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41 - Chapter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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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1화

주민혁은 최수빈이 보는 앞에서도 박하린과 여러 번 대놓고 사람들 앞에 붙어 다녔다.이건 그녀를 사람 취급조차 안 하는 것이었고 본처의 체면을 진창에 짓밟는 일이었다.아무리 거만해도 그렇지 이 정도까지 할 수 있을까?육민성조차 최수빈이 아깝다고 느꼈다.하지만 최수빈은 이미 마음을 비워버린 지 오래였다.“소송까지 가서 결국 합의 이혼할 건데 굳이 지금 자극할 필요 없어요.”애초에 그들의 결혼은 숨겨진 관계였다.주민혁과 박하린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사이였고 어떤 사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최수빈과 결혼하게 된 거였다.뿌리를 따지고 올라가면 사정은 매우 복잡했다.게다가 최수빈이 이를 공개하는 건 곧바로 박하린에게 모욕이 되는 일이니 그러면 당연히 천공연구원과 이씨 가문을 겨냥당하게 될 터였다.최수빈은 불필요한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때로는 복수하지 않는 게 아니라 때가 오지 않았을 뿐이다.군자는 복수를 서두르지 않는다.아직 날개가 다 자라지 않았는데 함부로 덤빌 이유는 없었다.그들이 자리에 막 앉자 저쪽에서 박하린과 주민혁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다가왔다.최수빈 자리 앞에 이르자 주최 측 관계자가 순간 멈칫했다. 얼굴이 낯설었기 때문이다.조심스럽게 물었다.“실례지만 아가씨, 여긴 VIP 구역인데 혹시...?”박하린은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이 업계에서 통하는 건 결국 ‘큰손’이었다.아무리 천공연구원에 몸담고 있는다 해도 최수빈에게는 명분이 없었다.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업계의 인재들이라 불릴 만한 사람이었는데 최수빈은 조회가 불가한 사람이었다.최수빈은 스스로 신분을 밝혔다.주최 측은 곧 육민성을 알아보고는 인사를 건넸다.그러고는 최수빈을 육민성의 조수나 비서 정도로 여겼다.보통 비서나 조수는 자리에 앉을 수 없지만 이미 그녀가 자리를 잡은 이상 억지로 내쫓기도 곤란했다.그들은 주민혁을 최수빈 옆자리에 앉혔고 박하린은 주민혁 옆에 앉았다.결국 그녀와 박하린이 주민혁의 양옆에 나란히 자리하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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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2화

주민혁이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그는 무심히 그녀가 적고 있는 노트를 흘끗 봤다. 발표회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 적고 있었다.“알아듣고 적는 거야?”남자가 불쑥 물었다.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살짝 틀어 더 이상 보여주지 않았다.박하린이 옆에서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딱 봐도 육 대표님 자료 정리 도와주러 온 것 같네요.”학부생이 이런 걸 알아듣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그래서 모든 수치와 자료를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하고 자기 의견은 전혀 담지 않았겠지.’최수빈이 몸을 피하자 주민혁은 입꼬리를 옅게 올려 웃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무대 위에서 남이준이 우연히 그 장면을 보았다.주민혁이 말을 걸자 최수빈이 대놓고 등을 돌려 무시하는 모습에 그의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여기까지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다니...’자료 시연이 끝난 뒤, 최수빈은 주민혁 일행이 언제 빠져나갔는지도 몰랐다.발표회장은 인파로 북적거려 숨이 막힐 정도였다.그녀는 바람이라도 쐬려 복도로 나왔다.그런데 멀리서 난간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주민혁이 보였다.최수빈은 사실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결혼 후 내내, 그녀 앞에서는 거의 피우지 않았으니 말이다.주민혁도 최수빈이 나오는 걸 보았다.시선은 여전히 차갑고 무심했고 곧 고개를 돌려 담배를 태우기만 했다. 인사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최수빈은 숨을 고르며 다가갔다.어젯밤 신혼집에서 원래는 이혼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분위기가 도무지 맞지 않아 입을 떼지 못했었다.그녀가 걸음을 옮기자 남자는 담배를 비벼 끄고는 느긋하게 옷매무새를 털었다.“무슨 일 있어?”“네.”최수빈이 입을 열었다.“우리 문제에 대해서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주민혁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히 그녀를 보았다.“우리 문제라니?”최수빈은 그를 똑바로 보았다.법원에서 받은 소환장 날짜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하지만 재판으로 가면 시간만 오래 끌릴 터였다.차라리 그와 직접 합의를 보고 동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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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3화

주민혁이 떠난 뒤, 최수빈도 곧장 복도를 벗어났다.육민성은 이미 남이준과 협력 논의를 약속해둔 상태였다.“어디 갔었어?”육민성이 그녀가 바깥에서 들어오는 걸 보고 물었다.“좀 바람 쐬고 왔어요.”“그럼 우리 먼저 가자.”육민성이 말했다.“남 대표님은 일에서는 전문성이 높으니 더 깊게 얘기할 수 있을 거야.”발표회장 안에는 귀빈용 접견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성안에서 내놓은 신소재는 활용도가 높아 협력이 성사되면 앞으로 많은 일을 줄일 수 있을 터였다.그들은 접견실로 향했다.직접 차를 우려내고 있던 남이준은 그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육 대표님, 수빈 씨. 앉으시죠.”자리에 앉자마자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천공연구원이 정부 입찰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라고 들었습니다.”남이준은 차를 따라 권하며 말을 꺼냈다.“네.”육민성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최수빈을 소개했다.“이번 프로젝트 책임자는 최수빈 씨입니다.”남이준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차를 한 모금 마시며 최수빈을 살펴보더니 차분히 잔을 내려놓았다.“육 대표님, 혹시 눈이 가려진 건 아닙니까?”그는 사실 육민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새로운 세대의 선두주자, 업계의 이끄는 인물, 하지만 그가 최수빈의 외모에 끌린 듯 행동하는 건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자신이 아는 최수빈은 집에서 아이만 돌보던 학부 출신의 여인일 뿐이었다.그런 사람이 어떻게 천공연구원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일을 이렇게 가볍게 여기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단순히 그녀를 곁에 두고 사적인 자리에 동행시키는 정도라면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방금 그녀를 ‘책임자’라고 소개한 건, 무책임하고 경솔하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육민성은 시선을 내려 차가 거의 넘칠 듯 찰랑거리는 걸 바라보았다.차가 가득 차면 곧 손님을 내보낸다는 뜻이었다.남이준은 가볍게 웃으며 스치듯 최수빈을 바라봤다.“육 대표님은 대단한 분이라고 존경했었는데... 결국 미인계에 무너져 철저히 타락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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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4화

남이준의 비서가 그 순간 그의 귀에 뭔가를 속삭이자 남이준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접견실을 떠났다.그저 그들에게 알아서 하라는 듯 말이다.“안목이 없어도 너무 없어!”육민성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갈았다.“다 똑같은 부류잖아?”“괜히 공사 구분 잘하고 일에 진지한 사람이라 생각했네!”최수빈은 미간을 바짝 좁혔다.대충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어차피 그들끼리는 한패, 보복이 오가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육민성은 분노 끝에 성안과의 모든 협력을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천공연구원은 이제 최수빈이 중심을 잡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가 완성되면 머지않아 협력을 구걸하는 쪽은 성안이 될 것이다.특수 소재 공급처는 성안뿐만 아니라 다른 선택지도 많았다.굳이 이 한 군데에 매달려 속을 끓일 이유는 없었다.최수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번 일을 명확히 정리했다.감정이나 오해에 휘둘리지 않고 각종 자료의 세부 데이터를 다듬어 이후 대조와 비교가 수월하도록 준비했다.발표회가 끝난 뒤에야, 그녀는 주민혁이 박하린을 데리고 병원에 갔다는 걸 알았다.그는 늘 박하린을 극진히 감싸고 보호했다.하지만 이제 그녀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육민성은 속으로 생각했다.‘저 결혼 생활은 하루빨리 끝내는 게 나아.’천공연구원으로 돌아온 뒤, 그들은 성안의 발표회를 토대로 분석과 연구를 이어갔다.마무리될 즈음, 송미연이 최수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내일 주말인데 나랑 술집 가서 신나게 놀까?”최수빈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난 예린이랑 놀러 갈 거야.”“또 나가? 네 시간은 없니? 평일에는 회사, 주말에는 애랑. 너 자신을 위한 시간은 언제 가져? 네 행복은 버린 거야?”최수빈은 살짝 눈을 내리깔았다.‘내 시간...’지난 생애에서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자기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늘 자신을 희생하며 주씨 가문을 중심으로만 살았다.“내 시간은 의미 있는 데 써야 해.”그녀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일하는 게 난 좋아. 나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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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5화

아침 식사 후,최수빈은 주예린을 데리고 교외의 승마장으로 향했다.이곳은 은산시 근교에서 가장 큰 승마장으로 많은 명문가와 상류층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주예린은 이런 운동을 무척 좋아했다.예전에는 늘 주시후가 타는 것만 보고 따라 하고 싶다는 내색조차 하지 못했다.주씨 가문은 주예린을 그저 얌전한 아가씨로만 키웠다. 여자아이가 거친 야외 운동을 하는 건 체면에 어긋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그래서 야외 활동은 언제나 주시후의 몫이었다.하지만 이제는 달랐다.주씨 가문에서 벗어난 지금, 그들의 말과 규칙 따위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주예린은 지난주 승마장을 처음 찾은 뒤 무척 즐거워했고 금세 익혀 잘 타기 시작했다.코치가 다가와 주예린을 데리고 연습을 이어갔고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수빈 씨도 한 바퀴 타보시죠. 최근에 트랙을 새로 정비했습니다.”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예린이가 두 바퀴 도는 걸 먼저 보고요.”아이의 안전이 확실히 보장되고 말에서 떨어질 위험이 전혀 없음을 확인한 뒤라야 마음이 놓였다.주예린은 탈의실에서 승마복으로 갈아입었다.작은 체구에 승마복을 입으니 더없이 귀여웠다.최수빈은 벤치에 앉아 말을 타고 달려나가는 주예린을 지켜보았다.주예린은 그녀 앞을 지날 때마다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자세도 안정적이었고 배우는 속도도 빨랐다.지덕체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게 성장하는 딸이었다.최수빈 역시 결혼 전에는 승마를 즐겨 했었다.주민혁과 결혼하기 전, 말 위에서 바람을 가르며 달리고 푸른 들판과 풀향기를 온전히 느끼는 자유를 누렸었다.하지만 결혼 후, 자신을 점차 희생하며 남편과 주씨 가문을 위해 살았다.그녀 자신을 위해 살았던 나날은 이미 오래전이었다.달리는 주예린을 보며 최수빈의 마음에도 오랜만에 설렘이 일었다.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승마복으로 갈아입고 마구간으로 향했다.그녀가 고른 건 ‘허리케인’이라는 이름의 말이었다.은산시 승마 대회의 챔피언 말이었지만 야성이 강해 길들이기 어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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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6화

그녀가 입을 열었다.“꽤 대단하네. 나도 말 한 필 골라서 겨뤄봐야겠다!”승마든 암벽등반이든 박하린은 못 하는 게 없었다.심지어 비행기 조종사 자격증까지 따서 직접 비행기를 몰 수 있었다.승마쯤은 그녀 눈에 더더욱 아무것도 아니었다.말 한 필을 고른 뒤 옷을 갈아입으러 탈의실로 향했다.최수빈은 승마장을 거침없이 달렸다.두 바퀴를 돌아내리니 조금 피곤했는지 능숙하게 말에서 내려 헬멧을 벗고 길게 흩어진 머리카락을 털어냈다.자유롭고도 환한 모습이었다.“멋지다!”승마장 사람들 사이에서 휘파람이 터져 나오고 박수갈채가 쏟아졌다.최수빈은 담담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사람들이 허리케인을 옆으로 끌고 가 안장을 풀었다.최수빈은 고개를 숙여 옷매무새를 정리했다.그때 박하린 일행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보자 은근히 미간이 찌푸려졌다.‘정말이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엄마, 아까 그 누나보다 엄마가 훨씬 멋있어요.”주시후는 박하린을 우러러보는 눈빛으로 말했다.“응.”박하린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돌려 주민혁을 바라봤다.“민혁 오빠, 모자 뒤가 삐뚠 것 같은데 좀 바로 잡아줄래?”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그녀의 모자를 고쳐줬다.그런 세심한 모습과 다정함을 최수빈에게는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사람이었다.세 사람은 다정한 가족 그 자체였다.예전에 자신과 주예린이 느꼈던 냉담함은 결국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구나 싶었다.최수빈은 담담히 시선을 거두었다.마침 코치가 주예린을 데리고 와서 칭찬했다.“연습을 아주 잘했어요.”최수빈은 손을 들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더 타고 싶어?”“조금 더 타고 그다음 밥 먹으러 가자.”바로 그때, 주시후가 승마장 출구 쪽에서 최수빈과 주예린이 이야기하는 걸 발견하고 금세 성큼성큼 다가왔다.“두 사람은 말도 못 타면서 여기 왜 온 거예요? 창피하지도 않아요?”그는 최수빈과 주예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비웃었다.박하린도 따라 시선을 옮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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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7화

반응도 하기 전에 뜨겁고 최수빈은 단단한 품에 안겨 버렸다.“읍...”곧이어, 남자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귀에 닿았다.정신을 차렸을 때, 최수빈은 자신이 주민혁의 품에 감싸여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말이 돌진하며 그녀를 두세 미터나 튕겨냈고 박하린 역시 멀리 나가떨어졌다.사람과 말이 뒤엉킨 아수라장, 승마장 직원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며 급히 달려와 말의 고삐를 잡아 진정시켰다.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채 주민혁 몸에서 일어나던 순간, 최수빈은 그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쳤다.늘 무심하던 그 눈빛 속에 이번에는 서늘한 분노가 짙게 깔려 있었다.그녀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날 선 ‘분노’를 포착했다.시선을 내리자 주민혁의 팔과 등 뒤 옷이 찢겨 피가 번져 있는 게 보였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민혁 씨, 다쳤어요...”하지만 주민혁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 순간, 최수빈은 어렴풋이 깨달았다.그가 구하려던 건 자신이 아니었다.조금 전 그녀와 박하린은 나란히 서 있었고 키도 비슷했다.승마장에서 입은 옷도 똑같았다.‘착각해서 구한 것이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그래. 이 사람이 내 생사를 신경 쓸 리가 없잖아?’“엄마!”주예린과 주시후가 동시에 소리쳤다.하지만 주시후는 박하린에게 달려갔고 주예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최수빈에게 달려왔다.“흑흑... 엄마, 괜찮아요?”주예린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괜찮아.”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주예린은 다시 땅을 짚고 일어서려는 주민혁을 바라봤다.“아빠...”승마장 직원들이 다가왔다.“선생님, 아가씨, 괜찮으세요?”주민혁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박하린 쪽으로 향했다.그의 등을 바라본 최수빈은 입꼬리를 비웃듯이 당겼다.무슨 일이 벌어지든, 본인이 얼마나 크게 다치든, 그의 눈에는 오직 박하린만 있었다.박하린은 땅에 쓰러져 심하게 다친 듯 보였다.주시후가 그녀를 끌어안고 울부짖었다.주민혁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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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8화

주민혁 일행이 떠난 뒤, 승마장 직원들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하린 씨가 별일 없길 빌어야지. 주 대표님 보니까 본인도 다쳤는데도 하린 씨 걱정만 잔뜩 하던데?”“두 사람 정이 참 깊어 보이더라고.”최수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옆에서 주시후는 계속 울며 원망스러운 눈길로 최수빈을 노려봤다.최수빈은 깊게 숨을 고르며 시선을 떨어뜨렸다.조금 전 말발굽이 찍고 지나간 바닥에는 아직도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엄마...”주예린이 엄마의 손을 잡아당겼다.“방금 진짜 무서웠어요. 엄마, 다친 데 정말 없는 거 맞아요?”“괜찮아.”“어떻게 다치겠어?! 다친 건 아빠잖아!”주시후는 울면서도 원망을 쏟아냈다.“아줌마만 아니었어도 허리케인이 미치지 않았을 거예요. 며칠 전에 내가 아빠 엄마랑 왔을 땐 멀쩡했는데! 만약 우리 엄마가 크게 다쳤으면 아빠는 진짜 속상했을 거예요.”최수빈은 내내 찌푸린 미간을 펴지 못했다.조금 전은 분명 긴박한 상황이었다.주민혁이 순간적으로 착각했을지라도 결국 다친 건 그였고 자신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그만 좀 해. 못 봤어? 엄마가 얼마나 놀랐는지?”주예린이 울먹이며 주시후를 노려봤다.주시후는 뺨이 부풀도록 화가 나 있었지만 더는 말하지 않았다.‘어차피 멀쩡한데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거지?’아이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최수빈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주민혁의 무심함보다 주시후의 배신이 더 숨 막히게 다가왔다.오롯이 정성을 다해 키운 5, 6년의 시간이 허망했다.그녀가 정성껏 길러낸 아들이란 게 고작 이렇게 자신을 원망하는 아이였다니.주시후가 박하린을 택하는 건 괜찮았다.친엄마니까, 언젠간 그리로 돌아갈 거라 예상은 했다.하지만 자신에게 향한 것이 미움과 원망뿐이라니, 그건 차마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씁쓸한 후회가 밀려왔다.만약 전생의 그 일들이 없었더라면 주시후를 키워 장성시켰을 때도 결국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자식이었을까.최수빈은 눈을 내리깔고 휴대폰을 꺼내 주씨 가문에 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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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9화

최수빈은 차갑고 무정한 사람이 아니었다.주민혁과 더 이상 얽힐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일이 벌어진 이상 안부라도 묻는 게 도리일 터였다.그런데 결국 그녀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마음이 독해서도, 무정해서도 아니었다.지금 상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주민혁 눈에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그녀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그가 잘못 구해낸 건 사실이지만 이때 전화를 건다 한들 돌아올 건 모욕뿐이었다.최수빈은 더는 자신을 깎아내릴 수치스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병원.박하린은 말에 부딪히긴 했지만 단순 타박상에 발목을 삐끗한 정도였다.실제로 모든 충격은 주민혁과 최수빈이 정면으로 받아냈다.주민혁은 팔이 마장 울타리에 스치며 크게 찢어졌다.피가 줄줄 흐르고 깊게 패인 상처에 봉합이 필요할 정도였다.박하린은 그의 상처를 보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자신도 몸이 성치 않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수술실 앞에서 그가 치료를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그가 병실로 옮겨진 뒤에도 옆에서 정성껏 돌보았다.한편, 주씨 가문에 돌아간 주시후는 울면서 오늘 일을 모조리 고자질했다.그 이야기를 들은 진서령과 원금영은 다급히 전화를 걸어왔다.박하린은 연신 주민혁의 상처를 걱정했다.그는 ‘괜찮다, 별일 아니다’라며 담담히 넘겼지만 전화를 끊은 진서령의 안색은 순식간에 굳어졌다.자신의 아들이 그렇게 크게 다쳐 봉합까지 했다는 사실은 충격이었다.금이야 옥이야 곱게 키운 장남이, 유학 시절 말고는 한 번도 이런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큰 부상을 당하다니 믿을 수 없었다.진서령은 차갑게 쏘아붙였다.“최수빈, 도대체 뭐 하는 여자예요? 남편이 다쳤는데 병원에 오지도 않잖아요. 점점 제멋대로 구네요. 남편이 다쳤으면 곁에서 돌보는 게 아내 된 도리지, 내가 보기에는 민혁이가 너무 오냐오냐해서 자기 위치도 잊은 거예요!”옆에 있던 원금영은 묵묵히 듣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수빈이는 어리고 어린 나이에 주씨 가문에 들어온 아이야. 우리가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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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0화

“네.”주민혁은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원금영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네가 요즘 하린이랑 자주 어울린다는 얘기 들었다. 어릴 때부터 같이 자라며 친구처럼 지낸 건 알지만 이렇게 붙어 다니면 소문이 안 날 수가 없지 않니. 그런 얘기들이 퍼지면 안 좋은 영향이 끼칠 거야..”“수빈이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생각해줘야 하지 않겠니?”그가 묵묵부답으로 고개만 숙이자 원금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하린이가 성격이 호탕해서 남자애 같아 보여도 결국은 여잔데... 네가 그렇게 드나들면 오해 살 만도 하지 않니? 아무리 친구라 해도 지킬 건 지켜야 해.”주민혁은 여전히 아무 대답 없이 태블릿 속 주식 그래프만 뚫어져라 바라봤다.원금영은 못마땅해졌다.“대답 좀 해. 나 누구랑 말하는 거지? 듣고는 있는 거야?”그제야 그가 고개를 들었다.“수빈이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린이랑 잘 지내요.”원금영의 얼굴빛이 굳어졌다.최수빈은 단 한 번도 그런 불평을 원금영에게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결혼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겪은 서운함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수빈이가 입을 닫았다고 해서 속이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야.”주민혁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할머니, 수빈이도 이제 성인이에요. 마음에 불만이 있으면 직접 말하겠죠. 굳이 할머니께서 나서실 필요 없습니다.”원금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노려봤다.“내 말은 네 아내가 억울하거나 상처받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거다.”그는 피식 웃었다.“할머니는 늘 수빈이 편만 드시잖아요. 그렇게 감싸고 원하는 건 다 해주는데 무슨 서러움이 있겠어요? 아이도 원하면 저택으로 보낼 수 있고 집에서는 하고 싶은 대로 다 하잖아요. 그게 뭐가 억울하다는 건데요?”조목조목 막힘없이 말하는 그의 태도에 원금영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너 아내 구하다가 다쳤다며.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딨니? 왜 여기 안 와 있지?”“전 괜찮아요. 수빈이는 집에서 예린이 돌보고 있어요.”원금영이 한마디 하면 그는 열 마디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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