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Chapter 121 - Chapter 130

144 Chapters

제121화

주민혁이었다.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손에는 하얀 국화를 들고 있었다.그리고 언제나처럼 표정은 무겁고 기세가 압도적이었다.최진식은 그를 보자 입을 다물었지만 얼굴에 놀라움은 없었다.주민혁이 온 것이 너무 의외는 아니었다.곧 그는 시선을 천천히 최수빈에게 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너무 늦진 않았지?”그 말은 겉보기에만 다정했지만 최수빈은 살짝 놀랐다.조금 전까지 전화로는 박하린과 함께 있었는데 이렇게 금세 태도를 바꾸다니.주예린은 아버지를 보자 기뻐하며 달려갔다.“아빠!”“응, 착한 우리 딸.”주민혁은 주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최수빈은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딸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은 당연했지만 늘 외면받는 주예린을 생각하면 속이 막혀왔다.이내 원금영은 곧장 나서서 꾸짖었다.“바쁘긴 뭐가 바빠? 이렇게 늦게 와서야 되겠니? 제사 곧 시작이야.”그러고는 손으로 그를 툭 치며 말했다.“어서 네 장인어른이랑 장모께 사죄드려라.”주민혁은 먼저 최수빈의 외할머니 허영희의 영정 앞에 국화를 올리고 향을 피운 후 천천히 최성민과 이혜정에게 인사를 건넸다.죽은 이를 위한 예법은 어김없이 지켰다.최수빈은 차갑게 최진식을 바라보며 말했다.“가세요. 여긴 아버지를 환영하지 않습니다.”최진식은 코웃음을 치며 흥미를 잃은 듯 떠났다.그 뒤, 이성민이 물었다.“시후는 오늘 안 왔나?”그러자 주민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시후가 아파서 다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그래, 그럼 잘 쉬게 해야지.”이성민은 고개를 끄덕였다.짧은 제사는 십여 분 만에 끝났지만 그 사이 주민혁은 최수빈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최수빈은 알았다.그가 온 건 오직 원금영을 안심시키기 위함일 뿐, 자신이나 외할머니를 위해서가 아니었다.행사를 마친 후, 무덤으로 이동해야 했지만 원금영은 연세가 많아 집에 남았다.주민혁은 옆으로 가 전화를 받았고 멀리서 본 최수빈은 그의 얼굴이 한결 부드러워진 걸 알아챘다.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통화 상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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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그는 늘 세심한 남자였다.하지만 최수빈에게만은 아니었다.일부러 무시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녀에 대해 이토록 무심할 수 있단 말인가.그저 최수빈에게 마음을 쏟을 의지가 없을 뿐이었다.겉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태도 누구도 그의 행동을 탓할 수 없었다.이성민과 이혜정 역시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제사에 참석했으니 더 말할 수는 없었다.그러나 원금영은 불만스럽다는 듯 투덜거렸다.“무슨 급한 일이 그렇게 많다고 서둘러 가니? 저녁 집안 모임에는 꼭 와야 한다.”주민혁은 시간을 흘끗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음, 그때 상황 봐서요.”자리를 뜨던 그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 최수빈을 바라보았다.“스스로 몸 잘 챙기고 예린이도 잘 돌봐. 난 갈게.”할머니 앞에서만은 언제나 빈틈없는 남편.최수빈은 그 모습이 그저 비웃음 같아 가슴이 씁쓸했다.자신의 남편에게서조차 가식적인 관심을 받아야 한다는 현실이 더 허무할 뿐이었다....그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묘비 앞, 온 가족이 모여 외할머니 묘 앞에 절을 올렸고 최수빈의 눈가는 금세 붉어졌다.살아생전의 장면들이 하나하나 눈앞에 떠올라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의식을 마친 뒤, 이성민은 몸 상태가 안 좋아져 안색마저 창백해졌다.“병원으로 다시 모시고 갈게요.”곧 이혜정이 부축하며 다급히 말했다.“삼촌.”최수빈은 걱정이 돼 미간을 찌푸렸다.“걱정하지 마.”이성민은 힘겹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당장 죽지는 않아. 차에 가서 좀 앉아 있으면 돼.”그는 오늘 하루만큼은 끝까지 함께하겠다고 버텼다.“이제 앞으로는 아마 병원에만 붙잡혀 있을 거야. 오늘처럼 집안 식구가 다 모이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고. 아마 내가 죽는 날에야 이렇게 다들 모일 수 있겠지.”“무슨 소리예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두 사람의 대화에 이혜정의 눈가마저 붉어졌고 최수빈의 가슴도 터질 듯 조여왔다.그리고 눈물이 차올라 서둘러 밖으로 나와 마음을 진정시켰다.그 사이, 송미연은 주예린과 함께 앉아 휴대폰으로 S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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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박하린은 최수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저 B구역에 자리를 하나 살까 해요.”그러자 최수빈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버렸다.그곳은 외할머니가 묻혀 있는 자리였다.조윤미는 어머니의 가정을 파괴한 불륜 상대였다.그런 사람과 자신의 외할머니를 같은 구역에 두겠다고?그것은 명백한 모욕이었다.외삼촌과 이혜정이 알게 된다면 분노할 것은 뻔한 일이었고 지금 이 순간조차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결국 이 모든 것은 주민혁이 박하린을 제멋대로 굴도록 방치한 탓이었다.최수빈의 손에 쥔 생수병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숨을 고른 뒤, 차갑게 주민혁을 노려보았다.“만약 박하린 씨 할머니 묘를 이쪽으로 옮기는 걸 허락한다면 저는 모두에게 알릴 거예요. 박하린 씨는 번지르르한 겉모습 뒤에서 어떻게 친아들을 버리고 이익을 좇는지. 그때가 되면 주시후는 사생아가 되겠죠. 과연 주씨 가문이 그걸 받아들일까요?”박하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고 미간은 잔뜩 찌푸려졌다.“언니, 시후가 언니 아들이 아니란 말씀이세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오래 키워놓고 아들 인생을 망치겠다니요?”‘내 아들?’최수빈은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 말은 고스란히 조롱으로 들려왔다.“저를 언니라고 부르지 마세요.”최수빈은 서늘하게 잘라 말했다.“제가 한평생 한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주시후를 입양한 거였어요.”이번 생에서 그녀는 오직 자신의 길을 걸을 생각뿐이었다.다시 업계 정상에 올라서 딸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주민혁과는 깔끔하게 갈라설 것.저들과 얽히고설킨 더러운 인연 따위는 단 하나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주민혁은 잠시 무표정하게 최수빈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고는 박하린에게 담담히 말했다.“외할머니 묘는 내가 따로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줄게.”한발 물러서며 결국 박하린을 감싸는 선택, 이건 모두 박하린 모자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함이었다.최수빈의 입술은 창백하게 바래갔다.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그간 얼마나 우스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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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그 맑고 천진한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동자, 너무도 주민혁을 닮은 그 눈은 언제나 따스하게 웃고 있었다.늘 냉담하기만 한 주민혁의 시선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최수빈은 순간적으로 주예린을 꼭 끌어안았다.앞으로는 더 이상 딸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면서.묘에서 돌아온 뒤의 집안 식사 자리에도 주민혁은 오지 않았다.그는 늘 시간이 없다고만 했으니 원금영의 안색은 많이 어두웠다.돌아가면 반드시 단단히 혼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은 듯.점점 더 제멋대로 행동하며 아무 자리를 가리지 않고 빠지기 일쑤였다.하지만 최수빈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오늘 제삿날 집안 제사 자리에 얼굴을 내민 것도 아마 박하린을 따라 나온 길이었을 것이다.그런 식으로 억지로 와서 사람 속을 뒤틀리게 할 바엔 차라리 안 오는 게 나았다.가족 식사가 끝나고 차에 오르는 길에 원금영은 주예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주예린의 피규어 꼭 잘 받아보고 확인해라.”그러고는 손등을 다정히 쓰다듬으며 이어갔다.“늘 주시후만 감쌌지만 그래도 넌 예린이 마음을 더 챙겨야 한다. 자꾸만 시후만 보듬지 말고. 남자애는 좀 약해도 괜찮아. 게다가 곁에는 민혁이고 있고 진서령도 있잖니.”원금영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다.최수빈이 얼마나 진심을 다해 주시후를 보살펴왔는지.지난 생에서 그는 친부모에게도 버림받은 아이가 가엾어 극진히 돌봤지만 결국 돌아온 건 배은망덕이었다.그 아이는 끝내 박하린의 아들이었다.최수빈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알겠어요, 할머니.”그녀가 주시후에게 얼마나 헌신했는지 할머니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하지만 어떤 이들은 눈이 멀어 전혀 보지 못했다.아니, 아예 보려 하지 않았다.이혜정은 이성민을 병원까지 직접 데려다줬다.최수빈도 따라가 의사에게 상태를 들었는데 다행히 당장은 안정적이라는 소견이었다.삼촌을 잘 모셔두고 돌아오는 길, 차창 너머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그녀는 말없이 긴 생각에 잠겼다.곧 휴대폰을 꺼내 들어 권성우에게 문자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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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5화

주민혁이 박하린과 그 가족을 챙기는 건 최수빈이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단 하나, 오직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뿐이었다.이런 소식은 송미연과 육민성에게도 전해졌다.송미연은 최수빈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이런 뉴스 보고도 지금 이렇게 담담할 수 있어?”최수빈은 차분히 숨을 고르며 답했다.“예전처럼 휘둘릴 필요 없어. 이미 마음 정리했으니까.”그러나 송미연은 여전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진짜 저 두 사람, 너무 역겹다! 결혼 중에도 재산 챙겨주고 박하린은 ‘사모님’이라는 타이틀로 다니면서 뻔뻔하게 나타나고. 진짜 역겹지 않아?”최수빈은 박하린과 주민혁 사이를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그러니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지난번처럼 또다시 상처를 받을 게 뻔했다.“시간은 소중해. 의미 없는 일에 낭비할 필요 없어.”송미연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혹시 어느 날 화가 풀리지 않아 싸우고 싶으면, 나랑 같이 가자.”최수빈은 희미하게 웃었다.“넌 참 아직도 어린애 같네.”그날 오후, 하늘은 점점 어두워지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최수빈은 오늘 도착한 주예린의 한정판 피규어를 받기 위해 신혼집으로 향했다.출근 후, 최수빈은 회사에서 택시를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저녁 7시쯤, 신혼집에 도착했을 때는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졌다.그래서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가리며 뛰었지만 금세 옷이 흠뻑 젖어버렸다.문 앞에서 벨을 눌렀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찬 바람과 비가 몸을 감싸 피부에 차갑게 스며들어 최수빈은 다른 문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자물쇠가 이미 교체되어 있었다.최수빈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씁쓸하게 웃으며 현실을 받아들였다.‘정말 냉정하게 다 바꿨구나. 왜 미리 알려주지 않은 거지?’그녀가 다시 돌아서려던 찰나, 휴대전화가 울렸다.주민혁이었다.최수빈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전화를 받았다.“운전해서 운교 별장으로 와. 나 좀 데리러 와줘.”말은 늘 그렇듯 짧았지만 명령처럼 단호했다.전에 그녀는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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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6화

아마 박하린 거였을지도 몰랐다.그녀는 그대로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집 안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주시후는 거실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갖고 놀고 있었다.아이는 분명 그녀가 초인종을 누른 걸 알았지만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위층에서는 장수미가 방을 정리하느라 초인종 소리를 듣지 못했다.문이 열리자 젖은 채로 들어오는 최수빈을 본 주시후는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보였다.“또 금방 바닥 더러워지겠네.”최수빈은 아이를 힐끗 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은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힘이 빠졌다. 감기에 걸려 열이 오르기 시작한 걸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다.그때 장수미가 내려왔다. 젖은 옷차림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사모님, 오셨어요? 왜 온몸이 다 젖었어요? 얼른 씻고 옷 갈아입으세요.”“괜찮아요.”최수빈은 장수미를 보며 물었다.“오늘 혹시 해외에서 온 소포 받은 거 있어요?”장수미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아, 하나 있긴 했던 것 같아요. 찾아볼게요.”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에 서서 기다렸다.몸이 식어가는 느낌이 점점 더 괴롭게 했다.주시후가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를 바라봤다.“내일 나 어린이집 데려다주고 밥 해주고 오늘 나 씻겨주면 아줌마 다시 들어오게 해줄게요.”“어차피 장 아주머니는 손도 느리고 어설프니까 아줌마가 도와주면 되잖아요.”“우리 엄마 말로는 아줌마 밖에서 남 도와주는 비서일 한다던데요? 그러니까 집에서는 내 비서 해요. 아빠한테 말해서 월급 주게 할게요.”최수빈은 귀에 거슬리는 그 말들을 들으며 정말 네댓 살 아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나 의심스러웠다.예전의 주시후는 버릇은 좀 있었어도 지금처럼은 아니었다.그녀는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차갑게 눈길을 던졌다.“앞으로 나 너랑은 아무 상관도 없게 될 거야.”주시후는 코웃음을 쳤다.그녀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매번 자신을 버리겠다더니 결국은 또 몰래 돌아와 자신을 보러 오지 않았던가.이 계모는 부귀영화를 버리지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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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7화

주시후는 속으로 확신했다. 최수빈은 아빠 곁을 떠난 이상 돈이 없을 거라고.어차피 일도 안 하니 돈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반대로 자기 친엄마와 아빠는 돈이 많으니 돈만 있으면 뭐든 살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최수빈은 고개를 떨군 채 바닥에 산산조각 난 피규어를 바라봤다.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귀에는 끊임없이 주시후의 어린 듯하면서도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장수미가 곁에서 황급히 나섰다.“사모님, 도련님이 아직 어려서 말이 좀 거칠 뿐이에요.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그리고는 주시후에게 말했다.“도련님, 엄마한테 얼른 사과드려야죠.”주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내가 왜 사과해요? 지금은 내가 원하면 뭐든 해줘야 되는 건데?”그는 언젠가 최수빈이 자신에게 밥을 해주고 빨래를 해주길 빌게 될 거라고 확신했다.예전에도 엄마 자리를 차지하려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아빠는 그 대가로 돈을 줬으니 말이다.돈이 떨어지면 결국 다시 돌아와 집안일을 하게 될 거라 믿고 있었다.최수빈은 눈을 들어 낯설게만 느껴지는 주시후의 얼굴을 바라봤다.“주시후, 언젠간 알게 될 거야. 돈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 않는다는 걸.”“돈이면 다 돼요.”주시후가 비웃듯 말했다.“내가 증조할머니 제사에 왜 안 갔는지 알아요? 재수 없으니까요. 가기 싫으면 안 가는 거죠. 아줌마는 내 눈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줌마가 뭔데 날 가르쳐요?”최수빈의 걸음이 순간 멈췄다. 등줄기가 곧게 굳어졌다.“누가 그렇게 말하라고 가르쳤어?”그녀는 뒤돌아서서 주시후를 매섭게 노려봤다.주시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시선에 겁이 난 것이다.“내가 무슨 거짓말 했어요? 죽은 사람은 원래 재수 없는 거잖아요...”최수빈은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몸이 떨리는 것을 참으려 애를 썼다.‘내가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애가 벌써 이렇게 변해버린 거지? 도대체 주민혁과 박하린이 아이 앞에서 무슨 말을 한 거지?’비웃음이 입가에 번졌다.자신이 떠난 건 옳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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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8화

주민혁은 전화를 받았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으며 그는 최수빈의 여위어 보이는 뒷모습을 바라봤다.“알았어.”짧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곧장 몇 걸음에 그녀를 따라잡더니 밖에서 대기하던 운전기사를 손짓해 불렀다.그러고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미안해. 일이 있어서 기사가 데려다줄 거야.”최수빈은 비웃듯 입꼬리를 당겼다.‘박하린이 부르면 언제든 곧장 달려가지? 나한테 한 약속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 줄 알고 있었어.’애초에 최수빈은 주민혁의 손에 이끌려 갈 생각도 없었다....최수빈이 떠난 뒤, 주민혁은 거실로 돌아왔다.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그의 주위에는 묵직한 긴장감이 맴돌았다.주시후는 곁에 서서 아빠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감히 입도 떼지 못했다.“네가 던진 거야?”주시후는 두 손을 뒤로 감추고 고개를 숙였다.“아니에요... 주려고 했는데 그만 떨어뜨린 거예요.”“자기가 못 받아서 깨진 건데 왜 날 탓해요?”주민혁은 시선을 들어 장수미를 바라봤다.“시후 서재에 데려가 반성하게 해요. 학교 빼고는 외출 금지, 군것질 금지, 장난감 금지. 잘못을 제대로 깨닫기 전까지는 절대 풀어주지 마요.”주시후는 입을 떡 벌리더니, 곧장 울음을 터뜨렸다.“흑... 엄마 보고 싶어요! 나는 하린 엄마가 좋아요! 다들 나만 괴롭혀요, 왜!”그의 울음에도 주민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서재로 들어갔다.장수미는 지시대로 아이를 데리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주민혁은 아들을 단련시키려는 것뿐이었다.주시후는 훗날 주씨 가문의 후계자가 될 아이, 감정에 휘둘려 물건을 함부로 부수고 거짓말하는 습관은 반드시 고쳐야 했다.다만 최수빈에 대해서는...그는 태연히 감기 기운에 열까지 있는 아내를 보내면서도 붙잡지 않았다.장수미는 속으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최수빈이 떠난 뒤로, 주시후는 점점 제멋대로가 되어 모든 버릇없는 면모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서재에 갇힌 지 하루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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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화

최수빈은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꾹 눌렀다.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담담히 말했다.“이미 지나간 일에 더 집착할 필요는 없어. 지금은 거의 회복됐으니까.”지금 그녀가 가장 우선해야 할 건 프로젝트를 진척시키는 일, 하루빨리 다시 정상 궤도에 올라서야 했다.과거에 발목 잡히면 끝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없다.이제 그녀에게 중요한 건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였다.송미연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다시 이마에 손을 얹었다.“아직 열 덜 내린 거 아냐?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는 푹 쉬어야 하는데 너는 좀 낫다 싶으면 또 바로 일을 생각하네.”최수빈은 시선을 들어 물었다.“그래서 내가 어제 온라인에서 얘기한 거, 오늘은 실행됐어?”“걱정 마. 기술팀에 너 같은 실력자가 있으니 네가 낸 기술안이 적용되자마자 눈에 띄는 진전이 있었어. 그동안 못 풀던 문제를 한 번에 해결했거든.”그 말을 듣고서야 최수빈은 안도했다.송미연이 덧붙였다.“육 대표님이 너 당분간은 좀 쉬어야 한다더라. 애도 챙겨야 하고 일도 해야 하고 마음 쓸 데가 한둘이야? 거기다 그 한 쌍의 뻔뻔한 인간들은 매번 널 자극하지.”“그 사람들은...”최수빈은 무표정하게 잘라 말했다.“내겐 이미 중요하지 않아.”송미연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지나치게 냉정해 보여서 오히려 걱정스러웠다.최수빈은 다시 마음을 가다듬었다.앞으로의 일정을 꼼꼼히 짜고 일선에서 직접 부딪치려면 하루종일 연구실, 실험실에 틀어박혀야 했다.많은 과학 성과란 결국 연구원들이 밤낮없이 매달려 계산하고 실험한 끝에야 나오는 법이다.그녀가 천공연구원에 입사한 뒤로 줄곧 일 중독처럼 달려왔던 것도 사실이었다.그녀의 프로젝트 제안과 기술안은 회사 내 석사, 박사 연구원들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송미연은 그런 그녀의 열정과 진심을 느끼며 속으로 탄식했다.“네가 그때 결혼을 택하지 않았다면 지금쯤은 이미 국립연구원에 있었을 텐데.”최수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곧 담담히 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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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0화

주예린은 유리 진열장 너머의 도자기를 눈을 반짝이며 바라봤다.“엄마, 증조할머니도 예전에 이런 거 만들었어요?”“응.”최수빈은 작품들의 기법과 유래, 역사까지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주예린은 옆에서 귀 기울이며 즐겁게 듣고 있었다.“전업주부가 무슨 문화를 운운해요?”갑자기 진승우의 목소리가 뒤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비아냥과 조롱이 가득한 어투였다.최수빈이 고개를 들자 주민혁과 박하린, 그리고 주시후가 함께 전시장에 들어서는 게 보였다.남자는 스치든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을 뿐, 표정은 무심했다.주시후는 곧장 주예린을 향해 말했다.“넌 그냥 네 엄마가 하는 헛소리 다 믿어. 나중에 어린이집 가서 망신이나 당하고.”최수빈은 진승우를 보며 비꼬듯 말했다.“전시장이 이렇게 넓은데 왜 자꾸 저한테 들러붙는 거죠?”박하린이 나섰다.“그냥 우연 아니겠어요? 저희도 아들 데리고 와서 안목 넓혀주려는 거예요. 예술적 소양도 길러줄 겸.”“언니가 예린이 데려왔으니 시후도 당연히 와야죠.”진승우는 팔짱을 낀 채 비웃었다.“여긴 사실 볼 게 별로 없는데 뭘 더 설명할 수 있겠어요? 다 뻔하죠, 뭐.”그러고는 콕 집어 최수빈을 바라봤다.“결국 세네 살짜리 애 앞에서만 잘난 척하는 거잖아요.”그런데 주민혁은 곁에서 줄곧 방관자처럼 서 있었다.마치 다른 사람 일인 양, 그저 조용히 구경하는 태도였다.최수빈은 냉소를 터뜨렸다.“진승우 씨가 저 집 식구들 앞잡이 노릇하는 건 뭐라 안 해요. 그런데 개처럼 아무 데서나 짖는 건 좀 자제하세요. 알아서들 하시라고요.”그녀는 차가운 말만 남기고는 주예린의 손을 꼭 잡고 떠났다.진승우가 반박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나보고 개라고 했어요?!”그의 얼굴은 금세 일그러졌다.박하린은 억지로 미소 지으며 달랬다.“언니 입 좀 거친 거 몰라요? 괜히 자꾸 시비 걸지 말아요.”“내가 틀린 말 했어요?”그는 씩씩거리며 곁의 주민혁을 보았다.위로라도 얻고 싶었지만 남자는 그저 시선을 피한 채 아무 말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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