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441 - Chapter 1450

1590 Chapters

제1441화

마치 무언가를 단단히 결심한 사람처럼 송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그러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위에 놓아둔 가방을 움켜쥐었다. 동작이 어딘가에서 도망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급했다.그녀는 육민성을 한 번도 바라보지 않은 채 그저 최수빈에게만 급히 고개를 끄덕인 뒤,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나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당분간 회사에도 안 나올 거야.”말을 마친 그녀는 곧장 문 쪽으로 걸어갔다. 등 뒤에서 무언가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발걸음이 아주 다급했다.“미연 씨!”육민성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녀를 뒤쫓아가 손을 뻗더니 앞을 막아섰다.이에 송미연은 우뚝 멈춰서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야 했다.고개를 든 그녀는 바로 눈앞에 선 육민성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높은 콧대, 선명한 턱선, 아직 핏발이 가시지 않은 눈까지...그는 전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송미연은 고개를 돌려 육민성의 어깨너머 복도 어딘가에 시선을 둔 채,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비켜요.”“왜 나를 피하는 거야?”육민성이 그녀를 바라보며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목소리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우리 어차피 가짜 결혼이었잖아. 이혼했다고 해서 친구조차 못 될 이유가 있나?”송미연은 손끝이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은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며 가느다란 통증을 일으켰다.그녀가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문제는 가짜 결혼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더는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육민성을 보기만 해도 동사무소에서의 그 일이 떠오르고, 육씨 가문 본가에서 자신을 보호해주던 모습이 떠오르고, 술에 취한 그가 자신의 이마에 남겼던 그 가벼운 입맞춤까지 떠오른다고.그 기억들은 가시처럼 송미연의 마음에 박혀 뽑아낼 수도, 삼켜낼 수도 없었다.“우린 원래 친구도 아니었어요. 대표님, 가짜 결혼이라는 연극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각자 갈 길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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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2화

육민성은 최수빈을 바라보며 얇은 입술을 달싹거렸다.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나온 건 희미한 한숨뿐이었다.그의 목울대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눈빛 속에 남아 있던 빛도 서서히 가라앉아 갔다.최수빈은 이미 모든 걸 봤고, 또 모두 이해하고 있다는 걸 육민성도 알고 있었다.어떤 감정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알고 있는 법이었다.최수빈은 그런 육민성을 보며 옅게 웃었다. 그 미소에는 체념과 이해, 그리고 안타까워하는 기색까지 함께 담겨 있었다.이윽고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접견실 안으로 돌아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문이 닫히자 복도에 남아 있던 적막과 쓸쓸함도 함께 문밖으로 밀려난 듯했다.육민성은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엘리베이터 숫자가 1층에서 멈춘 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차가운 손끝과 달리 속은 답답하게 막혀 있었다.송미연이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고작 가짜 결혼 생활 하나가 끝났다고, 친구조차 될 수 없을 만큼 멀어질 이유가 대체 무엇인지 말이다.천공연구원 건물 아래.송미연은 택시 한 대를 잡아타고 집 주소를 말했다.차는 천천히 출발하자 송미연은 차창에 기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써 감추고 있던 피로가 서서히 눈빛에서 드러났다.황당하게 시작됐던 가짜 결혼은 결국 이렇게 초라하게 끝나버렸다.송미연은 자신이 충분히 담담할 줄 알았다. 이혼 합의서에 사인만 하면 모든 걸 깔끔하게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하지만 육민성을 마주한 순간, 심장은 여전히 제멋대로 흔들렸다.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건 내려놓겠다고 해서 쉽게 내려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그렇게 택시가 한 별장 앞에 멈춰 서자 송미연은 요금을 계산한 뒤, 차에서 내렸다.복도의 센서등은 몇 개가 나가 있는지 불빛이 깜빡거렸고 공기 중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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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3화

지퍼를 끝까지 잠근 뒤, 캐리어를 끌고 거실로 나온 송미연은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너 어디 가?”그제야 설희애가 당황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막아섰다.“이렇게 가버리면 우리는 어떡하라고?”그러자 송미연이 더없이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제가 어디를 가든, 이제 두 분과는 상관없어요. 앞으로 제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말을 마친 그녀는 조용히 설희애의 손을 밀어냈다. 그런 다음 문을 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캐리어를 끌고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갔다. 발걸음이 솜을 밟는 것처럼 가벼웠지만 동시에 천근만근 무겁기도 했다.아래층에 다다르자 밤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왔다. 깊은 가을의 서늘함을 머금은 바람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그때 최수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여보세요, 수빈아.”“미연아, 괜찮아?”최수빈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네가 너무 급하게 나가서 신경 쓰였어.”송미연은 캐리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나 괜찮아. 걱정하지 마.”“지금 어디야? 내가 가서 같이 있어 줄까?”“아니야.”송미연은 조용히 거절했다.“그냥 좀 걸으면서 바람 쐬려고.”휴대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곧 최수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집에서 또 뭐라고 했어?”송미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이 된 것이었다.“마음에 담아두지 마.”최수빈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그런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을 필요 없어.”그러다 송미연이 마치 어떤 결심을 내린 사람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수빈아, 나 생각해봤는데... 사람은 역시 자기 일이 있어야 하는 것 같아. 안 그러면 실연을 당해도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집 안에 틀어박혀 아파하기만 하게 되잖아.”최수빈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다행이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응,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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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4화

육민성의 차였다.그 순간 송미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고 막 눈가에 번지던 온기마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이내 사그라졌다.반사적으로 집 안으로 몸을 숨기려 했지만 발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선생님은 송미연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벤틀리를 확인한 선생님의 얼굴에 무언가를 알아챈 듯한 미소가 번졌다.선생님은 몸을 돌려 아래층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다시 송미연을 보며 웃었다.“저기, 오셨네요.”번쩍 고개를 든 송미연은 선생님의 미소를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곧 선생님은 계단 쪽으로 걸어가 아래를 향해 외쳤다.“민성 씨, 오래 기다리셨어요?”육민성이 한 걸음씩 그녀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송미연은 문가에 선 채 문틀을 꽉 움켜쥐었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마음속은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했다.‘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선생님과는 또 무슨 사이인 거야?’송미연은 문 앞에 굳어선 채, 선생님이 웃으며 아래층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과 육민성이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두 사람이 몇 마디를 나누는 것을, 선생님이 자연스럽게 허리를 숙여 조수석에 오르는 것을, 육민성이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 차 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모든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익숙하고 매끄럽고 지나치게 호흡이 잘 맞았다.그러자 송미연의 입가에 천천히 자조적인 웃음이 번졌다.‘그랬구나. 어쩐지 선생님이 이렇게 빨리 방문 레슨을 와준다 했어. 어쩐지 수업 방식이 나한테 꼭 맞는다 했어. 어쩐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저 사람이 준비해둔 일이었던 걸까?’그녀는 바보처럼 드디어 시간을 보낼 일, 아픔을 잠시 묻어둘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마저도 육민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어쩐지 웃음이 났다. 그런데 웃다 보니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그럴 줄 알았어. 정말로 날 신경 쓸 리가 없지. 그냥 이 가짜 결혼 때문에 나한테 빚을 졌다 생각해서,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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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5화

“제가 수업을 못 한 것도 아니고, 미연 씨도 정말 열심히 배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왜...”메시지에 시선이 닿는 순간, 육민성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단번에 알아차렸다.‘틀림없이 내가 임 선생님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 오해한 거야.’육민성은 곧장 액셀을 밟았다. 갑자기 속도가 빨라져 놀란 임 선생님이 급히 손잡이를 붙잡았다.“민성 씨, 천천히 가세요!”하지만 육민성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휴대폰을 꺼내더니 송미연의 번호를 찾아 망설임 없이 전화를 걸었다.전화는 신호음이 한참 이어진 뒤에야 연결됐다.휴대폰 너머로 들려온 송미연의 목소리는 애써 평온한 척하고 있었다.“여보세요.”“왜 선생님을 바꾸겠다는 거야? 임 선생님은 전문적인 분이고 수업도 잘하셔. 우리의 관계 때문에 선생님과의 계약을 끊지는 마.”육민성은 두려웠다.송미연이 오해할까 봐, 또다시 자신을 피할까 봐, 그리고 그녀를 잠시나마 웃게 했던 유일한 일마저 포기해버릴까 봐 말이다.송미연은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댄 채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입가에는 점점 더 짙은 웃음이 번졌지만 그 웃음은 갈수록 쓰라렸다.‘날 걱정한다고? 신경 쓴다고? 결국 다 죄책감일 뿐이야.’“대표님.”송미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지나치게 정중해서 오히려 낯설게 느껴졌다.“선생님을 바꾸든 말든 그건 제 자유예요. 대표님이 관여할 일 아니고요.”육민성은 입술을 달싹였다.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휴대폰 너머에는 송미연의 희미한 숨소리만 남았다.한참 뒤, 송미연이 다시 입을 열더니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더 하실 말씀 없으면 이만 끊겠습니다.”그가 대답하기도 전에 송미연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대로 육민성의 번호를 차단 목록에 넣었다.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지는 순간, 송미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벤틀리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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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6화

그날 밤, 주민혁과 최수빈은 함께 만찬에 참석했다.상류층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그날의 만찬은 매년 열리는 비즈니스 서밋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자리였다.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이 있거나, 힘이 있거나, 둘 다 가진 이들이었다.연회장 입구 쪽이 순간 작게 술렁였다.주민혁의 팔짱을 낀 최수빈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그녀는 바닥에 길게 끌리는 버건디색 벨벳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부드럽게 흐르는 치맛자락이 가늘고 우아한 몸매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그 옆에 선 주민혁은 몸에 꼭 맞게 재단된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곧게 뻗은 자세, 단정하면서도 압도적인 분위기가 단숨에 시선을 끌었다.나란히 선 두 사람은 누가 보아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주 대표님, 최수빈 씨, 두 분은 정말 하늘이 맺어 준 한 쌍이십니다.”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머리가 희끗한 한 노신사였다. 전통 있는 기업의 회장으로, 주민혁이 주상 그룹을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리는 과정을 지켜본 인물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오늘 두 분이 함께 오시니 연회장이 다 환해지는군요.”주민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차분하게 웃었다.“과찬이십니다, 장 회장님.”최수빈도 예의 바르게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장 회장님.”그 말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잔이 부딪치는 맑은소리가 여기저기서 이어졌고 칭찬과 아부가 끊임없이 오갔다.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는 말, 주민혁이 이끄는 주상 그룹의 성장세가 놀랍다는 말, 그리고 그 틈을 타 협업 기회를 얻어 보려는 말들이었다.최수빈은 주민혁의 팔을 가볍게 잡은 채, 능숙하게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 냈다.건네지는 술잔도 마다하지는 않았다. 다만 입술만 살짝 적시는 정도로 예의를 갖췄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도 무례해 보이지 않는, 딱 적당히 거리감 있는 태도였다.주민혁은 내내 그녀의 곁을 지켰다.누군가 독한 술을 권할 때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잔을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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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7화

낯선 남자의 향수 냄새가 희미한 담배 냄새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묘하게 낯설고 불편한 기척이었다.순간 얼어붙은 최수빈이 본능적으로 몸을 빼내려는데 귓가에 어딘가 이국적인 억양이 들려왔다.“괜찮으세요?”걱정스러워하는 말투였다.곧 천천히 고개를 든 최수빈은 한 깊고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그녀를 붙잡아 준 사람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 남자로 말끔한 흰색 수트를 입은 그는 키가 크고 체격도 다부졌다. 이목구비는 또렷했고 나이는 서른 안팎으로 보였다.남자의 시선이 최수빈의 얼굴에 머물렀다. 예의 바른 미소에 적당한 관심이 함께 담겨 있었다.“고마워요.”최수빈은 정신을 가다듬고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러고는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괜찮아요.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에요.”말투는 정중했지만 분명 거리를 두는 태도였다.외국인 남자는 한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손을 거두었다. 여전히 신사적인 태도였지만 그의 시선은 아주 잠깐 그녀의 몸 위에 머물렀다.“만찬장에서 마시는 와인은 뒤끝이 세죠. 조금 취하신 것 같네요. 제가 모셔다드릴까요?”최수빈은 흐트러짐 없는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저었다.“괜찮습니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요.”“정말요?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최수빈은 눈앞의 남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말투로는 여전히 선을 긋고 있었다.“정말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해요.”외국인 남자의 푸른 눈에 잠깐 흥미로운 빛이 스쳤다.하지만 끝까지 예의를 잃지는 않고 살짝 몸을 숙이며 말했다.“알렉스라고 합니다. 이번 서밋에 참석한 해외 기업 대표예요.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많이 불편하시면 연회장 쪽에 휴게실도 마련되어 있습니다.”최수빈은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렉스 씨.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실례할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뒤,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문을 닫는 손길이 조금 급했다. 마치 등 뒤에서 무언가가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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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8화

“방금 넘어질 뻔했는데, 어떤 외국 남자가 붙잡아 줬어요.”주민혁이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눈빛을 달리했다.“외국 남자? 어떻게 생겼는데?”“금발에 파란 눈이었고, 흰색 수트를 입고 있었어요.”최수빈은 조금 생각하다가 있는 그대로 말했다.“이번 서밋에 참석한 해외 기업 대표라고 하던데 난 모르는 사람이에요.”눈가에 싸늘한 빛이 스치며 주민혁은 먼저 최수빈을 살피더니, 다친 곳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러고는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앞으로 혼자 다니지 마. 이런 자리는 겉보기와 달리 별의별 인간들이 다 섞여 있어. 조심해야 해.”최수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품에 몸을 기대자 익숙한 시더우드 향이 코끝에 닿았다.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불쾌한 불안감도 순식간에 사라졌다....연회장 중앙에서는 공연이 한창이었다.무대 위에는 흰 드레스를 입은 임한결이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었다.육민성은 한쪽 구석에 서서 샴페인 잔을 든 채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그는 오늘 천공연구원을 대표해 이 서밋에 참석했다. 애초에 사람들과 어울릴 마음도 없었지만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들려오자 눈빛이 복잡하게 가라앉았다.임한결은 그의 어머니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저분이 만찬 초대를 받아들여 무대에까지 오를 줄이야.’곡이 끝나자 연회장 안에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다.임한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온화한 미소를 띤 채 악보를 정리한 뒤, 무대 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하지만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뚱뚱한 중년 남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부동산으로 돈을 번 안 대표라는 인물이었는데 가진 돈만 믿고 평소에도 업계에서 안하무인으로 굴던 자였다. 특히 젊고 예쁜 여자들에게 추근대기로 악명이 높았다.안 대표는 음흉한 눈빛으로 임한결을 위아래로 훑었다.“한결 씨, 재주가 보통이 아니네. 피아노 실력이 아주 대단해. 여운이 오래 남겠어. 나랑 가는 거 어때? 내가 제대로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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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9화

육민성은 그 흐름 그대로 임한결을 제 뒤로 끌어당겼다.그녀가 보이지 않을 만큼 완전히 가로막은 뒤에는 칼날 같은 시선으로 안 대표를 내려다보았다.“감히 내 앞에서 내 사람을 건드려요?”목소리가 매우 싸늘했다.손목이 으스러질 듯 아픈 나머지 안 대표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그런데도 억울함을 삼키지 못한 듯 목을 빳빳이 세웠다.“육 대표님, 그 말씀은 좀 지나치시네요. 대표님도 아내가 있는 분 아닙니까. 여기서 다른 여자 구하려고 이렇게 나서시는 거, 밖에 알려지면 명성에 좋을 게 없을 텐데요?”이는 일부러 한 말이었다.아무리 육민성이라 해도 유부남인 이상, 여자 하나 때문에 자신과 정면으로 부딪치지는 못할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사람들의 시선은 육민성과 임한결 사이를 오가며 노골적인 호기심과 구경꾼 같은 흥미를 드러냈다.최수빈과 주민혁도 그쪽으로 다가왔다.그러다 임한결의 뺨에 선명하게 남은 손자국을 보고 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렸다.주민혁은 말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안 대표를 훑어보았다.그렇게 모두가 육민성이 체면 때문에라도 손을 놓을 거라 생각한 순간,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연회장을 쓱 둘러보았다.“저 아내 없습니다.”이 한마디에 연회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안 대표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뭐라도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육민성의 차가운 눈빛에 기세가 눌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제야 그는 얼마 전부터 업계에 떠돌던 소문을 떠올렸다.바로 육민성과 그의 명목상 아내가 이미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었다.육민성이 손을 놓자 안 대표는 몇 걸음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손목을 감싸 쥔 채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더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꺼져요.”짧은 한마디였으나 그 냉랭한 목소리는 사람의 숨통을 조일 만큼 서늘했다.안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 틈을 비집고 빠져나갔다. 거의 도망치다시피 연회장을 떠나는 뒷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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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0화

그 시각.송미연은 아파트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휴대폰 화면을 넘기고 있었다.그런데 한 뉴스 기사가 눈에 들어온 순간, 손끝이 멈췄다.[육민성 대표, 만찬장에서 한 여인을 보호하며 ‘아내 없다’ 발언!]송미연은 그 영상을 눌렀다.화면 속 연회장은 샹들리에 불빛으로 눈이 부셨고 육민성은 홀 한가운데 서 있었다. 곧게 선 그의 뒤에는 흰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가 보호받듯 서 있었다.그리고 육민성은 살찐 중년 남자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저 아내 없습니다.”카메라가 유난히 가까웠는지라 냉랭한 그의 눈빛까지 선명하게 보였다.송미연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가벼운 미소였지만 그 안에는 자조적인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댓글 창은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역시 육민성은 아직 솔로라는 반응부터, 그가 감싸고 돈 여자가 새 연인 아니냐는 추측까지 쏟아졌다.심지어 누군가는 그 여자가 피아노 선생 임한결이라는 사실까지 찾아냈다. 얼마 전 송미연에게 직접 피아노를 가르치러 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아, 그랬구나.’송미연은 휴대폰을 옆으로 던져두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시야가 서서히 흐려졌다.가짜 결혼이었다 해도, 적어도 그들은 친구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 그 짧은 결혼 생활 하나로 두 사람 사이에 남아 있던 정마저 다 닳아 버린 것 같았다.이제는 친구조차 될 수 없을 만큼 말이다.가슴 한가운데 무언가가 꽉 막힌 듯 답답해 송미연은 눈을 감았다.어쩌면 애초에 육민성이 결혼 제안을 받아들인 건, 그저 친구로서의 도리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거절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해 준 일일 수도 있었다.그의 마음속에 송미연이 들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이 결혼은 육민성에게 그저 끝내야만 하는 과제 같은 것이었을지도 몰랐다.두 사람은 곧 이혼을 앞두고 있었다.아직 숙려 기간조차 끝나지 않았는데 육민성은 벌써 사람들 앞에서 자신에게 아내가 없다고 선언했다. 그것도 다른 여자를 지키며 말이다.‘이런 결말이야말로 그 사람이 바라던 결말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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