 없던 작은 회사였는데 지금처럼 사업 판에서 자리라도 잡게 된 건 전부 주씨 가문의 지원 덕분이었다.그런데 이제 주씨 가문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슬슬 욕심이 올라온 모양이었다.혼란한 틈을 타 자기 몫이라도 챙겨보려는 속셈이 뻔했다.주성철은 도지석을 힐끗 바라봤지만 표정은 싸늘하게 유지한 채 코웃음만 한 번 치고 등을 돌려버렸다.벽에 걸린 주씨 가문의 가훈만 묵묵히 바라볼 뿐, 손녀사위를 상대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그러자 도지석의 미소가 순간 굳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금세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이내 도지석은 주민혁의 옆으로 다가와 능숙하게 어깨를 툭 두드렸다. 마치 한 가족인 걸 티 내려는 듯 친근한 목소리였다.“민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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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0화

“누나가 주씨 가문 돈으로 고급 차를 사고 호화 저택을 마련하고 밖에서 으스대고 다닌 것 중에 주씨 가문 덕을 안 본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주씨 가문의 기반을 나눠 가져야 한다고요? 도 대표님, 욕심이 지나치시네요.““주민혁!”도지석은 정곡을 찔리자 얼굴이 완전히 굳어졌다. 이제 더는 다정한 척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좋게 말해주니까 우습게 보이나 본데! 주씨 가문의 백 년 기반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거야. 그런데 왜 너 혼자 마음대로 쥐고 흔들어? 나연이도 주씨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 성도 주씨야. 왜 주씨 가문 재산을 물려받으면 안 된다는 거야? 넌 그저 먼저 자리를 잡았다는 이유로 우리를 밟고 올라선 것뿐이잖아!”주민혁은 흥분해서 소리치는 도지석을 바라보며 속으로 차갑게 비웃었다.그러고는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셔츠 소매를 정리했다. 동작은 끝까지 여유로웠다.“왜냐고요? 이 주씨 가문을 지금까지 버티게 만든 사람이 저니까요. 심씨 가문이 무너진 뒤, 사방에서 압박이 밀려왔을 때 주씨 가문을 지켜낸 것도 저였습니다. 해외 세력이 눈독 들일 때, 직접 중심에 서서 주씨 가문의 핵심 기술을 지킨 것도 저였고요. 주상 그룹을 몇 번이고 위기에서 끌어올려 지금의 규모로 만든 것도 저입니다.”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마치 우스운 광대를 마주한 듯 도지석을 바라보았다.“그런데 누나는요? 주씨 가문 이름을 팔아 밖에서 사고 치고 다닌 것 말고, 대체 뭘 했습니까? 주상 그룹 재무제표 하나 제대로 읽을 줄 아나요? 프로젝트 기획안 하나 낼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무슨 자격으로 주씨 가문의 재산을 나눠 갖겠다는 거죠?”“너...!”도지석은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가슴만 거칠게 오르내릴 뿐, 주민혁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든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주민혁은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서재 밖으로 향했다. 흔들림 없이 단호한 발걸음, 곧게 뻗은 뒷모습에는 냉정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마치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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