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31 - Chapter 140

144 Chapters

제131화

최수빈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어디선가 나타난 박하린 역시 그 도자기 꽃병을 눈여겨보고 있었다.주민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녀를 보더니 웃으며 물었다.“언제부터 이런 거 좋아했어?”“맨날 자극적인 것만 하다가 가끔은 이런 걸로 마음도 달래야지.”그때 진승우가 걸어와서 도자기 꽃병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했다.확실히 예뻤다. 비록 단색이지만 세세한 부분까지 정교했다.“안목 있네요.”진승우가 감탄하며 말했다.“이거 집에 두면 분위기 있어 보이겠어요.”최수빈은 차갑게 받아쳤다.“죄송하지만, 이 꽃병은 제가 먼저 고른 겁니다.”이건 외할머니의 유품이라 꼭 간직하고 싶었다.게다가 엄마와 외삼촌도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외삼촌이 할머니의 작품을 보면 마음에도 위안이 될 거라고 믿었다.엄마 말로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부터 외삼촌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고 했다.“이 꽃병은 제가 갖고 갈 거예요.”박하린은 예전과는 달리 담담하게 최수빈을 바라봤다.“우리 엄마 회사 프로젝트가 막 완공됐거든요. 선물로 드리려고 사 가고 싶어요.”주시후가 그때 엄마 손을 잡아당겼다.“엄마, 괜찮아요. 굳이 이런 얘기 안 해도 돼요. 저 사람이랑 경쟁도 안 돼요. 돈도 없잖아요. 엄마가 원하면 아빠가 엄마 좋아하니까 당연히 사줄 거예요.”진승우는 그 말에 크게 웃으며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말 잘하네, 계속 그렇게 해.”최수빈이 오늘 이 전시회에 올 수 있었던 게 어디서 표를 구했는지조차 알 수 없을 일이었다.분명 또 수단이 좋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수빈 씨, 괜히 찬물 끼얹지 마요. 형이 이 꽃병 사서 하린 씨 기분 좋게 만들려는 거잖아요. 두 사람 분위기 좋은 거 망치지 말라고요.”주예린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정말 예의도 없네...”“너...”진승우는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최수빈을 노려봤다.“딸을 이렇게 가르쳐요? 멀쩡한 애를 저 모양으로 키우다니.”최수빈도 물러서지 않고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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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2화

그가 그렇게 말하며 잠시 시선을 최수빈에게 스쳤다가 곧 주민혁을 향했다.“하린이한테 주는 거야?”주민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느긋하게 대답했다.“응.”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돌려 박하린을 보았다.“갖고 싶은 건 다 사.”박하린을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개의치 않았다.그녀의 것이든, 그녀의 것이 아니든 주민혁은 다 빼앗아줄 수 있었다.남이준이 허영희의 이름을 분명히 언급했음에도, 주민혁은 이것이 최수빈 외할머니의 작품이라는 걸 알면서도, 유품임을 알면서도 끝내 빼앗아갔다.최수빈의 감정 따위는 공기 취급이었다.“고마워, 민혁 오빠.”박하린이 살짝 미소 지으며 얼굴 가득 달콤한 빛을 띠었다. 누가 봐도 사랑을 듬뿍 받는 모습이었다.곧이어 그녀가 최수빈을 향해 말했다.“미안하네요, 남의 걸 빼앗아버려서. 하지만 원래 이런 건 돈 많이 주는 사람이 가져가는 거잖아요.”남이준도 무심한 눈길로 최수빈을 스쳤다.“미안해요, 수빈 씨.”이 말은 곧 결정이 내려졌다는 뜻이었다.꽃병은 주민혁에게 넘어간다는 의미였다.진승우가 비웃듯 말했다.“무슨 능력이 있다고 하린 씨랑 다툴 수 있겠어요? 애초에 급이 다른데.”조금 전까지 박하린과 최수빈이 누가 먼저 봤네 하고 얘기한 건, 그저 헛수고일 뿐이라는 태도였다.“수빈 씨, 비열한 수단으로 기어 올라간 사람은 결국 아무 가치 없어요. 부엌에서 하루 종일 불 앞에 서 있어도 남자 마음 하나 못 잡는다고요.”“민혁이 형은 그런 쉬운 남자가 아니에요. 수빈 씨가 어떤 부류인지, 스스로도 잘 알지 않나요?”말끝마다 최수빈을 비꼬았다.그는 그녀가 더러운 수법으로 침대에 올라 주민혁과 박하린의 결혼과 인연을 망가뜨렸다 생각했다.이제 본처가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며 이혼조차 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반면 박하린은 유학파에 두 개의 전공에서 박사 학위를 따낸 신세대 독립 여성, 잔꾀로 살아가는 최수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그러니 어떻게 감히 경쟁을 하나 싶었다.오히려 주민혁이 더 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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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화

그가 언제 다가왔는지 알 수 없었다.최수빈은 시선을 돌려 애써 모른 척했다.“너, 아이한테 이런 생각을 심어주는 거야?”최수빈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지금 무슨 낯짝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그녀는 차갑게 눈빛을 던졌다.“그건 이미 정해진 사실이잖아요.”말을 끝내고 주예린의 손을 잡아 걸음을 옮겼다.외할머니의 물건은 팔린 적이 없는데 왜 남이준 아버지의 손에 들어가 있었을까?지금은 되찾지 못하지만 앞으로 못 가져올 이유는 없었다.“뭐야, 화장실 가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진승우가 다가와 한마디 하며 주민혁을 흘깃 봤다.그의 시선을 따라가니 멀어져가는 최수빈의 뒷모습이 보였다.“뭐예요, 또 저 여자가 붙잡고 늘어졌어요? 참 집요하네.”진승우는 미간을 찌푸렸다.귀신처럼 따라붙어 성가셨다.“이런 거 보면 하린 씨는 그냥 천사라니까요.”박하린은 늘 조용하고 얌전했다.능력도 있고 배경도 있어 당당했고 누구와도 원만하게 어울렸다.어디 데리고 나가도 체면이 서는 여자였다.반면 최수빈은 온갖 얕은 꾀만 부리고 제대로 가진 것도 없는 속 좁은 여자였다.주민혁 쪽에 길이 막히자 이번에는 천공연구원으로 가서 육민성과 엮였다는 얘기까지 돌았다....송미연은 전시회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펄펄 뛰었다.“그 두 인간이 네 몸에 GPS라도 달았나? 맨날 마주치네?”최수빈은 휴대폰을 옆에 내려두고 시선을 컴퓨터 화면 속 데이터에 고정한 채 담담히 말했다.“은산시가 워낙 좁잖아. 고급 장소라고 해봤자 몇 군데 안 되고. 부딪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같은 업계에 있다 보면 마주치는 건 흔한 일이었다.“진짜 뻔뻔하네. 겉으로는 그냥 친한 남매 같은 사이라더니 안에서는 연인 짓이나 하고. 기막히다!”송미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박하린을 내연녀라 욕하고 싶어도 주민혁과 어릴 때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라는 명분이 있으니 빌미조차 없었다.최수빈이 송미연에게 전화를 건 건 오늘 일을 하소연하려는 게 아니었다.곧 본론으로 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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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4화

그들이 방에서 나오자 바깥 직원들은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마치 대수롭지 않은 문제를 쉽게 풀어낸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발목을 잡아 온 난제였다.그 차이가 사람들을 민망하게 만들 정도였다.그녀를 응대한 차승주가 연신 칭찬을 늘어놓았다.“역시 육 대표님, 업계 최정상의 인재십니다.”511연구원 출신이니 능력이 있는 건 당연했다.육민성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최 팀장님 공이 크죠.”“최 팀장님?”차승주의 시선이 의아하게 최수빈에게로 향했다.그는 그녀가 단순히 육 대표가 데려온 비서나 조수일 거라 생각했다.‘이렇게 젊은데...’차승주는 가볍게 인사하며 형식적인 칭찬을 던졌다.업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으니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그 말이, 하필 갓 들어온 진승우의 귀에 들어갔다.“능력 좀 있네요? 육 대표님이랑 같이 다니면서 얼굴도 알리고 직책까지 받아냈어요?”진승우도 꽤 놀란 눈치였다.‘육민성 정도 되는 사람이 최수빈한테 휘둘린다니. 역시 영웅도 미인 앞에서는 무력한 법이라니까?’최수빈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하고 차승주와 인사만 나눈 뒤 화장실로 향했다.진승우는 대놓고 눈을 흘기며 육민성을 바라봤다.“저 여자가 어떤 인간인지 알아요? 겉모습에 속지 마세요. 딱 봐도 대표님을 돈줄로만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한테 직책까지 주다니.”육민성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진 대표님, 말조심하시죠.”그는 최수빈을 단호하게 감쌌다.진승우는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바라봤다.여자가 무슨 수로 기술팀을 이끈단 말인가.그저 육민성이 붙여준 그럴듯한 직함일 뿐, 비서나 조수보다는 듣기 좋아 보이는 이름일 거라고 여겼다.팀장이라는 직책이 있으면 고급 인맥 자리에 끼는 것도 쉬워지니 말이다.그 순간, 그는 속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저 여자의 남자 꼬시는 재주를 내가 과소평가했네.’그래도 마지막으로 충고를 던졌다.“여자 때문에 가진 걸 다 말아먹지 마요. 회사가 여기까지 오기도 쉽지 않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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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5화

주민혁이 시선을 들어 담담히 그녀를 바라봤다.손에 쥔 펜을 내려놓고 몸을 의자 등받이에 살짝 기댔다.“응, 앉아.”최수빈은 걸음을 옮겨 들어갔지만 앉지는 않았다.결혼한 뒤 수년간, 거의 언제나 먼저 대화를 시도한 쪽은 그녀였다.그는 늘 차가웠지만 그래도 매번 조용히 들어주기는 했다.정말 마음에 담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무슨 일이야?”최수빈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외할머니 도자기 꽃병, 제물로 묻히게 할 수는 없어요.”조윤미와 이혜정 사이에 얽힌 원한을 주민혁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하지만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부터 조윤미는 최수빈 부모님의 사이에 끼어들었고 그때부터 양가가 원수처럼 갈라섰다는 건 분명 알 터였다.주민혁은 잠시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몇 초 뒤에 물었다.“네 외할머니?”최수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러고는 허무하게 비웃음을 흘렸다.‘아, 우리 외할머니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애초에 나 자신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는 사람인데 우리 가족은 더 말할 것도 없지.’주민혁은 시선을 내리고 펜 뚜껑을 닫더니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그래서 네가 신경 쓰는 거구나.”그녀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는 물건, 외할머니의 유품을 박하린 외할머니 묘에 함께 묻는다니 두 집안 관계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모욕이었다.최수빈이 단호히 말했다.“제가 원래 가격으로 사들일게요.”도자기는 이미 돈을 주고 그들이 산 것이었다.그녀에게는 빼앗을 명분이 없었다.되찾을 방법은 오직 되사오는 것뿐, 그것도 주민혁의 동의가 필요했다.원래는 시기를 두고 얘기하려 했지만 오늘 직접 들은 이상 더는 미룰 수 없었다.“다른 조건을 원하시면 말씀하세요. 뭐든...”“응.”주민혁이 끊듯 말했다.“원한다면 가져가.”최수빈은 순간 멍해졌다.사실 이전에도 부탁을 한 적은 많았다.그를 더 가까이 느끼고 싶다거나 선물을 원한다거나...주민혁은 냉정했지만 대부분 들어주기는 했다.그러다 박하린이 돌아온 뒤부터는 모든 게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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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6화

그때 주민혁이 느긋하게 사무실에서 걸어 나왔다.박하린은 그를 보자 벌떡 일어나 말했다.“민혁 오빠, 오늘 점심은 양식 먹으러 가자.”주민혁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그녀를 향해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응.”최수빈은 육민성과 함께 자리를 뜨려던 찰나, 두 사람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사실 주민혁은 양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집에서 자신이 해줬을 때도 단 한 번도 입에 대본 적이 없었다.어쩌면 아예 싫어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녀와 함께 먹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무엇이든 기꺼이 감수하게 되는 법이다.사랑과 사랑하지 않음의 간극은 때로 이렇게 뚜렷했다.육민성은 최수빈을 흘끗 보며 표정 변화를 살폈다.그녀의 작은 얼굴은 담담했고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박하린과 주민혁 사이의 애정 섞인 기류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비록 두 사람이 곧 이혼할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혼인 관계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공공연히 데이트 약속을 잡는다면 그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부부 사이가 마치 낯선 사람처럼 보이는 현실이 씁쓸했다.그는 말을 꺼냈다.“오늘 점심은 뭐 먹고 싶어?”“아무거나요.”최수빈은 곧바로 화제를 일로 돌렸다.머릿속은 다른 감정에 쓸 여유가 없었다. 어떻게 앞으로 한 발 한 발 내디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오후, 최수빈과 육민성은 완성한 프로젝트를 들고 한재준을 찾아갔다.한재준은 자료를 본 뒤 한참 꾸짖었다.“예전만 못하구나. 기술 혁신 부분도 다시 살펴야지. 이런 실수 전에는 안 했잖아.”최수빈은 열심히 가르침을 받아들였다.예전에 그녀는 주민혁과 결혼하겠다며 고집을 부리다 511연구원을 떠나 학업까지 포기했었다.지난번 한재준과의 식사로 겨우 차가웠던 분위기가 녹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그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잔소리와 함께 다시 가르침을 건네는 그의 태도에 최수빈은 오히려 마음이 조금 기뻤다.적어도 지금은 자신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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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7화

주시후의 주문 같은 말에는 최수빈이 대꾸하지 않았다.저녁에도 그녀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고,아침, 저녁 식사는 장수미가 준비하니 직접 할 생각은 없었다.그녀가 묵묵히 있자 주시후도 결국 더는 말하지 않았다.신혼집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최수빈은 지난번 기억을 더듬어 새 비밀번호를 눌렀다.그러나 화면에는 ‘비밀번호 오류’가 떴다.최수빈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한 번 알게 되면 곧장 바꿔버린단 말인가?’그때 주시후가 성큼 다가가 익숙하게 숫자를 눌렀고 곧 문이 열렸다.최수빈은 순간 멍해졌다.이번에는 또 예전 비밀번호로 되돌아가 있었다.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라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하지만 그녀는 그 문제에 신경 쓰지 않았고 주예린과 주시후에게 각자 숙제를 하라고 했다.주예린이 자기 책상 앞에 가보니 그곳은 온통 잡동사니와 장난감으로 뒤엉켜 있었다.주시후가 말했다.“넌 이 집 사람이 아니잖아. 이제 여기는 다 내 거야.”주예린은 잠시 멈칫하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굳이 다투고 싶지 않았다.이런 일이 하루 이틀도 아니었으니 익숙하기도 했다.그렇게 주예린이 거실 탁자에서 숙제를 하려 했지만 주시후가 가로막았다.“여기도 내 자리야. 저리 가. 바닥에 앉아서 해.”그러고는 덧붙였다.“아빠랑 엄마가 말했어. 이 집은 다 내 거라고. 너도, 그 새엄마도 여기서는 자격 없어.”주예린의 눈가가 붉어졌다.주시후는 또 이어 말했다.“그런데 네가 내 숙제까지 같이 해 준다면 내 책상 조금 빌려줄 수는 있어.”“숙제는 네 거니까 네가 직접 해야지.”사사건건 주시후는 주예린을 몰아붙였다.그 순간, 최수빈이 차분한 얼굴로 옆방에서 나왔다.“예린아, 이리 와서 해.”주예린은 숙제를 끌어안고 달려와 최수빈 품에 안겼다.그녀는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 주었다.주시후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사실 그녀의 품은 따뜻했다.거기서 잠들면 더 편안했고 은은한 향도 좋았다.그러나 아이는 곧 고개를 저었다.자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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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8화

그러나 그 뒤로 그 공예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었다.문 여는 소리가 나자, 주시후가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보았다.“같이 해요. 이 보석들은 아빠랑 외국에서 골라온 거예요. 다 만들면 올해 어버이날에 엄마한테 선물할 거예요.”“아빠도 이게 엄마한테 잘 어울린다고 했어요.”최수빈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박하린에게 줄 선물이었구나.’그녀는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이 시점부터 이미 두 사람의 관계가 촘촘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그러니 결국 이 공예품이 자취를 감춘 것도 이상할 게 없었다.전생의 자신이 너무도 둔했을 뿐이었다.“치워. 잘 시간이야.”주시후도 피곤했는지 하품을 했다.“오늘 밤은 같이 자요. 나랑 같이 안 잔 지 너무 오래됐잖아요.”솔직히 그는 최수빈이 그리웠다.그러나 최수빈은 담담했다.“먼저 자.”그러자 아이가 침대에 오르며 말했다.“꼭 와야 해요.”최수빈은 대꾸하지 않고 방 불을 껐다....주시후의 방을 나서보니 휴대폰에 메시지가 여러 통 와 있었다.송미연이었다.[오늘 옆 도시 매장에서 새 가방이 들어왔다길래 잠깐 들렀는데 거기서 박하린이랑 주민혁을 봤어.][두 사람 아주 알콩달콩하더라. 주민혁은 정말 그 여자한테 진심인 것 같아. 늘 곁에서 챙겨주고.]최수빈은 메시지를 읽으며 입꼬리를 씩 비틀었다.‘출장이라더니 결국 데이트였나.’그녀는 담담히 중얼거렸다.[맘대로 하라 그래.]...그날 한재준에게 다녀온 뒤, 최수빈은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와 멈출 수 없었다.노트북을 품에 안고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세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마지막 입력을 마치고 노트북을 덮은 그녀는 가볍게 기지개를 켰다.짐을 정리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끝내고 난 뒤, 그녀는 타월을 두르고 머리를 닦으며 걸어 나왔다.안방 대신 곧장 손님방으로 향했다.그곳은 이제 사실상 박하린과 주민혁의 안방이었기 때문이다.머리를 말리려다 보니 드라이기가 안방 화장대 위에 있다는 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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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9화

결혼 전, 한 번의 뜻밖의 사고로 그와 같은 침대에 누운 적이 있었다.그 일 때문에 지금껏 주민혁은 늘 그녀의 유혹과 계략이라 믿어 왔다.그래서 방금처럼 어색한 장면이 겹치자 최수빈은 그가 또다시 자신을 오해할까 두려웠다.하지만 남자는 무표정했다.그녀를 향해 곧바로 눈길을 주지도 어떤 오해를 드러내지도 않았다.그는 그저 옷방으로 가서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갈 뿐이었다.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돌아왔는지, 왜 굳이 집에서 자려 하는지조차 설명할 의향도 없어 보였다.최수빈 역시 궁금해하지 않았다.그가 샤워하러 들어가자, 곧장 손님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누웠다.다음 날 아침.아직 잠이 제대로 들지 못한 듯했는데 눈을 떠보니 날이 벌써 훤히 밝아 있었다.장수미가 문을 두드리며 불렀다.“사모님, 아침 드세요.”최수빈은 이 집에서 굳이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싶지 않았다.세수를 마친 뒤에는 주예린을 깨우러 갔다.그러고 난 뒤, 계단을 내려오다 마침 주민혁과 마주쳤다.그는 서재에서 막 나온 듯 보였고 꼴을 보아하니 밤새 한숨도 못 잔 듯했다.주예린이 아빠를 보자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아빠, 안녕하세요.”주민혁은 스치듯 한 시선으로 최수빈을 바라봤다.“같이 아침 먹어. 내가 직접 애 어린이집 데려다줄게.”웬일로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주예린의 눈빛이 반짝이며 은근한 기대를 내비쳤지만 끝내 입을 열진 않았다.“괜찮아요.”최수빈은 담담히 말했다.“제가 직접 데려다줄 거예요.”그녀는 주예린의 손을 잡고 도자기 꽃병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주민혁도 더는 막지 않았다.잠시 뒤, 주시후가 내려왔다.최수빈과 주예린이 이미 떠난 걸 보고 식탁에도 자기가 원하는 아침이 없자 입일 삐죽 내밀었다.“분명히 오늘 아침 뭐 먹고 싶다고 말했는데 안 해줬잖아? 너무해...”주민혁은 고개를 들어 차갑게 쏘아붙였다.“너 누구한테 그런 거 배웠어?”주시후는 입술을 깨물었다.손에 쥔 젓가락까지 부들부들 힘이 들어갔다.예전에 주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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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0화

주시후는 애초에 그녀를 엄마로 여기지 않았으니 당연히 전화 따위 걸어올 리 없었다.최수빈은 육민성과 함께 성안 체크인 구역으로 들어갔다.서명대에 이름을 적고 고개를 드는 순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요란스럽게 들어오는 게 보였다.그 중앙에는 주민혁이 서 있었다.곧고 고고한 기세로 눈에 띄었고 그의 곁에는 박하린이 있었다.주위에는 수행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성안 측에서는 그를 위해 따로 인사를 나갈 정도였다.주민혁의 시선이 스치듯 그녀를 훑고 지나갔지만 곧 아무 일 없다는 듯 딴 곳으로 옮겨졌다.최수빈도 태연히 시선을 거뒀다.그러나 바로 이어진 광경에 그녀의 눈동자가 살짝 멈췄다.박하린의 손목에 걸린 보석 팔찌, 여러 가지 보석을 꿰어 만든 그것은 분명 최수빈이 전날 주시후와 함께 정성껏 만든 팔찌였다.그녀가 직접 갈고 다듬은 조각들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최수빈은 고개를 돌렸다.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것이 고스란히 박하린의 손목 위에 있었다.그녀에게 건네는 선물이라니 실소가 나왔다.남편도, 아들도 진심은 한 번도 준 적 없었다.그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고 필요 없으면 밀쳐내는 가정부처럼만 대했을 뿐이었다.최수빈의 감정 따위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하린 씨, 그 팔찌 특이하네요.”누군가 눈치 빠르게 말을 꺼냈다.보석 하나하나는 값이 꽤 나가 보였지만 디자인은 낯설고 투박했다.박하린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아들이 오늘 아침, 어버이날 선물로 준 거예요.”“아? 벌써 아들이 있어요? 결혼하셨나요?”사람들이 놀라움에 웅성거렸다.그녀가 결혼했다는 얘기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박하린은 예의 바른 미소만 남기며 말을 아꼈다.“사적인 건 밝히지 않는 게 좋겠네요.”바로 그때, 주시후가 어린이집에서 빌린 전화로 전화를 걸어왔다.“엄마, 어버이날 축하해요.”박하린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그녀는 주민혁을 향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민혁 오빠, 오빠도 아들한테 한마디 해줘.”그 말에 모든 이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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